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일곱 살이다.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인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영화 《조지아》에서 망신창이 조지아가 부르던 다. 그 노래가 맘에 든다. 성공한 누나의 무게에 짓눌린 주인공의 비극이 내 마음을 할퀴었다.

“소연아. 이번에 내려야 돼. 일어나.”

꾸벅꾸벅 봄잠을 자고 있던 여동생을 깨운다. 내 마음은 지렁이처럼 땅 속을 헤집고 돌아다닌다. 이 나이에 여동생을 깨워서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한다니. 한가하게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정독도서관에 여자 친구랑 중간고사 공부하러 가고 싶단 말이야.

봄날은 나뭇가지로부터 치렁치렁하게 허공 곳곳에 달려 있다. 햇살은 투명하게 세상을 감싸 쥐고 그 안으로 부드러운 입김을 불어넣는다. 소연이는 언제 졸았냐는 듯이 산뜻한 얼굴로 사방을 감상하며 노래까지 흥얼거린다. 너무 씩씩해졌어. 난 그게 화가 난다. 났으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야. 왜 이혼은 해가지고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냔 말이야.

“응. 엄마. 다 왔어. 오빠랑 왔지. 걱정 마요. 잘 놀다가 밥 잘 먹고 갈게. 응. 걱정 마. 응. 그래, 나도 엄마 사랑해.”

어머니 마음도 이해는 간다. 항상 혼자였으니까. 아버지는 너무 바빴다. 게다가 여자도 잠깐 있었고……. 지금 아버지는 다시 혼자인데 어머니가 너무 하시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잠깐 들고는 한다. 아버지는 이제 일에 빠져 우리에게 돈만 다달이 보내주신다. 난 아버지라는 존재가 희미하다. 어머니는 그것도 싫으신 거겠지. 근데 또 화가 나는 건 왜 내가 그걸 이해하고 있냐 말이야.

“아빠!”

난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반듯한 양복 안에 있으시다. 자신의 딸을 보며 웃는다. 아버지의 차를 타고 식당으로 간다. 차창 밖으로는 봄날들이 날아간다. 퍼런 멍 같은 목련과 벚꽃들의 잔해 위로 드라이브를 한다. 아버지는 일상적인 대화 외에 별 말이 없다. 마치 어젯밤에 서로의 방에서 잠들었다가 오늘 점심 약속에서 만난 사이인 것처럼…….

“중국식 냉면 먹어봤니? 맛있어.”

아버지는 여전히 웃고 계신다. 뭐가 그리 즐거울까? 저 사람은, 내 아버지가 맞기는 맞는 걸까? 이런 상황이 현실적으로 연출될 수도 있구나.

“아버지.”

“응.”

“아니에요.”

어머니는 왜 끝내 아버지와 이혼을 하셨을까.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름대로 성실한 가장이었다.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도 사과를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싫으셨던 걸까?

내가 《조지아》에서 조지아가 부른 를 좋아하는 이유가 변했다. 이제는 그런 노래처럼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동경이어야 한다. 동경은 현실이 아니고. 하지만 나의 동경이 현실이 되어가는 느낌에 열일곱, 나의 삶은 곱다 못해 미칠 것만 같다. 져서 바람에 날리는 벚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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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환상일지도 몰라. 너무 괴로워서 그런 상상을 하곤 했어. 이 모든 것이 조작된 세계이고, 난 게임을 하고 있거나 생체 연결 시스템에 강제로 접속돼서 원치 않는 일상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를 비웃듯이 그건 한낱 기우에 불과했어. 의식이 돌아오면 내가 처한 현실이 괴로워서 난 어찌할 줄 몰랐어. 그래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어. 최대한 오랫동안 잠을 자려고 했지.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더라. 한 이틀 정도 안 일어나고 자봤니? 그거 고문이야.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어. 잠에 빠져있는 순간에는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으니 편할지는 몰라도, 환경이 개선되면 절대로,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져. 내가 아니라도 누구나 그럴걸.

