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워크
E. F. 슈마허 지음, 박혜영 옮김 / 느린걸음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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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일터와 노동을 꿈꾸다. E.F.슈마허의 <#굿워크>

오늘도 이른 아침에 출근을 합니다. 표정은 생기가 없고 어둡습니다. 발걸음은 무겁습니다. 비교적 좋은 조건에서 일을 하고 급여도 상당한데 일터로 향하는 발걸음은 왜 항상 무거운지 모르겠습니다.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지 않은 ‘일’. 만족하며 즐겁게 할 수는 없을까요?

일터가 재미없다고 하면 직장 동료도, 부모님도, 친구들도 욕심부리지 말고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직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고들 합니다. 물론 감사합니다. 하지만 돈을 받으며 하는 일이라도 즐겁게 하고 싶다는 것은 정말 과한 욕심일까요. 직장이 고통과 돈을 바꾸는 곳이 아니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만족스러우며 창조적인 노동을 하고, 품위 있는 생활을 유지하며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세상. 천국에서나 가능할 법한 모습입니다만 이 세상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이런 모습의 사회를 추구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로 유명한 E.F. 슈마허입니다.

흥미와 품위, 재미가 사라진 일터

1970년대 중반 슈마허가 미국에서 강연했던 내용을 묶은 책 <굿워크>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노동하는 삶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슈마허는 불가피하게 할 수 밖에 없는 일이든, 원해서 하는 일이든 노동을 삶의 중심에 놓고 바라봤습니다. 그렇기에 노동에서 재미와 의미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아마도 요즘 사람들이 일하는 곳에 슈마허가 방문한다면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역시나 안타까워할 것 같습니다. 슈마허가 우려했던 것처럼 현대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정신과 시간을 과도하게 빼앗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터에서 만족스러운 노동이라는 가치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노동생산성 향상만이 추구해야 하는 덕목으로 남았습니다.

슈마허는 노동자들이 흥미나 품위를 잃은 이유를 산업사회의 독재적 운영방식에서 찾았습니다. 현대기업들은 인간을 책임 있는 개인이 아니라 ‘생산의 요소’로서만 취급합니다. 요즘 회사들은 여기에서 한 술 더떠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자원으로 취급당하는데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책에서 슈마허가 언급한 산업사회의 복잡함, 탐욕, 규모 확대로 인한 권위주의는 과거보다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때문에 일을 하면서 품위를 유지하고 만족할 수 있는 환경은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실현될 수 없는 꿈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산업사회의 거대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요?

노동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현대 산업 사회가 노동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노동은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요. 직장에서 마주하는 답답한 현실에 비판과 푸념을 반복하기는 하지만 내가 바라는 노동과 그 의미에 대해선 더이상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슈마허가 책에 쓴 것처럼 저 역시 공리주의적 노동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도 없고 의미도 없으며 목적조차 없이 생존을 위한 ‘선택’과정인 진화의 산물이 인간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인간이 ‘공리주의’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면, 노동은 불쾌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따라서 노동은 적게 할수록 더 좋다는 식의 공리주의적 생각을 갖게 됩니다.”(199쪽)

슈마허는 노동이 세 가지 역할을 한다고 봤습니다. 1) 자신의 잠재력을 사용하고 계발할 수 있는 기회 제공, 2)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함으로써 자기 중심주의 극복, 3) 품위 있는 생존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 이와 같이 노동이 제 역할을 하는 사회라면 일터로 가는 사람들 표정이 밝을 것 같습니다.

노동의 역할이 회복된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법, 규칙, 협약, 세금, 복지, 교육, 건강 서비스와 같은 ‘상부구조’를 바꾸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슈마허는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될 필요가 없는 완벽한 시스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개인의 역할도 강조합니다.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니까요.

더 나은 노동과 일터를 상상하자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자본주의와 이윤추구 동기를 없애자’, ‘다국적 기업을 해체하고 관료주의를 폐지하자’, ‘교육을 개혁하자’와 같은 주장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슈마허는 “약자들이 자기 힘으로 생산함으로써 지금보다 더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새로운 형태의 기술을 도입”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슈마허는 자본, 기술, 조직 등이 점점 더 거대해지는 방향을 거슬러 보다 작은 규모로 인간뿐만 아니라 환경까지 고려하는 기술을 추구했습니다. 이 제안도 의미가 있어 보이지만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더 관심이 가는 내용은 슈마허가 말한 ‘자유’와 ‘자발성’입니다.

