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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 용감하게 성교육, 완벽하지 않아도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심에스더.최은경 지음 / 오마이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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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책과 ‘성’을 좋아했다고 말하던 아내가 ‘성 이야기’를 다룬 책을 썼습니다. 아내가 생애 첫 책을 썼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죠.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에게 책을 소개하고 읽어보라 권했습니다. 얼마 후 회사에서 만난 후배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수님 책을 주문해서 받았어요. 집에 가져가진 못하고 회사 사무실에서 쉬는 시간에 몰래 몰래 읽고 있어요.”

아내가 쓴 책이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기에 30대 중반, 한국인 남성인 후배는 군부 독재시절 금서를 가진 것처럼 책을 집에도 가져가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몰래 몰래 읽고 있었을까요? 남자 후배에게 물어보니 ‘섹스’, ‘성기’, ‘노브라’, ‘생리’, ‘성 경험’, ‘야동’ 등의 단어가 책에 직접 언급되어 있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후배의 이런 반응은 우리 사회가 ‘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 합니다.
 



성과 관련있는 다양한 이슈와 궁금증을 두 저자가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쓴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라는 성교육 교양서를 들고 읽는 것조차 부끄럽게 느끼는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아내의 책을 대하는 남성 후배의 모습과 ‘우리는 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편견 없는 뉘앙스로 들어본 적도 제대로 배운 적도 없다’는 책 속 저자의 말이 겹쳐집니다.
 

“성기를 우리 몸의 일부로, 성을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영역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성’과 ‘성기’를 대상화해서 우리와는 아주 거리가 먼,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큰일나는, 관심을 가져선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솔직한 성교육의 경험이 부족한 어른들의 편견과 수치심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242쪽)


‘성’하면 가장 먼저 선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르고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원인이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성을 대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어른들의 편견과 수치심에 있다는 저자의 의견에 깊이 동감합니다. 성교육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아내로부터 기회가 되는대로 ‘성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저 역시 ‘성’을 주제로 이야기할 때는 왠지 부끄럽습니다. 우리 삶의 일부인 성을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대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한참 갈 길 먼 우리 사회의 ‘성’ 인식 수준

최근 텔레그램 메신저 대화방에서 행해진 성착취 범죄가 드러나고 이 사건을 대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반응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성’인식 수준을 확인하게 됩니다. n번방 사건으로 알려진 이 범죄는 기존에 자주 있어왔던 불법 촬영과 유포의 수준을 넘어 여성들을 노리개로 삼은 중범죄입니다. 그럼에도 각종 기사 및 SNS 채널 등에서 피해자인 여성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을 여전히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가해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피해자(대부분이 여성)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사회 분위기가 여전히 팽배합니다. 심지어 나이 어린 여성 피해자들에게까지도 책임을 운운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다른 범죄와는 다르게 유독 성범죄 피해자들에게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속에 깊이 새겨진 ‘성’과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작동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불법 촬영과 유포, 성폭력, 성착취 등의 성범죄 기저에는 ‘사람, 특히 여성을, 여성의 몸을, 여성의 성을 자신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고,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물건 혹은 도구’로 여기는 태도가 놓여 있다고 <이런 질문, 해도 될까요?>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 너무나 만연한 성범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성’을 ‘도구’로 취급하는 태도가 사라져야만 합니다. 

‘여성을 같은 인간이 아니라 사냥감’으로 여기는 현실, ‘남자라면 여성을 성적 도구로 즐기고 소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왜곡된 남성다움에 대한 압박 등도 우리가 성을 왜곡해 받아들이게 하는 요소임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성’과 ‘여성’에 대한 인식 수준의 현재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을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대하도록 도와주는 문답 연습

아이들이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바르게 인식하려는 변화는 어른들에게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책에 따르면 2009년 유네스코에서 발간한 <조기성교육 지침서>에는 사춘기가 되지 전에 아이들이 자신의 성적 욕구와 충동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게 돕기 위해 5세 때 자위에 대해 알려줘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 어른들은 과연 자신의 성적 욕구과 충동을 이해하고 잘 다룰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성별을 떠나 오히려 지금 어른들이 성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겪어오는 ‘성’관련 문제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 아닐까요. 성교육 전문가와 오마이뉴스 기자인 두 저자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에 정리한 스무가지 질문과 대답을 통해 성과 관련되어 있는 다양한 이슈에 대해 어른들이 먼저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통해 섹스, 성기, 생리, 노브라, 성 경험 등의 단어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고 나의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 아이들이 갑작스레 물을 수 있는 질문들에 당황해하며 얼버무리지 않고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언어로 건강하고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에 대한 이야기도 담담하게 편견 없는 뉘앙스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성 이야기’로 소통하는 장이 많아지기를

