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는 언제나 맨얼굴이 된다 - 새하얀 밤을 견디게 해준 내 인생의 그림, 화가 그리고 예술에 관하여
이세라 지음 / 나무의철학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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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그 주제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에서 더욱 큰 울림을 준다. 예를 들면 과거에는 별것 아닌 듯 느껴졌던 책이 상황이 맞물릴 때나 힘들 때에는 인생 최고의 작품으로 다시 다가오는 경험은 나도 여러 번 했다. 뉴스 기사를 읽은 후 그런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의 나열일 뿐, 어떤 특별한 감정을 담고 있지 않기에 극히 드물지 않나 싶다. 『미술관에서는 언제나 맨얼굴이 된다』는 자신이 위로를 받았던 명화를 소개하는 에세이이다. 칼럼처럼 자신의 일화를 이야기하고, 그와 접점이 있는 화가나 그림을 연결한다. 그리고 그에 관한 감상을 나누는 방식이다.

나는 대개 역사나 미술처럼 스스로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분야의 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바쁠 때에는 가장 선호하지 않는 종류이다. 급하게 읽으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 소설을 읽을 때에도 독서 노트에 감상을 적거나 정말 좋았던 부분은 필사를 하기에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지만, 지식을 얻기 위한 목적의 독서는 더욱 그렇다. 나와 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있고, 바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미술관에서는 언제나 맨얼굴이 된다』는 꽤 추천할 만하다. 한 작품이나 화가에 관해 깊은 내용을 꾹꾹 눌러담은 전문적인 책은 아니다. 대신 다양한 작가들과 관련된 일화나 정보를 ‘1분 시사 상식’처럼 얕게 다루어 준다. 나는 미술을 좋아하면서도 지식이 많지 않아 우선 화가 라인업이 마음에 들었다. 잘 알려진 화가들이 많지 않아 얼른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아직 명화가 어려운 사람, 차곡차곡 얕은 지식을 쌓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다만 미술 사이사이에 영화가 끼어 있어 구성상 일관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좋아하기에 2장 첫 글에서 <브루클린>이 소개되었을 때 조금 당황하면서도 ‘2장은 영화를 소개하는구나.’ 하고 기대했는데, 이어지는 글은 다시 그림이었고, 그림 에세이 몇 편 뒤에 다시 영화 에세이가 등장하는 식이라 혼란스러웠다. 책에 소개된 영화 자체는 취향에 맞아 좋았다. 차라리 영화에 관련된 글들은 수가 비교적 적더라도 따로 모아 분리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책을 읽으면서는 무엇보다 여성 위주인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특히 전쟁 기념관에 관한 의견이 흥미로웠다. 토레스의 작품 이야기를 읽을 때에는 ‘퀴어’라는 이유만으로 주목받는 세상이 사라졌으면 하는 저자의 마음에 깊이 공감했다. 삼백 쪽이 조금 넘는 종이 속에 담긴 화가들의 인생이 모두 사랑스러웠지만, 그중에서도 르누아르와 소로야의 그림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행복한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고 짧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울이 찾아오면 떨쳐내지 못하고 자주 가라앉는다. 이유 없는 우울은 몸을 바삐 움직이면 극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유 있는 우울에 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세 시간 남짓한 독서 뒤에 예상치 못한 답변을 얻었다. 미술보다 인생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되어 조금 당혹스러우면서도 홀가분하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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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랜도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3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희진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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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슈든 초점을 잘못 잡으면 변질되기 쉽다. 페미니즘이 인터넷에서 이따금 과열되는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가 아니다. 그 자체로 남녀 평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열등하지 않음을 주장한다는 입장이다. 이 맥락에서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일부 억압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핀트를 잡지 못하고 단순히 남성 반대 혹은 혐오로, 여성이 남성보다 월등하다는 입장으로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는 시작된다. 단순히 페미니즘이라는 운동을 이해하는 데에서뿐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에 관해서는 한 번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다. 『올랜도』는 성별에 무게를 두지 않는다. 오롯이 “올랜도”라는 인간의 생애와 내면에 집중하는 특징을 보이는 소설이다.