난 유기견이야. 실망했다면 미안해. 김이 빠지지? 하지만 어쩌겠어. 난 버려진 개인걸. 그래도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시베리안 허스키야. 이제 2살이다. 수컷이고. 음. 클 만큼 컸지. 자립할 나이이긴 해. 하지만 주인이 있고, 그 그늘 밑에서 어미로부터 자립하는 것과 주인도 없이 그냥 세상에 내팽개쳐지는 것은 조금, 아니 많이 다르지. 난 후자인 경우인데. 흑. 그래서 젊은 나이인데도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 시베리아에서 썰매를 끌던 선조들이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우리 종이 가정생활에 길들여진지도 꽤 오래됐기 때문에 그건 적절한 논의는 아니라고 봐.

음. 태어나서 반년은 행복했어. 엄마 품에 안겨 젖도 먹고, 아빠랑 산책도 하고. 주인도 나를 무척 좋아해줬어. 하지만 7개월쯤엔가 버려졌지. 몇 가지 이유가 있어. 먼저 주인집이 시 외곽에서 도심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됐어. 나랑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아기가 있었는데 내가 그 아기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셨던 거 같아. 엄마랑 아빠는 일찌감치 개장수에게 팔리고. 그래도 주인인 아줌마랑 아저씨가 나는 기르려고 시도했던 것 같긴 해.

아줌마랑 아저씨가 휴가를 가게 됐어. 그들이 휴가를 말이지, 이민도 아니고 휴가를. 굳이 개장수를 찾아서 팔기도 귀찮고, 기르자니 부담스러운데 휴가도 가야겠고. 그래서 그냥 길거리에 날 내려놓고 가버렸어. 그게 끝이야. 어쩌면 시작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겠구나.

유기견이라고 무시하지는 말아줘. 나도 나름대로 길거리에서 공부도 많이 했어. 운 좋게 나보다 똑똑하고 나이 많은 유기견 선배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어. 그 옆을 지키며 그분의 임종도 지켜봤지. 후후.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지?

이것저것 많이 배웠지. 아픈 만큼 여문다고. 생각도 많이 할 수 있었어. 너무 외롭고 괴로워서,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늘어트리며 지새운 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또 어떤 얘기를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네가 나를 버리지 않고, 내 곁에 조금이라도 오래 머물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야.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적도 얼마나 많은지 몰라. 하지만 그렇게 세상을 등지고서만은 못 살 거 같더라.

이젠 2살이나 먹어서, 덩치도 제법 크고 힘도 세지만, 어렸을 적에 받은 충격과 고통이 커서, 사실 성격은 애와 같아. 생각이 깊다고 방금 그랬는데, 전혀 반대의 면도 있어. 그러니 말짱 도루묵이지.

잠깐만. 누나가 오신다. 맛있는 것을 주려나. 아니면 주사를 놔주려나.

참, 난 007이라고 해. 애칭이 아니라 자칭인데. 나랑 노는 동안은 나를 007이라고 불러줬으면 해.

잠깐만. 누나의 관심을 좀 받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난 버려졌어. 버려진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모르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내가 특별한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더 이상 나를 보기 싫다고 했다는 것이 한 마리의 개에게 얼마나 큰 상처로 남는지 사람들은 모를 거야.

‘내가 죄라도 저질렀다면 사죄하거나 잘못을 시정하려는 노력이라도 하겠지만, 이건 그것도 아니야.’라는 생각도 해봤지. 그러다가는 결국 내가 잘못했었던 일들이 떠오르더라. 방을 어지럽힌 일, 주인인 아줌마의 손가락을 깨물었던 일, 바뀐 사료가 맛이 없다고 투정을 부렸던 일…….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

내 과거와 사정이 그렇다는 걸 조금만 이해해줘.

그래서 길거리 생활을 시작했어. 나의 수난기지. 그 수난기로 인해서 약간 예민한 게 있어. 자기다짐도 잦고. 생각해보면 내가 원래 꽤 예민하고 수줍음도 많은 개인 거 같아. 조금 더 마음도 넓고, 서글서글한 개였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이렇게 길거리에 버려지는 일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음.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이해해주라. 네가 내 얘기를 다 들어주고, 내 옆에 있어주면 난 조금이라도 빨리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늪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늠름한 시베리안 허스키, 007로 거듭날 수 있을 거야. 이런 고백도 쉽게 할 수 있게 된 건 아니야. 결단코.