성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아이들이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할 수 있게 도와주면 좋겠다”고 저자는 썼습니다. 이 말은 어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저자가 책에서 강조했듯이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했고 정보도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올바른 성 가치관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시작으로 성과 관련되어 있는 다양한 이슈에 대해서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 중에는 생소하고 어려운 것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화 형식으로 쓰여 있어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부족함이 느껴진다면 책 끝부분에 있는 추천 도서들도 함께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을 은밀하게만 다루면 점점 드러내기가 어려워지고, 드러났을 때 느끼는 수치심도 클 수 밖에 없어요. 아이들이 지나치게 야동에 빠지거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거나, 준비 없이 섹스를 하게 되었을 때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우리 몸에 대해,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우리 몸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솔직하게 알려주고 표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243-244쪽)


“성기를 우리 몸의 일부로, 성을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영역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성’과 ‘성기’를 대상화해서 우리와는 아주 거리가 먼,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큰일나는, 관심을 가져선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솔직한 성교육의 경험이 부족한 어른들의 편견과 수치심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242쪽)- P242

“성을 은밀하게만 다루면 점점 드러내기가 어려워지고, 드러났을 때 느끼는 수치심도 클 수 밖에 없어요. 아이들이 지나치게 야동에 빠지거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거나, 준비 없이 섹스를 하게 되었을 때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우리 몸에 대해,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우리 몸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솔직하게 알려주고 표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243-244쪽)-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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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은 끝! - 일을 통해 자아실현 한다는 거짓말
폴커 키츠 지음, 신동화 옮김 / 판미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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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회사 꼭 가야해?”

내일은 일하러 가야해서 놀아줄 수 없다는 말에 초등학생 딸이 제게 종종 묻곤 합니다. 딸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너 장난감도 사주고 용돈도 주려면 돈 벌어와야지!” 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회사에 다니는 혹은 일하는 첫번째 목적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입니다. 그래도 딸은 이제 제법 커서 아빠가 회사에 가는 목적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눈치입니다. 

“아빠! 난 뭔가를 연구해서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고 싶어! 아빠는 꿈이 뭐였어?”

하아...이건 난이도가 좀 있는 질문입니다. 어릴 때 장래 희망란에 과학자라고 적었던 것을 희미하게 기억합니다. 어린 시절 로봇 만화를 좋아했었으니까 아마도 지금으로치면 제 꿈은 로봇 공학자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뭐 딱 맞는 분야는 아니지만 명함에 리서치 엔지니어라고 새기고 다니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얼추 어릴 적 꿈을 이뤘다고 우길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소망하던 꿈에 대충은 비슷하게 다가가 생활하고 있으니 저는 직업을 통해 자아실현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어릴 때 바라던 직업을 가지면 자아실현을 한 것일까요? 자아실현을 한 저는 왜 돈벌러 회사에 간다고 대답할까요? 내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준 일터인데 왜 출근하기는 싫을까요? 
 

  
현대인들에게 일이란?

폴커 키츠라는 작가도 <오늘 일은 끝!>이라는 책에서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쓴 말인지 알겠지만 단어를 바꿔 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직업 혹은 직장생활을 통해 자아실현을 한다’로 고치는 것이 보다 명확한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일, 노동, 직업을 구분해 사용해야 할 것 같아 사전(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일: 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 또는 그 활동의 대상.
노동: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
직업: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

‘일’은 중립적 혹은 긍정적인 느낌인 반면 ‘노동’과 ‘직업’은 생계와 연결되어 고달플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일은 노동이나 직업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폴커 키츠는 현대 사회에서 ‘직업’이 ‘일’과 동일한 지위를 얻게 되었기에 ‘일로 자아실현을 한다는 건 거짓말이다’라고 썼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대의 일(직업)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일은 사회에서 우리의 자리를 지정해 주고, 사회는 우리를 이용해 무언가를 한다. 일은 우리에게 일과를 부여하고, 우리를 집에서 나와 타인과 접촉하게 한다. 일을 원하지만 일이 없는 자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심각한 병에 걸릴 수도 있다. 일을 잃는다는 것은 파트너를 잃는 것처럼 삶을 파괴하는 트라우마적 사건이다.”(19-20쪽)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하고 재미있어 하기도 합니다. 어떤 일은 스릴 넘치기도 하고 세상을 더 멋진 곳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성취감을 느끼게도 하고 일터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물론 자아를 실현하게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바는 이것이 예외적인 사례라는 것입니다. 다수의 노동자들에게 이런 말은 다른 세상 이야기입니다.

