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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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자기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쌜리가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이라고요'를 세번인가 네번쯤 말한 뒤에야 그는 말귀를 알아들었고, 그 즉시 꼭 19세기 소설에 나오는 사람처럼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14p

 

 15년에 트위터에서 #오빤다알아해시태그가 실시간 트렌드로 올라갔다. 이 해시태그를 기점으로 여성들이 주변 남성들에게서 들었던 맨스플레인을 토해내는 장이 열렸다. 이를 통해 여성의 발언을 사회적으로 억압하는,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고, 일부 분야에 있어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며(아무리 그녀가 해당 분야의 전공자이거나, 해당 분야의 직업을 가지고있다고 하더라도), 특히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면(혹은 어려보일 때에도) 자신이 무리를 해서라도 기꺼이 알려주고 도와주어야한다는(얼마나 시혜적인가) '일부' 남성들의 행동들이 까발려졌다. 그리고 이 맨스플레인 부흥의 중심에는 이 책이 있었다. 책을 읽지 않은 당시에도 저자에게 그녀가 쓴 책에 대한 맨스플레인을 시전한 남성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졌었다. 이 책은 그 정도로 한국 페미니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저자에게 저자가 쓴 책에 대한 맨스플레인을 시전한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침묵 강요에 대한 고찰을 담은 글은 살인과 폭력, 사회적 여성차별 구조로 이어지며 끝났다. 일상적인 해프닝으로 웃어넘길 수 있을만한 일을 억지스럽게 극단적인 일과 연결짓는 것이 당황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논리와 글을 찬찬히 따라가다보면, 그녀가 읽어내는 사회적 현상이 그녀의(혹은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의) 망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저자는 각 주장에 완벽히 해당하는 범죄 사실과 사회적 변화를 구체적으로 덧붙이며 사회에 만연한 생태적 현상을 냉철하게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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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와 이 지구에서는 여성에 대한 강간과 폭력이 엄청나게 많이 발생하지만, 그 사건들이 시민권 문제나 인권 문제로, 혹은 위기로, 혹은 하나의 패턴으로 다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폭력에는 인종도 계급도 종교도 국적도 없다. 그러나 젠더는 있다." 37p

 

 범죄든 일상적 성희롱이나 맨스플레인이든, 개인의 경험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해프닝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들이다. 문제는 이 '일부'남성들의 행동에 따른 여성 피해자의 수가 일부여성들의 행동에 따른 남성 피해자의 수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은 이젠 통하지 않는다. 사건화조차 되지 않는 해프닝들이 얼마나 많은지 여성들은 모두 알고 있다. 사건화가 되었을 때에도, 여성인 증인의 증언이 신빙성이 없다며 불기소를 향해 온갖 공격을 받은 사례를 저자는 소개한다. 이미 그것에서부터 이 현상에 관련된 것은 '일부'남성들에게만 해당한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게 된다. 개인에게는 해프닝일지 몰라도, 대부분의 여성이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다는 것에서 더 이상 이 일은 해프닝이 될 수 없다. 개인의 경험을 연결지어 사회적 현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0개의 장을 통하여, 특히 2장에서 저자는 여성에 대한 범죄를 그저 한 건의 범죄로만 바라보지 말고 큰 그림으로 확장하여 하나의 사회적 체계로 봐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계속되는 미투 운동과도 같은 간증들, 성폭력, 맨스플레인, 경력단절, 임신중단의 경험에 대한 고백은 이 주장을 기반으로 한다. 페미니즘의 사회적 필요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차별의 가시화를 위함이다.