처음엔 살던 집으로 찾아갈까도 생각해봤어. 하지만 금방 포기했어. 너무 어릴 때 버려져서, 후각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었거든. 찾을 수 없더라.

버려진 장소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헤매다보니 배가 고팠어. 뭔가를 먹어야 했지. 먹을거리의 냄새가 나는지 코를 킁킁거렸어.

멀리에서 고기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는 거야. 냄새를 따라 걸었어. 그날의 고기 냄새는 바다에서 표류하는 개가 찾은 북두칠성의 별빛과도 같았어.

냄새의 근원지는 정육점이었어. 생고기도 팔고, 구워서 먹을 수도 있게 하는 데 있잖아. 식육점이라고 하나?

고기 조각 몇 점이 길바닥에 떨어져 있더라. 배송차량이 떠난 직후였는데, 고기를 식육점으로 옮기다가 흘린 거 같았어. 일단 주변을 두리번거렸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얼른 고기 조각을 주워서 먹었어. 주인인 가족들과 집에서 살 때는, 시베리안 허스키의 자존심이 있는지라, 밥그릇에 주지 않으면 먹지도 않았는데, 어쩔 수 없었어. 살고 봐야 하잖아.

그런데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빗자루를 들고 나와서 나를 때렸어. 더러운 떠돌이 개가 장사를 망친다는 거야. 그때 처음 알았어. 아, 버려진다는 건 이런 거구나. 버려진다는 것은 배고픔과 아픔의 시작이야.

그래서 도망갔어. 그러기를 몇 번 반복했어. 먹을거리의 냄새가 나면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가고, 먹을 게 있으면 주워서 먹고, 먹다가 맞고를 반복했어. 수컷인 시베리안 허스키라지만, 1살밖에 안 된 내게 왜 그렇게들 모질게 대해야만 했던 것인지 모르겠어.

결정타이자, 고난의 정점은 수유동의 시장 근처에서였어. 여느 날처럼 식당 잔반통에서 주린 배를 채우고 있었어. 동네 청소년들이 날 붙잡았어. 남자아이들이었는데, 아주 질 나쁜 자식들이야. 너도 혹시 그런 애들을 만나면 조심해. 알았지? 일단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해. 알았지?

한참 쓰레기통에 남아있는 음식들을 먹고 있는데, 날 붙잡더라고. 날 공터로 데리고 갔어. 내게 친절을 베풀어주려는지 알았어. 드디어 방랑의 세월이 끝나는가보다 했어.

중학생들인 거 같았어. 쇠꼬챙이의 끝을 라이터로 달구더니, 그걸 내 배에 대더라고. 깨갱거리며 힘껏 비명을 질렀어. 깽깽깽, 이렇게. 그 녀석들은 그런 나를 보면서 좋다고 웃어댔지. 자기들끼리 웃음의 축배라도 드는 줄 알았다니까.

그들은 동료애와 의협심을 확인했다는 듯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어. 나를 들어 올리고서는, 내 배의 상처를 보면서, 성공했다고 자축하는 표정을 지어보였어. 환한 얼굴로 고통스러워하는 날 바라봤어.

증오가 불타올랐어. 뭐, 저런 것들이 있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 3번쯤 그러더니, 날 공터의 구석으로 던져버리더라.

그날의 부끄러운 상처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보여줄까? 아직 아무도 보여준 적은 없지만 너에겐 보여줄 수 있어. 괜찮다고? 그래. 그런 걸 봐서 뭐하니. 보여준다고 한 나도 좀 그렇다.

그 상처를 봤을 때의 네 기분은 생각도 못하고……. 미안해.

 

괜찮아. 낮잠을 잤더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어. 아까 그런 우중충한 얘기했더니 머릿속이 복잡해지더라.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아? 그런 상태에 빠지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개마저도 미울 때가 있다는 거야. 내가 사랑하는 친구가 나를 나쁜 놈으로 기억하길 바라지 않아. 그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으니까.

