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여자아이는 정말 핑크를 좋아할까
호리코시 히데미 지음, 김지윤 옮김 / 나눔의집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 아이를 둔 부모님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자녀들에게 어린이날 선물을 해주셨겠죠? 아마도 자녀의 성별에 맞게(?) 선물을 준비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마트에 들렀다가 어린이 장난감 코너를 지나가는데 장난감을 성별에 따라 구별해 놓은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여자 아이들 장난감은 대체로 핑크색계열이고, 남자 아이들 장난감은 파란색계열입니다.
 
장난감 코너를 이렇게 구분해 놓은 건 여자 아이들은 핑크색을 좋아하고 남자 아이들은 파란색을 좋아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성별에 따라 색상을 구분해 놨기 때문에 아이들이 선호하는 색상이 만들어지는 걸까요? 여자 아이 둘을 키우면서 딱히 색상에 대한 선호를 두지 않으려고 했음에도 아이들이 핑크색 장난감들을 좋아했던 것을 보면 유아기 때 선호하게 되는 색상은 타고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일본인 작가 호리코시 히데미도 어린 딸이 핑크색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서 의문을 갖기 시작해 <여자아이는 정말 핑크를 좋아할까>라는 책을 썼습니다. 엄마가 블랙 마니아여도, 칙칙한 색 옷만 입어도 여자아이들은 유아기 때 대체로 핑크색에 빠져든다는 점을 저자는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딸 둘을 둔 아빠인 제게도 흥미로운 주제이고 의문이었습니다.
 
“국경을 초월해서 이렇게 많은 여자아이들이 핑크(혹은 프린세스, 반짝반짝거리는 것, 요정 등)를 좋아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사회적인 영향일까? 아니면 여자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핑크를 좋아하도록 타고나는 것일까? 설령 이것이 타고난 성질이라 할지라도 왠지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애초에 나는 핑크색에 왜 이런 찜찜함을 느끼는 것일까? 나는 과연 핑크색에서 또 다른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12쪽)

아이가 고정된 성역할에 갇히지 않기를

부모로서 아이들이 가능하면 특정한 틀에 갇히지 않고 성장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아이가 어느 한가지를 너무 좋아하게 되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특히나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어려서부터 성별에 따른 성역할에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그 틀에 갇혀 살아가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저자 역시 자신의 딸이 미용, 소꿉놀이, 요리 등 기존의 여성 역할을 답습한 장난감들에 영향을 받아 고정된 성역할에 갇히게 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고민과 의문을 이 책에 차근차근 풀어냈습니다. 핑크가 어쩌다가 여자의 색이 되었는지 역사를 살피고, 기존 여아용 장난감과는 다른 접근을 하면서 핑크에 저항하는 운동을 소개합니다. 더 나아가 여성의 사회진출, 특히 이공계 분야로의 진출문제까지 핑크와 연관지어 이야기합니다.

책의 마지막 장에선 핑크색과 여자아이의 관계를 넘어 핑크와 남자아이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데, 이 부분을 통해 저도 ‘남자다움’이라는 기존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점을 다시 환기할 수 있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나뉜 남성, 여성이라는 구분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의 범위를 생각보다 크게 제한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이같은 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지각하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재확인합니다.

핑크는 여성의 색? 역사는 짧다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시대엔 여성 중심 문화가 활기를 띠었는데 이 때 귀부인들은 핑크색 옷가지, 가구, 식기 등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장미를 사랑한 마리 앙투아네트, ‘퐁파두르 핑크’라는 사기그릇 색에 이름이 사용된 퐁파두르 후작부인 등이 유명한 인물들입니다. 기원은 기껏해야 200여년 정도이고 이런 경향이 심화된 것은 대체로 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고 하니 ‘핑크=여성의 색’이란 편견은 정말 얼마 되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여성적인 것으로 대표되는 보석, 스타킹, 하이힐, 리본과 레이스 등을 19세기 이전 서양에선 남성들이 권력 과시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다윈의 진화론과 민족학이 계기가 되어 화려한 장식은 열등한/미개한 혹은 하류계층 남성들이 하는 것이란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어른 남성이 예쁜색이나 장식을 좋아하는 것을 ‘계집애 같은’ 행위로 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신선했던 건 책에 실린 30개월 무렵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사진이었습니다. 1884년 사진인데 레이스 달린 치마, 끈 달린 구두, 긴 머리를 보면 딱 여자아이입니다. 당시엔 특별히 남녀 구분 없이 아이들에게 옷을 입혔다고 합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 아동심리학이 등장하면서 남자 아이들의 자위, 동성애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가설 등으로 인해 남아들 옷이 ‘남자다워’지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1950년대 미국에서 핑크는 여성스러움의 상징이 됩니다. 핑크와 여성이 밀접하게 연결된 역사는 결코 길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여자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핑크색 용품들로 둘러싸이게 된 이유를 저자는 아래와 같이 추정하는데 그럴법 합니다.
 