 

 #오빤다알아를 다시보자. 이 해시태그가 널리 퍼지면서, 이 해시태그를 공격하는 트윗 또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들은 페미니스트들의 프로필을 털어 선 넘은 평가와 함께 비난했으며, 심지어는 폭행예고와 살해협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터넷 게임 상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성희롱을 당하는지를 간증하고 미러링 방송을 한 갓건배의 발언을 멈추고 그녀가 말할 권리를 빼앗기 위해 한남부대는 그녀의 신상을 털어 수많은 살해 예고 영상을 올렸으며, 현피 실시간 방송을 중계하기도 했다. 여성의 입을 막기 위해 남성들은 온갖 수단을 쓴다. 맨스플레인은 이 수단의 매우 점잖은 형태 중 하나일 뿐이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사회적 안정감을 지키기 위해 남성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힘든 사회라는 것을 반증하는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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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어머니를 지우고, 두 할머니를 지우고, 네 증조 할머니를 지우라. 몇세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수백명이, 나중에는 수천명이 사라진다." 104

 

 한국에서 자행되는 맨스플레인에는 특이한 현상이 있다. 위 해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남성이 자기 자신을 오빠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오빠는 여성이 손위 남형제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일텐데, 실제로 피를 나누지 않은 사이임에도 남성은 자신이 친밀감을 느끼는 여성에게 오빠로 칭해지는 것을 선호한다. 그 상대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릴 때에는 더더욱이고, 심지어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연인에게도 남성은 오빠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한다. 참으로 기괴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이 오빠라는 호칭은 참으로 요상하다. 그저 호칭일 뿐인데도 오빠는 마치 자신이 여성에 대한 권리를 지닌 듯 행동한다. ‘오빠 믿지?’ 같은 말들이 유행한 맥락에는 해당 남성에게 관계적 우위를 점유할 수 있게 하는 암묵적인 허용이 담겨있다. 이것은 가부장적인 맥락이 기저에 깔려있기에 가능하다. 가부장제가 뼛속까지 스며든 보수적인 한국 가정 안에서, ‘오빠의 말은 엄마의 입을 다물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여동생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남성 중심 사회, 가부장제가 어떻게 여성을 지우는지를 그려낸 제 5장에서는 여성을 지우는 행위가 가족적 사회적으로 행해진 것에 대한 고찰이 나온다. 어째서 오빠가 맨스플레인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지가 직감적으로 이해된다. 한국에서 맨스플레인에 대한 간증이 이루어지면서 오빠에 대한 호칭이 재논의 되었던 현상은 자연스럽다.

 

 여성의 말을 막는 것은 주변 자극만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문제제기조차 하지 못했던 전통의 탈을 쓴 가부장제와 여성의 성씨 지우기는 그 체계만으로도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페미니즘이 가야할 길이 얼마나 먼지, 쌓인 남성중심역사의 세월을 계산해보면 알 수 있다. 그 끝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험준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바뀌어 온 것을 보면 완전히 부질없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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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페미니즘은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뀐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그런 방식이 가능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메갈이 생겼을 때, 공격적이라고 평해지는 페미니즘 해시태그가 돌았을 때, 생리대 시위가 열렸을 때, 사람들은 공격적이고 불편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들은 간과하고 있다. 이전에는 이런 일이 벌어질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여성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이 당한 일을 자신의 목소리로 웅변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여성의 목소리가 이정도의 무게감을 지닐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많은 남성들, 아니, 전통적인 성 역할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공격적이고, ‘예민하고, ‘망상증이라는 온갖 프레임을 씌우며 온갖 2차 가해와 함께 입을 막으려고 할 것이다. 당사자가 아무리 자신의 경험을 말해도 무식하고 감성적이고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심지어는 그들의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가스라이팅까지 사용하며 말할 권리조차 앗아간 채 가르치고 교정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평등은 제로섬게임이 아니다. 페미니즘이 이루어지면 그만큼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맨박스가 사라진다. 그들의 ‘KIBUN’(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폭력을 저지른 남성들을 조롱하기 위한 인터넷 용어이다)이 나쁘다는 것은 평등을 거부하는 이유에는 적절치 않다.

