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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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자기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쌜리가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이라고요'를 세번인가 네번쯤 말한 뒤에야 그는 말귀를 알아들었고, 그 즉시 꼭 19세기 소설에 나오는 사람처럼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14p

 

 15년에 트위터에서 #오빤다알아해시태그가 실시간 트렌드로 올라갔다. 이 해시태그를 기점으로 여성들이 주변 남성들에게서 들었던 맨스플레인을 토해내는 장이 열렸다. 이를 통해 여성의 발언을 사회적으로 억압하는,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고, 일부 분야에 있어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며(아무리 그녀가 해당 분야의 전공자이거나, 해당 분야의 직업을 가지고있다고 하더라도), 특히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면(혹은 어려보일 때에도) 자신이 무리를 해서라도 기꺼이 알려주고 도와주어야한다는(얼마나 시혜적인가) '일부' 남성들의 행동들이 까발려졌다. 그리고 이 맨스플레인 부흥의 중심에는 이 책이 있었다. 책을 읽지 않은 당시에도 저자에게 그녀가 쓴 책에 대한 맨스플레인을 시전한 남성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졌었다. 이 책은 그 정도로 한국 페미니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저자에게 저자가 쓴 책에 대한 맨스플레인을 시전한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침묵 강요에 대한 고찰을 담은 글은 살인과 폭력, 사회적 여성차별 구조로 이어지며 끝났다. 일상적인 해프닝으로 웃어넘길 수 있을만한 일을 억지스럽게 극단적인 일과 연결짓는 것이 당황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논리와 글을 찬찬히 따라가다보면, 그녀가 읽어내는 사회적 현상이 그녀의(혹은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의) 망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저자는 각 주장에 완벽히 해당하는 범죄 사실과 사회적 변화를 구체적으로 덧붙이며 사회에 만연한 생태적 현상을 냉철하게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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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와 이 지구에서는 여성에 대한 강간과 폭력이 엄청나게 많이 발생하지만, 그 사건들이 시민권 문제나 인권 문제로, 혹은 위기로, 혹은 하나의 패턴으로 다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폭력에는 인종도 계급도 종교도 국적도 없다. 그러나 젠더는 있다." 37p

 

 범죄든 일상적 성희롱이나 맨스플레인이든, 개인의 경험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해프닝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들이다. 문제는 이 '일부'남성들의 행동에 따른 여성 피해자의 수가 일부여성들의 행동에 따른 남성 피해자의 수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은 이젠 통하지 않는다. 사건화조차 되지 않는 해프닝들이 얼마나 많은지 여성들은 모두 알고 있다. 사건화가 되었을 때에도, 여성인 증인의 증언이 신빙성이 없다며 불기소를 향해 온갖 공격을 받은 사례를 저자는 소개한다. 이미 그것에서부터 이 현상에 관련된 것은 '일부'남성들에게만 해당한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게 된다. 개인에게는 해프닝일지 몰라도, 대부분의 여성이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다는 것에서 더 이상 이 일은 해프닝이 될 수 없다. 개인의 경험을 연결지어 사회적 현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0개의 장을 통하여, 특히 2장에서 저자는 여성에 대한 범죄를 그저 한 건의 범죄로만 바라보지 말고 큰 그림으로 확장하여 하나의 사회적 체계로 봐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계속되는 미투 운동과도 같은 간증들, 성폭력, 맨스플레인, 경력단절, 임신중단의 경험에 대한 고백은 이 주장을 기반으로 한다. 페미니즘의 사회적 필요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차별의 가시화를 위함이다.

 

 #오빤다알아를 다시보자. 이 해시태그가 널리 퍼지면서, 이 해시태그를 공격하는 트윗 또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들은 페미니스트들의 프로필을 털어 선 넘은 평가와 함께 비난했으며, 심지어는 폭행예고와 살해협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터넷 게임 상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성희롱을 당하는지를 간증하고 미러링 방송을 한 갓건배의 발언을 멈추고 그녀가 말할 권리를 빼앗기 위해 한남부대는 그녀의 신상을 털어 수많은 살해 예고 영상을 올렸으며, 현피 실시간 방송을 중계하기도 했다. 여성의 입을 막기 위해 남성들은 온갖 수단을 쓴다. 맨스플레인은 이 수단의 매우 점잖은 형태 중 하나일 뿐이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사회적 안정감을 지키기 위해 남성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힘든 사회라는 것을 반증하는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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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어머니를 지우고, 두 할머니를 지우고, 네 증조 할머니를 지우라. 몇세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수백명이, 나중에는 수천명이 사라진다." 104

 