“전쟁에서 해방된 여성들은 무엇보다도 남성의 사랑을 받는 것이 풍요로움과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려면 자신이 전쟁에 지친 남성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가정적인 존재임을 어필해야 한다. 그래서 핑크색 옷을 입고 남편에게 헌신하는 순종적인 모습, 우아하고 섬세한 여성스러움,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 적절한 백치미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당시에 핑크가 여성성과 강하게 연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찍이 여성들의 ‘입신 출세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42쪽)

아들이 핑크를 좋아하고 귀여움을 추구한다면?

책에서 다룬 여자아이와 핑크색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보다 관심이 갔던 부분은 남자아이들이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압박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여아용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브로니’들은 또래 아이들에게 조롱과 무시를 당한다고 합니다. 제 어린시절을 돌아봐도 그랬던 것 같고, 책을 읽으면서 남자아이가 핑크인형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떠올려보니 뭔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여성스러움보다는 남성스러움에서 벗어나는 이미지에 보다 부정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게도 기존의 성별 이미지가 고착되어 있는 것이겠죠. 남자아이에게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미국의 경우 귀여움을 추구하는 남자아이들이 심하게 차별을 당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여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취미를 가진 남자아이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자는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취향에 대한 억압을 받게 되는 사회를 ‘숨막히는 사회’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을 줄여나가는 방법으로 남자아이에 대한 억압에 초점을 맞춰보면 어떨까 제안하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이는 여성이 사회로 진출하는 만큼 남성이 가정에 진출해야 한다는 주장과도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남자아이 자신이 ‘가와이’를 버리는 일 없이 그 영역에서 감성을 다듬어 간다면, 성장한 뒤에 여성에게 ‘순진무구한 객체로 있으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남성 부재의 육아 현장에서는 남성성을 텔레비전 방송이나 소년 만화, 게임 등에서밖에 배울 수가 없다. 대중문화는 보다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표현이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점점 더 치우치기 마련이어서 배틀이나 경쟁을 좋아하지 않는 남자아이가 롤모델로 삼을만한 현실적인 남성상을 기르기 어렵게 만든다.”(238쪽)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을 가진 부모들로 인해 자녀들이 억압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남자아이가 핑크색이나 귀여운 것을 좋아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저자는 콜린 스톡스 씨의 TED 토크를 인용하면서 남자아이를 겨냥한 영화에서 배우는 남성성은 주로 폭력으로 악인을 쓰러트리는 영웅이 주류라는 것을 언급합니다. 콜린 스톡스 씨가 말한 것처럼 아들들에게 새로운 롤모델이 시급해 보입니다

"국경을 초월해서 이렇게 많은 여자아이들이 핑크(혹은 프린세스, 반짝반짝거리는 것, 요정 등)를 좋아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사회적인 영향일까? 아니면 여자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핑크를 좋아하도록 타고나는 것일까? 설령 이것이 타고난 성질이라 할지라도 왠지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애초에 나는 핑크색에 왜 이런 찜찜함을 느끼는 것일까? 나는 과연 핑크색에서 또 다른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 P12

"전쟁에서 해방된 여성들은 무엇보다도 남성의 사랑을 받는 것이 풍요로움과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려면 자신이 전쟁에 지친 남성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가정적인 존재임을 어필해야 한다. 그래서 핑크색 옷을 입고 남편에게 헌신하는 순종적인 모습, 우아하고 섬세한 여성스러움,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 적절한 백치미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당시에 핑크가 여성성과 강하게 연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찍이 여성들의 ‘입신 출세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 P42

"남자아이 자신이 ‘가와이’를 버리는 일 없이 그 영역에서 감성을 다듬어 간다면, 성장한 뒤에 여성에게 ‘순진무구한 객체로 있으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남성 부재의 육아 현장에서는 남성성을 텔레비전 방송이나 소년 만화, 게임 등에서밖에 배울 수가 없다. 대중문화는 보다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표현이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점점 더 치우치기 마련이어서 배틀이나 경쟁을 좋아하지 않는 남자아이가 롤모델로 삼을만한 현실적인 남성상을 기르기 어렵게 만든다." - P2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시집, 30주년 개정판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국의 노동자(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함께 쓴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문구인데 너무 유명해서 공산당 선언을 다 읽지 않은 사람들도 한 두번 쯤은 들었봤을 익숙한 말입니다. 최근에도 노동조합이 파업을 하거나 광장에 모여 시위를 할 때 자주 사용되는 구호이기도 합니다. 매년 5월 1일, 노동절을 맞이할 때마다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이 외침을 떠올리면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가슴 한 켠에서부터 힘이 솟아납니다.

당대의 시대정신을 꾹꾹 눌러 담은 공산당 선언은 출판된 후 오랜 시간 동안 노동자 민중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분업과 기계화로 인해 단순한 도구나 부품처럼 사용되던 노동자들은 사회변화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19세기 후반 노동자들 중심의 투쟁으로 사회변혁을 이뤄냈던 프랑스와 독일, 러시아 등의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남미 등지에서 이 선언이 혁명으로 실현되기도 했습니다.

