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0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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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사랑의 끝

3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졌지만 모두 다 사랑을 다루고 있다. 사랑을 다루는 방식이 감동적이었고 감명깊었다.

투르게네프의 작품은 처음 읽어보았는데 기본적으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장인물에게 많은 애정을 갖고있다는게 느껴졌다. 그러다보니 나도 그들의 인생을 응원하고 그들의 아픔에 동화되기도 했는데 각 단편의 주인공들이 다 선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들의 사랑에 몰입할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 모든 단편의 주제가 사랑을 다루고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의 상실을 말하고 있다. 먼저 첫 번째 이야기에는 첫사랑에 빠진 한 소년이 나오는데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상대방 때문에 아파하고 고뇌한다. 그 모습이 공감되기도 하고 소년을 응원하기도 했지만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며 쓰라린 첫사랑을 흘려보낸다. 하지만 그 때의 감정이 얼마나 강했는지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그는 그녀를 마음속에 항상 애틋하게 품고 있다.

스쳐지나간 인연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마음에 오래 남게되는 인연임을 깨닫는 것만큼 복잡한 감정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피해 도망가지 않고 제대로 마주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자신의 새로운 마음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소년은 상대방을 향한 이루지 못한 마음을 접으면서도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하여 상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토록 강렬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끼게 해준 상대에게 고마워한다. 그래서 소년이 매우 성숙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더더군다나 소년의 가정은 귀족가문이라 유복하긴 했지만 부모와 상호작용이 되는 사랑을 직접 느끼진 못했고, 소년은 그런 환경 속에서 상대방과 진심으로 주고받는 사랑을 원했다. 사랑의 결핍으로 상대에게 애정을 갈구하게 되면 상대방에게 집착하게 되고 결국엔 좋지 않은 결말을 맞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소년은 어느정도는 그러한 마음이 있었다고 해도 결국엔 그러한 감정들마저 극복해낸다. 사랑은 특히 부족하면 더욱 갈구하게 되는 고달픈 감정이지만 상대방의 결정을 존중함으로써 사랑의 아픔을 승화시켰다. 다시 말해 제대로 누군가를 사랑했던 멋진 사람이다.

이어진 두 번째 단편은 개인적으로 첫 번째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다. 첫 번째 이야기를 읽으며 어릴적의 사랑을 처음 느낀 생동감을 생생히 느꼈다면 두 번째 이야기는 그보다 더 사랑의 상실감을 조명한 느낌이었다. 특히 결말 부분이 충격적이었는데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평생 이어질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그것만큼 아픈 일이 어디있을까 싶다. 그때의 시대를 고려하여 생각해야겠지만 리자의 선택은 충격 그 자체다. 물론 그녀같이 독실한 신자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것이 관례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내가 죽은 줄 알았던 남자를 사랑했다는 것이 그리 큰 죄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 여자가 살아돌아오긴 했지만 그녀는 타인을 조종하면서 자신의 이득을 얻는 소시오패스다. 물론 이것이 리자가 라브레츠키와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이유가 되기는 힘들겠지만 수녀원으로 들어가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만큼 큰 죄를 짓지는 않은 것 같다. 그 옛날 러시아에서 리자같은 독실한 신자는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했지만 그러고나자 그때의 관습이 도대체 뭐길래 순수하게 사랑하는 연인들을 그리 갈라놓았는지 매우 답답하고 심지어 화가 나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나는 라브레츠키와 리자의 사랑을 응원했었다. 게다가 리자는 그녀가 죽은 줄 알고 어렵게 라브레츠키의 마음을 받아들였는데 그러자마자 관에서 살아난듯이 다시 라브레츠키에게 돌아와 그와 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놨다.

그 시대에는 결혼으로 맺어진다는 것이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고, 상대방이 믿음을 배반하여 어떠한 고통을 겪더라도 완전히 끊어낼 수 없는, 평생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낙인이었나 보다. 아아 정말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너무 안타깝다. 둘이 처음 입맞춤했을 때 난 정말로 그들의 행복한 미래를 그리고 있었는데 갑자가 상황이 급변하며 고통스러운 결말을 읽게 됐다. 더군다나 마지막에 라브레츠키가 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그 집이 젊음의 활기를 띈 채 열정과 행복함으로 들썩거릴 때, 리자가 수녀원에서 자신의 죄를 조용히 참회하면서도 라브레츠키를 위해 기도하며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에서는 정말 안타까웠다. 리자가 자랐던 그 집은 여전히 풍성한 젊음의 나날들로 빛나고 있는데 정작 리자는 엄격한 수도원에 평생 자신을 가두고 자신의 조그만 죄를 그리 혹독히 참회해야 하다니.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리자에게 그런걸 바라진 않았을 것 같다.

