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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 알마 / 2016년 8월
평점 :
“감정도 의미도 그녀의 세계에서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그 어떤 것이든 ‘현실의 사물’로서(‘비현실’의 것으로서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소설 속 주인공일까? 아니, 저자의 환자 중 한명이다. 그녀는 파괴형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그녀 안에서 인지되는 모든 개념들이 분해되고 침식되어 무질서한 혼돈으로 변해버린, 그저 유쾌할 뿐인 사람이다. 신비롭기 그지없는 그녀의 이야기는 앨리스가 헤맸던 이상한 나라의 주민을 보는 것 같지만, 그녀와 그녀의 병이 실존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면 참담한 상황이 따로 없다는 걸 알게된다.
이 책은 신경과 전문의 올리버 색스의 환자 사례집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적적으로’ 희귀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의 사례 24건을 소개한다. 픽션보다 더욱 픽션같은 실화. 문학으로 착각할 만큼 감성을 자극하는 저자의 글솜씨는 독자를 휘어잡는다.
어디 내용뿐인가, 표지, 만듦새, 그 모든 것이 잘 어우러져있다. 모든 꼭지 앞에 배치된 이정호 디자이너의 감각 있는 그림은 훌륭하다. 르네 마그리트를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데, 표지를 보자마자 손에 들어버렸다. (르네 마그리트와는 전혀 관련 없는 책이지만) 어딘가 먹먹하고 감성을 자극하며, 꼭지를 읽기 전 분위기를 환기해주고, 읽은 후 다시 그림을 보면 느껴지는 바가 또 다르다. 솔직히 취향 저격이다. 책 자체가 너무나 예쁘다. 소장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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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형을 사랑하고 있었고 만나자마자 바로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형의 모습이 어째서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1970년 이후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중증 코르사코프 환자, 챕터 <길 잃은 뱃사람>의 주인공, 지미를 보며 나는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를 생각했다. 둘의 증상은 완벽히 같지 않지만, 기점이 되는 시간 안에 갇힌 채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모습이 닮아보였다. 하지만 이 책을 계속 읽어가면서, 사례 속 증상을 어딘가에서 보았던 창작물에 빗대는 행동을 그만두게 되었다.
실제로 뇌 이상은 많은 창작물에서 잘 쓰이곤 하는 소재이다. 판타지가 절묘하게 섞인 뇌장애 증상들은 주인공들의 역경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실마리, 혹은 특이한 능력으로 미화되곤 한다. 그래서인지 보통 비장애인은 희귀한 병이나 증상을 접하면 공포를 느껴 배척하거나 흥미본위로 접근하곤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사례들은 그런 창작물을 접할 때와는 다른 시선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 책에 기술되어있는 건 소설이 아니라 실화이다. 픽션이 아니라 다큐다. 질병을 낭만화하지 않는 시선을 저자는 지속해서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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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구성하는 정신 과정은 단순히 추상적 혹은 기계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24가지의 사례만큼 다양한 병이 소개되며 뇌과학 지식 설명과 증상의 분석도 매우 전문적이다. 하지만 이 책의 초점은 병에만 맞춰져있지 않다. 이 책은 병에 걸린 사람 자체를 보는 방법을 알려준다.
뇌인지과학 수업을 들으며 다양한 사례를 접했지만 보이는 것은 강의 자료에 간결히 적혀있는 뇌와 신경의 매커니즘이 전부였다. 그 때 나는 환자 자체를 보지 못했고, ‘뇌에 이상이 생기면 이런 신기한 일도 있구나, 재미있네.’ 하고 가볍게 넘겨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특이해 보인다고 해도 가볍게 접근해선 절대로 안 된다. 이 질병들은 한 인간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을 정도의 재앙이 되기도 하고, 축복이 되기도 하고, 한 인간의 세계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인간들은 얼마든지 우리의 주변에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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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정말 그렇게 희귀한 존재일까? 아니면 우리가 단지 무심하게 지나쳤을 뿐일까?”
저자는 환자에게 일방적으로 의사의 권위를 휘두르지 않는다. 환자에게 지극히 조심스럽게 접근하며 항상 환자의 의견을 먼저 묻는다. 환자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는 휴머니즘이 뚝뚝 묻어나온다. 저자는 따뜻하면서 엄격한 시선으로 환자들을 분석하고 그들을 마음 깊이 사랑한다. 저자가 제일 중시하는 것은 환자의,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일상 속 행복이다.
환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환자와 함께 치료법을 모색하는 따뜻한 지성인의 모습은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환자에 대한 진심이 묻어나오는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시야가 넓어지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알마
감정도 의미도 그녀의 세계에서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그 어떤 것이든 ‘현실의 사물’로서(‘비현실’의 것으로서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 P205
그는 형을 사랑하고 있었고 만나자마자 바로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형의 모습이 어째서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 P71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구성하는 정신 과정은 단순히 추상적 혹은 기계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 P45
그들은 정말 그렇게 희귀한 존재일까? 아니면 우리가 단지 무심하게 지나쳤을 뿐일까?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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