<공산당 선언>만큼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에서도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아내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저작이 있습니다. 당시 노동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박노해가 쓴 시집 <노동의 새벽>입니다. 1984년 현장 노동자의 손에서 나온 이 시집은 ‘잊혀진 계급’이라는 노동자들의 “영혼의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이 목소리들이 모여 87년 6월 항쟁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84의 노동자 vs 2019의 노동자

노동자 박노해가 노동 현장의 아픔과 분노, 그리고 희망을 시에 담아낸지 35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 노동자들은 얼마나 나아진 환경에 있을까요? 평균적으로는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 환경이 좋아진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노동현장에선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하철역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와 안전문 사이에 끼어서, 석탄 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서…

"인간의 삶이란, 노동이란
슬픔과 분노와 투쟁이란
오래되고 또 언제나 새로운 것"
 -스무 살의 새벽 노래-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일하는 대기업 혹은 공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제외하면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는 여전히 ‘잊혀진 계급’인 것 같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각종 임시직 노동자로 잘게 나누어져 노동자들끼리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해야 하는 대한민국 노동현실은 세월이 흘러가는 것만큼 비례해서 나아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여전히 노동현장엔 오래된 슬픔과 분노와 투쟁이 존재합니다.

박노해 시인이 <멈출 수 없지>라는 시에서 보여준 노동자의 모습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사장님, 경찰, 판검사, 공무원 등 힘있는 사람은 박노해 노동자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입니다. 박노해 시인이 꿈꾸던 “서로를 받쳐 주는, 모두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세상은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가면 갈수록 바쁘게 뛰어야 하는
갈수록 가진 것 없고 졸라매야 하는
고도로, 번영으로
급성장하는
우리는 복지국가 대한민국
뺑이치는
노동자” 
-멈출수 없지-


‘노동’의 자리를 꿰어찬 ‘근로’

더구나 우리 사회는 박정희 개발 독재 시대를 보내면서 ‘노동’을 지우고 그 이름을 ‘근로’로 대체했습니다. 여기에는 노동자를 부지런히 그리고 성실하게 국가에 부역하는 근로자로 삼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의 주인공은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아니었고 권력과 부를 가진 사용자들이었습니다. 이 국가적 세뇌에 노동자들 스스로도 저항하지 못하고 노동이란 이름을 빼앗긴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노동절’도 ‘근로자의 날’로 바꿔버렸습니다. 노동자는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산업 역군인 근로자가 된 것입니다. 노동법도 근로기준법입니다. 심지어 헌법에서조차 노동은 지워지고 근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국회의원들도, 노동자를 보호해야 하는 노동부 공무원들도, 신문도, 방송도, 심지어 노동자를 스스로도 ‘노동자’나 ‘노동’이라는 단어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형식적인 민주화를 이뤄냈다고 하는 87년 이후로도 노동자는 언제나 사회의 주변인이었습니다. 극우 언론들에선 귀족노동자라는 말을 만들어냈지만 노동자는 여지껏 귀족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자 박노해가 꿈꿨던 “노동의 햇새벽”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이 시집을 읽으며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 지를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노동자로 어떻게 살 것인가?

노동자 박노해는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깊은 불안을 느꼈습니다. “죄진 적도 없고/ 노예살이 머슴살이하는 것도 아닌데/ 풍요로운 웃음이 하늘에 닿는/ 안정과 번영의 대한민국 땅에서/ 떳떳하게 생산하며 살아가는데/ 왜 이리 종놈처럼 불안한 세상살이인가?”라면서 마음을 토로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노동자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노동자 박노해가 평온한 저녁을 가질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하루를 보낸 후 조촐한 밥상을 앞에 두고 평온한 저녁을 맞이할 소박한 꿈을 갖기 위해 노동자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에서 시작하면 좋을 지 실마리를 35년전 박노해 시인의 시 속에서 찾아봅니다. 당시 20대였던 박노해 노동자는 생각하지 못하는 삶은 삶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말만 앞세우는 것도 물론 허울 뿐인 삶이라 봤습니다. 우선은 생각하고 말하고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땅에 노동자로 태어나서
생각도 못 하고 사는 놈은 죽은 송장이여
말도 못 하는 놈은 썩은 괴기여
테레비만 좋아라 믿는 놈은 얼빠진 놈
이빨만 까는 놈은 좆도 헛물
실천하는 사람,
동료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노동자만이
진실로 인간이제
진짜 노동자이제” 
-진짜 노동자-

“그래, 어둠에서 어둠으로
끝없는 노동 속에 절망하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서
슬픈 눈물로 기름 부어 타오르며
우리들 손에 손 맞잡고
사랑과 희망을 버리지 말자
우리 품에 안아야 할
포근한 석양빛의 휴식과 평화
우리들의 권리를 찾을 때까지
슬픔과 절망의 어둠 속에서
마주 잡은 손들을 놓치지 말자” 
-석양-


