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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ㅣ 살림지식총서 369
박영은 지음 / 살림 / 2009년 5월
평점 :
도스토예프스키의 철학이나 문학 등에 대한 말들은 독서가들이나 북클럽에서 자주 접해왔으나, 러시아 문학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옅은 지식만 가지고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풍파가 많았던 삶과, 그 삶을 녹인 많은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를 친절하기 풀어낸다. 유명한 러시아 문학의 대문호이자 죄와 벌 등 유명한 문학의 '저자'로만 알고 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족애와 로맨스가 담긴 인간적인 면모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적이고 중독적인 모습 등을 드라마처럼 이야기해주며, 그런 삶 속에 포함된 지나치게 잦은 지옥 같은 풍파들을 마치 영화를 보듯 그려내고 있어 영상을 보듯 흥미진진하게 읽어갈 수 있었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에 비극이 찾아올 때마다 함께 미간에 힘이들어갔기 때문에 보는 내내 미간에 주름을 펼 시간은 거의 없었다.
결국 체포된 도스토예프스키는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 8개월 동안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감방에 구금되어 있었다. 토굴 감옥의 암흑에 파묻혀 지내야 했던 끔찍한 시간에 많은 구금자들이 자살을 시도하거나 미쳐 나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앞이 보이지 않는 그 시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한층 더 강인함을 얻었다. 1849년 판결을 기다리며 감옥에서 쓴 메모는 그의 정신력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인간 내부에는 인내와 생명의 거대한 저수지가 있다. 사실 그것이 이토록 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난 이제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낙담한다는 것은 죄악이다. 나는 상황이 더 나빠질 거라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난 지금 내 안에 고갈되지 않는 생명력이 비축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p. 22
하지만 그 순간 그가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이런 생각이었답니다. "만일 내가 죽지 않는다면 어떨까, 만일 생명을 되찾게 된다면 어떨까, 그것은 얼마나 무한한 것이 될까, 그리고 그 무한한 시간이 완전히 내 것이 된다면, 그렇게 되다면 나는 1분의 1초를 100년으로 연장시켜 어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1분의 1초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한 순간도 헛되어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했다는 겁니다.
p. 27
저자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삶의 에너지를 끌어올릴 수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힘을 '강력한 낙관주의'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 심경이 '낙관주의'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적인 성향의 사람들,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심적으로 다치고 아플 수록 작업력이 오르는 그런 현상에 가깝지 않을까. 음악을 하는 사람들 중 자신의 창작을 위해 일부러 이별을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글을 쓰기 위해 스스로 고립되는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에서 느낀 정신력은 최악의 상황에서 발휘된 작가적 관찰력으로 일상 생활에서보다 더 많은 소재와 캐릭터들을 얻을 수 있기에 자기도 모르게 생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가족애와 작가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지만 과소비와 허세가 심한 사람이었고, 오랜 시간 빚에 시달렸으며, 도박에 빠져 없는 돈 까지 날리길 반복했다. 하루만에 돈을 다 날리고 아내에게 뻔한 변명이 담긴 편지를 보내고, 용서해 달라고 비열한 놈이라고 나무라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면서도 도박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돈을 잃으면 엉뚱한 구실로 아내의 발밑에 쓰러져 대성 통곡을 하고, 조금이라도 따면 온 세상을 차지한 것처럼 요란을 떨었다고 한다. 도박 밑천을 구하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을 거덜내야만 성이 차고 아내가 싫은 소리를 하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하며 아내의 옷가지들 까지 전당포에 맡기며 도박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 찌질한 모습을 본 젊은 아내는 이상하게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현실적으로 인지하고 바꾸려 하지 않고 '돈을 잃었다'는 팩트보다 남편이 돈을 잃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며 그 아픔을 공감하고 슬퍼했다. 아내가 남긴 회고록에 도스토예프스키를 성인 같은 존재로 묘사했다는 부분에서 객관성을 잃었다는 평을 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그보다 더한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부부 중 어느 하나도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두운 면을 여과없이 보여주지만, 도박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그는 도박을 위한 도박을 사랑했고, 그것의 저열함과 공포, 달콤한 고통을 사랑했다. 그의 본성은 항상 극단적인 감각들, 운명과의 한판 승부, 파멸의 전조 등을 필요로 했는지 모른다."로 표현하며 마치 그의 도박중독이 작가적 경험을 위한 것인 듯 이야기했으나, 시작은 그럴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지나치게 중독된 이상 그건 과대포장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결과적으로 행운처럼 나타난 아내 '안나'로 인해 비극이 줄을 지었던 젊은 생애를 지나 밝은 노년으로 생을 마무리한다. 아버지와 형, 딸과 아들을 먼저 보내고, 사형집행을 경험하고, 간질에 시달렸으며, 도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나 그 모든 어둠 들이 스스로가 가진 필력에 힘입어 문학적 작품으로 재탄생하여 한 시대의 획을 긋고 60세에 생을 마감했다. 늘 돈에 시달리고 심적 고통에 시달렸으나 그의 장례식에는 그에게 사랑을 표하려는 5만여 명의 대군중이 운집했다고 한다. 그의 고통과 절박함이 만들어낸 예술과, 그 작품으로 인해 영향을 받은 수많은 작가들과 독자들. 이 책으로 인해 그의 어두운 삶과 도박중독, 생각 없는 과소비 등을 알았기에 그의 삶이 존경스럽진 않지만 힘든 삶과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작품에 그대로 투영해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는 정말 대단하고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작가로 살아왔다고 표현하기보다 작가로 태어났다고 표현하는 게 훨씬 잘 어울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