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한중록 (패브릭 양장) - 1795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혜경궁 홍씨 지음, 박병성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러고 보면 나에게 혜경궁 홍씨는 언제나 ‘그냥 혜경궁 홍씨’였다. 사도세자와 정조에 관한 이야기는 새로운 정보의 유입과 함께 이미지가 갱신되었으나, 혜경궁 홍씨에 대한 이야기는 그때도 지금도 한결같이 들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그녀의 이야기가 늘상 궁금했는데, 이번 기회에 무려 초판본으로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 『한중록』을 읽기 전부터 절절한 내용이 담겨 있을 거라는 슬픈 예감 반, 옛 글이니 어려울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 반이 뒤섞였다.



 

 


     『한중록』은 총 여섯 권으로 나뉘어 있다. 1권에는 혜경궁 홍씨의 집안 이야기와 간택된 이후의 궁중 생활이 적혀 있다. 2권에서는 임오화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조가 다른 자식을 편애했던 일, 사도세자가 어릴 적부터 교육에 힘쓰지 않고 유난히 박했던 태도를 완곡히 지적한다. 동시에 남편에게 병환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초반에는 과하게 무서워하는 경계병에 그쳤던 증세가 내시를 매질하거나 죽이고, 심지어는 궁녀 빙애에게 마구 지출하는 식으로 심화되어 나타난다. 3권에서는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이유를 묻는다. ‘사람을 죽여야 화가 풀린다’고 곧이곧대로 대답하자 영조는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나 얼마 이어지지 못한다. 임오화변 이후 친정으로 돌아갔던 혜경궁 홍씨와 세손이 다시 입궁하고, 세손은 경희궁으로 들어가 교육을 받는다. 4권에서는 자신의 아버지 홍봉한이 어떤 무리의 읍해로 조정에서 물러났다고 말한다. 혜경궁 홍씨는 집안을 구하기 위해 동생 홍낙임에게 화완옹주 집안과 친할 것을 이르고, 영조가 죽은 뒤 정조는 사도세자 묘를 이전한다. 5권은 화완옹주와 홍국영에 대한 험담이 주를 이룬다. 고모인 화완옹주가 모자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고, 방탕하나 약간의 재주로 듣기 좋은 말을 하는 홍국영이 정조의 혼을 쏙 빼놓았다고 말한다. 더불어 홍낙임의 참화를 비통해한다. 6권은 정조가 “내 기구함과 처지의 원통함”을 알고 원을 풀어 주기를 바란다는 이야기와 “티끌만치라도 꾸며내거나 과장한 것”이 없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죄송한 마음을 고백하고, 귀주가 자신의 집안을 해치려 끊임없이 모함했다고 말하며 글을 끝낸다.







  읽는 내내 답답했다. 사도세자의 아내, 정조의 어머니로서 비통했을 심정은 막연히 이해했으나, 그녀의 필체로 읽는 이야기는 조금 더 생생히 다가왔다. 경모궁을 대하는 영조의 태도에 의문을 제기할 때는 나 역시 고개를 갸우뚱했으며, 바로 옆에서 변해 가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는 과정에서는 마음이 저몄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차라리 죽어 못 본 척하고 싶다는 말에서 혜경궁의 고통이 절절히 느껴졌다. 결혼 생활이라도 순탄했으면 좋았겠지만 사도세자는 몇 번이나 궁녀와 얽혔다. 남편의 외도를 고하면 당대의 도리에 어긋나고 고하지 않으면 영조에게 꾸중을 듣는 등 그녀의 입지가 생각보다 훨씬 더 곤란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임오화변을 지켜본 뒤 아들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영조를 향한 도리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후자를 택할 때는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한편 홍국영과 정조의 사귐을 두고 걱정하는 대목에서는 혜경궁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떠나 아들을 둔 어머니의 모습이 엿보여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한중록』의 저자는 혜경궁 홍씨라는 특정 인물이기 때문에 철저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4권부터 6권까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집안 간 권력 다툼에서 비롯된 이야기이며, 세세한 전말은 밝히지 않되 전체적으로 음모에 ‘당한’ 가족 구성원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어 객관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 부분에서는 나 역시 자신의 집안에 관해서 어느 정도 편을 들었으리라 생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읽기 전이나 지금이나 이 책이 주관적이라는 사실이 문제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역사라는 게 원래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런 사소한 문제로 배제해 두기에 『한중록』은 문학적 가치가 무척 뛰어난 책이다. 저자가 여성인 점도 그렇지만, 문체가 경박하지 않으면서도 읽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으며 입궁하기 전과 후의 삶과 임오화변이라는 큰 사건을 엿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굉장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이미 사도세자에 관한 이야기는 지겨울 정도로 들어 알고 있더라도, 언젠가 한 번쯤 이 회고록을 꼭 만나 보기를 추천한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사람의 비밀
캐런 M. 맥매너스 지음, 이영아 옮김 / 현암사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캐런 M. 맥매너스의 두 번째 소설이 출간되었다. 이번에도 첫 번째 소설이었던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와 흡사한 표지 디자인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전작에서는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을 그렸는데, 개성 강한 인물들로 내가 아는 배우들을 총동원해 영상화된 모습을 상상해 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는 과연 어떤 인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표지를 보는 순간부터 두근두근했다.