직장생활에 대한 환상 걷어내기

폴커 키츠는 몇몇 예외적인 사례들로 포장되어 온 직장생활의 환상들을 걷어내고 ‘일’에 대해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하자고 말합니다. 아마도 많은 직장인들이 직장생활에 대한 환상과 현실의 불일치를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말할 때 포장된 환상들을 저자는 아래 일곱가지로 정리했습니다. 평소 제가 접하던 말들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직장에 있으면서 열정이 솟아날 때가 얼마나 있었는가 생각해 봅니다. 열정에 대한 과장된 환상으로 인해 저 역시 일하면서 열정을 느끼지 못하면 내가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동감합니다. 사실 열정이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꿈꾸는 직업은 실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꿈의 직업’이란 것이 전혀 없다. 요술 지팡이를 든 요정이 찾아온다 해도 그들은 어떤 일을 소원으로 말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사회가 기대하듯, 열정을 불태울 일 말이다. 그들은 일에서 열정을 발견한다고는 상상할 수 없고, 일에서 열정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삶의 여러 영역에서 만족감을 이끌어 낸다. 일은 그 여러 영역 중 하나에 불과하다. (중략) 원래는 ‘인생’과 ‘직장생활’이 동의어인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마땅하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 대신 머릿속에 ‘꿈의 직업’이라곤 절대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40-41쪽)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도 마찬가지로 의미를 너무 높은 곳에 두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로 인해 다른 대부분의 일들은 의미 있다고 하기엔 너무 사소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을 거창하게 바꾸지’ 않으면 의미를 부여하기가 너무 어려운 세상입니다. 직업으로 자아실현을 한다는 말 또한 아주 예외적인 소수에게만 맞는 말입니다. 이 구도에서 벗어나 일과 직업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솔직해지기

‘우리는 돈 때문에 일한다’는 걸 인정하고 시작하자고 저자는 말합니다. 또 저자는 ‘적절한 보수’를 언급합니다. 전일제로 일한다면 가족의 주거와 양식을 해결할 수 있는 정도를 적절하다 말하지만 부동산 투기로 주거비용이 한껏 부풀려진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에선 왠만한 전일제 노동으로는 적절한 보수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구조적 한계는 있지만 일에 대한 환상을 걷어 낸 세상을 상상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저자가 비판하는 점은 사회에서 설정된 일과 직업에 대한 높은 기준으로 인해 다수의 사람들이 좌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에서 혹은 직장에서 성취감을 느끼지 않아도, 일할 때 열정을 느끼지 못해도, 자신의 일이 자신의 정체성이 아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인생에는 직업 이외에도 다양한 영역에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자가 말하듯 “일(직업)은 하나의 모자이크 조각”일 뿐입니다.

폴커 키츠는 다수가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만족이라는 상태를 재발견”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자가 말한 ‘적절한 보수’만큼이나 애매하고 상대적인 표현이지만 자기 자신에게 ‘만족’이란 무엇인지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작은 책이 인생 행복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직장생활을 솔직하게 대하는 것만으로도 예기치 않은 만족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러나 저자가 솔직하게 그려본 이런 회사 어디 없을까요?
 

“이 회사는 여러분이 일하며 행복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를 위한 제품 혹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생계를 경제적으로 유지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은 사회에 의미를 가집니다. 일의 역할은 여러분 인생에 의미를 불어넣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생의 의미는 여러분 스스로가 책임지면 됩니다. 우리 회사는 요란스럽게 부산을 피우거나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양 뭔가 있어 보이게 연출하지 않고, 매일 맡은 바 일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다수의 보통 사람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일은 시간과 돈의 교환입니다. 동일한 노동에 대해서는 동일한 보수를 지급받으며, 우리 회사는 한 사람 몫의 임금을 받는 한 사람이 세 사람 몫의 일을 처리하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회사가 여러분에게 인생의 의미를 주지 않듯, 여러분은 회사에 인생을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일은 사회에서 우리의 자리를 지정해 주고, 사회는 우리를 이용해 무언가를 한다. 일은 우리에게 일과를 부여하고, 우리를 집에서 나와 타인과 접촉하게 한다. 일을 원하지만 일이 없는 자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심각한 병에 걸릴 수도 있다. 일을 잃는다는 것은 파트너를 잃는 것처럼 삶을 파괴하는 트라우마적 사건이다.”(19-20쪽)- P19

“그들에게는 ‘꿈의 직업’이란 것이 전혀 없다. 요술 지팡이를 든 요정이 찾아온다 해도 그들은 어떤 일을 소원으로 말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사회가 기대하듯, 열정을 불태울 일 말이다. 그들은 일에서 열정을 발견한다고는 상상할 수 없고, 일에서 열정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삶의 여러 영역에서 만족감을 이끌어 낸다. 일은 그 여러 영역 중 하나에 불과하다. (중략) 원래는 ‘인생’과 ‘직장생활’이 동의어인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마땅하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 대신 머릿속에 ‘꿈의 직업’이라곤 절대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40-41쪽)- P40

“이 회사는 여러분이 일하며 행복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를 위한 제품 혹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생계를 경제적으로 유지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은 사회에 의미를 가집니다. 일의 역할은 여러분 인생에 의미를 불어넣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생의 의미는 여러분 스스로가 책임지면 됩니다. 우리 회사는 요란스럽게 부산을 피우거나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양 뭔가 있어 보이게 연출하지 않고, 매일 맡은 바 일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다수의 보통 사람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일은 시간과 돈의 교환입니다. 동일한 노동에 대해서는 동일한 보수를 지급받으며, 우리 회사는 한 사람 몫의 임금을 받는 한 사람이 세 사람 몫의 일을 처리하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회사가 여러분에게 인생의 의미를 주지 않듯, 여러분은 회사에 인생을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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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권리 선언 - 페미니즘을 위한 역사적 명언들
올랭프 드 구주 외 지음 / 동글디자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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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날입니다. 회사가 매년 여성의 날 행사에 참석하는 여성조합원들에게 근무일수 하루를 빼주는 걸 보면서 ‘여성들은 좋겠네’ 하고 부러워하기만 했을 뿐입니다. 어떤 남성조합원은 왜 남성의 날은 없냐며 볼멘 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엔 남성들이 이처럼 생각없이 내뱉는 말들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 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남성의 날은 왜 없냐고?