인생이 뭐니? 모두 태어났다 죽는 거잖아. 주어진 시간은 모두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영원히 살 수는 없잖아. 모든 생물의 생명은 유한하잖아.

억척스럽게 욕망을 부릴 필요가 있을까싶어. 좋아하는 벗들과 행복한 게 최고이지.

야. 근데 정말 봄이 좋다. 유기견 생활을 할 때는, 겨울이 정말 싫었어. 굉장히 고통스러웠거든. 한겨울에 밖에서 안 자본 개는 모르는 일이야. 너도 안다고? 후후.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우린 정말 편안하고 행복한 거야. 그치?

너도 그렇겠지만, 그래서 ‘수리’의 누나를 좋아하잖아. ‘수리’가 뭐냐고? 아직 그것도 몰랐어. 우리가 지금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 동물보호협회의 별칭이 ‘수리’이잖아. ‘수리수리 마수리’에서 차용했다고 누나가 그랬어. 모든 유기견들이 마술처럼 편안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길바닥에서 형편없이 망가진 채 방황하고 있는 날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나야. 누나가 형들과 함께 그물로 날 잡았지. 또 상처를 받을까봐 사람들을 피해 다녔거든. 그리고 그들이 날 여기로 데려왔어.

이발을 하고, 목욕을 하고, 주사를 맞았어. 모두 누나가 해줬어. 그리고 누나가 미지근한 우유도 줬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몰라. 먹다가 울 뻔 했어. 이틀 뒤에는 미지근한 우유에 으깬 참치를 말아서 줬어.

그렇게 한 달을 지내니까 거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더라. 정상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망가졌었어.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게 뭔지 알아? 실은 며칠 전인데……. 얼마 안 됐지? 하하. 누나가 나를 재워줬다는 거야. 아기를 재우듯이, 내 머리를 누나의 다리에 올리고서는, 토닥이면서 자장가도 불러주더라고.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하면서.

창문으로 정오의 봄빛이 고양이의 걸음처럼 살금살금 들어오고 있었어. 실내는 아주 조용했어. 모두들 낮잠을 잤거든. 먼지조차도 몇 개인지 셀 수 있을 정도로 나른한 시간이었어.

곧 누나의 무릎을 베고, 누나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에 빠져들었어. 그때만큼은 악몽을 꾸지 않았어.

 

볼일을 보고 온 거야?

엉겨 붙은 혈흔 같은 기억들은 이렇게 자꾸 말로라도 뱉어내야 해. 고백함으로 구원받는다고도 할 수 있고. 감기에 걸리면 가래를 뱉는 것처럼 말이지. 가래에 감기 바이러스가 들어있어서, 가래를 뱉어나면 상태가 나아진다고 하잖아.

내가 너무 똑똑하다고? 나도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아. 떠돌이 생활을 하다보니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경험도 했어. 때로는 살기 위해서 더 오랫동안 유기견 생활을 한 분들에게 도움도 청했고,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도 많아. 그게 남은 거라면 남은 것이지만, 생활이 너무 불안하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모두 도루묵. 크크크.

유기견은 그런 게 있어. 주인이 날 버린 것인지, 나의 어떤 행동이 주인으로 하여금 날 버리게 만든 것인지가 헷갈려. ‘내가 규칙을 어긴 것일까, 나약한 존재는 내쳐지는 게 맞는 것일까, 가장 강한 동물인 인간이 먼저 생존해야 나 같은 개도 그나마 안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들이 자꾸 드는 거야. 그렇다면 원래 내게 주어진 행복이란 고작 이런 것인가. 맘이 복잡해지지.

이렇게 자꾸 말하다보면, 나도 언젠간 웬만한 일에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지도 몰라. 지금은 이게 나를 살게 해주는 힘이야.

유기견으로 1년 정도를 살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구제역 현장이었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도 거의 기직맥진 했을 때였던 거 같아. 물을 먹고 싶어서 웅덩이를 찾고 있었어. 그런데 꿀꿀, 꽥꽥거리는 돼지의 멱을 따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거야. 호기심에 힘든 것도 잊고서는 그쪽으로 다가갔지. 소리의 근원지로 갈수록 점점 더 많은 꿀꿀, 꽥꽥 소리가 중첩되어 들리는 거야.