두 사람이 마음을 확인하고 결국엔 서로를 떠나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이 있었을지 가늠할 수 없다. 평생 라브레츠키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 기도할 리자도, 단 한번의 사랑을 놓쳐 그녀만을 그리워할 라브레츠키도 모두 안타까울 뿐이다.

마지막 작품인 무무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가장 크게 느꼈던건 결혼하고 싶은 사람조차 자유의지로 고를 수 없던 그 시대의 부조리함과 주인공의 비애였다.

누군가에게 종속됐다는 의미는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다르게 변화됐지만, 예전 계급이 있던 때의 많은 사람들의 강요된 맹목적인 희생과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주인의 명령에 잡지도 못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과, 자신을 충실히 따르던 개를 주인의 위선과 독단으로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하다니.

이 모든 것의 결정의 중심에는 게라심이 없었다. 오직 주인의 판단과 신경질적인 명령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결국에 게라심은 그 곳을 탈출하여 평생을 아무도 곁에 두지 않은채 살아간다. 그에게 사랑하는 여인과 충실한 벗을 잃었다는 상실감은 스스로를 고독하게 살아가게 할 원동력이 됐을 뿐이다.

흔히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고 하지만, 게라심은 평생 지키고 싶은 존재가 한정돼있어 그 존재들만을 향한 사랑에만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보다. 자신의 모든 것에 충직했던 사람인만큼 그것들을 지킬 수 없었던 아픔과 죄책감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대의 계급제는 지금도 이어져오고 있다. 다만 그때는 계급이 제도화된 세상이었기 때문에 하위층의 자유가 당연한듯이 억압됐었지만 지금은 자본이라는 형태로 바뀌어 다시 인간사를 다스리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의 인간성을 물질에 바치며 노예가 된 인간들은 타인을 착취하고 있다. 그때에도 지금도 게라심과 여주인의 관계처럼 인간의 계급제는 기계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세상에서도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되새기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마음을 억지로 잠재우고 살아가는 것만큼 공허한 것도 없을 것이다. 풍선처럼 커졌던 행복감과 기대감, 설레임이 빠져나간 자리를 다시 채울 수 있을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이들만큼은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사랑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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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토요일 밤이면 전화가 있는 현관 로비 의자에 앉아 나오코에게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토요일 밤에는 다들 거의 바깥으로 놀러 나가니까 로비는 평소보다 한산하고 고요했다. 나는 늘 그런 침묵의 공간 속에 이리저리 흩어져 떠다니는 빛의입자를 바라보며 내 마음을 찾으려고 애써 보았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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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말로 해 버리면 평범하지만 그때 나는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하니의 공기 덩어리로 몸속에서 느꼈다. 문진 안에도, 당구대 위에 놓인 빨갛고 하얀 공 네 개 안에도 죽음은 존재했다. 우리는 그것을 마치 아주 작은 먼지 입자처럼 폐 속으로다빨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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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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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운명을 정녕 벗어날 수 없는가

왜 이 고전이 그 오랜 역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내 생각으로는 인간의 삶과 운명 간의 관계를 명료하게 묘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 인간이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가. 아마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 질문들은 인간의 그림자 속에서 인간과 함께 공존해왔을 것이다. 이 고전에서 말하는 운명은 절대적이며 모든 인간이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우주적 흐름이다. 단지 그리스의 신들을 빌려 인간은 운명을 바꿀 수 없고 운명이 인간의 삶을 수놓는 절대신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운명 그 자체가 그리스의 신들과 동의어는 아니다. 그렇다고 믿기에는 신들이 굉장히 감정적으로 인간의 대소사를 처리하고 그것이 옳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들의 결정과 생각들이 신들의 것보다 더 현명하고 성숙하다고 느꼈던 부분이 많이 있었다. 트로이아의 파리스가 자신들을 최고의 여신이라고 고르지 않아서 그리스군을 지원한 헤라와 아테나만 봐도 그렇다. 그들의 대사 하나하나에서 트로이아를 멸망시키고 싶어하는 질투와 분노, 미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또한 제우스는 어떠한가. 전쟁에서 위기에 빠진 그리스군을 돕기 위해 헤라가 쓴 묘책에 걸려들어 이성을 팽개치고 욕망을 그대로 실현한다. 한마디로 신들의 행동과 말들이 모두 인간의 것과 너무 비슷하다.