여성의 날을 따로 정해서 기념한다는 건 그만큼 여성이 소외되어 왔기 때문임을 굳이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된 최근 몇년 동안 많은 남성들이 ‘이제는 성평등이 이루어졌다’ 혹은 ‘역차별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렇지 않다 생각합니다. 남성으로 태어나 살면서 집과 회사에서 느끼는 건 역시 아직도 매일 매일은 ‘남성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웃들에게 일등 남편이 되는 건 아주 쉽습니다.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내다버리는 제 모습을 옆집에서 보면 됩니다. 어느 주말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사진을 SNS에 올리면 됩니다.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 행사가 있을 때 하루 휴가를 내 엄마들 틈에 앉아 있으면 됩니다. 회사에선 여성 직원들에 비해 그냥 신뢰를 받습니다. 남성위주 사회에서 남성은 아무런 장치 없이 숨쉴 수 있지만 여성은 우주복에 산소통을 짊어져야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여성들은 산소통 없이 숨쉬기 위해 투쟁해야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쟁취하지 않으면 저절로 권리가 주어지는 일은 없었으니까요. 근대적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올랭프 드 구주도 프랑스 혁명 시기에 <여성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며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한 대가로 처형당해야 했습니다. 여성들은 인간이라면 누릴 권리를 얻기 위해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투쟁의 역사를 알면 어이없는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성도 인간임을 선언하다
 

“프랑스 혁명의 시기, 드 구주는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으나 혁명이 내건 자유와 평등이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을 비판하며 글로써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그 결과 ‘성별에 적합한 덕성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처벌받았던 것이다. 그녀는 “여성이 사형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당연히 의정 연설 연단 위에 오를 권리도 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8-9쪽)


이 조그만 책에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 ‘국제연합 여성 차별 철폐 선언’, 짧은 말로 긴 울림을 주는 페미니즘 명언록’이 실려 있습니다. 1789년 출판된 올랭프 드 구주의 주장과 이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1967년 유엔의 선언문을 읽어보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세계가 얼마나 진보했고 또 동시에 얼마나 정체되어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부분을 현대의 소수자 권리 문제에 적용할 것인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올랭프 드 구주의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 17개 조항에 ‘여성’ 대신 지금 우리 사회에서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넣어 읽으면 되겠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엔 ‘여성’이 온전한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우리 사회에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범주가 꽤 세분화되었습니다. 성소수자, 난민, 대책없이 죽음에 내몰리는 노동자들 등을 ‘여성’ 대신 넣어 읽으면 됩니다.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가져야 할 자유, 소유, 안전, 그리고 억압에 저항할 권리. 기본적인 것을 얻어내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투쟁이 있어왔는지를 이해한다면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기본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것입니다. ‘역지사지’만큼 뻔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말도 없습니다. ‘내가 저 입장이라면’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뇌어야 혐오와 차별을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200년이 흘렀어도 또 선언이 필요했다
 

“국제연합 헌장, 세계 인권 선언, 국제 인권 규약, 국제연합과 전문 기구의 여타 규범이 존재하며, 인권의 동등함과 관련하여 진보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여성에 대한 심각한 차별이 자행되고 있다고 인정됨을 고려하고,”(54쪽)


올랭프 드 구주가 참정권을 주장하고 죽임을 당한 이래로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여성은 여전히 차별당해 왔음을 유엔 총회 결의안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 차별적인 기존의 법, 관습, 규제, 관행을 폐지하고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적절한 법적 장치”가 필요함을 선언한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에 적절한 강제 장치가 필요합니다.

투표권, 피선거권, 공직에서 일할 권리, 국적 취득 권리, 재산권, 이동권, 교육받을 권리, 노동에 대한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 결혼이나 임신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 등 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누렸어야 하는 조건들이 1960년대까지도 여성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도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에 논란이 되는 것 자체가 성평등한 세상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독서를 통해 좁디좁은 가정생활을 생각과 상상과 지식으로 이루어진 끝없는 공간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여자들은 위험해진다. 독서를 하면서 여자들은 사회가 미리 정해두지 않았던 지식과 경험을 흡수한다.”(90쪽, 슈테판 볼만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인용)


투쟁 혹은 혁명은 언제나 한계를 가집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가 함께 움직여가야 합니다. 슈테판 볼만이 쓴 것처럼 보편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그룹의 깨달음과 투쟁을 통해서 공고하게 이어져 오던 관습에 작은 균열은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험해지는 책 읽는 여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남자들이, 기존의 지위를 누리는 이들의 깨달음도 함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성도 남성도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되는 것이다. 사회에서 인간 여성이 취하는 모습을 정하는 것은 그 어떤 생물학적, 정신적 또는 경제적 운명도 아니다. 여성이라고 하는, 이 남자와 고자 사이에 있는 중간의 존재를 만들어낸 것은 문명 전체이다. 어떤 개인을 타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개인의 중재가 필요하다. 만약 아이들이 홀로 존재한다면, 자신들의 성별이 다른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75쪽,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인용)