‘이건 무얼까, 돼지들이 집단으로 버려져서 길을 헤매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했어. 간혹 다른 유기견이나 들짐승이 고통스러워서 우는 소리를 들을 적은 있어. 쥐덫에 잡힌 까치를 보기도 했고. 그들도 항상 울지. 상처가 생겼고, 그래서 아프니까.

하지만 이처럼 많은 동물들의 울음은 처음이었어. 점점 난 두려워지기 시작했어. ‘뭔가 크게, 엄청나게 잘못되고 있구나.’ 그런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어.

오랫동안 유기견의 생활을 한 늙은 선배의 임종을 지킨 적이 있다고 했지? 그 선배가 그런 말을 했어. ‘너에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니?’ 난 그런 거 생각해본 적 없다고 그랬어. 그랬더니 그 선배가 그랬어. 너에겐 영혼이 있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영혼은 정신인 것인데, 육체와 정신이 전혀 별개인 게 수의학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는 거야.

그 선배의 말에 따르면,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말로 유명한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육체와 영혼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대. 그러면서도 그것이 불안했던지 송과선이라는 것을 더불어 주장했대. 영혼과 육체를 연결해주는 기관인데, 후에 인간의 육체엔 송과선이 없는 것으로 판명됐지.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이분법은 틀린 것이지. 정신은, 어느 정도는, 육체를 바탕으로 한 호르몬과 신경물질의 전달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 거기엔 슬픔, 기쁨, 아픔, 짜릿함과 같은 감정도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사람처럼 뇌 용량이 크지는 않다고 해도, 우리도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잖아. 우리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이 선배가 거의 평생을 떠돌면서 내린 결론이래. 붕어도, 오징어도 의식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작은 영혼이 그들에게도 깃들어 있는 거야.

난 눈물이 다 나더라. 그러면서 이런 말도 했지. 인간도, 우리도 다른 동물이나 식물을 먹으니 무조건 인간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면 우리도 영혼을 지닌 존재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 살기 위해 다른 동물이나 식물을 먹더라도 그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 한다……. 이런 말들이 그 선배가 마지막에 남긴 말들이었어. 난 몸을 부르르 떨었어.

얘기가 좀 다른 데로 샜지? 미안해.

소리의 근원지에서 생지옥을 봤어. 수십 마리의 돼지들이 산채로 커다란 구덩이에 던져지고 있었어. 그리고 사람들이 그 위에 흙을 쏟고 있었어. 돼지들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동료를 짓밟고 올라가다가 사람의 삽에 맞아 다시 구덩이로 떨어지곤 했어. 다른 돼지의 발에 밟혀 죽은 돼지도 있었어. 아기 돼지를 지킨다면서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눈물만 흘리고 있는 어미 돼지도 있었어. 아비규환이었어.

단테가 그리려고 했던 연옥이 바로 이런 건가라는 생각이 들더라. 아니면 로댕이 만든 지옥의 문이…….

수풀 너머에서 잠시 보고 있다가, 위액을 토하고 말았어. 그 광경이 너무 끔찍해서 달아나고 말았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너무 무책임하고 비겁하지? 그래도 시베리안 허스키인데…….

걷다가 그 선배가 생각났어.

‘정도는 다르다고 해도 개나 돼지에게도 의식이 있고, 그것을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최소한 저런 취급은 하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닌가.’라고 생각했어. 인간에게 인권이 있다면, 동물에게는 동물권이라는 게 있는 건 아닌가하고 말이야. 내가 본 구제역 현장은 킬링필드와 별반 다를 게 없었어.

치사율이 최대 55%에 이른다는 구제역에 걸린 동물을 처분해야 한다면 생매장 말고 약물 투여 같은 방법으로 고통 없이 저 세상으로 보내주면 안 될까? 주사약의 비용이 사치스러운 걸까? 돼지들이 인간들을 위해 수백 년 동안 제 살을 제공해줬는데도?