연대를 통해 노동의 햇새벽으로

의식이 깨어난 노동자가 나아가야 할 다음 단계는 함께 손을 마주잡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극도로 분열되어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의 노동자 계층. 이들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마땅히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외쳤던 것처럼, 박노해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 힘을 모으는 것 뿐입니다. 그나마 상황이 나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이 먼저 손을 내밀어 취약한 환경에 있는 노동자들을 품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자랑스러운 노동자의 이름을 되찾는 일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헌법에서 ‘근로’를 지우고 ‘노동’을 되찾고, ‘근로기준법’을 ‘노동법’으로 바꾸고,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바꾸면 좋겠습니다.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도 이뤄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먼 일인 것 같아 보이지만 내년 총선에선 노동자를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더 많아질 수 있도록 후보자들을 면밀히 살피고 투표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참말로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알았던 20대 박노해 시인의 고백을 되새기며 2019년 ‘노동절’을 보내고 싶습니다.

“노동운동을 하고부터
동료와의 깊은 신뢰와 나눔과 사랑 속에
참말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알았네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신뢰와 사랑 속에
동료를 위해 사는 것처럼 큰 희열이 어디 있을까
라면 한 개 쓴 소주 한 명을 노놔 먹어도 웃음꽃이 피고
불안함과 경계가 없이 너나가 우리로 다 함께
환히 열린 하나 됨 속에서 해방의 기쁨을 나는 맛보네
나의 눈물이 동료들의 웃음이 되고
나의 고통이 동료들의 기쁨이 되고
나의 아픔이 우리들의 희망이 된다면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답고 뜻깊은 생인가” 
-아름다운 고백-


"인간의 삶이란, 노동이란
슬픔과 분노와 투쟁이란
오래되고 또 언제나 새로운 것"
-스무 살의 새벽 노래-

"오늘도 내일도
가면 갈수록 바쁘게 뛰어야 하는
갈수록 가진 것 없고 졸라매야 하는
고도로, 번영으로
급성장하는
우리는 복지국가 대한민국
뺑이치는
노동자"
-멈출수 없지-

"이 땅에 노동자로 태어나서
생각도 못 하고 사는 놈은 죽은 송장이여
말도 못 하는 놈은 썩은 괴기여
테레비만 좋아라 믿는 놈은 얼빠진 놈
이빨만 까는 놈은 좆도 헛물
실천하는 사람,
동료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노동자만이
진실로 인간이제
진짜 노동자이제"
-진짜 노동자-

"그래, 어둠에서 어둠으로
끝없는 노동 속에 절망하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서
슬픈 눈물로 기름 부어 타오르며
우리들 손에 손 맞잡고
사랑과 희망을 버리지 말자
우리 품에 안아야 할
포근한 석양빛의 휴식과 평화
우리들의 권리를 찾을 때까지
슬픔과 절망의 어둠 속에서
마주 잡은 손들을 놓치지 말자"
-석양-

"노동운동을 하고부터
동료와의 깊은 신뢰와 나눔과 사랑 속에
참말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알았네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신뢰와 사랑 속에
동료를 위해 사는 것처럼 큰 희열이 어디 있을까
라면 한 개 쓴 소주 한 명을 노놔 먹어도 웃음꽃이 피고
불안함과 경계가 없이 너나가 우리로 다 함께
환히 열린 하나 됨 속에서 해방의 기쁨을 나는 맛보네
나의 눈물이 동료들의 웃음이 되고
나의 고통이 동료들의 기쁨이 되고
나의 아픔이 우리들의 희망이 된다면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답고 뜻깊은 생인가"
-아름다운 고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년들의 섬 - 일제가 만들고 군사정권이 완성시킨 선감학원 소년들의 잔혹사!
이민선 지음 / 생각나눔(기획실크)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봄꽃을 구경하기에 딱 좋은 4월. 꽃을 즐길 수 있는 주요 거리들엔 완연한 봄을 맞이하는 이들로 가득합니다. 필자의 고향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부도로 가는 길도 주말에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북적일 게 눈에 보입니다. 이 지역은 서울 근교에 있는데다 꽃구경도 하고, 바다내음도 맡고, 해산물 요리도 즐길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입니다. 저도 고향집을 방문할 때면 가족들과 종종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곳으로 가는 길목 선감도라는 곳에 선감학원이라는 소년 수용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1982년까지 운영되었다고 하니 충격이었습니다. 지난 해 오마이뉴스 이민선 기자가 쓴 <소년들의 섬>이라는 책을 통해서 뒤늦게 알았습니다. 평소 종종 다니던 곳에 이토록 잔혹한 국가폭력의 역사가 있었다니…가까운 주변에 너무 관심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인터넷 검색창에 선감도를 입력하니 생각보다 오래 전부터 뜻있는 사람들이 선감도 수용소의 잊혀진 아픔을 기억해내고 진실을 밝히려 노력해 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일본 식민지 말기에 만들어져 1982년까지 운영되었던 선감학원은 4.3이나 5.18과 같은 국가폭력 사건들만큼 폭넓게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뼈아픈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민선 기자는 선감학원에서의 인권유린 속에서도 살아 남았던 피해자들을 만나 그들의 여전히 고통스러운 인생이야기와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어렵게 듣고 기록했습니다. 그들의 아픈 역사가 오롯이 담긴 책이어서 수월하게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름은 학원, 실제는 지옥같은 수용소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나쁜 짓을 할 것 같은 8~18세 소년들을 잡아다가 감화시킨다는 목적으로 소년 감화원이라는 이름의 수용소를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 잔인한 인권유린 시설을 해방 후에도 없애지 않은 채 군사독재 시절까지도 운영했습니다. 박정희 독재 시절엔 사회를 정화한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납치하기도 하고, 미아보호소에서 막무가내로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선감도로 끌려온 아이들은 강제노동과 폭력(성폭력)에 시달리며 죄수처럼 살았습니다.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너무 어린 시절부터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기에 지옥같았던 수용소를 벗어나서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수용소를 나와서도 아무런 기반 없이 혼자 힘으로 세상을 버텨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기억을 힘겹게 떠올리며 저자의 인터뷰에 응했을 선감학원 피해자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책장 한장을 넘기는게 미안할 지경입니다.