“나는 아무 의미도 없는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다. 나는 기계와 관료제의 노예가 되어 권태롭고 추악하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바보나 로봇, 통근자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누군가의 일부분으로 살고 싶지 않다.(90쪽)

“나는 내 일을 하고 싶다. 나는 좀 더 소박하게 살고 싶다. 나는 가면이 아니라 진짜 인간을 상대하고 싶다. 내겐 사람, 자연, 아름답고 전일적인 세상이 중요하다. 나는 구군가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91쪽)

이런 꿈을 꾸며 일하고 싶습니다. 비록 현실의 직장에선 자발성을 발휘할 공간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자유를 포기해 버린다면 그 또한 비극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결국엔 조직도 활기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슈마허의 이 말은 생계를 위해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이 꼭 생각하며 일하면 좋겠습니다.

“그래, 비록 생계를 위해 일을 하지만 나한테는 다른 일을 할 시간도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결국 최고의 일을 하게 됩니다.”(126쪽)

"인간에 대한 관심도 없고 의미도 없으며 목적조차 없이 생존을 위한 ‘선택’과정인 진화의 산물이 인간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인간이 ‘공리주의’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면, 노동은 불쾌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따라서 노동은 적게 할수록 더 좋다는 식의 공리주의적 생각을 갖게 됩니다."(199쪽) - P199

"나는 아무 의미도 없는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다. 나는 기계와 관료제의 노예가 되어 권태롭고 추악하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바보나 로봇, 통근자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누군가의 일부분으로 살고 싶지 않다.(90쪽) - P90

"나는 내 일을 하고 싶다. 나는 좀 더 소박하게 살고 싶다. 나는 가면이 아니라 진짜 인간을 상대하고 싶다. 내겐 사람, 자연, 아름답고 전일적인 세상이 중요하다. 나는 구군가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91쪽) - P91

"그래, 비록 생계를 위해 일을 하지만 나한테는 다른 일을 할 시간도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결국 최고의 일을 하게 됩니다."(126쪽)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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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과 망각
김용진.박중석.심인보 지음 / 다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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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합니다. “그때 ‘만약’ 그게 그렇게 됐다면 지금 이 모양은 아닐 텐데...”, 이처럼 아무리 한탄한들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비슷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만약’이란 질문을 던지면서 회고해 봐야 할 역사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봅니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 소속 김용진, 박중석, 심인보 기자는 <친일과 망각>의 머리글에 이렇게 썼습니다. 저자들이 책의 첫머리에서 상상한 것처럼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아마도 우리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최근 전국민의 분노지수를 높이는 이영훈류의 사람들은 발붙일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친일청산 실패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 중 하나입니다. 떠올리기 고통스럽고 부질없어 보이지만 우리는 계속 이 역사를 떠올려야만 합니다. 기억해야만 합니다. 저자들이 말했듯이 “배반과 치욕의 역사는 망각을 자양분으로 해서 되풀이”되기 때문입니다. 

뉴스타파는 기억을 위해 해방 70주년 기획으로 <친일과 망각>시리즈(4회)를 2015년에 방송했고 이듬해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일본 극우 정권과의 갈등에 더해 이영훈류의 사람들이 망언을 넘어서 그것을 책으로까지 내놓는 것을 보면 떠올리기 고통스럽고 치욕스런 역사지만 또 복습해야 하겠습니다. <친일과 망각>은 1960년대 임종국의 <친일문학론>,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잇는 후속작이라 봐도 되겠습니다.

매국이 애국을 이긴 나라

저자들은 2005~2009년 활동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확정한 1006명의 친일파 후손을 취재했습니다. 그 결과 친일파 후손들은 친일 청산을 무산시키고 기회주의 세력이 득세하게 했던 이승만 정권 덕분에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해 얻은 선대들의 사회경제문화적 유산을 물려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공고히 자리를 잡았음을 확인했습니다.

친일파 후손들 중 일부는 친일 청산 작업을 노골적으로 반대했고, 심지어는 친일 청산이 좌파와 빨갱이들의 요구라는 막말을 내뱉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해방 후 반민특위를 해체했던 이승만 시절의 인식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않은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들이 썼듯이 이들은 과거의 진실을 마주할 용기 혹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사망했고 그 후손들 역시 극악스럽게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래도 친일의 역사를 묻어두어서는 안됩니다. 과거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지 못했기에 우리 사회에는 “불의가 정의를 대체”했고, “매국이 애국을 이겼”습니다. 이 잘못 묶여진 역사의 매듭을 풀 수는 없지만 책에서 말하듯 “망각 속에 계속 방치해선” 안됩니다.

