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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엄마를 그곳에 두고 올 수 없었다. 머지않아 좀도둑이 안경을, 심지어는 유골까지 훔쳐가겠다고 엄마의 무덤을 파헤치리란 생각을 하면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주술이 국가 종교가 되어버린 그 무렵,뼈는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닭의 모가지를 치는 이빨 빠진 국가. 그 순간 , 몇 달만에 처음으로 온몸으로 울었다,두려움과 고통에 몸이 떨렸다. 엄마 때문에, 나 때문에, 둘도 없던 우리 때문에 울었다.밤이 오면, 아델라이다 팔콘, 우리 엄마가 산자들에게 휘둘릴 그 무법지대를 생각하며 울었다. 단 한번도 평화를 내어준적 없는 땅 아래 묻힌 엄마의 주검을 생각하며 울었다. 조수석에 올랐을 때 나는 죽고 싶은게 아니었다.나는 이미 죽어 있었다 (p.35)
교사 생활을 하던 엄마의 죽음,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던 아델라이다 팔콘, 엄마와 같은 이름으로 사는 아델라이다. 나, 너, 우리였던 엄마와 딸. 그녀에게는 단순한 한사람의 죽음이 아닌, 한 세계가 무너지는, 그녀의 우주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소설에서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라는 장소외에 시대나 인물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그럼에도 읽다 보면 베네수엘라의 정치적, 사회적인 어느 한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을 알수 있는데 실제 시대적 배경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이야기가 이해가 안되거나 흐름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길래 라는 의문이 생겨나고 구체적인 배경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서 읽는 도중 인터넷을 검색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피비린내가 난다.피칠갑을 한 사람들이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팔이, 손이 보이는 느낌,여기 저기 길에는 화염병과 건물과 사람을 태우는 불길,길을 지나다 어디서가 날아오는 총에, 칼에 주먹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에서 아델라이다는 국가가 자기를 밀어내고 있다고, 이 거리에서 이 나라에서 살아남으려면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것은 그녀와 엄마의 집 때문이리라
그 집이 무장 부대가 이끄는 무리들에게 점거 당하고 살기 위해 피신중 우연히 옆집문을 열고 들어가 도움을 청하려고 했을 때 그녀가 발견한 건 이미 죽은 스페인 여자의 딸인 아우로라 페랄타.거실 탁자위에는 아우로라에게 스페인 여권 발급이 허가 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우편물. 그리고 휴지조각이 된 베네수엘라의 화폐 말고 아우로라가 남겨놓은 유로.
무덤을 파헤쳐 죽은 이의 뼈까지 훔쳐가고 묘비에 적힌 글씨까지 파가고 해골가면을 쓴 경찰과 무자비하게 끌려가는 시위 학생들, 남의 집을 점거하고는 방바닥에 똥을 싸질러 놓고 부수고 망가뜨리는 보안관, 동료는 없고 사방이 적과 죽음뿐인 그곳에서 그저 살기 위해 아우로라의 신분을 훔치는거 외에 그녀가 할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내 의무는 살아남는 것이었다 (p.248)
자매처럼 지낸 친구 아나와 아나의 동생 산티아고를 통해 그 시절 무자비한 폭행과 죽음,정의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 않게 이뤄지는 살인,억압,강탈을 넘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유없이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과 무너지는 인권. 결국은 잔혹한 물리적인 폭력앞에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그 안에서 상황이 그리 정글처럼 변하더라도 아직은 짐승처럼 행동하지 않으려 하는 아델라이다의 몸부림은 그래서 더 처절하고 슬프다.
조금씩 이야기가 흐를수록 묘한 기시감이 든다.어디선가 본 듯한, 비슷한 느낌, 물론 나라마다 시대적인, 사회적인 정황이나 배경은 분명 다르나 힘 없는 국민들을 먹잇감으로 삼고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모습으로 책장에서 피맛이 나는 느낌이 들던 이 느낌은 그저 5.18을 지나고 있어서 만은 아닐 것이다.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역사의 아픔의 상처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이 책은 군부 쿠테타로 폭력이 한창인 미얀마나 죽음의 문턱을 넘어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와 같은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머나먼 과거가 아닌 여전한 현실임을 자각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허구이고 자전적 소설이 아니라고 작가가 분명히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르포처럼 읽히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가슴이 먹먹한 소설이다.
출판사 서평단으로 지원받은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