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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이야기 - 영미 여성 작가 단편 모음집
루이자 메이 올콧 외 지음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요즘에는 책을 읽다 보면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 모르던 시절에는 감지하지 못했겠지만, 일단 알고 나니 외면할 수 없는 ‘여성 문제’이다. 맥락 없는 혐오도 지겹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들은 환상을 토대로 만들어진 프레임과 편견이다. 얼마 전에도 명백한 성적 환상이 담긴 그림과 글을 보고 분노했던 기억이 있는데, 굉장히 빈번한 일이라 꼭 아주 예전 일 같기도 하고 어제 일 같기도 하다. 피로감에 슬슬 지쳐갈 때쯤 『그녀들의 이야기』와 마주쳤다. 불타는 속을 스프링클러처럼 시원하게 진화해줄 것 같은 책이었다. 읽고 난 뒤에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의 제목과 작가의 이름을 네이버에 몇 가지 검색해 보았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플랫폼임에도 서평이나 책의 리뷰는 만무하고 기본적인 정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 꽤 수록되어 있다는 사전 정보에 어느 정도 예상했으나 묘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황망함도 잠시, 이번 기회로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감사했다.
1. 루이자 메이 올콧, 「내가 하녀가 되었던 경위」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요세푸스 목사의 집에서 몇 달 간 하녀로 일했던 작가 자신의 경험을 글로 옮겼다. 친척들은 일말의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가문에 먹칠한다며 그녀를 말린다. 푸아를 두고 “마귀할멈”이라거나 “누님의 마음을 완전히 조종”한다는 요세푸스의 설명에 스릴러 버금가는 긴장감이 느껴져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여성이 살아가는 삶에 공감하면서도 ‘갑질’ 실정에 공감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당차게 싫다고 말하고, 마음 가는 대로 하면서도 성실한 루이자 메이 올콧의 모습에서 훗날 본인이 만들어낸 캐릭터 조 마치의 모습이 어렴풋이 겹쳐 보였다.
2. 제인 오스틴, 「세 자매」
메리는 늙은 갑부 와츠에게 청혼을 받는다. 그를 “늙은 멍텅구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생들이나 더턴가 아이들이 먼저 결혼할까 봐 받아들인다. 혼인이 무산되려는 조짐이 보이자 조건을 취소하는 메리의 모습에 대신 수치스러우면서도, 흔들림 없이 ‘너 말고 결혼하고 싶은 사람 많다’는 와츠의 태도가 기묘했다. 연애 결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오늘날과 달리 과거에는 서로의 이익을 계산해 이루어지는 일이 많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내의 용돈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 미리 정했다는 부분은 조금 놀라웠다. 결혼 사실을 부풀려 자랑하자 비웃는 그 시대의 또 다른 남성 기득권층 브루드넬까지. 언니를 비웃은 그 남자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결말부가 유난히 우스꽝스럽고 씁쓸했다.
3. 윌라 캐더, 「폴의 사례」
폴은 학교에서 문제아로 통한다. 극단과 카네기홀을 동경하지만 아버지에게 들킬까 늘 노심초사한다. 친구들에게는 자신과 극단의 사이를 과장해 떠벌리다가 학교에서 쫓겨난다. 폴은 회사에서 송금하라고 준 돈을 들고 그대로 뉴욕으로 향한다.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했다. 극단 관계자는 폴을 두고 “나쁜 사례”라고 말했지만 나는 극히 평범한 사례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대한 동경은 본능이며, 그저 같은 내용을 배우는 일이 반복되는 일상과 억압적인 가정에 염증을 느꼈다면 당연하지 않은가. 폴의 일탈과 만족감은 지면 너머의 나에게도 황홀감을 전해 주었다. 그런 한편 범죄이기에 그런 생각을 품어선 안 되는 것인지 갈등하기도 했다.
4. 케이트 쇼팽, 「실크 스타킹 한 켤레」
어느 날 소머스 부인의 수중에 15달러가 들어온다. 자식들을 위한 모자나 신발, 원단 따위를 고민하다가 충동적으로 할인 판매 중인 실크 스타킹을 한 켤레 구매한다. 목돈의 쓰임새로 가장 먼저 생활비를 떠올리는 소머스 부인은 전형적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실크 스타킹 한 켤레로 시작된 소비가 신발과 장갑으로, 잡지로, 식사와 연극으로 걷잡을 수 없이 이어지며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아내라는 칭호를 벗어던지고 “다른 즐거운 것들에도 익숙했던 시절”의 그녀로 돌아가는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억눌려 있던 욕구의 해방, 결코 적지는 않으나 또 결코 많지는 않은 15달러로 “스스로 왕족이 된 기분”을 느끼고 “소속감과 자신감”을 느끼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 역시 케이블카가 멈추지 않기를 소망했다.
