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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안녕 - 도시의 힘없는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공감과 위로!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2월
평점 :
뜨겁게 쿨한 여자의 20대 일기.
"살다보면 그런 일도 있어, 나도 다 겪은 일이야. 그러니까 힘내" 이런 차분한 위로의 글은 이 책의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위로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하지만 읽는 내내 무언의 텔레파시를 보낸다. 아마 이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토닥토닥 쓰담쓰담이 아닌 등짝을 퍽! 치며 시원하게 한 마디 한다. "쫄지마! 살아! 울어도 살고, 울면서 살고, 무조건 살아!"
표지 속의 부드러워 보이는 여자는 그녀가 아니다. 아니 그녀이긴 하지만 이 책 속에서 뜨거운 청춘을 살았던 그녀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배를 잡고 웃다가, 이불에 얼굴을 뭍고 엉엉 울다가 하면서 친해진 그녀는 그녀 안의 "경상도 아저씨"였다. 그녀는 그렇게 말한다. 내 안에 경상도 아저씨가 살고 있다고. 집도 절도 돈도 빽도 없이 살아왔다는, 서울의 도시빈민이라 말하는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살기 위해 자신 안에 경상도 아저씨를 키웠을 것이다. 그래서 힘들어도, 힘들 수 밖에 없는 삶에서도 꿋꿋하게 그리고 당차게 살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생의 처음 경상도 아저씨 뒤에 숨겨져 있던 아가씨의 모습이 나왔을 때 그녀는 무너지고 만다. 여리디 여린 아가씨의 마음으로 아파서 무너지고, 무너지는 모습에 화가 나서 무너지고. 그렇게 또다시 그녀는 경상도 아저씨라는 단단한 방패와 가면을 꺼내 굿센 언니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나 같고, 내가 그녀 같았다. 쿨한 척, 센 척 하지만 그녀도 여자다. 하지만 여려질 수 없다. 살아야 하니까. 더 꿋꿋하게 버텨내야 하니까. 힘든 생활과 외로움에 남자를 끝없이 만나기도 하고, 20대의 모든 청춘을 술을 손에서 놓지 않고 보내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그녀를 살게 하는 버팀목이었으니까. 집이라 말하기도 힘든 집에서의 삶, 그래도 지친 몸을 뉘일 공간에 그저 행복해하던 그녀. 매달 갚아야 하는 할부로 낸 등록금과 수업이 끝나면 달려가야하는 회사, 공부하랴 회사에서 시달리랴 그녀는 지칠대로 지쳤을 것이다. 거기다 툭하면 물에 잠기는 집, 동네의 살인 사건, 틈만 나면 들이닥치는 술취한 집주인, 나라면 과연 그 생활을 버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 조금은 다르지만 나도 그녀와 비슷하다면 비슷한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나 또한 학교 생활과 회사 일을 병행하며 이도저도 아닌 생활로 20대 초중반을 날려버렸기 때문에 아직도 때때로 한숨을 쉬지만 그녀의 과거를 들여다보니 나 따위는 아주 배부른 생활을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강했다. 강해지려면 늘 술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내면에 경상도 아저씨는 쿨하고 낙천적이고 용감했다. 경상도 아저씨 뒤에 숨은 착한 아가씨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나올라치면 그녀는 '호구는 타고난다.'라는 말로 나를 빵 터뜨렸다. 그리고 된장녀 대신 자신은 늘 환장하는 환장녀라며 자신의 상황을 쿨하고 재치있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현실을 너무나 잘 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노력하면 안 되는 건 없다고, 노력하면 다 잘 산다고,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은 노력하지 않아서라고 했던 말을 그녀는 그 때부터 믿지 않았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지만, 노력이 모든 걸 해결하지는 않는다. 그게 사실이고, 현실이다. 하지만 청춘들을 향하는 모든 책들엔 '노력'이란 단어가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해리포터의 마법주문이라도 되는냥 떠들고 있다. 희망과 노력도 좋지만 때론 주위를 둘러보는 시선이 필요한 것 같다. 차마 눈을 돌리려 하지도 않는 그 헤지고 어두운 곳에도 사람은 살고, 빛은 있으니까. 그 속에 숨은 보석같은 사람들을 그녀는 보았고,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산다. 얼어붙은 산꼭대기 동네에 살아서 눈이 오면 아파도 병원에 못 가는 할머니를 업은 채로 미끄러질까 조심조심 내려오면서, 누군가를 구하려다 자신의 목숨을 잃은 청년의 비석을 보며 '미안해요, 나 잘할게요. 열심히 살게요'라며 자신도 알 수 없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사람과 삶을 위해 투쟁하면서 그녀는 오늘도 용감한 도시빈민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본 나도 지금까지의 한숨과 '뜨겁게 안녕' 하고 또 다른 내일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