저자들은 친일파 후손들이 취재에 응해달라는 뉴스타파의 요청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친일파 후손들은 어떻게 성공적인 삶을 유지해 갔는지, 이들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친일 재산을 물려받았는지 등을 알려줍니다. 과거 실패했던 친일 인사 처벌 만큼이나 친일 재산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한 것도 안타깝습니다. 친일파 후손들이 선대의 재산을 이미 빼돌릴만큼 빼돌렸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실패한 친일 청산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마주하게 되면서 혈압이 상승하는 것을 느낍니다. 특히 일제에 부역해 쌓은 선대들의 부를 약싹빠르게 차지한 친일파 후손들과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대조적인 삶을 마주할 때는 심장 박동수가 더 빨라지고 혈압이 최고조에 이르는 느낌이었습니다. 진정 나라를 사랑했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고통속에 살아가고 매국한 이들과 후손들은 태평성대를 누려온 나라.

고백하고 사죄한 후손들

말초 혈관들까지도 팽팽해지는 느낌은 책의 6장에 이르러 다행히도 해소됩니다. 6장에는 친일을 한 선대들의 자손임을 확인한 후손들의 ‘고백’이 실려있기 때문입니다. 일제 말기 경남 하동 군수를 지냈던 이항녕은 “조선인 앞잡이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일제의 식민 지배도 불가능했다”고 강조하며 자신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사죄/반성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음성군수를 지냈던 이준식의 손자 이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반성하지 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그것이 이윤 씨가 할아버지의 친일행적을 반성하고 공개 사죄한 이유였다. 이 씨는 “자기 집안이나 조상의 떳떳하지 못한 문제를 덮고 쉬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그것은 결코 조상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우리 집안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공개사죄했다”고 밝혔다. 역사 앞에서 당당해지는 것, 그것이 오히려 선조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209쪽)

뉴스타파가 취재를 시도한 친일파 후손 350명 중 선대의 잘못을 인정하고 공개 사죄한 사람은 세 명이었다고 합니다. 저자들이 이 세 명의 사죄를 의미 있게 받아들인 것과 같이 저 역시 이 세 명의 마음을 담은 사죄가 결코 실망스런 결과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들의 사과를 보며 아마도 어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같은 기억을 가질 때까지

폴란드는 1998년 <민족기억연구소 및 폴란드 민족에 대한 범죄기소위원회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의회 소속으로 ‘민족기억연구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치 독일과 공산 체제 하에서 자행된 범죄가 어떠했는지 교육하고, 지금도 관련 범죄를 조사하고 범죄자를 추적해 법정에 세운다고 합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나치 부역자들을 철저하게 처벌했습니다. 우리 나라는 어땠을까요.
 
“해방 6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국가 차원의 친일 진상규명 작업이 다시 이뤄졌다. 그런데 우리는 당시 이뤄졌던 친일 진상 규명의 성과물을 사회적 차원에서 충분히 공유하고, 가르치고 있을까?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는 게 제작진의 생각이었다. 25권에 이르는 반민규명위의 방대한 보고서와 그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수집된 수많은 기록들은 더 이상 활용되지 않은 채 국가기록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잊혀진 존재가 됐다.”(266쪽)

“누군가 되묻지 않으면 잊히고 마는 게 기억이다. 기억은 늘 부정확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뒤틀리고 변조된다. 우리는 친일 문제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기억하려 노력했는가?”(274쪽)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과 그들의 행위를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기억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저자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공간에서 식민지근대화론, 식민지배축복론 등을 여전히 입에 담는 이들과 마주앉아 <친일과 망각>을 펴고 우리가 같은 기억을 가질 수 있도록 함께 읽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합니다. "그때 ‘만약’ 그게 그렇게 됐다면 지금 이 모양은 아닐 텐데...", 이처럼 아무리 한탄한들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비슷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만약’이란 질문을 던지면서 회고해 봐야 할 역사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봅니다."

