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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번째 레인
카롤리네 발 지음, 전은경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5월
평점 :
얇은 소설이다. 쉽게 읽힐줄 알았던 소설은 상처입은 영혼 틸다와 이다를 만나고, 사고로 가족을 잃은 빅토르를 만나고, 그들의 아픔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 책은 소설이 아닌 나의 묵은 상처를 끄집어 내는 오래된, 빛바랜 일기장 같은 책이 되고야 만다
독일의 어느 작은 도시에 알코올 중독자인 엄마와 어린 여동생을 돌보며 살아가는, 사실상 소녀가장인 틸다, 현실의 족쇄에 묶여 발목이 잡힐때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때마다 수영장 레인을 스물 두 번씩 오가며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 그러던 틸다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세상 밖으로 나갈수 있는 기회,푸른 하늘에 희망이라는 구름이 뭉게 뭉게 피어있는 그런 미래, 그러나 이 미래를 선택하려면 알코올 중독자인 엄마에게 어린 동생 이다를 남겨두로 베를린으로 떠나야 한다. 이다를 술만 마시면 괴물이 되는 엄마 옆에 홀로 두고 차마 선택하지 못하는 틸다, 사랑과 책임, 내 삶에 대한 강한 끌림 앞에서 고뇌하며 성장하는 틸다와 이다의 이야기이다
그럴때면 나는 완전히 작동을 멈추지 않아? 튜브에는 그저 내 몸만 누워 있어. 늘 기준이 다른 구름이,자기가 얼마나 강하고 따뜻한지 매번 새로 보여주는 해가, 그리고 어느날은 해가 같은 편이다가 다음날은 구름과 동맹을 맺는 바람이 있을 뿐이야. 바람과 구름과 해, 냉기과 온기, 사실은 아주 간단해 (p.95)
틸다와 이다의 유대의 끈과, 스물 네살인 딸의 보살핌으로 살아가는 엄마, 온 가족을 사고로 잃은 빅토르를 각각 생각해봤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할 때 가족의 관계망은 위험해진다. 부모가 흔들이고 인생과 외줄타기를 하게되면 아이들은 일찍 철이든다.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생존을 위해서. 그들끼리의 유대가 더 끈끈해진다. 틸다와 이다는 자매 이상의 끈으로 유지된 사이다.
결혼 후 자신과 아이를 두고 떠나버린 남편, 그녀의 시간은 거기에 멈춰 있다. 자라지 않는 어른이다.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수 있다는 불안에 살고 있고, 오히려 그 불안으로 사랑하는 이가 떠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녀의 삶에 엄마라는 타이틀은 족쇄가 아니었을까. 모성보다 자신을 사랑한 자신이 스스로도 용납이 안되지 않았을까? 그녀는 남편이 아이와 자신을 남겨두고 떠날 때 삶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어렸고 엄마도 처음이었다. 원망보다는 안타까운 인물이다.
빅토르는 어린 나이에 천재소년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아이다. 자신의 그 천재성으로 번 돈으로 가족에게 집과 차를 선물하고 그 차를 타고나간 가족이 사고를 당했다. 빅토르의 시간도 멈춰있다. 그는 가족이 살았던 집을 떠나지 못하고 괴로워 질때마다 수영장을 찾아간다.
이 소설에서 제일 철이 든 인물은 제일 어린 이다가 아닐까 한다. 삶에서 중요한 기회가 찾아든 언니를 기꺼이 떠나 보낼수 있는 마음, 틸다와 빅토르의 인연을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사랑보다 인생의 서로 치유가 되고 구원이 되는 관계임을 먼저 알아챈, 속에 뭐가 들어 앉았나 싶게 속이 꽉찬 아이.
동이 틀 무렵 우리는 걸어서 돌아온다. 안타깝게도 바닷가로 가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다. 우린 시간이 있으니까 이제야 막 서로에게 도착했으니까 (p.283)
출판사의 지원도서이며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