 

나 실은 누나 말고 사랑하는 개가 생겼어. 너도 알걸. 음. 누나가 목에 분홍색 리본을 묶어준 말라뮤트 말이야. 그녀도 유기견이지. 나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고생을 엄청 많이 했는데, 그녀는 암컷의 몸으로 얼마나 힘들었겠니. 그런 생각으로 그녀를 바라보니까 왠지 털을 핥아주고 싶고, 지켜주고 싶고, 짐을 나눠 들어주고 싶고, 그렇더라.

물론 그녀는 날 잘 바라보지도 않지만……. 힘들어서 그럴 거야. 구조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렇지? 네가 봐도 그녀가 날 외면하는 건 힘들어서 그런 거 같지? 아니라고? 내 말이 맞아. 볼 때마다 자고 있더라고. 아니면 바닥에 엎드려서 눈만 말똥말똥 뜨고 미동도 안 한 채 앞만 쳐다보고 있던지. 많이 지친 거 같았어.

사랑에 빠져서 다행이야. 누나 덕분에 예전의 매력도 어느 정도는 되찾았으니까. 아직 나도 좀 움직이기 힘든 면이 있지만……. 오른쪽 뒷다리가 잘 움직이질 않아.

왜 예수님이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는지 알 거 같아. 사랑은 과거의 모든 아픈 기억까지,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잊게 해주는 거 같아. 마법의 약과 같아. 누군가 큐피드의 화살 같은 걸 물약으로 만들어서 팔면 대박일 거야, 그치?

미안하다. 실없는 소리를 해서. 알았어. 미안하다는 말도 그만할게. 이것도 떠돌이 생활의 잔재이기는 해. 그저 누구에게나 다 미안하더라. 외로우니까 그런 것도 있고. 항상 미안하다고 말할 만큼 섬세하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 누구도 거대한 먼지 덩어리와 같은 날 사랑해주지 않더라. 내 곁에 같이 있어주지도 않았어.

그런데 내 사랑에 방해꾼이 하나가 있어. 실은 그것 때문에 아까부터 널 붙잡고 얘기를 하고 있는 건데……. 물론 친구로 내가 널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지만 분명히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장황하게까지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녀가 내 말문을 틔워줬다고 해야 할까. 그게 아니라면 굳이 같은 수컷끼리 이렇게 많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나? 아닌가? 내가 잘못됐을 수도 있고. 아, 참, 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구나.

내 고민은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야. 그것 때문에 그녀에게 다가가기가 힘들어. 그게 뭐냐고? 넌 뭐하고 살았냐. 아직까지 그것도 모르고……. 이해한다. 이해해. 그럴 수도 있지.

야, 잠깐만. 누나가 부르신다. 마당에 같이 나가볼래?

 

마당에 나오니까 좋다, 그치? 파랗게 새로 돋아난 잔디를 좀 봐. 너무 귀여워.

질이 나쁜 중학생들에게 당하고, 돼지들이 집단으로 생매장되는 구제역의 현장까지 보고 나니까 너무 견디기 힘들었어. 내 영혼도, 마음도 모두 10억 광년쯤 떨어진 행성으로 떠나고, 껍데기만 남은 기분이었어.

좀비처럼 생각과 의식이 흐려지면서, 불안증이 심해졌어. 매일 악몽을 꾸고, 괜히 숫자도 세고, 길을 지나가다가 간판을 보면서 몇 글자인지 세기도 하고, 거의 십 분마다 시계를 보기도 하고…….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게 다른 게 아니라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라는 것을 알았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가 뭐냐고? 그건 일종의 정신질환이야.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였던 거, 그걸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라고 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 갇혔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사람들도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의 증상을 보였다고 해. 괜히 건물이 무너질 것만 같고, 똑같은 일이 반복될까봐 너무나 두렵고. 그러면 일상생활도 제대로 유지하기가 힘들어. 천안함에서 생존한 장병들과 구제역의 현장에서 돼지들을 생매장하는 일을 한 인부들도 이런 고통을 호소했다고 해.