  올랜도는 잘생긴 귀족 청년이다. 가벼운 사랑만 했던 그는 모스크바 여인 사샤와 사랑에 빠진 뒤, 레이디 마거릿과의 결혼을 포기하고 함께 도피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사샤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일로 큰 상처를 받은 후에는 명성을 얻기 위해 전력으로 글을 쓴다. 유명 작가 닉 그린을 초청해 대접하고 자신의 작품을 보여 주지만, 그린은 집에 가자마자 올랜도를 풍자하는 시를 쓴다. 이 일로 낙담한 올랜도는 인간과 명성에 회의를 느끼고, 앞으로는 스스로를 즐겁게 하기 위한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해리엇 그리젤다라는 대공 부인이 올랜도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는 그녀를 피해 터키로 떠난다. 그곳에서 공작 직위를 수여받던 날 원주민들이 난동을 일으킨다. 소동을 겪은 뒤 혼수상태에 빠진 듯 오래 자고 일어난 올랜도는 여성이 되어 있다. 그녀는 집시를 따라 떠나 행복을 만끽한다. 그러나 곧 자신과 그들의 차이를 깨닫고 영국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배 안에서 그녀는 문득 자신이 요구했던 여성성과 여성의 조건을 이제는 자신이 감내해야 함을 깨닫는다.








  여성과 남성은 큰 차이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주목할 만한 부분은 아닐지도 모른다. 올랜도의 성별이 바뀐다는 사실은 책의 중심이 되는 큰 사건인데,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 하인들마저 간단한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성 전환을 다룬 대다수의 콘텐츠에서 새로 생긴 부위를 만져 본 뒤 사실을 깨닫게 된다거나, 주변에 납득시키기 위해 애쓴다는 내용을 의무 사항처럼 넣는 데에 비하면 특이한 지점이다. 여전히 내면은 다채로운 올랜도인 그녀의 모습을 통해 ‘성별이 뭐가 그리 중요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 느껴졌다. 또한 소설 속에는 올랜도에게 큰 좌절을 맛보게 했던 이가 둘 있다. 첫째는 그의 사랑을 받아 주지 않았던 여성 사샤, 둘째는 풍자 시를 쓰고 그의 문학을 유린했던 남성 닉 그린이다. 이들이 상처를 준 것은 여성이거나 남성이라서가 아니다. 한때 올랜도를 매혹하려 했던 해리엇 그리젤다의 정체성도 그렇다. 쉘머딘과 올랜도가 서로의 성격을 두고 남성이 맞는지, 여성이 맞는지 묻는 부분에서는 생각에 더욱 힘이 실렸다. 성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불어 예술을 떠올렸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 버지니아 울프의 단골 주제인 글쓰기와 인생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올랜도가 처음 인정받기 위해 썼던 글은 닉 그린에게 풍자당한다. 이 일을 계기로 문체가 크게 바뀌고, “화려하게 장식된 두루마리 족자” 대신 “「참나무, 한 수의 시」라는 제목이 붙여진 한 권의 낡은 공책”에 글을 쓰게 된다. 삼백 년 뒤 재회한 닉 그린에게 “현대 정신의 흔적이 없다”며 출판 권유를 받는 원고이다. 어떤 목적을 지니지 않고, 내려놓은 채 쓰는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 번 다잡았다. 또한 닉 그린은 “책은 300년 전에만 쓰인 것이면 그 책에 관해 최고의 찬사를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의 태도에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책이든 영화든, 고전 명작이라는 평을 듣고 나면 나도 모르게 인상적인 부분을 애써 찾아가면서 읽지는 않았던가. 지속적으로 고심하고 경계하는 부분이기에 눈길이 가는 부분이었다. 사교계의 허와 실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놓지 못하는 올랜도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여태까지 접한 울프의 글 중 페미니즘 색채를 가장 강하게 띠는 소설이었다. 게다가 다소 환상적이다. 덕분에 쉬이 읽을 수 있으면서도, 여전히 깊어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모든 굴레를 벗어던진 채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도 글쓰기에 갈망을 느껴 돌아온 올랜도의 삶을 곱씹어 본다. 더불어 몇 번의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끝없이 썼던, 어떤 상황에서든 원고를 품에 지니고 다녔던 모습을. 무언가 열성을 다해 하다 보면 초심과 사뭇 다른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오를 때가 있다. 특히 개방된 공간인 SNS에 업로드하면서는 기대감이 더욱 커지는 것 같다. 기왕 쓰는 글, 다른 사람들도 좋아해 줬으면 하는 기대감. 하지만 그런 글을 쓰기 시작하면 도전하기 어려워진다. 반대 의견인 사람에게 비판받을까 봐 두려운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세간의 평가가 부정적이어도 끝없이 도전했던 사람들에게 새삼스러운 애정이 솟았다. 남을 만족시키기보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글을 쓰자는 지향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올랜도』는 버지니아 울프가 마냥 어렵게만 느껴지는 이에게도, 예술의 목적성과 정체성에서 갈피를 잃고 고민하는 이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명성이나 영광 같은 것은 애시당초 존재하지도 않는다. 차세대들은 나나 포프 씨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시대’란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란 무엇이란 말인가?”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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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넌 도일 - 셜록 홈스를 창조한 추리소설의 선구자 클래식 클라우드 20
이다혜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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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자와 창조물의 관계는 묘하다. 작가의 인터뷰를 읽을 때면 자신이 만든 캐릭터가 스스로 움직였다는 구절을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 만화가가 인기 많은 캐릭터의 죽음을 그렸다가 항의 연락을 받은 뒤 생명에 진지한 위협을 느껴 번복하는 일도, 아직 도래하지 않은 죽음에 대해 독자들이 앞서 협박 편지를 보내는 일도 있다. 그렇듯 잘 만들어진 캐릭터는 작가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주지만, 때로 마음대로 행동해 애먹이거나 나아가 작가의 삶 전체를 흔들기도 한다. 캐릭터는 어떻든 소유물일 줄만 알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작가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 있기도 한 것이다. 클래식 클라우드의 20번째 주인공은 자신의 캐릭터 셜록 홈즈를 한 번 죽였다가 살린 『코넌 도일』이다. 나는 셜록 홈즈 시리즈를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그저 유명한 탐정이고, 왓슨과 한 쌍이며, 죽었다가 부활했다더라. 여기까지가 책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기본적인 정보였다.