 

페미니즘은 여성들만을 위한 운동이라는 편견. 거센 백래시에 아무리 노력해도 부질없는 행위라는 편견. 저자는 이 편견들을 이 한 책을 통해 거부한다. 이 책의 10개의 챕터에서 저자는 매우 다양한 요소를 모아 페미니즘이라는 하나의 큰 강줄기를 형성하는 것을 보여준다. 페미니즘은 곧 사회이며, 평등이고, 범죄의 감소이며 평화이다. 하지만 이것을 이루기 위한 길이 전쟁임에는 틀림없다. 매우 절망스럽고 갈 길이 멀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은 각각 다른 년도에 쓰인 것들이다. 2008년에서 시작해서 2014년에서 끝난다. 6년의 세월동안 세상은 이미 많이 바뀌었다. 그것을 지켜본 저자의 희망이 담긴 단호한 논지는 앞으로 나아갈 잔잔한 용기를 심어준다.

그러나 그는 자기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쌜리가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이라고요‘를 세번인가 네번쯤 말한 뒤에야 그는 말귀를 알아들었고, 그 즉시 꼭 19세기 소설에 나오는 사람처럼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 P14

이 나라와 이 지구에서는 여성에 대한 강간과 폭력이 엄청나게 많이 발생하지만, 그 사건들이 시민권 문제나 인권 문제로, 혹은 위기로, 혹은 하나의 패턴으로 다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폭력에는 인종도 계급도 종교도 국적도 없다. 그러나 젠더는 있다. - P37

당신의 어머니를 지우고, 두 할머니를 지우고, 네 증조 할머니를 지우라. 몇세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수백명이, 나중에는 수천명이 사라진다. - P104

새로운 페미니즘은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뀐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그런 방식이 가능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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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미술관 - 가볍고 편하게 시작하는 유쾌한 교양 미술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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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이면 인상이지, '후기'인상은 뭐지?"

 

'후기인상주의'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머릿속을 떠돌던 질문. 하지만 찾아볼 생각도 의지도 없어 '인상주의 다음에 나와서 후기가 붙은거겠지' 라는 어설픈 추측만 하고 넘겨버린 질문. 이 책은 미술 작품들을 볼 때마다 눈가리고 아웅하던 궁금증들을 시원하고 재미있게 풀어준다.

 

미술을 좋아하는 저자가 진행하던 팟캐스트를 기반으로 한 책이다. 미술이 어렵고 재미없다는 오해와 허례허식을 벗기기를 바라며 저자는 마치 친구의 속사정을 들려주는 것처럼 친근한 문체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미술을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년도와 화가와 작품을 연결지어 외우는 것이 영 젬병이라 부끄럽게도 제대로 아는 미술지식은 없는 편이다. 인상주의 모네, 추상화를 그린 피카소, 귀를 자른 알코올중독자 고흐, 페미니스트의 우상 프리다 칼로... 이 정도로 표면적인 지식을 가진 나는 어린 시절 모네와 마네를 헷갈리고 고흐와 고갱을 헷갈리는 미알못(미술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알면 참 좋겠지만 미술시간에 한 번 쯤 들어본 이름이라 재미없을 것 같다는 편견이 있어 찾아보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 편견을 시원하게 깨주는 책. 화가와 수다 떠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이 잘 느껴지는 가벼운 미술교양입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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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사진보다 심오한 유사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던 고흐이기에 <해바라기>는 우리가 알던 해바라기가 아닙니다. 노랗게 타오르는 정열의 에너지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살면서 이름 한 번 쯤 들어본 인지도가 높은 화가 선정, 사이사이에 적절한 회화를 접목한 화가의 일대기로 인해 회화와 화가를 쉽게 연결 지을 수 있다.

 

챕터의 길이도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 길지 않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려 한 노력이 엿보인다. 오디오북에서 저자는 '8장부터는 근대미술 위주로 정리하여, 시대적 배경을 노력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도록 기획하였다'고 말한다. 확실히 인상주의 이후의 미술사 흐름은 잘 이해되지만 8장 이전에 나온 화가들은 어떤 기준으로 구성된 건지가 궁금하다. (4장에서 본 고흐가 10장에서 다시 등장해 당황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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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확신의 이면에는 가장의 책임을 포기하기로 한 고갱도 숨어있습니다. 어쨌든 이제, 오로지 자신의 예술만을 바라보기로 한 것이죠."