5. 메리 E. 윌킨스 프리먼, 「뉴잉글랜드 수녀」
루이자와 조 다겟은 15년 전부터 약혼한 사이이다. 루이자는 조 다겟을 14년 동안 만나지도 못했지만 변함없이 기다려 주었는데, 결혼식 하루 전에 그의 외도 현장을 목격한다. 조는 결혼도 하고 싶고, 릴리와의 관계도 이어나가고 싶어 하지만, ‘나도 너 같은 남자 필요 없다’는 두 여성 캐릭터가 근사했다. 그와 별개로 과거의 실수로 14년 동안 “죄수 생활”을 한 루이자의 강아지 시저의 삶이 공교롭게도 루이자가 조를 기한 없이 기다린 기간과 겹쳐 측은했다. 혼인하지 않더라도 부디 시저가 얽매이지 않는 여생을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 엘리자베스 개스켈, 「이부형제」
헬렌이 첫 남편의 죽음 이후 홀로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어려워 윌리엄 프레스턴과 결혼한다. 이후 그녀의 아들 그레고리와 ‘나’의 이야기가 담겼다. 형제애를 그려 전체 수록작 중에서 가장 무난하면서도 가장 잔인한 작품이었다. ‘나’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었는데도 자꾸만 그레고리에게 이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에서도 결혼은 원치 않았지만 홀로 아이를 키우는 일이 버거워 재혼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 드러난다. 또한 꾸준히 가해지는 칭찬과 핍박이 어떤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지에 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7. 샬럿 퍼킨스 길먼, 「변심」
매로너 부인이 자신의 남편과 하녀 게르타 피터슨의 관계를 알아챈다. 매로너 부인의 ‘변심’이 인상적이고 또 의외였다. 함께 사는 남편이 강요했다는 정확한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나라면 “아기를 상대로 한 범죄”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당연한 듯 따라붙었다. 매로너 씨가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왜 이제야 왔느냐고 묻더니, 과거와 현재의 모든 행적을 파고드는 일이 당연한 수순인 듯 구는 형사가 섬찟하기도 했다. 단순 이혼이 아니라 월링이라는 처녀 때의 이름을 되찾은 결말이 특히 가슴을 뛰게 했다.
8. 수전 글래스펠, 「사소한 것들」
유일하게 극본 형식으로 되어 있는 수록작이다. 작품은 존 라이트가 죽은 사건을 두고 전개된다. 해일이 증언하고, 카운티 검사와 보안관은 존 라이트의 집을 수색하고, 해일 부인과 피터스 부인은 존 라이트의 아내에 공감한다. 두 여성이 “사소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자 보안관과 카운티 검사는 비웃기 바쁘다. 여성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남성과 사회가 그것을 얼마나 막아 왔는지 새삼 깨달은 단편이었다. 과거부터 디테일에 집중하는 감성적 측면은 흔히 여성만의 전유물, 이성에 비해 열등한 무언가, 시간 낭비로까지 여겨졌다. 하지만 이 단편에서는 우리가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도 다르게 판단하도록 떠민 그 통념을 재고할 것을 종용한다.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면 읽어 볼 만하다.
9. 조라 닐 허스턴, 「땀」
이 단편의 주인공은 흑인 세탁부 딜리아 존스이다. 남편인 사이크스는 그녀에게 언어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폭력을 가하는 데다가 바람까지 피운다. 급기야는 딜리아를 쫓아내기 위해 딜리아가 무서워하는 뱀까지 집으로 들인다. 인종 차별 문제까지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는 부분에서 다른 작품들과 차별점을 가졌다. 사이크스의 태도에도 당연히 화가 났지만, 모여서 그를 때려 주겠다는 둥 허세만 부리는 마을 남자들의 대화에서도 남편의 폭언과 폭력을 참고만 살다가, 결국 폭발해 맞서 쏘아 주는 부분이 특히 시원했다. 혼인 후 아내와 남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 문제에 노동이 버무려지며 단단한 열기를 뿜어내는 소설이었다.
10. 에이미 레비, 「현명한 세대」
소녀 시절부터 필립 섄드가 던졌던 추파에 버지니아 워릭은 잠시 그를 좋아했다. 그러나 필립은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가이 오몬드라는 갑부가 나타나며 세 사람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단순한 삼각관계를 넘어 “이따금 나는 우리처럼 부유한 집 딸들이 더 자주 타락하는 듯하다.”로 시작하는 버지니아 워릭의 독백은 소녀들이 자주 접하는 첫사랑의 환상과 그 동기를 꼬집는데, 유달리 인상적이었다. 「뉴잉글랜드 수녀」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여지를 두고 싶어 하는 남성 캐릭터들이 형편없어 보였다.