런던에는 셜록 홈즈와 관련된 장소가 많다. 셜록 홈즈 시리즈가 런던 시내 거의 전 지역을 무대로 삼은 탓이다. 특히 셜록 홈즈 박물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줄을 서서 들어간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작가인 코넌 도일의 인기는 ‘안습’이다. 사람들은 그를 셜록 홈즈를 만날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듯 보인다. 그의 부친상에는 관심 없는 반면, 홈즈의 사망에는 맹렬히 반기를 들며 비난한다. “셜록 홈즈에게 시달렸다”는 도일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에든버러에 위치한다는 ‘코넌 도일’ 펍에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어렸을 적부터 코넌 도일에게는 이야기를 잘하는 재주가 있었지만, 그에게도 어려움은 있었다. 몇 번 거절을 맛본 뒤에 마침내 셜록 홈즈와 왓슨을 세상으로 내보낼 수 있게 된다.


셜록 홈즈의 인기가 특히 대단히 다가온 이유는 영상 미디어의 힘을 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 드라마 <셜록>이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이미 셜록 홈즈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내 세대에 가장 인기 있다고 할 수 있는 캐릭터는 해리포터 삼총사인데, 물론 소설도 대단히 사랑받았지만 그들에게 더욱 힘을 끼얹어 준 것은 영화 아니었던가. 실체화된 적 없는 캐릭터가 그토록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런가 하면 셜록 홈즈가 아니라 코넌 도일이 이 책의 주인공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듯 코넌 도일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정감록』처럼 범죄와 잡히지 않는 범인이 판치는 시대적 배경과 셜록 홈즈의 등장이 맞물렸던 점, 한 회에 끝내는 데에 승부를 걸었던 연재 기술, 심령술에 심취했던 그의 말년 등. 특히 여성과 관련해서는 관대한 시선을 보내지 않는 이다혜의 시선이 좋았다. 스릴러 분야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는 그녀가 인정한 걸작, 『J. 하버쿡 젭슨의 진술』에도 관심이 생겼다.