 

책을 읽고 나면 화가의 이름과 그 특색, 그림이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되는데, 그 이유는 화가마다 나름의 캐릭터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눈길을 끄는 자극적인 소제목, 사람이라면 궁금해 할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재미있게 풀어낸다. 꼭지가 끝날 때마다 학파에 대한 간결한 설명을 덧붙여 내용정리를 돕는다.

 

가볍고 재미있는 교양서를 목표로 했지만, 화가의 불행과 고통을 '예술의 기반'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과 함께 가십기사를 닮은 듯한 문체를 보아 화가에 대한 깊은 고찰을 기대할 책은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기억에 잘 남는 문장들이라 페이지가 쉽게 넘어간다

 

미술관은 좋아하지만 설명문을 열심히 읽어도 돌아서면 까먹는 사람, 아는체 하고 싶지만 표면적인 지식밖에 몰라서 입을 다물게 되는 사람.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폭넓은 층이 읽어도 좋은 대중적인 교양서이다. 도비라와 소제목, 알아보기 페이지까지 유머가 빠지지 않는다. 올해 4월10만부 에디션으로 표지가 부드럽고 감성적으로 바뀌었는데,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매우 마음에 들지만 내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유머가 담긴 원색 계열 표지였으면 더욱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든다.

 

방구석 미술관조원재 지음, 블랙피쉬


사실 이런 확신의 이면에는 가장의 책임을 포기하기로 한 고갱도 숨어있습니다. 어쨌든 이제, 오로지 자신의 예술만을 바라보기로 한 것이죠.

‘화가는 사진보다 심오한 유사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던 고흐이기에 <해바라기>는 우리가 알던 해바라기가 아닙니다. 노랗게 타오르는 정열의 에너지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인상이면 인상이지, ‘후기‘인상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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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기 좋은 방 - 오직 나를 위해, 그림 속에서 잠시 쉼
우지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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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그녀는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한 채 조용히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긴긴밤이 지나고 나면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열어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를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22

 

우리에게는 공간이 필요하다. 실용적이든, 탐미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공간은 밖과 안을 구분하며 그것 특유의 공기를 자아낸다.

 

방에는 다양한 기억이 쌓인다. 그것들은 위안과 쓸쓸함을 동시에 주지만 개인적이기에 또한 매력적이다. 공간에는 인생이 흔적이 밴다. 흔적 위에 다른 흔적을 덧칠하며 우리는 살아간다.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방이 필요하다. 세상과 잠시 거리를 두고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떠오르는 제목은 그래서일까? 표지에는 한 여성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신문을 읽고 있다. 홍차향과 조금은 서늘한 아침공기가 느껴지는 듯 하다. 표지의 여성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책장을 넘기는 손길도 부러 조심스러워진다.

 

이 책은 공간을 소재로 한 미술작품을 소재로 일상 속 위로와 공감을 내어주는 미술 에세이이다. 저자는 독자의 손을 끌고 그림 속 공간들에 담긴 화가의 흔적을 읽는다

 

작품을 바라볼 때, 보통은 공간 자체가 아닌 공간 안이나 밖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보게 된다. 그것들은 인물이 될 수도 있고, 풍경이 될 수도 있고, 사물이 될 수도 있다. 공간 자체가 그림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인지 생소한 그림들이 많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화가의 작품은(카미유 피사로나 고흐의 그림이 있긴 하지만)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지극히 사적인 공간인 욕실부터 사방이 트여있는 대중교통까지, 다양한 공간들이 소개된다. 자연스레 새로운 화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창문과 테라스를 주구장창 그린 화가, 부엌에 깃든 일상적 노동에 집중한 화가, 자신의 소신과 주도성을 운전석에 빗댄 화가... 많은 이들이 풍경으로만 여기는 공간에 그들은 의미를 부여한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공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공간을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 모두에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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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면 철저히 독립된 나만의 장소로 숨어버린다. 그곳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안식이기에."