여성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남성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 속에서 남성이라는 범주 안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살아왔기에 여성들이 여전히 경험하고 있는 차별적 구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공감력의 부족은 성평등 문제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적 약자 그룹에도 동일하게 작동하게 될 것이기에 두렵습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올해 세계 여성의 날 행사는 예년 만큼 진행되지 못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면 좋겠습니다. 올 해 제한된 상황에서 제가 선택한 것은 책을 읽고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내년에는 여성의 날 행사에 직접 참석해 기념하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프랑스 혁명의 시기, 드 구주는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으나 혁명이 내건 자유와 평등이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을 비판하며 글로써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그 결과 ‘성별에 적합한 덕성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처벌받았던 것이다. 그녀는 “여성이 사형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당연히 의정 연설 연단 위에 오를 권리도 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8-9쪽)- P8

“국제연합 헌장, 세계 인권 선언, 국제 인권 규약, 국제연합과 전문 기구의 여타 규범이 존재하며, 인권의 동등함과 관련하여 진보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여성에 대한 심각한 차별이 자행되고 있다고 인정됨을 고려하고,”(54쪽)- P54

“독서를 통해 좁디좁은 가정생활을 생각과 상상과 지식으로 이루어진 끝없는 공간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여자들은 위험해진다. 독서를 하면서 여자들은 사회가 미리 정해두지 않았던 지식과 경험을 흡수한다.”(90쪽, 슈테판 볼만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인용)- P90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되는 것이다. 사회에서 인간 여성이 취하는 모습을 정하는 것은 그 어떤 생물학적, 정신적 또는 경제적 운명도 아니다. 여성이라고 하는, 이 남자와 고자 사이에 있는 중간의 존재를 만들어낸 것은 문명 전체이다. 어떤 개인을 타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개인의 중재가 필요하다. 만약 아이들이 홀로 존재한다면, 자신들의 성별이 다른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75쪽,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인용)-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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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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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페스트>에서 얻는 교훈들


예기치 않은 곳에서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됨에 따라 우리 나라 상황도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특히나 신천지라는 종교집단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생겨나고 그들에게서 확진자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이들을 비난하는 모습도 곳곳에서 보입니다. 더구나 한국 기독교에서 이단이라 규정하는 단체인 신천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몰상식한 일부 기독교 목사들에게 좋은 설교거리가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중국에서 처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발생해 확산되고 있을 때에도 한국의 일부 기독교 목사들은 성경을 인용하면서 중국과 중국인을 혐오하는 설교를 배설했었습니다. 이제는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대치되는 집단에서부터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이 증가하고 있으니 앞으로 또 어떤 혐오와 저주가 담긴 설교들이 유튜브 등을 통해 떠다니게 될 지 걱정입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이용해 엉뚱한 주장을 해대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최근 오마이뉴스 기사(“총리가 ‘세균’이라 코로나가 들어왔다”는 목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목사이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인 김민수 기자는 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사사로이 이용하는 사람들이라 말하며 “도대체 어떤 징벌을 받아야 당신들의 혀를 끊어 버리겠는가?”라고 묻습니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에게 김민수 시민기자의 기사와 함께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함께 읽을 것을 제안합니다. <페스트>는 오랑이라는 도시에서 발생한 페스트로 인해 도시가 폐쇄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소설입니다. 이번 코로나19 확산에 반응하는 목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소설 속 다양한 인물 등 중 파늘루 신부에 초점을 맞춰 읽어보았습니다.

원인모를 전염병의 확산을 바라보며 파늘루 신부가 대중들에게 했던 설교는 요즘 한국 기독교 일부 목사들의 관점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물론 파늘루 신부는 전염병을 계기로 신자들의 믿음을 성찰해보자는 제안이니 한국 기독교 일부 목사들의 혐오와 저주와는 결이 다릅니다.) 파늘루 신부도 설교에서 불행을 겪고 있는 신자들에게 “여러분은 그 불행을 겪어 마땅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재앙이 처음으로 역사상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신에게 대적한 자들을 쳐부수기 위해서였습니다. 애굽 왕은 하느님의 영원한 뜻을 거역하였는지라 페스트가 그를 굴복시켰습니다. 태초부터 신의 재앙은 오만한 자들과 눈먼 자들을 그 발아래 꿇어 앉혔습니다. 이 점을 잘 생각하시고 무릎을 꿇으시오.”(128쪽)


파늘루 신부는 전염병의 확산을 통해 뜨뜨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에게 하느님께 보다 열정적으로 나아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신자들을 더 깊이 사랑하기에, 더 오래 보고 싶기에 전염병으로 심판하는 것이니 하느님을 드문드문 찾아오지 말고 더 열심히 하느님을 찾으라고 설교했습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을 더 오래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이며,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만이 사랑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이리하여, 여러분이 찾아뵙는 것을 기다리다가 지치신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재앙이 죄 많은 모든 도시를 찾아들었듯이, 여러분에게도 찾아들게 하신 것입니다.”(132쪽)