"반성하지 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그것이 이윤 씨가 할아버지의 친일행적을 반성하고 공개 사죄한 이유였다. 이 씨는 "자기 집안이나 조상의 떳떳하지 못한 문제를 덮고 쉬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그것은 결코 조상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우리 집안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공개사죄했다"고 밝혔다. 역사 앞에서 당당해지는 것, 그것이 오히려 선조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P209

"해방 6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국가 차원의 친일 진상규명 작업이 다시 이뤄졌다. 그런데 우리는 당시 이뤄졌던 친일 진상 규명의 성과물을 사회적 차원에서 충분히 공유하고, 가르치고 있을까?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는 게 제작진의 생각이었다. 25권에 이르는 반민규명위의 방대한 보고서와 그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수집된 수많은 기록들은 더 이상 활용되지 않은 채 국가기록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잊혀진 존재가 됐다." - P266

"누군가 되묻지 않으면 잊히고 마는 게 기억이다. 기억은 늘 부정확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뒤틀리고 변조된다. 우리는 친일 문제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기억하려 노력했는가?"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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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의 법칙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지음, 이지연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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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행동 이해를 위한 19가지 도구 <인간 본성의 법칙>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다. 비이성이라는 유령이.”

요즘 언론에 보도되는 뉴스를 보고 있으면 인간이 과연 이성을 가진 존재인가 의심하게 됩니다. 일본 내각의 근거 없는 무역 보복 조치로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때에 ‘우리 일본’ 운운한 국회의원, 극우 정치인들의 거짓 선동에 우르르 몰려다니며 혐오를 부추기는 사람들, 사회 문제에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내는 사람들에게 달려가 무작정 인격을 모독하는 인터넷 댓글 부대들...

사실 확인은 커녕 거짓/왜곡 보도를 토해내는 기자들, 그들의 기사를 전파에 태워 이슈를 만들어 내고 중요한 사회 문제를 덮어버리려는 특정 언론사와 그 지지 세력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 혹은 정당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감정을 담아 벽을 세우고 반대의 목소리 자체를 부정하려는 사람들. 최근엔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매국노라 비난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끊임 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황당한 모습에 한숨을 짓다가 나를 돌아보곤 합니다. 이런 이슈들에 과연 나는 이성을 가지고 대응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위에서 제가 비난하며 지적한 사람들과 저는 또 얼마나 더 다를까요. 제가 하는 생각과 행동이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흠칫 놀라곤 합니다.

인간 행동 이해를 위한 19가지 도구 


최근에 출간된 <인간 본성의 법칙>에서 저자 로버트 그린이 지적한 것처럼 ‘내가 하는 행동이나 말을 늘 내가 통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느낍니다. 저자는 이번 책에서 사람의 의식보다 더 깊은 수준에서 활동하면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힘들을 ‘인간본성’이라 정의하고 이를 역사속 인물들의 이야기와 함께 열 아홉가지로 정리해 소개했습니다.

“인간 본성 19가지: 비이성적 행동, 자기도취, 역할 놀이(비언어적 신호), 강박적 행동, 선망(욕망), 근시안(단기적 사고), 방어적 태도, 자기 훼방(세상을 보는 방식, 태도), 억압(어두운 측면), 시기심, 과대망상, 젠더 고정관념, 목표 상실(소명), 동조(집단의 영향력), 변덕(리더십과 권위에 대한 양가감정), 공격성, 세대 근시안(세대 갈등의 패턴), 죽음 부정”

로버트 그린이 정리한 이 열 아홉가지 인간 이해 도구를 가지고 사회속에서 마주치는 온갖 다양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저자도 책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많은 이슈들에 감정적이고 피상적으로 대응하며 살아가게 되는 요즘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타인의 행동을 거울 삼아 나를 돌아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소셜 미디어상에서는 바이럴 효과를 따라 새로운 이슈가 끊임없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조작에 능한 지도자들이 우리를 이용해먹고 뜻대로 휘두르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중략) 나와 동일시할 집단을 찾아내고, 서로의 메아리만 주고 받는 공간에서 내 부족의 의견만 계속 증폭시키고, 누가 되었든 외부인은 철저하게 악마로 몰아서 떼로 몰려가 겁을 준다. 인간 본성의 원시적 측면 때문에 아수라장이 벌어질 가능성은 오히려 더 커졌다.”(13쪽)

저자가 말하는 시대상이 우리 사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자제하고, 판단의 속도는 늦추고, 찬찬히 세계를 관찰하며,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힘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로버트 그린이 말한 ‘스스로를 자각하고 사려 깊은 행동을 하게 하는 고차원적 자아’가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말이죠.