그들은 신이기 때문에 인간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만 정작 자기들이 다스리는 인간보다 성숙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외쳐대는 신들을 향한 숭배가 그들의 한없는 염원과는 동떨어지게 들렸다. 본질은 서로 같은데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한 힘을 가졌기 때문에 신의 결정에 굴복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어쩐지 불합리하다고 느꼈다. 여기서의 신은 힘과 지혜가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게추가 기울어버린, 균형이 깨진 채 힘을 과시하는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신의 절대성이 선한 것과 옳은 것을 지향할 것이라는 일종의 편견에서 유발된 것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매체에서 다뤄왔던 신의 모습은 공통적인 이미지를 구축한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며 절대선이라는 느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처럼 화를 내고 질투하고 기뻐하는 그리스 신들의 모습이 내가 느낀 절대적인 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전쟁의 흐름과 아킬레우스, 헥토르의 운명이 신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느끼며 뭔지 모를 허탈함을 느꼈다. 이야기의 주제가 너무나 명확한데 그것을 부정하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어떻게 삶을 살든 자신이 믿는 바를 밀고 나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다. 좋은 일과 나쁜 일,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등 그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흐름이라면 인간은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일까? 애초에 운명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이 주제를 매번 생각할 때마다 답이 바뀌지만 적어도 지금은 운명이라는 것에 너무 매몰된 채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흘러가는대로 살되, 모든 일에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항상 느끼면서 겸손하게 사는 것이 지금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이다. 한 때는 운명이란 것은 없다고도 생각했었고 어떤 시기에는 내가 겪은 불행이 필연적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운명이 있든 없든 나는 결국 지금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고 내게 불어오는 그 어떤 미지의 힘에도 꿋꿋이 버티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그것이 진정한 영웅적인 면모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킬레우스보다 헥토르를 좀 더 응원했는데 헥토르가 그러한 맥락에서 좀 더 유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헥토르는 아주 많은 것을 짊어졌다. 신들의 자존심 싸움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결국 동생 파리스의 욕심으로 트로이아는 거대한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는 목숨을 걸고 적들을 죽인다. 물론 신들의 체스게임으로 그에게 유리할 때도 불리할 때도 있긴 했지만 그는 용감하게 전장을 누빈다. 아킬레우스가 무서워 도망갔을 때도 그와 싸울 사람은 자신밖에 없기에 다시 돌아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특히 그는 죽을 때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신이 자신을 저버렸음에도 사후에 자신의 죽음을 슬퍼할 가족과 트로이아 사람들, 국가의 운명을 걱정한다. 그는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아님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해결사의 위치에 있었고, 죽음의 고독함을 최전방에서 이겨내고자 고군분투했다.

아킬레우스는 이와는 반대다. 그는 아가멤논과 전리품을 두고 크게 다투어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자신의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각성했을 때는 자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죽었을 때였다. 그는 미친듯이 적들을 베어 죽이며 자신의 슬픔을 발산했고, 헥토르의 시신을 마차에 묶어 끌고 다녔다. 아무리 전쟁 중에서 사랑하는 친구를 잃었다지만 비인간적인 행동이고 신들도 잔인한 행동이라 말한다. 그는 헥토르와는 달리 자신의 감정과 기준으로 이 전쟁에 참가했다. 이미 자신의 운명이 단명할 것임을 아는 상태라고 해도 그는 그것만을 등에 짊어진 채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만 챙긴다. 상대적으로 헥토르에 비해 죽음과 운명에 있어서 여유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헥토르는 마지막에 신들의 뜻을 받아들이며 운명을 맞이한다. 그가 체념하기보다 담담히 운명을 마주했듯이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는 확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운명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면 나 또한 피하지 않고 맞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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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마르파 티모페예브나가 나가자 리자는 한쪽 구석에 않아서 울음을 터뜨렸다. 마음이 쓰라렸다. 그녀는 이런 굴욕을 당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사랑은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제저녁부터 두 번째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새롭고 뜻하지 않은 감정이 이제 겨우나타났을 뿐인데, 그녀는 얼마나 고통스러은 대가를 지불했으며 남의 손길이 얼마나 거칠게 그녀의 소중한 비밀을 건드렸는가! 그녀는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이 쓰라리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의심도 공포도 없었다. 오히려 라브리츠키가 더욱 소중해였다. 자기가 이 사랑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주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밀회 이후에 그 입맞춤 이후에 그녀는 이미 주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진심으로 진지하게 그를 사랑했고, 평생 동안 그를 굳게 사랑할 것이었다. -알았기에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관계를 강제로 끊을 수 없다는 걸 느끼고있었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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