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를 으깨며 노리코 3부작
다나베 세이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p. 27
늙는 것이 특별히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마음이 황폐하게 늙는 것은 좋지 않다.
늙는다는 것은 메리처럼 상아조각이 '세월의 안개에 싸여서 소리 없이 고요하게 바래가는 것' 같아야만 한다.
안절부절못하고 마음이 황폐해지는 늙음, 그것은 '늙음'이 아니라 그저 '노인이 된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노인이 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지만, 상아조각처럼 늙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일이다. 거울 앞에서 자기 몸을 보고 '어머나, 어쩜 이리 아름다울 수가! 좀 봐봐!' 하는 자화자찬이 켜켜이 쌓이면, 어느새 느낌이 좋은 '늙음'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자기애가 없는 여자는 향기 없는 꽃과 같다 하지 않던가!
 
 
p. 120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그것은 인생이다. 정말 인생이다. 그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인생은 여러 가지 일에 도움이 된다. 특히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다시 태어나 있다.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살아 있지 않을 것이고, 기계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나의 하루하루는 나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 같은 것이다.
- 프랑스 영화배우 '브리짓 바르도' 인터뷰 내용 中
 
 
p. 87
이렇게 케이를 놀리니, 케이는 수염으로 덥수룩한 얼굴을 박박 비비면서 말했다.
"아니, 꼭 그렇게 놀려야겠냐? 나 이제 어려운 생각은 될 수 있으면 안 하면서 살고 싶다. 너무 어려운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거기에 못이라도 박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행복한 사람은 어려운 생각을 사서 하려고 하지만."
케이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만, 가끔 '후무 테츠'가 심원한 잠언을 자기도 모르게 입에 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좀 감탄했다. 행복한 사람은 시간이 남아돌아서 여러 가지 건드리지 않아도 될 상처를 건드리거나, 문제시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일부러 왈가왈부하는 것이라고 한다.
 
 
 
'저세상에 간대도 이보다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아'
 
3년 간의 수감생활(결혼생활)을 끝내고 자유의 몸으로 돌아와 행복을 듬뿍 만끽하고 있는 노리코의 이야기.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거라며 너무너무 아름답고 빛나는 서른다섯을 즐기고 있는 그녀는 내가 여지껏 본 어느 드라마 속의 여주인공 보다 멋졌다.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혼해야 한다'고 생각 하며 샤워를 하고 나와 거울을 보며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그녀는 마치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 보였다.
 
엄청나게 부유한 거기다 연하에 매력이 넘친다는 (순전히 노리코의 생각) 고와 결혼을 했지만 그녀의 삶은 몽땅 고에게 맞춰질 수 밖에 없었다. 고의 부잣집 아들 답게 집착과 거만함 자만심 등의 저질 성격 덕분에 친구도 일도 다 포기하고 고의 악세사리 같은 삶을 살았던 노리코. 덕분에 고와 부유함을 몽땅 버리고 나와 자유를 만끽하며 그림을 그리고, 친구를 만나고, 여행을 다니고, 아주 소소하게 우유에 딸기를 으깨어 먹는 그 작은 일에도 무한의 행복을 느끼는 그녀는 웃기게도 수감생활로 돌아가기는 싫어했지만 고에게 만은 어쩐지 관대했다. 다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그 역겨운 자만심과 타인의 모든 면을 경멸하는 그 고집스러운 거만함이 어떻게 그의 매력으로 보일 수 있는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래 그랬던 사람이 여전히 그런 모습을 보이면 재미있을 수도 있고 어쩐지 반가울 수도 있겠지만 아마 나였으면 스트레스에 3년은 커녕 1년도 되지 않아 스트레스로 미쳐버렸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 만끽하는 모습에 나 또한 행복해 지는 느낌을 받았다. 행복에 돈이 빠질 수야 없겠지만 일상의 소소한 자유, 그게 진장한 행복이 아닐까. 마치 주말 오후 알람 없이 느즈막히 일어나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뒹굴뒹굴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하루를 낭비하는 그런 하루. 일상에 치여 있을 때 가장 부러운 그런 마음의 여유. 어쩌면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은 그런 사소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누울 공간, 창문을 열면 싱그러운 바람이 들어오고, 내가 먹고 싶은 걸 내가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고, 귀찮으면 빨래도 설거지 거리도 쌓아둬도 상관 없고, 듣고 싶은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친구들을 불러 밤새 수다를 떨거나 와인을 마셔도 좋고, 며칠 훌쩍 떠났다 돌아와도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 것. 자유. 그 행복을 노리코는 만끽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주위에는 그녀와 같은 자유를 만끽하는 상아색 여자들과 든든한 남자친구들이 있었지만.
 
'딸기를 으깨며'의 전작 '아주 사적인 시간'에서 고의 가족사가 나온 것 같은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일로 인해 노리코의 형무소 생활이 끝이 난 것 같아서 얼른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읽으면서 일본 소설 특유의 감성이 느껴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작가 다나베 세이코 였다. '아주 사적인 시간'과 함께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 요란하지 않은 파스텔 컬러의 감성이 얼어있던 겨울에 봄을 불러오는 것 같아서 읽는 동안 너무 행복했다.
 
(아마 내 친구들은 내가 이 책을 읽은 걸 알면 분명 폭발적인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이다. 안 그래도 결혼 생각과는 담을 쌓고 자유롭게 혼자 사는 것을 찬양하는 나를 어떻게든 바꿔 놓으려고 애쓰는 친구들이라. 그런 생각을 하니 어쩐지 마치 나와 같은 행복의 기준을 가진 노리코가 친구같이 느껴져 이 책이 더 좋아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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