과거에 범접할 수 없는 인기를 끌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처음에는 내가 몰랐던 부분을 알아가며 새삼스러운 감상에 젖고, 조금 더 빠져들면 동시대를 살지 못했던 것이 안타까워진다. 그렇게 고무되어 있는 동안 동년배의 심드렁한 반응을 목격한다. 이 과정에서 문득 나 역시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끝까지 몰랐을 거라는 사실이 떠오르며 서글퍼진다. 다음 세대에는 그들이 더더욱 잊힐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서라도 자꾸 과거에 실재했던 이들의 흔적을 찾게 된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예술가의 작품뿐만 아니라 생애 전반을 아우른다는 점이 곱씹을수록 큰 장점이다. 이다혜의 첨예한 시선 끝에서 코넌 도일의 허와 실을 파헤치고, 그 지식을 기반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여행이었다. 책을 읽고 나니 다음 시리즈 『페르메이르』가 어서 읽고 싶어져, 가지런히 놓여 있던 책을 뽑아 첫 장에 북마크를 꽂아 두었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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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포스터 북 by 에곤 쉴레 아트 포스터 시리즈
에곤 실레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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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곤 실레에 관한 영화를 봤다. <에곤 실레: 욕망이 그린 그림>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예술가의 이기적 태도와 사랑이 퍽 인상적이었다. 다소 특이한 부분에 매료되는 버릇이 있는 나는 한동안 그의 일생에 매료되어 그림을 찾아봤었다. 얼마 전에는 그의 에세이도 읽었다. 말하자면 스며들듯 점차 관심을 가지게 된 케이스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와도 꽤 연이 닿아 있다. 스티커북으로 완성한 그의 작품 <키스>가 집에 있기 때문이다. 척 보기에도 복잡해 보이는 그림을 눈으로 계속 좇으며 핑글핑글 돌았으나 그만큼 화가의 고충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이 두 사람은 아르테 더 포스터 북이 이번 달에 선보이는 화가이다. 두 화가가 생전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던 덕에 더욱 애착이 생겼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클림트전은 몇 번 개최되었지만 에곤 실레 전시회는 개최된 적 없으므로 만나 보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이다.






  에곤 실레의 작품에서 아무래도 가장 친근한 것은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이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표지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품. 미술에 관심이 없어도 이 그림만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워낙 인기가 많으니 제쳐 두자고 생각하면서도 책을 열고서 홀린 듯 한참 바라봤는데, <헌신>과 <손을 덮고 있는 보라색 가운을 입은 젊은 남자> 역시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인 <죽음과 소녀>가 수록되어 있지 않아 아쉬웠지만, 그래도 여전히 실레만의 독특한 색채가 담겨 있는 그림들로 가득해 다각도로 찬찬히 관찰했다. 에곤 실레는 신체의 어떤 부분도 쓸데없는 판타지로 미화하거나 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보인다. 그 완성작에는 적당량의 혐오감과 애정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외설이 아닌 예술이라는 확신이 든다. 야위거나 살찐 그들이 좋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은 에곤 실레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에곤 실레의 그림은 정적이고 바싹 마른 듯 보이지만, 클림트의 그림은 얼굴 부분만 사진을 잘라 붙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눈빛과 살결이 생생히 살아 있다는 인상 때문이다. 대표작 <키스>와 <아델르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에는 노란색이 지배적이다. 채도와 명도가 다른 노랑은 그의 캔버스 위에서 반짝거린다. 바라보고 있으면 노란색이 이렇게 다양하고 활기를 띠는 색상이었나 자문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 다음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처녀들>이다. ‘클림트=황금색’이라는 공식을 벗어나 다양한 색채로 장식한 점이 돋보였다. 뒤엉킨 처녀들의 모습이 역동적이다. 항상 옷이나 배경에 쓰인 도형들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건지 궁금했는데, <처녀들>의 옷에 그려진 도형들은 꼭 꽃이 핀 모습처럼 보였다.

