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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한결아, 정말 몸이 괜찮은 거니?”
“그럼요 에취! 문, 문제없어요.”
엄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도 한결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콧물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었다. 약간 머리만 아파도 학교가기 싫어하는 한결이가 몸을 덜덜 떠는데도 학교에 가겠다고 하는 게 엄마는 이상했지만 한결이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학교 늦었어요. 갈게요.”
한결이는 엄마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을 나섰다. 옷을 겹겹이 껴입어서 마치 북극에 사는 사람처럼 보여도 어쩔 수 없었다. 한여름 햇빛이 아침부터 쨍쨍하지만 한결이의 몸은 으슬으슬 춥기만 했다.
“야! 너 왜 그러냐? 또 감기 걸린 거야?”
아주 작아진 미르가 호주머니 속에서 얼굴을 쏙 빼낸 채로 말했다. 미르는 얼굴에는 어젯밤 우울했던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나 참, 미르 너 때문이잖아.”
“내가 왜?”
“네가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으니까 내가 계속 추워지는 거라고 에 에취!”
“쳇 호주머니에서 절대로 나오지 말라고 한 게 누군데 그래? 난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단 말이야.”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에 에취! 내가 감기에 걸리고 말지 암 그렇고말고.”
한결이는 미르를 잘 보살펴 달라던 우돌 영감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미르를 어떻게 보살펴야 하나 고민 고민했던 한결이는 아예 미르가 자기 주머니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한결이는 미르를 친 자식처럼 생각하는 우돌 영감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한결아! 같이 가.”
등 뒤에서 찬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찬이에게도 석우에게도 미르 예기를 할 수 없다는 건 한결이는 잘 알고 있었다.
“응 찬이구나.”
“몸은 좀 어때?”
“콜록 콜록! 괜찮아 어젠 네 모습이 좀 황당했지?”
“그런데 가만 너 옷, 옷차림이 왜 그래?”
“감기에 걸려서 그래. 창피하니까 더 이상 묻지 마. 콜록 콜록”
“감기에 걸렸다고 그런 털옷을 입어? 한결아,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찬이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결이는 찬이에게 모든 걸 이야기 할 수 없었다.
“난 말짱해 그냥 감기에 걸린 거야. 그러니까 이상한 눈으로 그만 좀 쳐다봐 알겠니?”
그때였다. 멀리서 석우가 달려왔다. 석우는 초코 맛 젤리가 입 속에 잔뜩 넣어서 우물거리느라 말이 느렸다.
“야, 찬이야, 한결아! 오늘은 지각 안 했네? 가만 한결아 너 왜 그런 옷을 입고…….”
“그만! 날 좀 가만 나둬!”
한결이는 두 사람을 밀치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결이는 찬이와 석우에게 심하게 대한 것이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뭐, 뭐야? 한결이 왜 저래?”
석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말했다.
“나도 몰라. 정말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까지 변할 수 있는 거지?”
찬이도 할 말을 잃고 한결이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교실 안에선 이미 한결이 주위에 많은 아이가 모여 있었다. 당연히 털옷을 입고 온 한결이가 이상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한결이에게 질문을 해댔지만 한결이는 이번엔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기에 걸렸다고 해도 어차피 아까 찬이처럼 이상한 얼굴로 쳐다볼 게 뻔했으니까 말이다.
‘아 괴로워, 왜 모두 나만 보는 거야.’
언제나 아이들 관심밖에 있던 한결이가 아이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저 녀석들은 왜 네 주위에 와서 흘끗흘끗 보는 거야?”
미르가 주머니에서 목을 길게 빼고는 물었다. 미르는 주머니 속이 좁은 지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한결이는 몸이 더 추워 졌다.
“…….”
“응? 왜 아무 대답이 없어? 응? 응!”
“제발 그만 가만히 좀 있어!”
한결이가 큰소리로 고함을 치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은 모두 주춤주춤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때였다. 준태가 교실로 들어오다 한결이를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야, 이 바보가 오늘은 한여름 에스키모가 됐네. 어제는 눈물 콧물 질질 짜더니, 너 맛이 완전히 갔냐?”
“하하하하!”
아이들도 준태에 말에 따라 웃었다. 그래도 한결이는 아무 말 그냥 앉아 있을 뿐이었다.
‘준태가 날 놀리는 건 한 두 번도 아니니까 상관없어. 아이들도 저러다 지쳐서 그만 둘 거야.’
이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찬이와 석우에게 쌀쌀맞게 군것은 마음에 걸렸다.
“야, 넌 입도 없냐? 저 못 돼먹은 녀석에게 소리라도 질러야 할 것 아니야.”
주머니 속에 있던 미르는 준태를 보고 화가 났는지 씩씩되었다.
“넌 가만히 있어. 나하고 약속했잖아. 내 호주머니에서 가만히 있겠다고 말이야.”
한결이는 미르를 쳐다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제 또 누구하고 이야기 하는 거냐? 너 완전히 미쳤구나? 응?”
준태는 짓궂게 한결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마침 석우와 찬이도 교실로 들어왔다.
“준태 저 자식 한결이한테 시비를 걸고 잇잖아. 찬이야, 우리가 좀 도와줘야 하는 아냐?”
석우가 준태를 바라보며 찬이에게 말했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니? 그리고 한결이가 가만히 나두라고 했잖아.”
찬이가 쌀쌀 맞게 말했다.
“하지만,…….”