긍정의 자기계발서 종합판 같기도

저자는 인간이 보여줄 수 있은 부정적 혹은 파괴적 모습들에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그 원인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이 법칙들은 타인과 나를 바라보는 거울로 활용할 때 유용할 것 같습니다. 저자가 소개한 인물들의 이야기에 나를 비추며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미친 어린 시절의 경험, 교육 및 성장 환경, 직업과 속한 집단 등이 있었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특히 역사 속 인물들의 실제 사례를 통해 지금 우리들이 범할 수 있는 유사한 실수들을 보여주고 그런 행동에 영향을 준 심리적 요인들을 찾아보려 한 부분은 상당히 유익했습니다. 다만 그 정도에서만 멈췄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제시한 열 아홉가지 ‘법칙’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을 길게 풀어놓았는데, 이 부분들은 마치 긍정적 태도를 긍정하는 자기계발서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나를 지배하는 감정을 극복한다.”, “자기애를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 바꾼다.”, “운명은 자신이 만든다.”, “상대를 긍정해서 저항을 누그러뜨린다.”, “태도를 바꾸면 주변이 변한다.”, “비교를 피하는 방법.”, “인생의 소명을 발견하고 지침으로 삼는다.”, “집단의 영향력에 저항하라.”...각 장에서 볼 수 있는 소제목들인데 마치 각 장이 하나의 자기계발서 같은 느낌입니다.

각 장에서 역사 속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고 그 의미를 언급한 부분 이후는 과감하게 생략했으면 좋았겠다고 (주제넘게) 생각합니다. 물론 해당 분야 전문가로서 저자가 독자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조언들을 시중에 있는 다른 도서들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면 중복을 피하는 것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사전처럼 곁에 두고 필요할 때 찾아보는 용도로 활용한다면 장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책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독자들의 몫이겠지요?

죽음은 자주 생각하자

위와 같은 아쉬움에도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죽음(죽음 부정의 법칙)을 다룬 마지막 장입니다. 아마도 최근 제가 병치레를 하고 있어서 더 공감을 하게 된 듯 합니다. 저 역시 병에 걸리기 전과 후에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상당히 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저자가 이 장에서 소개한 메리 플래너리 오코너 만큼 죽음을 앞두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죽어가고 있음에도 자신과 죽음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을 가깝게 인식하게 되면 인생의 많은 부분들에서 관점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가족, 친구 등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부터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들에 이르기까지 과거엔 그렇지 않았던 경험들이 매우 선명하고 강렬해집니다. 플래너리 오코너가 죽음을 자각하고 난 후 삶의 많은 부분을 강렬하게 경험했던 것처럼요.

저자도 죽음을 자각할수록 더 많은 자유를 맛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죽는다고 생각하면 무엇인가를 결정하거나 선택해야 할 때 보다 대담해 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덜 불안해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제약에서 조금은 벗어나 전에는 하지 못했던 일들도 과감하게 시도해 볼 수 있게 됩니다. 저자의 말처럼 시간이 허락한다면 나의 가능성을 더 많이 탐구하고 확장하고 싶어집니다.

“죽음에서 그 이상함을 제거하고, 죽음을 알고, 죽음에 익숙해지자. 그 무엇보다 죽음을 가장 자주 생각하자. 모든 순간 우리의 상상 속에서 죽음의 모든 측면을 그려보자. 죽음이 어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죽음을 미리 생각해보는 것은 자유를 미리 생각해보는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을 지운 셈이다. 어떻게 죽을지 알고 나면 모든 종속과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미셸 드 몽테뉴-“(905쪽)

실제로 죽음을 생각한다고 해서 모든 종속과 제약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이전보다는 자유롭고 대담할 수는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가능성을 새겨가면서 노예가 되는 법을 조금씩 지워갑니다.


#인간본성 #인간이해 #심리학 #이성 #자기계발 #죽음 #긍정 #로버트그린 #삶 #인생

소셜 미디어상에서는 바이럴 효과를 따라 새로운 이슈가 끊임없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조작에 능한 지도자들이 우리를 이용해먹고 뜻대로 휘두르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중략) 나와 동일시할 집단을 찾아내고, 서로의 메아리만 주고 받는 공간에서 내 부족의 의견만 계속 증폭시키고, 누가 되었든 외부인은 철저하게 악마로 몰아서 떼로 몰려가 겁을 준다. 인간 본성의 원시적 측면 때문에 아수라장이 벌어질 가능성은 오히려 더 커졌다. - P13

