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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드릴게요 - 정세랑 소설집
정세랑 지음 / 아작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란 이따금씩 깊은 사색에 잠기곤 한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내면에서 흐르는 이야기들을 글로 적으세요 하고 듣는다면, 그게 생각보다 꽤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다. 같은 한국어를 쓰더래도 내 안의 표현으로 남을 이해시키도록 글을 쓴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니니까 말이다. 나는 정세랑 작가님의 작품이 그런 복잡한 감정들을 공감이 가도록, 또 명료하게 문장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명료하게 표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딱딱한 글도 아니며, 오히려 읽는 입장에서는 감성에 젖어드는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정세랑 작가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한창 작가님원작의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이 주변에서 화제가 되었던 시기였다. 장난감 물총이나 검으로 세균퇴치를 하는 보건선생님이란 이 특이한 소재는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슨 작품이지? 하고 건드려볼만한 느낌이다. 홍보영상을 보고 궁금해져서 1화를 봤다가 생각보다 심오한 내용에 잠시 끝까지 보는 것을 미뤄뒀다. ㅋㅋㅋ
어느 날, 읽을 책을 고르다보면 정세랑 작가님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보건교사 안은영 보다 말았는데, 원작을 먼저 읽어볼까?'하던 찰나, 작가님 단편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에 더 마음이 강하게 이끌렸다. 어쩌면 평소에 내가 자신의 무언가를 잃어버려가면서라도 하고싶은 일에 용기를 내는 인어공주 이야기를 좋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코랄의 고운 표지가 눈에 들어와서 였을지도 모르고.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단순히 이야기를 설명해준다기보다는 독자들이 읽으면서 그 문구를 한번더 곱씹어보도록 유도할만한 묘사나 내용들이 많다. (작가님의 글 스타일이 원래 그런거려나?아직 다른 책을 안읽어봐서 모르겠다.) 작가님이 평소에 얼마나 생각을 깊게 하시는지, 또 얼마나 그 내용을 글로 잘 표현하시는지가 이 단편집에 매우 잘 드러난다. 로맨스도 조금씩 섞여있어서 그런가 읽고있으면 마음이 막 간질간질하당ㅎㅎ
장르가 SF면 보통 미래 기술(또는 데우스엑스마키나), 주변인물의 희생, 주인공의 각성이 주가 되어 '짠~문제가 해결되었어요. 주인공은 어떻게되었고…, 주변인들은 어떻게 되었으며….' 등등 표면적 결과, 인물간의 관계나 감정은 알 수 있을지 몰라도 역시 중심은 그 세계관의 배경이 어떻게 변했는가에 무게가 더 실어진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내용은 다른 책들과 조금 차이점을 두게 된다. 문제를 대면하거나 타파하는 것 자체의 연대기가 무대가 아닌, 그것을 타파해가는 사람들의 마음속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흘러간다. 문제가 어떻게 풀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여러 문제가 일어나는 그 곳에서, 주인공들이 어떤 마음으로 상황을 임하며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있어 읽다보면 이입되어 많은 생각을 하게된다. 미래배경에 대한 설정이 설득력도 있고.
깔끔한 느낌이라 읽기 좋았다. 이런 장르의 글은 내 기준 대개 등장인물들간 언어의 캐치볼에서 날카로움이 느껴지거나 악한 감정이 보이거나 해서 불쾌감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는데,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그런 불쾌감이 없었다. 읽기 편안한 책이었다. 독서를 하며 이런 담백함은 처음 느껴본다 ㄷㄷ 신기했어...! 뒤에 해설과 작가님 후기가 따로 있는데 읽어보니 왜 이리 편하게 읽었는지 납득이 갔다. 작가님이 일부러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글에 장치를 해둔거구나. 끝까지 위트있고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본 소설들도 재미있었지만 해설과 후기를 읽는 것도 이 책의 즐거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 감상으로「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작가님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문장력이 굉장한 책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몰입도도 높아서 금방 읽었다. 그리고 몰랐는데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이 8년이란 시간차가 있다던데 지금 읽어도 불편한 부분없이 내용이 너무 좋다..! 다 좋았지만 마음에 들었던 단편은 [11분의 1] [목소리를 드릴게요]. 작가님의 다른 작품도 구매해서 볼 예정~ 재밌었당!
손가락은 언제나 가장 곤란한 곳에 있었지. 독재자가 즐겨 쓰는 모자 벨트에 끼어 있었고, 길고 긴 사막 길을 가는 상인의 수통 속에 들어 있기도 했고, 과학자의 완두콩 밭에 묻혀있었고,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사람의 속옷 겹겹 사이에, 첨탑의 종 속에, 기와의 이끼 안에, 보석상의 펠트를 댄 서랍에… - P11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 각지고 나약한 몸을 제가 사랑하긴 했어도, 사실 오빠와 대화만 할 수 있다면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 P33
"너는 오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널 한번 더 본 것만으로 그 추운 곳에 가서 죽을 수 있어." - P38
과거의 풍요로움이란 굉장히 기분 나쁜 풍요로움이었던 것 같다. 이어 작은 동물원의 흔적을 찾았을 때는 여러 사람이 토했다. 윤리는 본능적인 비위에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짧은 시간 동안 급격히 변화하기도 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 P82
며칠 전에는 아바의 <I have a dream>을 틀어주었는데, "나는 천사를 믿어요.(I believe in angel)" 라는 가사에 인면어들은 괴성을 지르고 천사만 깔깔 웃었다. - P122
학설을 뒤집고 또 뒤집은 젊은 학자들은 원래도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 P145
수용소는 연선을 위해 지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끊임없이 바라봐야하는 얼굴의 여왕이 다스리는 태평성대였고 백성들은 그저 찬탄했다. - P188
하필이면 사랑이 일목 대상인 일목인처럼. 물거품이 될 각오가 선 인어처럼. - P215
날다람쥐가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날다람쥐를 위해 죽을 수 있을 것 같다고도 느꼈다. 나방이나 노린재같은, 날다람쥐보다 보잘 것 없고 아름답지 않은 종을 위해서라도. - P227
영광은 분명 존재한다. 영광의 좁고 동그랗고 하얗게 빛나는 영역 안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에게 영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다. 정윤은 영광을 원한다. 기억하는 한 언제나 그래왔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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