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사회의 규칙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대가
인간의 선하면서도 속물적인 면을 모두 보여주는데 모든 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면밀히 묘사하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지면서도 조금은 벅찬 느낌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왜 제목을 안나 카레니나로 정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3부작의 대장정에서 안나 카레니나만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삶과 그 당시 사회와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도 매우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다만 잘못을 저지르고도 부와 사치가 그것을 정당화하기라고 하는 듯 뻔뻔하게 행동하는 귀족의 모습뿐만 아니라, 사회의 암묵적인 규범을 파괴한 인간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보여줄 수 있어서 안나 카레니나를 작품의 제목으로 한 게 아닐까 싶다.
귀족이라는 특수한 계층 내에서도 한 가정에 속한 사람이 그 가정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용납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나를 지지하는 귀족 중에는 남편이 있음에도 정부를 만들어 연애를 즐기는 여자도 있었지만, 안나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히 그 생활에 충실하지는 않았다.
안나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사회의 규범이 지키는 선을 완전히 넘어버렸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비난을 냉철하게 감당하는 듯 보였지만 그러한 시선과 자신에 대한 모멸감 때문에 그녀의 정신은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자초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자신이 넘은 선 위에서 줄타기를 하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주기만을 바라는 안나의 태도는 매우 이기적이다. 그녀가 한 행동을 보면 그 이기적인 행태가 더 잘 드러난다.
그녀는 남편을 끊임없이 증오하면서도 그가 주는 생활비를 받고, 정부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에게는 관심도 거의 보이지 않으면서 오직 정부의 사랑만을 바란다.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할 때 그녀가 보인 행동은 정말 역겹다. 출산하면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서 자신의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남편에게 용서를 구하는 등 자기합리화와 자기연민에 빠진 말들을 마구 늘어놓지만, 출산이 끝나고 자신의 상황과 감정이 안정되자 다시 남편에 대한 증오감을 드러낸다. 할 거면 하나만 하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온다.
안나의 남편은 정치인으로서 직장에서나 자신의 삶에서나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사랑과 낭만이라는 감정적인 관념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고, 그래서 안나가 바라는 따뜻한 가정까지 책임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안나가 파괴한 것들에 대해 아파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안나는 갑자기 사랑에 눈을 뜨며 그 사랑이 주는 온갖 따뜻한 감정과 쾌락에 몸을 맡기면서 그 사랑에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이후로 그녀에게 남편이란 자신을 구속하고 놓아주지 않는 역겨운 인간으로 변했지만, 난 그녀의 사랑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만큼 그녀의 남편에 대한 증오심은 철저하게 그녀의 입장에서 그런 것일 뿐, 그녀의 생각처럼 그가 형편없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나는 그저 그것이 그가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녀의 남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도 그녀의 외도에 대해서 충분히 아파했고, 어쩔 줄 몰라했으며 그녀가 다시 가정에 충실해지기를 빌었다. 다만 그와 그녀가 그렇게 파경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과 안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현저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아들이라는 공통적인 매개체를 제외하고는 그들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것들은 별로 없었다. 알렉산드로비치에게는 정치적으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 체면이 가장 중요했다면, 안나에게는 사랑과 쾌락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아들을 매우 그리워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놓은 난잡한 상황 속에서 아들을 딱 한번 보러 갈 수 있었을 뿐이고 아들과의 이별 역시 그녀가 감당했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와 안나 카레리나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용서다. 알렉세이는 안나를 용서했지만 안나는 알렉세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그녀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지탄받을만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지만 알렉세이에 대해서는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자신이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감한 여성이라는 자기합리화를 한 채 점점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브론스키에 대한 사랑만을 갈구할 뿐이다.