죽음에서 그 이상함을 제거하고, 죽음을 알고, 죽음에 익숙해지자. 그 무엇보다 죽음을 가장 자주 생각하자. 모든 순간 우리의 상상 속에서 죽음의 모든 측면을 그려보자. 죽음이 어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죽음을 미리 생각해보는 것은 자유를 미리 생각해보는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을 지운 셈이다. 어떻게 죽을지 알고 나면 모든 종속과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미셸 드 몽테뉴- - P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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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일을 하는가?,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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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9일 tvN에서 방영한 <유 퀴즈 온 더 블럭> 25화에서 진행자들은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주제로 시민들을 만났습니다. 진행자들은 직장인들이 많이 다니는 지역에서 만나는 시민들에게 ‘150~250만원 받는 백수와 400~500만원 버는 직장인 중 어떤 삶을 선택하겠는가’ 물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백수를 선택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아 흥미로웠습니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출근해 5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은행에서 청소를 하시는 노년의 세 여성은 ‘250만원 백수와 500만원 직장인 중 선택한다면?’이란 물음에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직장인을 선택했습니다. 이들은 일할 때 행복하다고 했고, 심지어 한 분은 300만원을 받아도 직장을 다니겠다고 했습니다. 이분들에게 일은 돈 이외에도 다른 의미를 가져다 주는 원천인 것 같습니다.

반면 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준비하는 젊은 시민은 절약해 여행하며 재충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150만원 백수를 선택했습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는 한 시민은 생계 유지를 위해 수입이 더 높은 직장인을 선택했지만 만약 혼자라면 돈을 적게 받더라도 백수로 살아보고 싶다고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일터에서 시달리는 평균적인 직장인들은 이분들처럼 대답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제 통장에 누군가가 매월 생활비를 넉넉하게 넣어준다면 저 역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당장 그만두고 재미있는 일들을 찾을 것 같습니다. 월급 받는 일을 하면서 돈벌이 이상의 의미를 추구한다거나 행복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랭 드 보통이 쓴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책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고, 현대인들에게 일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

알랭 드 보통은 책의 첫 부분에서 배를 관찰하는 사람들을 보며 일이 주는 물질적 혜택보다 그 일 자체가 주는 재미를 더 높이 평가하는 이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도 실험하고 그 결과를 보면서 호기심이 충족되고 재미를 느꼈던 때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일이 살아가는 데 의미를 주는 원천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보편적인 것은 아닙니다. 현대의 일터는 우리가 일하면서 재미를 느끼게 놔두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는 많은 물건을 실제로 손에 넣을 수는 있지만, 그런 물건들의 제조와 유통 과정이 어떠한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소외 과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이, 감사, 죄책감을 경험할 수 많은 기회를 박탈당한다.”(39쪽)

물류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저자가 관찰하면서 얻은 통찰이 연구소에서 일하는 제 마음에도 와 닿습니다. 일의 전 과정에 참여해 볼 수 있다면 딱 주어진 일만 로봇처럼 하게 되는 경우보다 일의 재미를 느낄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또한 일터에서 무한 경쟁, 한계 없는 빠른 속도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일하면서 예기치 않는 경이로움을 발견할 가능성이 커질 것입니다.

저자가 책에 쓴 것처럼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 때” 우리는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행복해 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끊임 없이 일의 보상으로 따라오는 돈 이외에 일에서 의미를 찾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의 말 처럼 저 역시 “그저 물질만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동물”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일을 통해 주어지는 물질적 보상 이외에 다른 의미를 추구하게 되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때문에 극도로 분업화되어 무한한 생산성 혹은 효율을 추구하는 현대의 일터에서 우리는 무의미 속을 부유하며 행복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일하며 행복할 수 있다는 건 예외적 축복

현대의 일터가 우리에게서 일의 의미를 앗아가는 것에 더해 우리가 행복을 느끼며 일하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믿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경제적인 필요가 없어도 일은 구해야 한다고 암시하는 것도 우리 사회가 처음이다”고 했는데 로또 1등에 당첨되어도 회사를 계속 다니겠다고 말하던 제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하고 있는 일 혹은 직업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 버린 사회에서 일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이상적 믿음과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일터의 현실이 크게 다르다는 점을 매일 확인하면서 사람들은 계속 불행하다 생각합니다. 알랭 드 보통이 제안하는 것처럼 이같은 일과 행복에 대한 신화적 믿음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일에서 행복을 느끼는 건 소수에게 허락된 일종의 축복과도 같다 생각합니다.