한편 전염병으로 인해 점점 더 열악해지는 도시에서 전염병과 맞서 싸우는 의사 리유와 시민 타루는 파늘루 신부와는 다른 관점으로 대응합니다. 의사 리유는 “그 병으로 해서 겪는 비참과 고통을 볼 때,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라 말합니다. 파늘루 신부의 설교를 들은 다른 시민 타루 역시 신부의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는 사람이 죽는 것을 많이 보진 못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리 운운하는 것이죠. 그러나 아무리 보잘것 없는 시골신부라도 자기 교구 사람들과 접촉이 잦고 임종하는 사람의 숨소리를 들어 본 사람이면 나처럼 생각합니다. 그는 그 병고의 유익한 점을 증명하려 하기 전에 우선 치료부터 할 겁니다.”(169쪽)


일부(일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한국 기독교 목사들이 소설에서지만 전염병에 맞서 싸우며 환자들을 돌보는 이들의 말과 태도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파늘루 신부는 전염병이라는 비극 앞에서 자비심 없이 설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는 전염병에 맞서는 현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 아이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아무 자비심 없었던 자신의 첫 번째 설교를 후회하지만 자신의 원칙을 끝내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모든 일에는 언제나 취할 점이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가장 잔인한 시련조차도 기독교인에게는 역시 이득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 기독교가 여기서 정말로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이득이며, 그 이득이 어떤 점에 있는 것이며 어떻게 하면 그 이득을 발견할 것인가를 아는 데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291쪽)


개인적인 일이든 사회적인 사건이든 개인이 자신을 성찰하는데 계기로 삼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공적인 자리에서 게다가 사사로운 정치적 주장을 하기 위해서 또는 자신들의 유익을 취하기 위해서 사용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이들은 설교를 하기 전에 전염병이 확산되는 현장에서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힘썼던 의사 리유의 말을 꼽씹어 보면 좋겠습니다.
 

“그 어린애를 기다리는 영생의 환희가 능히 그 고통을 보상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로서는 쉬운 일이겠으나, 실상은 그 점에 대해서 자기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영생의 기쁨이 순간적인 인간의 고통을 보상해 준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소리를 하는 자가 몸소 육체와 영혼의 고통을 맛본 주님을 섬기는 기독교인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리라.”(292쪽)


일부 ‘거짓 선지자’들이 교훈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페스트>를 읽고 소개하기는 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에 있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우리들도 <페스트>는 읽어볼 만합니다. 국내에서도 이번 감염증 확산과 대응은 장기전이 될 것 같습니다. 무한하게 길어질 것 같은 페스트에 무디어져 가고 지쳐가던 오랑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스스로를 환기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재앙에 맞서서 투쟁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 차츰차츰 밀려들고 있는 탈진 상태의 가장 위험한 결과는, 외부의 사건이나 타인의 정서 같은 데에 대한 무관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는 무성의에 있는 것이었다.(중략) 그처럼 그 사람들은 점점 더 빈번하게 자기 자신들이 규정해 놓은 위생 규칙을 소홀히 하고, 자기 자신들 몸에 실시하기로 했던 수많은 소독 규칙을 잊어버렸으며, 때로는 전염에 대한 예방 조치조차도 취하지 않고 폐장 페스트에 걸린 환자들 곁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253쪽)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예상하지 못한 정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우리 사회에도 두려움과 불안이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겪고 있는 이 사태를 정치에, 종교에, 돈벌이에 이용하는 이들도 많아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민들은 알베르 카뮈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통해 전하려 했던 ‘인류애’를 기억하고 대처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이 재앙이 처음으로 역사상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신에게 대적한 자들을 쳐부수기 위해서였습니다. 애굽 왕은 하느님의 영원한 뜻을 거역하였는지라 페스트가 그를 굴복시켰습니다. 태초부터 신의 재앙은 오만한 자들과 눈먼 자들을 그 발아래 꿇어 앉혔습니다. 이 점을 잘 생각하시고 무릎을 꿇으시오.”(128쪽)- P128

“하느님은 여러분을 더 오래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이며,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만이 사랑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이리하여, 여러분이 찾아뵙는 것을 기다리다가 지치신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재앙이 죄 많은 모든 도시를 찾아들었듯이, 여러분에게도 찾아들게 하신 것입니다.”(132쪽)- P132

“그는 사람이 죽는 것을 많이 보진 못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리 운운하는 것이죠. 그러나 아무리 보잘것 없는 시골신부라도 자기 교구 사람들과 접촉이 잦고 임종하는 사람의 숨소리를 들어 본 사람이면 나처럼 생각합니다. 그는 그 병고의 유익한 점을 증명하려 하기 전에 우선 치료부터 할 겁니다.”(169쪽)- P169