수용소에서 그리고 이후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피해자들이 겪었던 고통을 이 책 한 권을 읽고서 감히 가늠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삶이었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이야기에 더 주목하고 싶습니다. 뒤늦게 비극적 역사를 알게 되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선감학원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에 기억이라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이 사건의 진실이 조금이라도 알려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국가가 나서야 한다

이 국가폭력의 진실을 규명하는데 앞장서왔던 역사학자 정진각 소장은 처절하게 삶을 이어온 피해자들에게 지금이라도 국가 차원에서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하지만 정 소장의 노력만으로는 힘이 부족해 보입니다. 이 책을 읽고 선감학원에 대해 알게 된 시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정 소장과 뜻을 모은 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국가폭력 사건들 만큼 논의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정부나 경기도는 선감학원의 비극이 국가에 의한 폭력이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일이 없다.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 또한 거의 없었다. 정 소장을 비롯한 뜻있는 사람들이 선감학원의 비극을 역사적 교훈으로 남기기 위한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선감학원의 비극 대부분은 아직도 피해자들 기억 속에만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20쪽)


선감학원을 거친 삶은 고통 그 자체

1963년 선감학원에 수용되었던 열 살 남짓 된 쌍둥이 형제 중 형은 이듬해 작은 꽃신 하나를 남기고 죽었습니다. 왜 끌려왔는지도 모른 채. 관도 없이 묻혔던 형의 유골이 발굴되었을 때 유골을 받아든 사람은 가까스로 생존해 이제는 환갑이 넘은 쌍둥이 동생이었습니다. 동생이 기억하는 선감학원은 굶주림과 지독한 매질이었습니다. 형이 죽은 후 동생은 운좋게 선감학원에서 나오게 되었지만 이후의 삶도 그리 나아지진 않았습니다.
 

“선감학원을 겪은 뒤에는 기를 펴고 살 수가 없었어요. 늘 불안한 거에요. 그러다 보니 앞장설 일이 생겨도 나설 수가 없고, 사람 사귀는 것도 두렵고.”(47쪽)


동생은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막노동, 운전 등 평생을 성실히 일했지만 사글셋방에서 살고 가족도 없다고 합니다. 인터뷰에 응했던 당시에도 허드렛 일이라도 찾아 일해야 당장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파괴해버린 국가폭력 사건인데 가해자도 책임자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이 더욱 원망스럽습니다.

서울에 있는 삼촌 집에 가다가 남루한 옷차림을 이유로 경찰에 납치되듯 끌려갔던 한일영씨의 인생도 상상할 수 없는 비극입니다. 어머니와 삼촌이 버젓이 있었음에도 경찰에게 잡혀 아동보호소에 들어간 후 선감도로 이송된 한일영씨 역시 강제 노동, 굶주림, 폭력을 겪으며 지옥같은 고통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동상이 걸려도 제대로 치료 받지도 못해 발가락이 떨어져나가도 발을 자르지 않아 다행이라 여겨야 했던 삶…

선감학원에 수용된 지 3년 만에 한일영씨는 죽음을 무릅쓰고 이웃 섬으로 탈출에 성공하지만 섬 주민들은 선감도에서 탈출해 온 소년들을 겁박해 노예로 부렸습니다. 악귀와 같은 독재 정권 아래 국민들이 어떻게 악해질 수 있는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선감도 주변 지역 주민들은 소년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삼았습니다. 탈출했던 이웃 섬에서 노예생활을 한 지 1년 만에 한일영씨는 다시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13살에 찾아가던 삼촌집에 18살이 되어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공무원이 납치해 선감도로 보내기도

지금은 스님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곽은수씨는 부모와 형제가 있었음에도 어느 날 친구들과 놀다가 갑자기 나타난 차에 실려 수원시청으로 끌려갔습니다. 곽은수씨는 공무원에게 납치되어 선감학원에 수용된 경우였습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졌던 폭력입니다. 물리적 구타뿐만 아니라 선배들로부터 성폭행까지…그는 선감학원을 ‘약한 이는 고통속에서 죽거나 고통을 못이겨 도망치다 죽는 동물들의 세계’였다고 말합니다.