 

어릴적 나는 나만의 방을 너무나도 가지고 싶었다. 두 살 터울인 남동생과 같은 방을 쓰고 싶지 않아서였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족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감정을 풀어낼 방이 나는 필요했다.

 

방이 생겼을 때 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틈만 나면 문을 걸어 잠그고 나만의 시간을 즐겼다. 그 시절의 나는 내 방이 나의 전부였다. 지금도 방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유일한 안식처이다.

 

실제로 몇몇 사람들은 기력을 충전하기 위해 기꺼이 은둔한다. 인간관계를 줄이고 방으로 들어간다. 직업 상 실내에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화가들 또한 이런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 방이란 특별한 의미가 생길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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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사랑하는 일상의 순간을 캔버스에 기록한 화가의 시선에는 삶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나아가 우리에게 무심코 보낸 하루를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315

 

누구에게나 특별한 공간이 있다.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공간. 꼭 혼자서 공간을 점유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인파 속에 숨을 수 있는 광장일 수 있고, 모두가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만찬 테이블일 수 있다. 누구에게나 평범하지만 누구에게는 특별한 공간. 공간이란 사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사람과 방은 떼어낼 수 없기에, 사람냄새가 가득한 그림들을 보고 있자면 화폭에 이를 담아낸 화가의 마음을 알 수 있을것 같기도 하다.

 

일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는 에세이이다. 힘들고 지칠 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이 책은 위로라는 방문을 연다. 그리고 잠시 안으로 들어가 자기자신과 마주보는 것을 넌지시 권한다. 페이지에 가득 차도록 배치된 그림들은 공간감을 탁월하게 느끼게 하며 말 없이도 말 이상의 것을 줄 것이다.

 

 

혼자 있기 좋은 방우지현 지음, 위즈덤하우스


이곳에서 그녀는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한 채 조용히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긴긴밤이 지나고 나면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열어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를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 P22

이럴 때면 철저히 독립된 나만의 장소로 숨어버린다. 그곳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안식이기에.

자신이 사랑하는 일상의 순간을 캔버스에 기록한 화가의 시선에는 삶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나아가 우리에게 무심코 보낸 하루를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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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 알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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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도 의미도 그녀의 세계에서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그 어떤 것이든 ‘현실의 사물’로서(‘비현실’의 것으로서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소설 속 주인공일까? 아니, 저자의 환자 중 한명이다. 그녀는 파괴형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그녀 안에서 인지되는 모든 개념들이 분해되고 침식되어 무질서한 혼돈으로 변해버린, 그저 유쾌할 뿐인 사람이다. 신비롭기 그지없는 그녀의 이야기는 앨리스가 헤맸던 이상한 나라의 주민을 보는 것 같지만, 그녀와 그녀의 병이 실존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면 참담한 상황이 따로 없다는 걸 알게된다.


이 책은 신경과 전문의 올리버 색스의 환자 사례집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적적으로’ 희귀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의 사례 24건을 소개한다. 픽션보다 더욱 픽션같은 실화. 문학으로 착각할 만큼 감성을 자극하는 저자의 글솜씨는 독자를 휘어잡는다.