  쌍둥이 남매 엘러리 코코런과 에즈라 코코런은 엄마 세이디의 고향 에코리지로 이사한다. 첫날부터 두 사람은 에코리지 고등학교의 인기 과학 교사 제이슨 보먼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쓰러져 있는 현장을 목격한다. 과거 에코리지의 데이트 명소 머더랜드(현 프라이트팜)에서 레이시 킬더프가 살해당한 일이 전파를 탈 정도로 유명했는데, 코코런 남매의 이사 후로 “내가 돌아왔다”며 그 사건의 범인이 이번에는 홈커밍 여왕을 노리겠다고 예고한다. 당시 레이시의 남자 친구이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데클런 켈리의 동생 맬컴 켈리와 엘러리 코코런을 중심으로 숨겨져 있던 진상이 파헤쳐진다.






  캐런 M. 맥매너스는 다시 한 번 학교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 소설을 써냈다. 이번에도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에서처럼 학교 안의 사건과 고등학생의 우정과 사랑 같은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져 있어, 사건의 실마리를 쫓으며 감정 변화를 따라가는 재미가 있었다. 나쁜 일에 휘말린 가족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던 두 주인공이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서서히 걷어내는 모습이 지켜볼 만하다. 자신을 위해 타에 민폐를 끼치는 일, 먼저 사과하는 용기와 같은 성장 이슈는 덤이다. 유색 인종을 배제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했던 사이코패스 테스트가 중간에 등장한 것도 친근감이 느껴졌다. 스릴러광 주인공, 학교 내의 반달리즘과 사건사고. 이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소재는 아니지만 여전히 킬링 타임용으로는 괜찮은 <영 어덜트> 소설이다. 아주 무섭고 섬뜩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극을 이끌어나가는 적당한 긴장감이 매력적이었다. 아주 무서운 소설은 싫지만 추리와 반전이 고픈 사람이라면 읽을수록 등장인물 모두가 의심스러워지는 『두 사람의 비밀』 역시 즐겁게 읽으리라 예상한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들의 이야기 - 영미 여성 작가 단편 모음집
루이자 메이 올콧 외 지음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요즘에는 책을 읽다 보면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 모르던 시절에는 감지하지 못했겠지만, 일단 알고 나니 외면할 수 없는 ‘여성 문제’이다. 맥락 없는 혐오도 지겹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들은 환상을 토대로 만들어진 프레임과 편견이다. 얼마 전에도 명백한 성적 환상이 담긴 그림과 글을 보고 분노했던 기억이 있는데, 굉장히 빈번한 일이라 꼭 아주 예전 일 같기도 하고 어제 일 같기도 하다. 피로감에 슬슬 지쳐갈 때쯤 『그녀들의 이야기』와 마주쳤다. 불타는 속을 스프링클러처럼 시원하게 진화해줄 것 같은 책이었다. 읽고 난 뒤에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의 제목과 작가의 이름을 네이버에 몇 가지 검색해 보았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플랫폼임에도 서평이나 책의 리뷰는 만무하고 기본적인 정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 꽤 수록되어 있다는 사전 정보에 어느 정도 예상했으나 묘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황망함도 잠시, 이번 기회로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감사했다.