곽은수씨는 잡혀간 지 8년만에 선감도에서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호적도, 주민등록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탈출한 지 5년만에 선감학원을 찾아가 엄청난 매질을 당하고 성장증명서를 받아와 호적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에 적응해 사는게 쉽지 않았습니다. 온갖 궂은 일을 하며 삶을 이어가다 절에서 만난 스님들의 도움을 통해 성직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돌아보다 비장하게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 누구 때문에 내 인생이 곤두박질쳤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그때, 그 사람들이 나를 잡아가지 않았다면! 그 생각이 안 떠나니까 속에서 뜨거운 게 막 올라와서 괴롭고, 그럴 때마다 찾아서 복수하고 싶고…다 용서하고 살면 되지 않겠느냐? 그게 아니에요…너무 비참하잖아요.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죠. 지금도 꿈속에서 ‘기상’이라는 소리를 들어요. ‘제2반 인원보고’ 하고 소리 질러서 같이 자던 스님들 깨우기도 하고요. 공무원한테 붙잡혀 오는 꿈도 꾸고, 선착순 하는 꿈도 꾸고요. 국가에서 저지른 일이니, 국가로부터 사과라도 받아야겠어요.”(155쪽)


진실규명과 사과, 배상이 이뤄지기를

이분들 이외에도 인터뷰에 응한 선감학원 생존자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묻게 되고, 악독한 국가 아래서 시민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자문하게 되는 역사입니다. 저자는 선감도에 끌려온 소년들이 걸었을 길을 걸으며 길의 끝자락에 있는 박물관에서 작은 꽃신을 보며 선감학원의 진실을 확인해야겠다 다짐했습니다.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없어 할 수 있는 것은 생존자들을 만나 증언을 듣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민선 기자는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지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나서 후련해하는 피해자들의 모습을 보며 포기하기 않고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저자가 바라는 것처럼 이 책이 우리 역사를 알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아픈 심장을 부여잡고 오늘을 살아가는 생존자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선감학원이라는 잔혹한 국가폭력의 진상이 시민들에게 더욱 알려지고 진실이 규명되는 것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에게 배상이 이루어 지는데까지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부나 경기도는 선감학원의 비극이 국가에 의한 폭력이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일이 없다.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 또한 거의 없었다. 정 소장을 비롯한 뜻있는 사람들이 선감학원의 비극을 역사적 교훈으로 남기기 위한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선감학원의 비극 대부분은 아직도 피해자들 기억 속에만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 P20