어디 내용뿐인가, 표지, 만듦새, 그 모든 것이 잘 어우러져있다. 모든 꼭지 앞에 배치된 이정호 디자이너의 감각 있는 그림은 훌륭하다. 르네 마그리트를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데, 표지를 보자마자 손에 들어버렸다. (르네 마그리트와는 전혀 관련 없는 책이지만) 어딘가 먹먹하고 감성을 자극하며, 꼭지를 읽기 전 분위기를 환기해주고, 읽은 후 다시 그림을 보면 느껴지는 바가 또 다르다. 솔직히 취향 저격이다. 책 자체가 너무나 예쁘다. 소장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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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형을 사랑하고 있었고 만나자마자 바로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형의 모습이 어째서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1970년 이후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중증 코르사코프 환자, 챕터 <길 잃은 뱃사람>의 주인공, 지미를 보며 나는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를 생각했다. 둘의 증상은 완벽히 같지 않지만, 기점이 되는 시간 안에 갇힌 채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모습이 닮아보였다. 하지만 이 책을 계속 읽어가면서, 사례 속 증상을 어딘가에서 보았던 창작물에 빗대는 행동을 그만두게 되었다.


실제로 뇌 이상은 많은 창작물에서 잘 쓰이곤 하는 소재이다. 판타지가 절묘하게 섞인 뇌장애 증상들은 주인공들의 역경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실마리, 혹은 특이한 능력으로 미화되곤 한다. 그래서인지 보통 비장애인은 희귀한 병이나 증상을 접하면 공포를 느껴 배척하거나 흥미본위로 접근하곤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사례들은 그런 창작물을 접할 때와는 다른 시선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 책에 기술되어있는 건 소설이 아니라 실화이다. 픽션이 아니라 다큐다. 질병을 낭만화하지 않는 시선을 저자는 지속해서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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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구성하는 정신 과정은 단순히 추상적 혹은 기계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24가지의 사례만큼 다양한 병이 소개되며 뇌과학 지식 설명과 증상의 분석도 매우 전문적이다. 하지만 이 책의 초점은 병에만 맞춰져있지 않다. 이 책은 병에 걸린 사람 자체를 보는 방법을 알려준다.


뇌인지과학 수업을 들으며 다양한 사례를 접했지만 보이는 것은 강의 자료에 간결히 적혀있는 뇌와 신경의 매커니즘이 전부였다. 그 때 나는 환자 자체를 보지 못했고, ‘뇌에 이상이 생기면 이런 신기한 일도 있구나, 재미있네.’ 하고 가볍게 넘겨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특이해 보인다고 해도 가볍게 접근해선 절대로 안 된다. 이 질병들은 한 인간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을 정도의 재앙이 되기도 하고, 축복이 되기도 하고, 한 인간의 세계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인간들은 얼마든지 우리의 주변에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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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정말 그렇게 희귀한 존재일까? 아니면 우리가 단지 무심하게 지나쳤을 뿐일까?”


저자는 환자에게 일방적으로 의사의 권위를 휘두르지 않는다. 환자에게 지극히 조심스럽게 접근하며 항상 환자의 의견을 먼저 묻는다. 환자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는 휴머니즘이 뚝뚝 묻어나온다. 저자는 따뜻하면서 엄격한 시선으로 환자들을 분석하고 그들을 마음 깊이 사랑한다. 저자가 제일 중시하는 것은 환자의,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일상 속 행복이다.


환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환자와 함께 치료법을 모색하는 따뜻한 지성인의 모습은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환자에 대한 진심이 묻어나오는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시야가 넓어지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알마


감정도 의미도 그녀의 세계에서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그 어떤 것이든 ‘현실의 사물’로서(‘비현실’의 것으로서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 P205

그는 형을 사랑하고 있었고 만나자마자 바로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형의 모습이 어째서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 P71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구성하는 정신 과정은 단순히 추상적 혹은 기계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 P45

그들은 정말 그렇게 희귀한 존재일까? 아니면 우리가 단지 무심하게 지나쳤을 뿐일까?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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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사라졌다
경선 지음 / 넥서스BOOKS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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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그냥 평범했는데."

 

영인은 지금까지 자신의 오빠가 범죄자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을 자책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서 회상하는 장면은 오빠인 영재가 여혐발언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평범하다고 생각할만큼 우리 사회는 얼마나 남성들에게 물렀던 걸까. 아니, 우리 아들, 오빠, 남동생이기에 눈 가리고 아웅한 걸지도 모른다.