1. 루이자 메이 올콧, 「내가 하녀가 되었던 경위」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요세푸스 목사의 집에서 몇 달 간 하녀로 일했던 작가 자신의 경험을 글로 옮겼다. 친척들은 일말의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가문에 먹칠한다며 그녀를 말린다. 푸아를 두고 “마귀할멈”이라거나 “누님의 마음을 완전히 조종”한다는 요세푸스의 설명에 스릴러 버금가는 긴장감이 느껴져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여성이 살아가는 삶에 공감하면서도 ‘갑질’ 실정에 공감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당차게 싫다고 말하고, 마음 가는 대로 하면서도 성실한 루이자 메이 올콧의 모습에서 훗날 본인이 만들어낸 캐릭터 조 마치의 모습이 어렴풋이 겹쳐 보였다.

2. 제인 오스틴, 「세 자매」

  메리는 늙은 갑부 와츠에게 청혼을 받는다. 그를 “늙은 멍텅구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생들이나 더턴가 아이들이 먼저 결혼할까 봐 받아들인다. 혼인이 무산되려는 조짐이  보이자 조건을 취소하는 메리의 모습에 대신 수치스러우면서도, 흔들림 없이 ‘너 말고 결혼하고 싶은 사람 많다’는 와츠의 태도가 기묘했다. 연애 결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오늘날과 달리 과거에는 서로의 이익을 계산해 이루어지는 일이 많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내의 용돈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 미리 정했다는 부분은 조금 놀라웠다. 결혼 사실을 부풀려 자랑하자 비웃는 그 시대의 또 다른 남성 기득권층 브루드넬까지. 언니를 비웃은 그 남자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결말부가 유난히 우스꽝스럽고 씁쓸했다.

3. 윌라 캐더, 「폴의 사례」

  폴은 학교에서 문제아로 통한다. 극단과 카네기홀을 동경하지만 아버지에게 들킬까 늘 노심초사한다. 친구들에게는 자신과 극단의 사이를 과장해 떠벌리다가 학교에서 쫓겨난다. 폴은 회사에서 송금하라고 준 돈을 들고 그대로 뉴욕으로 향한다.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했다. 극단 관계자는 폴을 두고 “나쁜 사례”라고 말했지만 나는 극히 평범한 사례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대한 동경은 본능이며, 그저 같은 내용을 배우는 일이 반복되는 일상과 억압적인 가정에 염증을 느꼈다면 당연하지 않은가. 폴의 일탈과 만족감은 지면 너머의 나에게도 황홀감을 전해 주었다. 그런 한편 범죄이기에 그런 생각을 품어선 안 되는 것인지 갈등하기도 했다.

4. 케이트 쇼팽, 「실크 스타킹 한 켤레」

  어느 날 소머스 부인의 수중에 15달러가 들어온다. 자식들을 위한 모자나 신발, 원단 따위를 고민하다가 충동적으로 할인 판매 중인 실크 스타킹을 한 켤레 구매한다. 목돈의 쓰임새로 가장 먼저 생활비를 떠올리는 소머스 부인은 전형적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실크 스타킹 한 켤레로 시작된 소비가 신발과 장갑으로, 잡지로, 식사와 연극으로 걷잡을 수 없이 이어지며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아내라는 칭호를 벗어던지고 “다른 즐거운 것들에도 익숙했던 시절”의 그녀로 돌아가는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억눌려 있던 욕구의 해방, 결코 적지는 않으나 또 결코 많지는 않은 15달러로 “스스로 왕족이 된 기분”을 느끼고 “소속감과 자신감”을 느끼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 역시 케이블카가 멈추지 않기를 소망했다.

5. 메리 E. 윌킨스 프리먼, 「뉴잉글랜드 수녀」

  루이자와 조 다겟은 15년 전부터 약혼한 사이이다. 루이자는 조 다겟을 14년 동안 만나지도 못했지만 변함없이 기다려 주었는데, 결혼식 하루 전에 그의 외도 현장을 목격한다. 조는 결혼도 하고 싶고, 릴리와의 관계도 이어나가고 싶어 하지만, ‘나도 너 같은 남자 필요 없다’는 두 여성 캐릭터가 근사했다. 그와 별개로 과거의 실수로 14년 동안 “죄수 생활”을 한 루이자의 강아지 시저의 삶이 공교롭게도 루이자가 조를 기한 없이 기다린 기간과 겹쳐 측은했다. 혼인하지 않더라도 부디 시저가 얽매이지 않는 여생을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 엘리자베스 개스켈, 「이부형제」

