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병기 그녀 1~7권 세트
타카하시 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등에 강철의 날개를 달고, 거대한 라이플을 늘어트린 채 불바다를 뒤로 하고는 멍한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는 소녀(그것도 교복!)의 일러스트 한 장으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좋은 사람]으로부터 이어진 그림자를 너무나 확실하게 걷어버리고 타카하시 신의 화풍을 완성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나치게 잘난 처녀작 때문에 학을 떼고 있는 수많은 만화가들(대표적으로 [바람의 검심]의 와츠키 노부히로. [건블레이즈 웨스트]는 정말 재미 없었다)과 비교하면 이 사실은 더더욱 빛을 발한다.
수많은 작품들이 그려냈던 개조인간, 최종병기. 그러나 타카하시 신의 최종병기 치세는 맹하고, 키 작고, 공부도 운동도 젬병, 입버릇은 '미안해', 자신있는 과목은 세계사이지만 인생엔 별 도움 안된다는 것 쯤 잘 알고 있으며, 잘 넘어지고 잘 다치는 아이다. "나… 최종병기가 되어버렸어…" 라는 힘없는 한 마디로 수많은 남정네들의 가슴을 진탕시킨 바 있는 치세는 절대로 지켜주어야 할 듯한 연약함과 무엇이든 요구해도 좋을 듯한 맹함, 그리고 절대적인 파괴력이라는 세 가지로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으며, 강력한 최종병기로서 도시 몇 개를 '지워' 버리고 몇 만의 적병을 '소거' 하며 모든 자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소녀가 점차 그 힘에 매몰되어가는 모습은 타카하시 신 특유의 섬세한 감정묘사에 힘입어 어떤 작품에서도 찾아보지 못한 슬픔으로 얼룩져 있다. "나,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 단 한 문장에 함축된 절망과 실낱같은 가능성에 매달린 가냘픈 기대의 조화는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리라.
그리고 그 심리묘사를 뒷받침하는 그림체는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유려하며 특히 여성의 몸을 아름답게 그린다. 누구처럼 어린 소녀 아니면 인체비례가 완전히 망가진다거나 손에 중기관총을 들었더라도 속옷 이상 걸치면 그리다 때려쳐버린다는 모 작가같은 행태를 보이지 않고, 동글동글하고 토실토실한 어린 소녀의 몸부터 그 품에 안기면 폭신 가라앉을 듯한 성숙한 여성의 풍만한 몸까지 '진짜 이상적인 여성'을 멋지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몸이 경험하는 농후한 성행위는 얼마 전 [쵸비츠] 리뷰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의 과정이자 목표이자 증명으로서,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되고 멈추는 모습을 확연하게 증거한다. 거기에 치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맹하기 때문에 더더욱 역사에 남을 퀄리티를 지니고 있다. "야한 짓이 하고 싶었으면 제일 먼저 나한테 말했어야지!" 흐미이이이이~!!(잠시 폭주)
그렇지만 전혀 야하지 않다. 그저 슬프고 안타까울 뿐. '이 작은 지구의 마지막 사랑의 이야기'라는 테마대로 그들의 마지막 작은 사랑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력한 슈지의 눈물과 치세의 가냘픈 몸을 통해 슬프고 슬프고 슬프도록 그려내어진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급류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남자로 성장해가는 슈지의 모습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자각하고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치세의 '성장'과 맞물려 진정 덧없는 아름다움과 안타까움을 일으켜보인다.
이미 만화책이 아닌 그림책이나 수필집 수준의 문자량, 거기에 더해 굳이 고집한 세로쓰기에 뻘쭘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하지만, 힘들게 읽은 내용은 그저 만화가 아닌, 무언가 깊은 의미를 담은 가치있는 작품이었다. 이런 작품과 만난 것이 큰 행운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런 때면 만화를 좋아한다는 사실부터가 큰 축복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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