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문 애장판 세트 - 전12권
황미나 지음 / 애니북스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상당히 오래 된 작품이지만, 순정만화에 대한 나의 편견을 꺾어준 만화. 황미나 씨는 천재다. 소년만화 파라다이스, 개그물 수퍼트리오, 정통파 순정물 굿바이 미스터 블랙, 그 외의 수많은 작품들로 만화의 거의 모든 장르에 탐욕스러울만치 손을 뻗치면서도 각 장르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그분('그녀'라는 말은 무례하다!)의 필력은 실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만, [레드 문], 이 진지하고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와 동시에 [이씨네집 이야기]라는 대머리 아저씨가 방귀뀌는 개그물을 연재했다는 것은 이미 보통 인간의 정신구조를 뛰어넘은 어떤 영역에 이르러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장황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황미나 님에 대한 나의 숭배를 표현할 기회이기에 자제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되는데…)
[레드 문]에 대한 내용 요약은 의미가 없다. 이 작품은 단순하고 흔한 사랑과 애증으로 시작되어 힘의 가치와 마음의 가치를 논하며, 권력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설파하고, 음모와 속임수를 거쳐 무한한 희생이 무엇인지를 확연하게 내보인다. 어떻게 말하자면, 철저하게 독자의 기대를 배신한다. 언젠가는 누명을 벗고 다시 태양으로 떠오르겠지, 언젠가는 루나의 사랑을 되찾겠지, 언젠가는 친구들의 믿음을 받을 수 있겠지, 언젠가는 정의를 이루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설마 이것만이라도…
자신을 배신하고 배신하고 배신한 동생과 가족과 연인과 세상을 향해 모든 울분을 토로하고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을 자격과 권리와 힘이 있음에도 붉은 달 - 거짓된 태양으로 매도당한 필라르는 자신을 배신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어찌 말하면 생명보다도 소중한 것들을 최후의 한 조각까지 내어준다. 사랑과, 신뢰와, 믿음과, 힘과, 의지와, 그리고 이성까지도. 자신의 피로 오염된 세상을 정화하는 필라르의 모습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그저 한 질의 만화책, [레드 문].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만화가 아니다. 이런저런 감상이나 선전에 동원되는 허투른 수식어로는 부족하다. 짧은 눈물이나 즉물적인 감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레드 문]이라는 단 한 마디의 제목 만으로도 내 기억의 파편 속에서 생명을 얻어 마치 진정한 태양처럼 솟아오른 영원한 예술품. 마치 대리석에 새겨진 빗돌처럼 묵직한 기억. 나는 [레드 문]을 향해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바친다. 그 이상을 바칠 수 없음에 슬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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