“모두가 일과 사랑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너그러운 부르주아적 자신감 안에 은밀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배려 없는 잔혹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 두 가지에서 절대 충족감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충족감을 얻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뜻일 뿐이다. 예외가 규칙으로 잘못 표현될 때, 우리의 개인적 불행은 삶에 불가피한 측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저주처럼 우리를 짓누르게 된다.”(142쪽)

나에게 일이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열정을 다해 일하는 성공한 창업자들의 이야기,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생각되는 것이라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일을 소명으로 여기며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서두에 언급한 <유 키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청소하는 분들이 일을 대하는 태도 등을 접하면 내가 너무 불평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 한켠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이야기들은 알랭 드 보통도 말했듯 모두에게 적용되는 규칙이 아닙니다. 소수에게 허락되는 예외입니다. 0.1%, 아니 0.01%의 성공이 누구나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법칙인 것처럼 사회에서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그 성공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더 큰 실망을 느끼고 자책하게 됩니다. 

사회 전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고려했을 때 내가 일하는 조건(급여, 복지 등 노동환경)이 상대적으로 좋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에서 돈벌이 이외의 의미가 저절로 찾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은 주어진 지침에 영혼없이 따라야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엔 생각할 겨를 없이 단지 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기도 합니다.

상속받을 재산이 넘쳐나는 경우가 아니고선 먹고 살기 위해 노동과 돈을 바꿔야만 하기도 하고, 건강을 잃거나 노년에 이르러선 일할 수 있는 것 자체를 소중히 여기기도 할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업무에 형벌받은 시시포스가 된 것 같아 괴로워 하기도 할 것이고, 일해서 이뤄낸 결과물을 보고 때론 행복해하기도 할 것입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일이라는 얄궂은 존재로 인해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제 운명이 아닐까요.

현재 우리는 많은 물건을 실제로 손에 넣을 수는 있지만, 그런 물건들의 제조와 유통 과정이 어떠한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소외 과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이, 감사, 죄책감을 경험할 수 많은 기회를 박탈당한다 - P39

모두가 일과 사랑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너그러운 부르주아적 자신감 안에 은밀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배려 없는 잔혹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 두 가지에서 절대 충족감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충족감을 얻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뜻일 뿐이다. 예외가 규칙으로 잘못 표현될 때, 우리의 개인적 불행은 삶에 불가피한 측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저주처럼 우리를 짓누르게 된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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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9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3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90년생이 온다 - 간단함, 병맛, 솔직함으로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임홍택 지음 / 웨일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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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이른바 X세대의 물결이 지금 일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젊은이들은 새로운 생각과 문화를 지니고 있었지만 요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젊은이들의 가치관 그리고 행동양태는 가히 상상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그 특성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20세기 말의 신세대.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X세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994년 어느 봄 날 KBS뉴스에서 앵커가 한 말입니다. 이 세기말 신세대는 어느 새 마흔 살을 넘어 오십 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당시 뉴스에선 이들을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개성이 넘치는 자유로운’ 세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얄궂게도 “가히 상상을 뛰어넘는” 이 세대를 ‘기성세대’로 만들었습니다. 요즘 회사에선 ‘X세대 꼰대’란 말이 나올 정도로 X세대는 사회의 주축이 되어 있습니다.

당시 뉴스에서 X세대는 전통적 위계에 따른 권위를 부정하고, 재능과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이 등으로 우대받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X세대도 이전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겠지요. “현대 시청각 문화(비디오-유튜브가 아닙니다 하하)에 익숙해서 말보단 느낌을 전달하는” 세대가 이제 그들과는 또 전혀 다른 세대라고 하는 90년대생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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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생이 온다는데...

요즘 기성세대들에게 권하는 책이라고 하는 <90년생이 온다>를 읽어보았습니다. 요즘 2030신세대의 특징을 잘 정리해 놓았다고 해서 지난 해 화제가 되었던 책입니다. 저자는 90년대생들이 사회에 진출할 시기에 불안이 극대화된 시대를 맞이하게 되어 ‘안정’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봤습니다. 안정적인 직업에 ‘올인’하는 이들을 저자는 ‘9급 공무원 세대’라고 해 많은 호응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자도 말했듯 공무원을 준비하는 비중이 높다고 해서 이들 세대가 ‘열정이 없고 도전정신도 없는 그저 편한 복지부동의 일만 하려는 나약한 세대’는 아닙니다. 단지 지금 2030세대가 다른 세대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에 비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크게 줄어든 상황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하는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90년대생 세대의 특징을 ‘간단함’, ‘병맛’, ‘솔직함’이라는 세가지 키워드로 정리했습니다. 90년대생들은 길고 복잡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재미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이 불편해 한다고 해도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세대입니다. 저자 나름의 관찰과 만남을 통해 잘 잡아낸 특징들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기존 세대와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는 특징인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X세대, 아니 모든 세대가 그랬듯 90년대생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성세대가 되고 이들은 또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보며 ‘요즘 애들은 참 버릇이 없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대 간의 차이가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90년대생들이 완전히 유별난 것도 아닙니다. 내 어릴 적 모습을 조금만 돌아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합니다.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