"선감학원을 겪은 뒤에는 기를 펴고 살 수가 없었어요. 늘 불안한 거에요. 그러다 보니 앞장설 일이 생겨도 나설 수가 없고, 사람 사귀는 것도 두렵고." - P47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 누구 때문에 내 인생이 곤두박질쳤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그때, 그 사람들이 나를 잡아가지 않았다면! 그 생각이 안 떠나니까 속에서 뜨거운 게 막 올라와서 괴롭고, 그럴 때마다 찾아서 복수하고 싶고…다 용서하고 살면 되지 않겠느냐? 그게 아니에요…너무 비참하잖아요.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죠. 지금도 꿈속에서 ‘기상’이라는 소리를 들어요. ‘제2반 인원보고’ 하고 소리 질러서 같이 자던 스님들 깨우기도 하고요. 공무원한테 붙잡혀 오는 꿈도 꾸고, 선착순 하는 꿈도 꾸고요. 국가에서 저지른 일이니, 국가로부터 사과라도 받아야겠어요." - P1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버드 비즈니스 독서법 - 세계 최고 엘리트들은 어떻게 책을 읽을까?
하토야마 레히토 지음, 이자영 옮김 / 가나출판사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1년에 채 10권이 되지 않는 1인당 독서량(13세이상) 통계를 언급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아 걱정이라는 기사들은 매년 되풀이됩니다. 이런 기사들을 보면 저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책을 진짜 안읽네. 큰일이네.’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책을 읽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이 없는데 우리는 왜 독서량이 적다고 걱정할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책을 읽지 않아도 문제는 없지만 독서가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헤르만 헤세는 <독서의 기술>에서 “삶으로 이끌어 주고 삶에 이바지하고 소용이 될 때에만” 책이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3색볼펜 읽기 공부법>을 쓴 사이토 다카시에게 독서는 “다른 사람의 사상과 철학을 폭넓게 수용하는 행위”이며 “여전히 유효한 공부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입니다. 앤 라모트는 <쓰기의 감각>에서 책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기도 하고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꾸준히 책을 읽어오면서 저 역시 독서가 유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독서의 유익을 말한 사람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책을 수십 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독서가와 작가들은 가장 기본적인 지식 습득에서부터 자아발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독서가 유익하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하토야마 레히토라는 작가는 정말 실제적인 독서의 유익과 독서 방법을 제안합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한 후 여러 기업들을 거치며 성공한 삶을 살아온 저자는 <하버드 비즈니스 독서법>이라는 책으로 자신의 독서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그는 당면한 문제 해결에 철저하게 초점을 맞춰 독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가히 실용적 독서법의 극단에 있는 읽기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책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이고, 독서 자체보다는 독서를 통해 비즈니스 세계에서 어떤 결과를 냈는가에 목적을 둔 독서법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제목을 처음 봤을 땐 뭔가 속물적인 자기계발서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서문에서 저자가 말한 “읽기만 하는 독서의 함정”이라는 문구에 끌림이 있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독서가 무조건 실천으로 옮겨져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유용한 지식을 얻었다’거나 ‘깨달음을 얻었으니 만족스럽네’ 정도로만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문에 하토야마씨가 말하는 독서방식도 참고해 볼 만했습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를 빈번하게 만나는 직장인이나 사업가들에게는 상당히 유용하고 실용적인 독서법이라 생각합니다. 책을 많이 혹은 빨리 읽고 아무런 변화나 성과가 없는 것보다는 “한 페이지 또는 한 줄만 읽었더라도 그것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실용적 독서라면 굳이 꺼려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과제 해결’에 책을 읽는 목적을 둔 저자가 하는 말들은 상당히 유쾌하면서도 매력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독서량이 아니라 책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이다.’, ‘독서의 목적은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실천하는 것이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에 대한 자기 의견을 가져야 한다.’ 등의 문구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힘”입니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모두가 정해진 답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혁신은 일어나지 않는다…사회적 배경이 모두 비슷하고,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자기 의견을 가지는 것보다 상대의 생각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논의나 대립보다는 결국 평범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41-42쪽)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대표 기업들이 국제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근본 이유를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급변하는 세계 비즈니스 환경에서 위기를 겪고 있는 국내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새겨들을 만한 조언입니다. 조직이 거대해질수록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일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겐 저자가 제안하는 과제 해결을 위한 실천형 독서가 시급히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중요한 문장이나 부분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서 책의 내용을 지금 자신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생각하라고 저자는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때문에 저자는 속독이니 다독이니 하는 기술들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물론 저자의 독서법은 모든 종류의 책에 적용되는 것은 아님을 독자들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비즈니스 환경, 즉 경제나 경영관련 실용도서를 이렇게 읽자는 제안입니다.

저자의 독서법은 네 가지 문구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 ‘지금 필요한 10권의 책’, ‘이 책들을 눈에 띄는 가까운 곳에’, 그리고 ‘실천’. 즉 자신이 당면한 과제를 늘 떠올릴 수 있고, 주의가 분산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도록 책의 권수를 10권 이내로 줄여 그것들에서 얻은 통찰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저자는 효율성을 강조하는 경영세계에 있는 만큼 ‘선택과 집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토야마식 독서법에서 제가 얻은 교훈 한가지는 ‘책 처분’에 관한 것입니다. 실상은 한번 들춰보지도 않을 책으로 책장을 채워두지 말라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책장을 정리하다가도 왠지 모르게 읽을 것 같은 생각에 만지작거리고 다시 책장에 꽂기를 반복하다 먼지만 소복하게 쌓인 책들이 분명 많을 것입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 책을 읽고 실천거리 하나를 얻었습니다. 읽지 않을 책 처분!
 
“그냥 종이일 뿐이잖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절대로 다시 보지 않을 테고, 공간만 아깝지. 만약 다시 봐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 다시 사면 되지 않아?”(67쪽)

그렇습니다. 필요하면 다시 사면 됩니다. 왠지 이번에는 책장에 쌓여가며 제게 부담을 주고 있는 책들을 상당히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지금 저에게 필요없는 책들은 과감하게 처분하고 새로운 책들을 친구로 들일 것입니다.

실용과 실천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저자에게도 독서하는 방식에 변화는 찾아옵니다.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끊임 없이 마주할 때는 그와 관련된 실용적인 책들을 읽었으나, 이후엔 자신의 성장을 위한 독서, 교양을 쌓기 위한 독서, 시대의 흐름을 읽기 위한 독서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자 역시 업무상 문제 해결 목적 이외에는 애독가들이 말해왔던 것과 같은 독서의 유익을 누려왔던 독서가입니다.