만화 속 처벌이 강화된 한국에서도 그들은 뻔뻔하게 돌아왔다. 몇몇 피해자들은 절대로 돌아올 수 없는 일상에 말이다.


이 만화는 계속해서 말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얼굴을 한 그들은 '그럼에도' 결국 돌아올 것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알던 사회는 이미 바뀌고 있다고.

 

이 만화는 성 착취물 유포나 소지만으로도 3년형이 선고되는 한국의 한 가정을 그려낸 만화이다.


장남인 영재가 성 착취물 소지혐의로 경찰에 소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두 여동생 영은과 영인이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담담히 묘사된다.


영재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에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가족, 현재의 최소 3년형으로 가중되었음에도 실질적으로 처벌받지 않는 현실을 비판하며 '디지털 성범죄 근절법'을 외치는 친구들, 그리고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오빠 영재의 모습들.


영인과 영은은 가해자인 오빠를 돕지 않기로 결의한다.

 

잔인한 가해 장면이 나오지 않는데도 마음이 답답하고 고통스럽다. 다양한 입장의 목소리가 여과되지 않고 몰려들어와서 더 그렇다. 캐릭터들의 표정, 효과적인 연출에 대사 속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특히 얼굴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진수의 미소는 단순한 그림체임에도 공포스러웠다.


짧은 만화이지만 생각이 많아진다. 작중에 그려진 가족의 모습이 너무나 평범하여 자신의 남자 형제가 가해자가 되었을 때를 가정해 대입해보게 된다. 부모님의 반응은 어떠실까, 주변은 우리 가족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그 때,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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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쁜일이... 악몽으로만 남는다면 너무 억울하잖아."

 

이 만화는 n번방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가해자가 구속되었음에도 부과된 형량은 너무나 낮다. 기사를 볼 때마다 허무감이 느껴진다. 강남역 사건부터 시작되어 소라넷과 버닝썬을 거치며 활활 타오르던 분노의 불씨가 무력감에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실제로 기사를 계속 보다 정신건강이 안좋아져 우울증에 걸린 커뮤니티 친구의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분노와 기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도망치고 싶지는 않기에 연대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연대의 숨은 주인공은 어머니, 연숙이다. 처음에는 아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던 보수적인 인물이었지만 점점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며 성장하는 인물이다. 영재와의 인연을 끊겠다는 두 딸의 편을 들어주는, 세대를 뛰어넘은 연대의 장면은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


"너는 너한테 일어난 일이 아니면, 너랑 관련된 일이 아니면 공감을 못하니?"

 

주인공 영인과 영은은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부모에게, 남편에게, 친구, 선배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소통하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하지만 상대방이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여주지는 않는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메울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영은의 남편 진수가 그렇다.


어디에나 있는 착하고 이해심 많은 남자. 하지만 거기까지인 남자. 82년생 김지영의 정대현,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의 주인공이 그렇듯 자신이 보는 일상과 파트너가 보는 일상의 괴리를 이해하지 못하며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듯 답답하기만 하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진수는 육아휴직을 쓰고 영은의 복직을 돕는다. "내가 더 노력할게.",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쓰여지곤 하는 이 문장을 말한 진수는 그것을 말뿐이었던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


공존을 위해서는 이해와 신뢰,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점점 사회는 바뀌어갈 것이다. 처벌이 가중되지 않으면 가해자는 바뀌지 않은 채, 모든 것이 바뀐 사회로 돌아올 것이다.


상상 속으로 만들어낸 '악마' 만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는 언제나 너무나 평범해보이던 주변인일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는 준비되어있어야 한다. 그 시작은 나 자신이다.

 

오빠가 사라졌다경선 지음, 넥서스BOOKS

... 그냥 평범했는데.

그 나쁜일이... 악몽으로만 남는다면 너무 억울하잖아.

너는 너한테 일어난 일이 아니면, 너랑 관련된 일이 아니면 공감을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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