 한국에서 자행되는 맨스플레인에는 특이한 현상이 있다. 위 해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남성이 자기 자신을 오빠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오빠는 여성이 손위 남형제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일텐데, 실제로 피를 나누지 않은 사이임에도 남성은 자신이 친밀감을 느끼는 여성에게 오빠로 칭해지는 것을 선호한다. 그 상대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릴 때에는 더더욱이고, 심지어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연인에게도 남성은 오빠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한다. 참으로 기괴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이 오빠라는 호칭은 참으로 요상하다. 그저 호칭일 뿐인데도 오빠는 마치 자신이 여성에 대한 권리를 지닌 듯 행동한다. ‘오빠 믿지?’ 같은 말들이 유행한 맥락에는 해당 남성에게 관계적 우위를 점유할 수 있게 하는 암묵적인 허용이 담겨있다. 이것은 가부장적인 맥락이 기저에 깔려있기에 가능하다. 가부장제가 뼛속까지 스며든 보수적인 한국 가정 안에서, ‘오빠의 말은 엄마의 입을 다물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여동생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남성 중심 사회, 가부장제가 어떻게 여성을 지우는지를 그려낸 제 5장에서는 여성을 지우는 행위가 가족적 사회적으로 행해진 것에 대한 고찰이 나온다. 어째서 오빠가 맨스플레인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지가 직감적으로 이해된다. 한국에서 맨스플레인에 대한 간증이 이루어지면서 오빠에 대한 호칭이 재논의 되었던 현상은 자연스럽다.

 

 여성의 말을 막는 것은 주변 자극만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문제제기조차 하지 못했던 전통의 탈을 쓴 가부장제와 여성의 성씨 지우기는 그 체계만으로도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페미니즘이 가야할 길이 얼마나 먼지, 쌓인 남성중심역사의 세월을 계산해보면 알 수 있다. 그 끝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험준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바뀌어 온 것을 보면 완전히 부질없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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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페미니즘은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뀐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그런 방식이 가능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메갈이 생겼을 때, 공격적이라고 평해지는 페미니즘 해시태그가 돌았을 때, 생리대 시위가 열렸을 때, 사람들은 공격적이고 불편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들은 간과하고 있다. 이전에는 이런 일이 벌어질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여성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이 당한 일을 자신의 목소리로 웅변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여성의 목소리가 이정도의 무게감을 지닐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많은 남성들, 아니, 전통적인 성 역할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공격적이고, ‘예민하고, ‘망상증이라는 온갖 프레임을 씌우며 온갖 2차 가해와 함께 입을 막으려고 할 것이다. 당사자가 아무리 자신의 경험을 말해도 무식하고 감성적이고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심지어는 그들의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가스라이팅까지 사용하며 말할 권리조차 앗아간 채 가르치고 교정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평등은 제로섬게임이 아니다. 페미니즘이 이루어지면 그만큼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맨박스가 사라진다. 그들의 ‘KIBUN’(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폭력을 저지른 남성들을 조롱하기 위한 인터넷 용어이다)이 나쁘다는 것은 평등을 거부하는 이유에는 적절치 않다.

 

페미니즘은 여성들만을 위한 운동이라는 편견. 거센 백래시에 아무리 노력해도 부질없는 행위라는 편견. 저자는 이 편견들을 이 한 책을 통해 거부한다. 이 책의 10개의 챕터에서 저자는 매우 다양한 요소를 모아 페미니즘이라는 하나의 큰 강줄기를 형성하는 것을 보여준다. 페미니즘은 곧 사회이며, 평등이고, 범죄의 감소이며 평화이다. 하지만 이것을 이루기 위한 길이 전쟁임에는 틀림없다. 매우 절망스럽고 갈 길이 멀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은 각각 다른 년도에 쓰인 것들이다. 2008년에서 시작해서 2014년에서 끝난다. 6년의 세월동안 세상은 이미 많이 바뀌었다. 그것을 지켜본 저자의 희망이 담긴 단호한 논지는 앞으로 나아갈 잔잔한 용기를 심어준다.

그러나 그는 자기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쌜리가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이라고요‘를 세번인가 네번쯤 말한 뒤에야 그는 말귀를 알아들었고, 그 즉시 꼭 19세기 소설에 나오는 사람처럼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 P14

이 나라와 이 지구에서는 여성에 대한 강간과 폭력이 엄청나게 많이 발생하지만, 그 사건들이 시민권 문제나 인권 문제로, 혹은 위기로, 혹은 하나의 패턴으로 다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폭력에는 인종도 계급도 종교도 국적도 없다. 그러나 젠더는 있다. - P37

당신의 어머니를 지우고, 두 할머니를 지우고, 네 증조 할머니를 지우라. 몇세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수백명이, 나중에는 수천명이 사라진다. - P104

새로운 페미니즘은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뀐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그런 방식이 가능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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