이 책의 제목만 보고서 언뜻 흔한 자기계발서 정도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어쩌면 피해왔을지도 모르는 극단적으로 실용적인 독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입니다. 역시 책은 어떤 면에서 보나 우리에게 유익을 건네줍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책을 많이 안 읽는다 걱정만 하지 말고 지금 당장 어떤 책, 어떤 목적이라도 좋으니 책을 읽어봅시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모두가 정해진 답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혁신은 일어나지 않는다…사회적 배경이 모두 비슷하고,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자기 의견을 가지는 것보다 상대의 생각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논의나 대립보다는 결국 평범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41-42쪽) - P41

"그냥 종이일 뿐이잖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절대로 다시 보지 않을 테고, 공간만 아깝지. 만약 다시 봐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 다시 사면 되지 않아?"(67쪽) - P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왜 사는가?’라는 물음. 보편적인 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이 근본적인 물음에 답을 구하고자 사람들은 신학, 철학, 예술 등을 통해 인간의 존재 이유를 탐구해 왔습니다. 여전히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답은 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사람들은 여전히 ‘왜’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어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법륜스님은 ‘사람이 왜 사는 걸까요?’라는 물음에 ‘풀이 자라는 데, 토끼가 자라는 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사람도 그냥 사는 것이다. 왜 사느냐 묻지 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어보라’고 대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김상용 시인도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에서 “왜 사냐 건 웃지요”라며 답이 없는 물음에 웃음으로 대답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태도와도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는 이유를 찾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공허함을 느낄 때, 소중한 무엇 혹은 누군가를 잃었을 때,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열망하던 것을 얻고 난 후에도 왜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용도가 다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노인들에게, 열정은 넘치지만 열정을 쏟아부울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에게도 왜 사는가라는 물음이 자연스레 솟아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고민 속에 괴로워하다 끝모를 우울에 빠져 상담가를 찾거나 심한 경우엔 병원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 예기치 않게 병에 걸리고 나니 삶의 의미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책들을 전보다 더 많이 찾아보게 됩니다. 투병하며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책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습니다. 살면서 저자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어도 감당하기 벅찬 상황을 맞게 되는 때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데 이 책이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책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습니다. 살면서 저자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어도 감당하기 벅찬 상황을 맞게 되는 때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데 이 책이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강제 수용소에서 얻은 결론

빅터 프랭클 박사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 수감자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수감자들은 처음엔 지독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에 대한 혐오와 무감각 상태에 이릅니다. 박사 자신도 옆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그것이 일상이 되어 시체를 바라보면서도 식사를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무뎌지지 않으면 극심한 환경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수용소라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버텨내는 수감자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수용소의 체험을 기술했습니다. 지적인 활동을 통해 감수성을 키워왔던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들, 수용소 안에서도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려는 사람들 등은 도처에 고통이 만연한 수용소에서도 내면을 지켜나갔다고 저자는 썼습니다.

물론 위와 같은 사소한 행복들은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니었음은 당연합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상황에 지배당해 이와 같은 사소한 행복들을 느낄 여유는 없었습니다. 대체로 수감자들은 운명에 지배당한다는 두려움에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리기를 기피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보며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인간은 주변 환경에 지배당해 아무런 정신적 자유를 갖지 못하는지, 수용소와 같은 환경에서 인간은 자기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것인지’ 의문을 품습니다.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수용소에서도 타인을 위로하거나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음을 확인하면서 빅터 프랭클 박사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고 결론내립니다. 어찌보면 매우 희박한 사례를 가지고 내린 결론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상황에만 지배되지는 않는다는 가능성을 강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중략) 수면부족과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도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본문 인용)

이와 같은 결론을 언뜻 보면 사회 구조적인 실패로 인한 개인의 실패를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 혹은 의지 없음으로 돌리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상황에 놓인 인간이 반드시 상황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 인간의 내적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어떻게 찾을까

저자에 따르면 사람이 삶에서 겪게되는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인간의 내적 자율성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데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 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그런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본문 인용)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요? 빅터 프랭클 박사의 접근 방식도 기본적으로 법륜 스님이나 김상용 시인의 태도와 유사합니다. 저자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사랑하는 이,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합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수용소의 체험을 바탕으로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 로고테라피라는 기법을 만들었습니다. 저자는 인간이 존재하는 동력을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봤고, 인간 존재의 본질을 “책임감”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선, 진리, 아름다움 등을 체험, 자연과 문화를 체험,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3)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본문 발췌 인용)

다만 주의할 점은 시련에 대한 관점입니다. 시련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의미를 발견하고자 굳이 시련을 겪을 필요는 없다는 점입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단지 시련속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자기 학대에 불과하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가 관건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공허감, 육체적/정신적 고통, 삶의 유용성을 상실한 느낌 등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관점으로 인간 존재를 정의합니다. 즉 인간이 ‘고통을 성취로, 죄를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삶을 수 있고, 일시적인 삶에서도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 관점에 동의합니다.

“인간은 조건 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본문 인용)

‘왜 살아야 하지?’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강제수용소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아직 이루지 못했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간직하고 살아 돌아온 빅터 프랭클 박사의 조언을 따라가 보면 어떨까요? 저자는 우리의 삶을 영화에 비유했습니다. 저도 요즘 겪는 시련을 영화에서 고통스런 한 장면을 지나고 있는 것이겠구나 여겨보려 합니다.

“영화는 수천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장면에 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부분, 개별적인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본문인용)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중략) 수면부족과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도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 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그런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선, 진리, 아름다움 등을 체험, 자연과 문화를 체험,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3)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인간은 조건 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영화는 수천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장면에 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부분, 개별적인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