  헬렌이 첫 남편의 죽음 이후 홀로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어려워 윌리엄 프레스턴과 결혼한다. 이후 그녀의 아들 그레고리와 ‘나’의 이야기가 담겼다. 형제애를 그려 전체 수록작 중에서 가장 무난하면서도 가장 잔인한 작품이었다. ‘나’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었는데도 자꾸만 그레고리에게 이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에서도 결혼은 원치 않았지만 홀로 아이를 키우는 일이 버거워 재혼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 드러난다. 또한 꾸준히 가해지는 칭찬과 핍박이 어떤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지에 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7. 샬럿 퍼킨스 길먼, 「변심」

  매로너 부인이 자신의 남편과 하녀 게르타 피터슨의 관계를 알아챈다. 매로너 부인의 ‘변심’이 인상적이고 또 의외였다. 함께 사는 남편이 강요했다는 정확한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나라면 “아기를 상대로 한 범죄”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당연한 듯 따라붙었다. 매로너 씨가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왜 이제야 왔느냐고 묻더니, 과거와 현재의 모든 행적을 파고드는 일이 당연한 수순인 듯 구는 형사가 섬찟하기도 했다. 단순 이혼이 아니라 월링이라는 처녀 때의 이름을 되찾은 결말이 특히 가슴을 뛰게 했다.

8. 수전 글래스펠, 「사소한 것들」

  유일하게 극본 형식으로 되어 있는 수록작이다. 작품은 존 라이트가 죽은 사건을 두고 전개된다. 해일이 증언하고, 카운티 검사와 보안관은 존 라이트의 집을 수색하고, 해일 부인과 피터스 부인은 존 라이트의 아내에 공감한다. 두 여성이 “사소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자 보안관과 카운티 검사는 비웃기 바쁘다. 여성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남성과 사회가 그것을 얼마나 막아 왔는지 새삼 깨달은 단편이었다. 과거부터 디테일에 집중하는 감성적 측면은 흔히 여성만의 전유물, 이성에 비해 열등한 무언가, 시간 낭비로까지 여겨졌다. 하지만 이 단편에서는 우리가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도 다르게 판단하도록 떠민 그 통념을 재고할 것을 종용한다.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면 읽어 볼 만하다.

9. 조라 닐 허스턴, 「땀」

  이 단편의 주인공은 흑인 세탁부 딜리아 존스이다. 남편인 사이크스는 그녀에게 언어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폭력을 가하는 데다가 바람까지 피운다. 급기야는 딜리아를 쫓아내기 위해 딜리아가 무서워하는 뱀까지 집으로 들인다. 인종 차별 문제까지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는 부분에서 다른 작품들과 차별점을 가졌다. 사이크스의 태도에도 당연히 화가 났지만, 모여서 그를 때려 주겠다는 둥 허세만 부리는 마을 남자들의 대화에서도 남편의 폭언과 폭력을 참고만 살다가, 결국 폭발해 맞서 쏘아 주는 부분이 특히 시원했다. 혼인 후 아내와 남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 문제에 노동이 버무려지며 단단한 열기를 뿜어내는 소설이었다.

10. 에이미 레비, 「현명한 세대」

  소녀 시절부터 필립 섄드가 던졌던 추파에 버지니아 워릭은 잠시 그를 좋아했다. 그러나 필립은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가이 오몬드라는 갑부가 나타나며 세 사람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단순한 삼각관계를 넘어 “이따금 나는 우리처럼 부유한 집 딸들이 더 자주 타락하는 듯하다.”로 시작하는 버지니아 워릭의 독백은 소녀들이 자주 접하는 첫사랑의 환상과 그 동기를 꼬집는데, 유달리 인상적이었다. 「뉴잉글랜드 수녀」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여지를 두고 싶어 하는 남성 캐릭터들이 형편없어 보였다.

11. 캐서린 맨스필드, 「행복」

  버사는 눈을 뜨면서부터 주체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낀다. 리틀 B에게도 참을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하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펄 풀턴에게 이상하리만치 끌린다. 주석에도 적혀 있지만, 원제 bliss는 “모르는 게 약”의 의미로 추정된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뚜렷한 이유 없이 붕 뜨는 심리 묘사가 탁월했다. 이 소설에서 펄 풀턴은 딱히 피해자처럼 느껴지지 않아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완독한 뒤 곱씹으며 오로지 착하거나 억울한 캐릭터만 존재하지 않았다고, 그보다 풍부했다고 느낀 계기이기도 하다.