“그래도 모든 일에는 언제나 취할 점이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가장 잔인한 시련조차도 기독교인에게는 역시 이득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 기독교가 여기서 정말로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이득이며, 그 이득이 어떤 점에 있는 것이며 어떻게 하면 그 이득을 발견할 것인가를 아는 데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291쪽)- P291

“그 어린애를 기다리는 영생의 환희가 능히 그 고통을 보상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로서는 쉬운 일이겠으나, 실상은 그 점에 대해서 자기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영생의 기쁨이 순간적인 인간의 고통을 보상해 준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소리를 하는 자가 몸소 육체와 영혼의 고통을 맛본 주님을 섬기는 기독교인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리라.”(292쪽)- P292

“재앙에 맞서서 투쟁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 차츰차츰 밀려들고 있는 탈진 상태의 가장 위험한 결과는, 외부의 사건이나 타인의 정서 같은 데에 대한 무관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는 무성의에 있는 것이었다.(중략) 그처럼 그 사람들은 점점 더 빈번하게 자기 자신들이 규정해 놓은 위생 규칙을 소홀히 하고, 자기 자신들 몸에 실시하기로 했던 수많은 소독 규칙을 잊어버렸으며, 때로는 전염에 대한 예방 조치조차도 취하지 않고 폐장 페스트에 걸린 환자들 곁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253쪽)-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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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저널리스트 : 조지 오웰 더 저널리스트 2
조지 오웰 지음, 김영진 엮음 / 한빛비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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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지금도 널리 읽히는 고전이 된 <동물농장>과 <1984>를 쓴 조지 오웰(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 1903.6.25~1950.1.21)이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명작으로 인정받는 소설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친 조지 오웰이지만 그는 다양한 영역에서 글을 썼습니다. 기일을 맞아 그의 유명한 소설들을 다시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조지 오웰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책도 읽어볼 만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 오웰이 저널리스트로서 쓴 기사와 칼럼을 선별해 담은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은 또 다른 조지 오웰을 소개합니다. 조지 오웰의 기사들을 엮어 책을 만든 김영진씨는 조지 오웰이 다루는 다양한 관심사들을 평등, 진실, 전쟁, 미래, 삶, 표현의 자유라는 여섯 가지 주제 아래 모았습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조지 오웰의 생각들을 맥락 있게 읽을 수 있는 점이 좋습니다.


특히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지금 우리 사회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글들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상당히 밀접하게 닿아 있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난민 등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역사와 진실의 문제, 특정한 이념에 대한 광신적 추종,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 노동 문제에 이르기까지 마치 우리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칼럼을 쓴 건가 착각할 정도입니다.

조지 오웰은 여러 사회 문제와 약자들이 겪는 어려움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에 그의 글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밝혔듯 그는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사람들이 자기가 속한 우물 밖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신경 쓰도록" 만들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의 글에서 상당한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혐오와 역사왜곡은 무지의 소산

지난해 제주도에 예멘 난민들이 도착했을 때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막연한 반감으로 그들을 거부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조지 오웰 당시 유태인 난민을 거부했던 영국의 현실과 비슷합니다. 그는 이와 같은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래와 같은 제안을 하는데 마치 지난 해 난민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던 우리 사회에 하는 말로 들립니다. 우리 사회 시민들은 더 악랄해지지 않도록 이제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난민들에게 '돌아가라'며 쫓아낼 때 그 말의 의미가 어떤 건지 정확히 이해하도록 설명해 줄 수는 있다. 조금이라도 지식을 얻고 나면 사람들이 조금은 덜 악랄하게 굴지도 모른다."(51쪽)


몇 년 전 국정교과서 문제로 우리 사회는 역사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또 대한민국의 뿌리가 언제 어디에 있느냐를 두고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좀 더 최근에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책으로 논란을 일으킨 사람도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대중이 믿는 진실이 언제나 같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조지 오웰이 역사와 진실 문제에 대해 쓴 글을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 집니다.
 

"나치 버전으로 쓰인 전쟁과 나치가 아닌 이들이 묘사하는 전쟁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이 중 어느 쪽이 역사로 남겨질지는 역사적 증거가 아니라 전투의 결과가 결정할 것이다.(93쪽)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중략)전체주의가 정말로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잔혹행위를 저지르기 때문이 아니다. 전체주의는 객관적 사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과거만 통제하는 게 아니라 미래도 통제하려 든다.(96쪽)"


연대하는 노동자들의 힘과 역할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노동 혹은 노동자라는 말을 이상하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동자이면서도 말입니다. 게다가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정규직, 비정규직, 프리랜서, 자영업자, 플랫폼 노동자 등으로 분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노동자들이 연대할 때 만들어지는 힘에 대한 인식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 듯 합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연대할 때 함께 생존할 수 있습니다.

조지 오웰이 우리 사회 노동자들에게 '사보타주'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와 함께 우리 사회 노동자들이 점점 잊어버리고 있는 연대하는 노동자들의 힘에 대해서도 조언합니다. 노동자들이 가진 사회적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다시 강조합니다. 전쟁과 같은 반인륜적인 일에 맞서 할 수 있는 방식도 제안합니다.
 