책의 몇몇 부분에선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들도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90년대생들은 자신들을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여기지 않고 특정 이상을 실현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단지 그들은 현 시대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43쪽)”와 같은 표현이 그렇습니다. 제가 만나본 90년대생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에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또한 저자는 “권력이 이미 기업의 손을 떠나 개인으로 이동했다”고 하며 90년대생을 받아들여야 하는 기업들에게 조언을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재능있는 개인들은 직장생활에서 그들의 요구와 기대를 확대하고 성취할 만한 협상력을 가지게 되었다.”(135쪽) 고 하면서요. 이 부분은 대체로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좋은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면서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업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수의 인재들에게는 저자의 말이 적용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직장에서 평균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기업과 협상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업들에 대한 개인의 협상력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386세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시위하느라 수업을 하지도 못했는데 졸업할 때가 되면 기업들이 입사 원서를 대학들에 보내주었다고들 말하는 시대였으니까요.

이건 내 얘긴데? 직장은 변하지 않나봐?

또 한편으론 저자가 90년대생 인재들의 특징으로 언급한 부분들 중 ‘내 이야기를 하는 건가’하는 지점도 있었습니다. X세대 끝자락에 해당될 것으로 생각되는 제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했던 생각들을 90년대생들도 하고 있다고 하니 대한민국 직장이라는 곳은 시간에 따른 변화가 많은 것 같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곳인가 봅니다. 이를테면 아래와 같은 언급들은 마치 제 이야기 같습니다.
 
“새로운 세대에게 기존 세대들은 이미 회사에 믿음을 상실했으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충성하는 꼰대들로 보일 뿐이다.”(154쪽)
“90년대생들은 회사에 대한 충성이 곧 나의 성장이라는 공식을 배격한다.”(155쪽)
“본인에게 주어진 휴가를 다 쓰지 않고 휴가를 다녀오지 않은 것이 마치 더 일을 열심히 한 듯이 으스대는 선배들을 볼 때면 얼간이같이 느껴져요. 내 휴가를 내가 사용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요. 얼마 전에 팀장님이 지나가는 말로 ‘휴가가 너무 잦은 거 아닌가?’라고 하는데 기분이 안 좋았죠. 지적하려면 업무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169쪽)

특히, “즐거움은 돈을 내고 찾아. 회사는 엄연히 돈을 받고 일을 하러 오는 곳이야. 그런 곳에서 즐거움을 찾는 게 말이 되니?”(221쪽)라는 말은 제가 불과 몇 년 전 선배에게서 들었던 말과 똑같아서 놀랍습니다. 이처럼 개인차가 큽니다. 10년이란 출생 시기로 세대를 구분하고 규정하고 싶은 바램들이 소위 ‘세대론’을 지지합니다. 물론 당대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 유사한 지점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급한 일반화는 피해야 합니다.

새로운 편견이 되지 않기를

새로운 세대를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규정해버리는 것 또한 90년대생에 대한 새로운 편견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90년대생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불쾌할 수도 있겠다 생각됩니다. 사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인데, 이처럼 책으로 간단하게 규정되어 버린 것을 나의 특징이라고 여기며 대한다면 기분이 나쁠 것 같습니다.

90년대생은 두려운 존재도 아니고, 역사를 통틀어 완전한 별종도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직접 만나서 겪고 이야기를 나눠보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90년대생들이 그렇게 특별히 다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류의 책들은 읽어보고 ‘아, 이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정도로 참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을 보고 90년대생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세대에게 기존 세대들은 이미 회사에 믿음을 상실했으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충성하는 꼰대들로 보일 뿐이다. - P154

본인에게 주어진 휴가를 다 쓰지 않고 휴가를 다녀오지 않은 것이 마치 더 일을 열심히 한 듯이 으스대는 선배들을 볼 때면 얼간이같이 느껴져요. 내 휴가를 내가 사용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요. 얼마 전에 팀장님이 지나가는 말로 ‘휴가가 너무 잦은 거 아닌가?’라고 하는데 기분이 안 좋았죠. 지적하려면 업무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P169

즐거움은 돈을 내고 찾아. 회사는 엄연히 돈을 받고 일을 하러 오는 곳이야. 그런 곳에서 즐거움을 찾는 게 말이 되니?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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