12. 이디스 워턴, 「다른 두 사람」

  웨이손은 앨리스와 세 번째 결혼한 남자이다. 앨리스에게는 첫 남편 해스켓과 두 번째 남편 거스 배릭이 있다. 해스켓은 베일에 싸여 있었으나 딸인 릴리가 아프다는 소식에 앨리스와 웨이손의 집에 찾아오고, 거스 배릭은 회사 일로 웨이손과 엮이게 된다. 웨이손은 거의 유일하게 이 단편선에서 마음에 들었던 남성 캐릭터인데, 과거를 캐내려 들지 않고 건전하게 사랑하는 점에 호감이 갔다. 제멋대로 판단하는 게 불편하다가도 아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심정을 떠올리면 참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의 심경 변화를 지켜보는 일이 유쾌했다.

13. 버지니아 울프, 「새 드레스」

  메이블 워링은 돈이 많이 드는 치장을 하는 대신 스스로 독창적인 드레스를 만든다. 그 드레스를 입고 댈러웨이 부인의 초대에 참석하는데, 급격한 심경 변화를 느낀다. 심리 묘사는 언제 이야기해도 입 아플 정도로 역시 특출했고, 파리와 우유가 담긴 쟁반에 관한 비유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버지니아 울프는 별스러운 원단을 사용해 만든 드레스를 입었다가 이복오빠에게 잔소리를 듣고 갈아 입었던 경험을 회고록에 적은 바 있다. 그녀는 이 경험을 남성의 권력에 굴복했다고 생각하며 깊이 후회했는데, 「새 드레스」 역시 그에서 비롯된 작품으로 이해했다.









  놀랍게도 열두 편의 단편 중 어느 하나 불편하거나 따분하게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여성 작가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여성의 이야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 생활에 대한 한탄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손을 들어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고 싶은 진부함도 없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이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들’이 아닌 각각의 ‘그녀’가 내는 다양한 목소리가 또렷이 구분되어 울렸다.