"사보타주는 원래 프랑스어다. 프랑스 북부와 플랑드르 지방의 사람들 중 주로 농민과 노동자가 신는 묵직한 나무 신발이 있다. 그게 바로 '사봇 sabots'이다. 오래 전에 고용주에게 불만을 품은 노동자 여럿이 돌고 있는 기계에 사봇을 던져 기계를 고장 낸 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행위에 사보타주라는 이름이 붙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보타주는 작업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거나 값나가는 재물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141-142쪽)
"기계를 향해 사봇을 던진 벨기에의 노동자들은 한 가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평범한 노동자는 막대한 힘을 가진 중요한 존재라는 점이다. 우리가 곧잘 간과하는 사실이다. 사회의 원동력은 육체 노동자의 노동에 기반하고 있으며 노동자에게는 사회의 작동을 멈춰버릴 힘이 있다."(143-144쪽)
"기계를 망가뜨릴 만한 기회나 용기는 없어도 기계가 더디 작동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다. 이를테면 가능한 제일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일하면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꾀병을 부리고, 원자재를 헤프게 쓰면 된다. 이럴 땐 게슈타포 입장에서도 책임을 따져 묻는 게 쉽지 않다. 소극적 사보타주는 전쟁 물자 생산에 끊임없이 잡음을 만들어낸다."(145쪽)


저널리즘의 역할


마지막으로 저널리스트로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언론에 대한 비판입니다. 가짜 뉴스를 생산해내는 언론이 여전히 주류에 있고, 진짜 문제를 일으키는 사회악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대중들을 호도하는 일에 열심인 신문과 방송도 없어지지 않는 우리 사회입니다. 권력을 제대로 감시하고 진실을 시민들에게 알리려는 소수의 언론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조지 오웰은 '저널리즘의 역할'이라는 글에서 한 저널리즘 교육기관 학과 부소장의 편지를 인용했습니다. 그는 저널리즘의 목적은 피곤한 사업가의 주머니에서 돈을 터는 것, 사회의 나쁜 면에 대해 입을 다무는 것, 독자가 생각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엔 "이 세상은 변할 리가 없고, 대중은 언제나 속아왔으며 앞으로도 기꺼이 속을 준비가 되어 있는 얼간이들일 뿐"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우리 시민들은 결코 얼간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불의한 권력에 저항했고 진실을 스스로 찾아가며 혁명을 이뤄왔습니다. 이런 깨어 있는 시민들에 더해 언론들이 권력을 감시하고 진실을 알리는 제 역할을 하게 된다면 시민들의 권한을 위임받은 국민의 머슴들이 제 주인 위에 군림하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저널리스트로서 조지 오웰이 남긴 글들에서는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는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진정한 언론인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시대에 조지 오웰은 언론인으로서 롤 모델로 삼을 만한 인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지 오웰을 추억하며 그가 가진 언론인으로서의 매력을 느껴보시죠.

˝돌아갈 고향이 없는 난민들에게 ‘돌아가라‘며 쫓아낼 때 그 말의 의미가 어떤 건지 정확히 이해하도록 설명해 줄 수는 있다. 조금이라도 지식을 얻고 나면 사람들이 조금은 덜 악랄하게 굴지도 모른다.˝(51쪽)
- P51

˝나치 버전으로 쓰인 전쟁과 나치가 아닌 이들이 묘사하는 전쟁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이 중 어느 쪽이 역사로 남겨질지는 역사적 증거가 아니라 전투의 결과가 결정할 것이다.(93쪽)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중략)전체주의가 정말로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잔혹행위를 저지르기 때문이 아니다. 전체주의는 객관적 사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과거만 통제하는 게 아니라 미래도 통제하려 든다.(96쪽)˝- P96

˝사보타주는 원래 프랑스어다. 프랑스 북부와 플랑드르 지방의 사람들 중 주로 농민과 노동자가 신는 묵직한 나무 신발이 있다. 그게 바로 ‘사봇 sabots‘이다. 오래 전에 고용주에게 불만을 품은 노동자 여럿이 돌고 있는 기계에 사봇을 던져 기계를 고장 낸 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행위에 사보타주라는 이름이 붙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보타주는 작업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거나 값나가는 재물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141-142쪽)- P141

˝기계를 향해 사봇을 던진 벨기에의 노동자들은 한 가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평범한 노동자는 막대한 힘을 가진 중요한 존재라는 점이다. 우리가 곧잘 간과하는 사실이다. 사회의 원동력은 육체 노동자의 노동에 기반하고 있으며 노동자에게는 사회의 작동을 멈춰버릴 힘이 있다.˝(143-144쪽)- P143

˝기계를 망가뜨릴 만한 기회나 용기는 없어도 기계가 더디 작동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다. 이를테면 가능한 제일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일하면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꾀병을 부리고, 원자재를 헤프게 쓰면 된다. 이럴 땐 게슈타포 입장에서도 책임을 따져 묻는 게 쉽지 않다. 소극적 사보타주는 전쟁 물자 생산에 끊임없이 잡음을 만들어낸다.˝(145쪽)-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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