  이들의 그림을 보며 예술과 외설에 관해 생각해 본다. ‘예술가’와 ‘빈곤’이 한 쌍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일반적인 노동이나 업무와 달리, 인정받지 못한 예술은 빈곤으로 직결되게 마련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를 포기하고 원하는 예술을 할 것인지, 부를 택하고 예술가로서의 긍지를 버릴 것인지 택하는 일은 주된 번뇌로 등장한다. 가시적인 반응을 뒤로하고 자신만의 길을 가는 일은 힘들다. 대부분의 화가나 작가들에게 큰 부담이겠지만 빈곤에서 끝나지 않고 실제 생활에 타격까지 받았던 클림트와 실레에게는 더욱 무겁게 다가왔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인간성을 떠나 예술이라는 분야에는 언제나 선구자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앞서는 이가 없으면 신선하지 않은 답습만 계속되기에. 그래서 그들이 도전한 흔적에 자꾸 눈길을 주게 된다. 현대 미술을 받아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 들었다. 사진술의 발달로 예술이라는 분야에서 가품과 진품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아우라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났다. 연극이나 전시회를 직접 관람할 때면 확연히 드러나는 차이이다. 하지만 때로,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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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원 기행 - 역사와 인물, 교유의 문화공간
김종길 지음 / 미래의창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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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란다에 해바라기를 키운다. 화분만 두고 키우기에 정원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모양새이다. 전에는 몰랐던 사실인데, 식물은 생각보다 훨씬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다. 나의 경우에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과 흙내음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겉으로는 내가 해바라기를 키우고 있지만, 속으로는 해바라기가 쓰러지지 않고 클 수 있게 나를 붙잡아 주고 있는 셈이다.

  제목에서 예고했듯 『한국 정원 기행』은 한국의 정원으로 떠난다. 들어가기에 앞서 정원이 각국에서 어떤 의미로 다르게 표현되는지, 한국 정원에는 특히 어떤 정신이 깃들어 있는지 등 사전 정보를 제공한다. 1부부터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된다. 관람 순서, 심긴 식물이나 조형물, 지은 사람과 관련된 일화, 평가한 문헌 소개까지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 지루하지 않다. 하나하나 경청하는 동안 바람이 머리를 간질이는 듯했고, 단아한 동양의 흥취에 흠뻑 젖어들었다.






  이 책에는 정원을 배운다기보다 여행한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정원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빠져나오는 순간까지 경로를 순차적으로 설명해 주는 형식 덕분에 직접 거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다녀온 뒤 기억을 더듬으며 쓴 글이 아니라 저자가 길 위에서 열심히 적은 글이라는 생각이 여실히 들었다. 그 발길을 따라 종종 걷다 보니 확실히 우리나라의 정원은 조급히 화려하지 않는 여유가 포인트임을 깨달았다. 대부분이 정원 안에서는 바깥이 보이지 않도록 차단해 두었다는 부분에서 은둔이라는 목적의 매력이 물씬 풍겨 나왔다. 그뿐 아니라 공간이 현실의 문제와 맞물리는 지점에서는 정신이 번쩍 들기도 했다. 공간을 향한 인간의 욕심이, 김흥근과 흥선대원군 사이에서처럼 정치적 보복으로 이용되는 사실이 개탄스러웠다. 남간정사, 명옥헌을 비롯한 몇 군데는 처음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모종의 이유로 원형을 읽었다는 곳들이 아쉽기도 했다. 특히 정약용이 잊지 못했다는 백운동이 여전히 궁금하다. 언젠가 직접 눈에 담으러 향하고 싶어졌다. 동백이 만개할 봄에.


  잘 모르는 분야를 알아가는 일은 큰 기쁨이다. 요즘에는 유튜브에도 브이로그라는 이름으로 일상이나 기행기를 다룬 비디오가 수십 건씩 업로드되지만, 그런 영상보다 종이 책을 먼저 찾게 되는 걸 보면 나 역시 아날로그 세대가 아닌가 싶다. 일독만으로 모든 내용을 기억하고 장소와 일화를 연결 짓기는 어렵다. 한 번에 기억하려 하지 않고 행선지를 정한 뒤 방문 전 읽거나, 다녀오고 나서 책을 다시 펼쳐 읽는다면 더욱 풍미로운 산책이 될 것이다. 태어난 이래로 쭉 아파트에서 살았지만 그다지 아쉽게 느껴지는 점은 없었다. 크면서는 더욱 그랬다. 베란다에도 식물은 충분히 키울 수 있고, 보안 측면에서는 오히려 아파트가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어린 날의 소망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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