  놀랍게도 열두 편의 단편 중 어느 하나 불편하거나 따분하게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여성 작가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여성의 이야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 생활에 대한 한탄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손을 들어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고 싶은 진부함도 없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이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들’이 아닌 각각의 ‘그녀’가 내는 다양한 목소리가 또렷이 구분되어 울렸다. 엮은 이가 좋은 작품을 선별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미 잘 알려진 남성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느라 그간 전도유망한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놓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엮은 이가 좋은 작품을 선별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미 잘 알려진 남성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느라 내가 그간 전도유망한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놓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엮은 이가 좋은 작품을 선별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미 잘 알려진 남성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느라 내가 그간 전도유망한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놓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예전의 내가 여성이 나쁜 역할을 맡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일차원적인 입장이었다면, 요즘의 나는 아무쪼록 풍부한 모습이 표현되었으면 한다. 여성도 남성과 다를 바 없이 다양한 면모와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그녀들의 이야기』에 (특히) 한국 소설에서 지겨울 정도로 등장하는 ‘술집 여성’과 ‘완전무결한 첫사랑 그녀’, 뛰어난 고전 작품에서조차 심심하면 부르짖는 ‘창녀’는 없다. 이 단편선의 주인공들은 노동의 대가로 푼돈을 받는 대신 부당했던 처우를 고발하고(내가 하녀가 된 경위), 결혼 전 오간 합의 내용을 부풀려 자랑하거나(세 자매) 참다 참다 폭발(땀)하기도 하고, 다정함을 착각해 사랑에 빠지며(현명한 세대) 때로는 충동 구매 하고(실크 스타킹 한 켤레), 과거의 연인에 노련하게 대처(다른 두 사람)한다. 생활상도 시대도 달랐던 그녀들이 꼭 아는 언니나 동생처럼 애틋했다. 여성 작가의 작품을 읽고 싶은데 잘 알지 못해 누구의 작품을 먼저 읽어야 할지 고민이라면, 성녀-악녀 프레임에 괴로이 끼어 숨통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단언컨대 실패하지 않을 책이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자의 말센스 - 돈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김주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은 어려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이야기 중 하나다. 나도 실천하려고 늘 노력하는 부분이지만 최근에는 어쩐지 그런 일이 특히 쉽지 않다. 살다 보면 답답하고 화나는 일도 많을뿐더러, 돌아오는 대답이 나를 충분히 배려하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경우에는 애써 고민하고 돌려 말하는 내가 바보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으면서 언어습관에 관한 책은 읽는 데에는 나라도 그런 마음가짐과 필요성을 잊지 말자는 나름의 다짐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부자의 말센스에서는 말 그대로 부자가 되기 위해 어떤 어투를 지녀야 할지 간략히 짚어 준다. “돈과 사람을 끌어당기는”이라는 제목처럼 말투와 매출의 상관관계에 집중해 서술한다. 중간에 큐알코드도 첨부되어 있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동영상을 볼 수도 있게 되어 있다. 자기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서비스직에 종사한다면 읽음직하고,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국한하지 않고 모두가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진솔하게 말하면 내용상 다른 자기계발서와 크게 차별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돈”이라는 조금 더 강력한 계기와 연결되어 있으니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비스업 분야에 속하는 대부분의 사업장에서는 직원들에게 ‘쿠션어’를 사용하도록 한다. 부정적인 인상을 주지 않도록 거절할 때도 ‘죄송하지만’, ‘번거로우시겠지만’ 따위를 문장 시작에 붙이거나 ‘괜찮을까요?’와 같은 식으로 완곡히 돌려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나도 아르바이트를 해 봐서 알지만 쿠션어를 끝까지 잘 지키는 사람은 굉장한 인내심을 지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돌아오는 말이 사나우면 다시 가는 말도 사나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의 말투와 어법을 알려 주는 책은 많이 출간되는 것치고 사람들이 잘 읽지 않는 것 같다. 제발 어떤 책이든 상관없으니 한 권씩 필독서로 지참했으면 좋겠다. 물론 나도 계속 노력할 것이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 시나공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막판기출 심화(1, 2, 3급) 7일 기출문제집 - 특별부록 : 그림으로 읽는 한국사 연표, 심화공부 이렇게 해 봐요!
시나공 한국사 연구회 지음 / 길벗 / 202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사 자격증에 관해서는 실용성을 두고 의견이 참 분분했다. 불과 몇 년 전에는 “한국사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하면 시간을 버렸다는 뜻이다”라거나, “한국사 자격증은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스펙이다”라는 이야기가 통상적이었고, 최근 들어 한국사 자격증은 필수 자격증이 되었다. 과거 뉴스에서 ‘마이너스 당하기 십상인 자격증 삼대장’의 대표 주자로 소개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았던 내게도 놀랄 만한 변화였다. 나는 취준생으로서 어떤 기업에서 어떤 자격증을 요구할지 모르기에 따 두겠다는 생각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도 학교에서 한국사 강의를 수강한 이후 지대한 관심이 생겨 공부하고자 생각하고 있다.


친구들이 “시나공”이라는 말을 할 때 문제집 이름인 줄은 알았지만 “시험에 나오는 것만 공부한다”라는 문장의 줄임말인 줄은 몰랐다. 반짝거리는 분홍색 글씨가 크게 박힌 표지는 학창 시절 사용했던 ‘오투’나 ‘올백’ 등을 연상케 할 정도로 전형적인 문제집 같다. 그 위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실루엣이 어쩐지 흐물해지는 내 자세를 고쳐 앉게 한다. 그야말로 ‘한국사 문제집’에 딱 어울리는 디자인이다.







구성도 꼭 학교 다닐 때 썼던 문제집 같아 문득 그리워졌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도 잠시, 잊고 있던 우리나라의 역사에 집중해야 한다. 사실 본격 공부는 이번이 처음이라 내용만 봐서는 기출 문제인지 분간할 길이 없지만, 그 유명한 시나공 시리즈라는 것만으로 일단 믿고 시작해 본다. 7일 안에 끝낼 수 있다기에 이 책으로 기본을 다지기에는 어려울 것 같아 따로 강의를 수강해 볼까 생각 중이다. 시나공은 아마 그 이후에 마지막 실력 검증 수단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책의 뒷면만 봐도 초심자용은 아니다. 아무튼 늘 생각만 하고 언제 시작할지 영영 미정 상태였던 “(언젠가) 한국사 자격증 따기” 목표가 공고해졌다. 이 책을 만난 덕에 올해 내 챌린지는 하나 더 추가되었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