11. 캐서린 맨스필드, 「행복」
버사는 눈을 뜨면서부터 주체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낀다. 리틀 B에게도 참을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하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펄 풀턴에게 이상하리만치 끌린다. 주석에도 적혀 있지만, 원제 bliss는 “모르는 게 약”의 의미로 추정된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뚜렷한 이유 없이 붕 뜨는 심리 묘사가 탁월했다. 이 소설에서 펄 풀턴은 딱히 피해자처럼 느껴지지 않아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완독한 뒤 곱씹으며 오로지 착하거나 억울한 캐릭터만 존재하지 않았다고, 그보다 풍부했다고 느낀 계기이기도 하다.
12. 이디스 워턴, 「다른 두 사람」
웨이손은 앨리스와 세 번째 결혼한 남자이다. 앨리스에게는 첫 남편 해스켓과 두 번째 남편 거스 배릭이 있다. 해스켓은 베일에 싸여 있었으나 딸인 릴리가 아프다는 소식에 앨리스와 웨이손의 집에 찾아오고, 거스 배릭은 회사 일로 웨이손과 엮이게 된다. 웨이손은 거의 유일하게 이 단편선에서 마음에 들었던 남성 캐릭터인데, 과거를 캐내려 들지 않고 건전하게 사랑하는 점에 호감이 갔다. 제멋대로 판단하는 게 불편하다가도 아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심정을 떠올리면 참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의 심경 변화를 지켜보는 일이 유쾌했다.
13. 버지니아 울프, 「새 드레스」
메이블 워링은 돈이 많이 드는 치장을 하는 대신 스스로 독창적인 드레스를 만든다. 그 드레스를 입고 댈러웨이 부인의 초대에 참석하는데, 급격한 심경 변화를 느낀다. 심리 묘사는 언제 이야기해도 입 아플 정도로 역시 특출했고, 파리와 우유가 담긴 쟁반에 관한 비유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버지니아 울프는 별스러운 원단을 사용해 만든 드레스를 입었다가 이복오빠에게 잔소리를 듣고 갈아 입었던 경험을 회고록에 적은 바 있다. 그녀는 이 경험을 남성의 권력에 굴복했다고 생각하며 깊이 후회했는데, 「새 드레스」 역시 그에서 비롯된 작품으로 이해했다.


놀랍게도 열두 편의 단편 중 어느 하나 불편하거나 따분하게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여성 작가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여성의 이야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 생활에 대한 한탄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손을 들어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고 싶은 진부함도 없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이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들’이 아닌 각각의 ‘그녀’가 내는 다양한 목소리가 또렷이 구분되어 울렸다.
놀랍게도 열두 편의 단편 중 어느 하나 불편하거나 따분하게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여성 작가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여성의 이야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 생활에 대한 한탄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손을 들어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고 싶은 진부함도 없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이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들’이 아닌 각각의 ‘그녀’가 내는 다양한 목소리가 또렷이 구분되어 울렸다. 엮은 이가 좋은 작품을 선별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미 잘 알려진 남성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느라 그간 전도유망한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놓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엮은 이가 좋은 작품을 선별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미 잘 알려진 남성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느라 내가 그간 전도유망한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놓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엮은 이가 좋은 작품을 선별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미 잘 알려진 남성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느라 내가 그간 전도유망한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놓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예전의 내가 여성이 나쁜 역할을 맡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일차원적인 입장이었다면, 요즘의 나는 아무쪼록 풍부한 모습이 표현되었으면 한다. 여성도 남성과 다를 바 없이 다양한 면모와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그녀들의 이야기』에 (특히) 한국 소설에서 지겨울 정도로 등장하는 ‘술집 여성’과 ‘완전무결한 첫사랑 그녀’, 뛰어난 고전 작품에서조차 심심하면 부르짖는 ‘창녀’는 없다. 이 단편선의 주인공들은 노동의 대가로 푼돈을 받는 대신 부당했던 처우를 고발하고(내가 하녀가 된 경위), 결혼 전 오간 합의 내용을 부풀려 자랑하거나(세 자매) 참다 참다 폭발(땀)하기도 하고, 다정함을 착각해 사랑에 빠지며(현명한 세대) 때로는 충동 구매 하고(실크 스타킹 한 켤레), 과거의 연인에 노련하게 대처(다른 두 사람)한다. 생활상도 시대도 달랐던 그녀들이 꼭 아는 언니나 동생처럼 애틋했다. 여성 작가의 작품을 읽고 싶은데 잘 알지 못해 누구의 작품을 먼저 읽어야 할지 고민이라면, 성녀-악녀 프레임에 괴로이 끼어 숨통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단언컨대 실패하지 않을 책이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