석우도 더 이상 아무 말 못하고 그냥 한결이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야, 너 이제 벙어리가 됐냐? 말 좀 해봐. 이 바보야!”
준태가 계속해서 한결이를 놀려댔지만 한결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르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나 같으면 한방 먹였을 텐데. 뭐야? 왜 참는 거야?
“…….”
“한결아, 저 녀석 내가 확 집어 삼켜 버릴까?”
“제발 그만!”
한결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미르에게 고함을 빽 질렀다. 하지만, 준태는 그것이 자기에게 하는 소리인줄 알았다.
“어라! 나한테 고함도 쳐? 이게 정신만 나간 게 아니라 겁도 없어졌나보지? 어디 한 번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냐?”
준태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너한테 한 게 아니야.”
한결이는 준태를 보며 이렇게 말했지만 준태가 자기 말을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이 자식! 이제 날 놀리기까지 하네. 응?”
준태는 앉아있던 한결이를 멱살을 잡았다.
“그만 둬! 한결이가 그만 하라잖아.”
그때, 준태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긴장한 얼굴의 찬이와 석우의 모습이 보였다.
“석우야, 찬이야…….”
한결이도 두 친구를 바라보았다.
“이런 바보 삼총사가 힘을 합하시려나 보지? 엊그제 맞고 또 맞고 싶나봐. 그래?”
준태가 주먹을 움켜지고 찬이를 노려보았다. 찬이와 석우는 주춤 물러났다.
“어쭈, 나설 땐 언제고 이제 겁먹은 거냐. 응?”
“그, 그냥 놔둬 한결이는 아프단 말이야.”
찬이는 엊그제 준태에게 맞은 부분이 다시 아파오는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마, 맞아, 그냥 놔둬!”
석우도 찬이의 어깨에 손을 꽉 잡고 뒤에서 떠듬떠듬 말했다.
“그래? 좋아. 그냥 놔두지 그 대신 너하고 저 돼지 새끼를 흠씬 두들겨 패 줄 거야!”
준태가 앞으로 나가며 마치 권투 선수처럼 주먹을 휘둘렀다. 그때였다.
“그만둬!”
한결이가 갑자기 달려들어 등 뒤에서 준태를 와락 덮쳤다. 그러자 준태도 당황해서 몸의 균형을 잃고 말았다.
“야!”
순간 석우와 찬이도 고함을 지르며 준태에게 달려들었다. 세 아이가 준태에게 달려들자 준태는 그만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삼총사는 준태를 넘어뜨렸지만 그 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준태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팔다리를 꼭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야, 이 자식들, 이거 못 놔? 놔! 놓으라고!”
“미쳤냐? 우리가 널 놓게?”
찬이는 이렇게 말한 뒤 한결이를 보며 씩 웃었다. 한결이도 석우와 찬이에게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선생님 오신다!”
회장 신철이가 복도를 살피다가 큰소리로 외쳤다. 삼총사들은 그 소리에 놀라 후다닥 일어나 제자리로 들어갔다. 준태도 옷을 털고는 씩씩대며 자리에 들어갔지만 두 눈은 삼총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 이리 소란스러운 거니?”
담임선생님은 교실 문을 열고 아이들을 빙 둘러보았다.
“그런데, 한결이는 괜찮은 거니? 가만, 오늘은 털옷을 입고 왔네.”
“으하하하!”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선생님은 전혀 웃지 않았다. 그러자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차츰 줄어들었다. 선생님은 한결이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결이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감, 감기에 걸려서 그래요.”
“그렇구나. 몸이 그렇게 안 좋은데 학교에 온 거야?”
“네.”
“너무 무리하진 마라. 건강이 가장 중요하니까. 알겠니?”
“네 감사합니다.”
한결이는 자기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담임선생님이 너무 고마웠다.
“선생님!”
찬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찬이는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준태를 쓱 한 번 보고는 말을 이었다.
“응? 무슨 일이니 찬이야”
“준태가 방금 전까지 한결이가 털옷을 입고 왔다고 놀리며 괴롭혔어요.”
“맞아요. 맞아!”
석우도 거들었다. 선생님은 바로 매서운 눈초리로 준태를 바라보았다. 준태는 움찔해서 고개를 숙였다.
“준태 이 녀석! 또 다른 친구를 못살게 굴었구나! 오늘 하루 운동장에 나가는 거 금지다 알겠니?”
“네…….”
‘수업 시간 끝나고 보자 이 바보 녀석들.’
준태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다시 삼총사를 노려보았다.
삼총사도 준태의 시선을 느꼈지만 왠지 겁이 나지 않았다. 방금 전처럼 삼총사가 힘을 합하면 준태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야, 우리가 드디어 괴물 준태를 해치웠다!”
석우가 신이 났는지 앞에 앉은 한결의 어개를 톡 치고는 작은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 모두 고마워!”
한결이도 미소를 지어보였다. 찬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어느 정도 덜었고 미르가 더 이상 문제만 안 일으키며 오늘 하루는 큰 문제없이 지낼 것 같기 때문이었다.
“고맙긴 우린 삼총사잖아 안 그래? 근데 너 땀을 너무 흘리는 것 같다?”
석우의 말에 한결이는 웃는 얼굴로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땀이 나다니 무슨 소리야 나한텐 미르가 ……. 맙소사 없어졌어. 미르가 없어졌어!”
“무슨 소리야 그게?”
석우는 어리둥절해서 한결이에게 물었지만 한결이는 놀라서 더 커진 눈으로 한참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