알렉세이가 안나를 용서한 것은 정말 선한 행동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성적 사고가 아닐까. 가정생활의 파괴를 불러일으키고 자신에게 혐오감만을 내보이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 것이다. 그가 안나를 용서하면서 했던 말들에 대해서 브론스키마저 감동했을 정도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의 이런 위대한 행동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웃었다는 점이다. 아내를 뺏긴 무능력한 남자라는 이미지만 커져서 그는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정치활동에서도 소외됐다. 그를 사랑하는 이바노브나 백작부인이 곁을 지켜주지 않았다면 그는 매우 외롭게 살아갔을 것이다. 그렇게 선한 마음으로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람을 용서를 했음에도 주변에 그런 진정한 마음을 알아주는 이 없이 살아갔다면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다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이바노브나 백작부인과 정체불명의 예언자의 영향으로 이성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안나와 이혼을 할지 말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자신의 생각으로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예언자의 뜻에 따라 이혼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사람이 너무 힘들면 미지의 존재에게 기대기도 하지만 자신의 판단으로 결정해야 하는 인생의 중요한 일들을 남에게 대신 떠넘기는 순간 그는 이성적인 결정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체성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알렉세이의 빛나는 정치력과 이성적 사고가 그렇게 퇴화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3부 후반부의 안나의 의식의 흐름은 안나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했다. 어떻게 이렇게 자세하고 세밀하게 사람의 감정을 묘사할 수 있는지 정말 놀라웠다. 안나의 생각을 자세하게 읽고 나서야 안나가 왜 그렇게 브론스키에게 매달리고 결국 미쳐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브론스키를 정말 너무 사랑해서, 그녀 자신에게는 평생 단 한 번 밖에 경험할 수 없는 사랑이라서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녀에게 남은 것이 그것 하나밖에 없어서 그렇게 브론스키에게 집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그토록 사랑했던 세료자도 못 보게 되고, 자신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고 남은 것은 브론스키뿐인데, 그가 사회활동을 시작하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자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던 것이다. 남편을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까지,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었지만, 브론스키는 다른 사람들과 사교활동을 하고 스스로의 부를 이용해서 점차 활동영역을 넓혔다. 자연스럽게 그와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고, 자신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브론스키를 선택하면서 그녀에게 가해졌던 수많은 무언의 비난이 그녀를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들었고, 결국은 자신의 그러한 처지를 이해 못해준다는 이유로 브론스키에게 끊임없이 시비를 걸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정말 불쌍한 인간이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브론스키와의 관계도 시들어가고 결국 피해망상과 아집만 남게 된다. 브론스키의 타당한 설득에도 그녀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들먹이며 아집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여준다. 1부 초반부에 그녀가 풍기던 지적이고 우아한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고, 어느새 부정을 저지르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불쌍한 인간만이 남았다.
결국 그녀는 1부에서 브론스키와의 만남에서 암시됐듯이, 달려오는 기차에 스스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는다.
브론스키를 잡으러 기차역에 가기까지 그녀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마치 생각을 끊을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피해망상으로 발전될 뿐이다. 자신이 죽으면 브론스키가 얼마나 후회할지 상상하며 만족감을 느끼는 모습에서 그녀의 삶이 끝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 모든 것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죽음으로의 도피 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중요인물인 레빈은 굉장히 독특한 인물이다. 귀족이면서도 농부와 농가생활을 사랑하는 그는 안나와 알렉세이 같은 다른 등장인물들처럼 인간의 삶에는 정해진 방향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그의 생각을 읽을 때는 좀 힘들었는데, 그가 너무 우울한 모습을 자주 보여줬기 때문이다. 키티에게 청혼을 거절당했을 때를 비롯해서 시시때때로 우울감에 젖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고요한 농경생활을 사랑하지만 인간관계 및 사교활동에 대해서는 매우 긴장하고 어색해한다. 나한테도 그러한 부분이 있어 레빈에게 공감이 갔지만 그는 사교활동을 너무 어색해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우스꽝스럽게 비쳐지기도 한다.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키티를 미워하고 그녀를 잊으려 노력하지만 그녀를 다시 본 순간 자신이 아직도 키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가장 순수한 인간상인 것 같다. 어릴적 외로웠던 생활을 잊고 자신만의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자 그는 많이 노력해왔고 결국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함께 가정을 꾸린다. 물론 그런 생활이 레빈이 생각했던 것처럼 매번 행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그 가정 생활 속에서 인간적으로, 남편으로, 아버지로서 성장할 것이다. 예를 들어 레빈은 무신론자이면서 종교활동을 은근히 무시했지만 키티가 아이를 낳을 때는 신에게 아내를 무사히 구해달라고 절실히 기도한다.
자신이 전혀 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러한 변화는 레빈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레빈은 다른 사람들과 단절된 채 살아왔다고 느끼면서도 자신의 자리만은 고수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삶과 철학에 고집이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자신을 위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겠지만, 가정을 만들고부터는 세상에 좀 더 유연하게 대응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태어난 아들에게도 서먹서먹한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이지만 자신이 깨닫지도 못한 사이에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사랑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위해 바뀌는 모습들이 그에게는 좋은 변화이자 변혁일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달랐다. 그녀에게 갑자기 찾아온 변화의 순간은 그녀를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 아들마저 버릴 정도로 강렬하게 느꼈던 사랑이지만 스스로의 인격마저 버렸던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쟁취한다면 다른 사람의 시선은 신경쓰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오만함이었다. 타인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인간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 강렬한 자의식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마저도 파괴하는 법이다.
내 자신이 선택한 변화라고 해도, 그것이 어떤 의미의 변화일지는 스스로도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안나는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온 규칙들이 고루하게 느껴졌고, 그것을 과감히 깨뜨릴 수 있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자 사랑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아니었다. 그렇지만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안나 카레니나처럼 자신이 구축한 이상적인 세계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려 하지 않고 타인도 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은 외롭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스스로를 가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