떠돌이 생활을 할 때, 너무 고통스럽고, 하루하루가 괴로워서 먹을 것을 구할 때 빼고는 거의 혼자서 지냈어. 불가항력적으로 잠에 빠져든 것도 이 즈음이었어. 너무 자서 나중엔 허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어.

참 불쌍하지, 나? 한참 뛰어놀면서 성장하고, 세상을 만끽해도 모자랄 나이에…….

육체의 건강만이 전부가 아니라니까. 정신의 건강도 중요해.

끔찍한 늪에서 스스로 날 끌어올리기 위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어.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집에 가면 몇 권의 책을 구할 수 있었어. 그분들도 외로우셨는지 나를 쫓아내지 않으셨어.

살고 싶다는 장돌뱅이의 이야기,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행복하다는 고백을 하는 사지가 없는 청년의 이야기 같은 걸 읽었어. 물론 어려운 책들도 조금 읽었고. 크크크.

그리고 달리기도 시작했어. 참 건장하고 잘생겼던 골든 리트리버였는데, 그 역시 유기견이였어. 그가 나를 보더니 자기가 더 견디기 힘들었는지, 같이 달리자고 하더라. 처음엔 억지로 끌려갔어. 아무것도 하기 싫었거든. 조금씩 변하는 나를 보면서, 나중엔 내가 재미있더라. 내가 좋으니까, 나중엔 안 시켜도 하게 되는 거야.

이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에서는 많이 벗어났어. 너랑 이렇게 길게 이야기도 하고 있잖아.

그걸 회한이라고 부를 생각이야. 그래도 될 때가 온 것 같아.

하지만 아직 모자란 부분도 있어. 잔상들이 남아서 떠돌고 있다고나 할까.

이게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기 힘든 이유야.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온 게 얼마 안 되니까,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기가 힘든 거야.

춥다. 들어가자. 꽃샘추위가 맹렬하네.

 

얼마나 많은 개들이 버려지는지 알아? 서울에서 작년 1월부터 8월 사이에 버려진 개가 1만2000여 마리야. 몰티즈 1208마리와 진돗개 284마리가 버려졌어. 엄청나지? 전국적으론 한해에 8만2658마리가 버려졌어. 2002년 이후에 지속적으로 그 숫자가 늘고 있어.

이 개들이 어떻게 되느냐고? 60% 정도는 안락사당하거나 병에 걸려 죽는대. 나머지는 우리처럼 유기견이 되는 거지. 그중에서 아주 운이 좋은 친구들만 우리처럼 동물보호협회에 의해서 구조가 되는 것이고.

버려진 개보다 수위는 낮겠지만, 버린 사람도 어느 정도로는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을까?

동물을 학대하는 현장을 보고 자란 어린이는 어른이 됐을 때 폭력 성향을 보일 가능성이 크대. 선진국에선 자폐증 어린이나 재활 치료를 하는 환자에게 동물을 키우게 하기도 한대. 응? 누가 그랬냐고? 누나의 남자친구들한테 들었어. 약물치료 같은 것보다 유기견을 키우는 게 자폐증 어린이나 재활 치료를 하는 환자에게 정신적으로 훨씬 더 많은 도움이 된대.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는 것은, 어린이의 정서적 성장에도 도움이 되고.

그리고 참, 우린 애완동물이 아니야. 반려와 애완은 다르대. 애완은 아끼는 장난감이란 뜻이래. 이건 나도 아까 한 말이지만, 동물은 엄연한 생명체이잖아. 장난감처럼 싫으면 버리고, 던지고, 부숴버릴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란 말이지.

동물에게도 복지가 있대. 인간의 편의에 의해 동물을 이용할 순 있지만,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편안하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형들이 그랬어. 자신들은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고도.

야. 물을 좀 먹자. 말을 너무 많이 했다. 그런데 넌 원래 말수가 적니? 응? 뭐라고? 내가 너무 말을 많이 했다고? 흐흐흐. 미안해. 아. 미안하다는 말을 이제 안 하기로 했는데…….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좀 편한 거 같아.

 

구조되고서 결심했지. 내 사랑 말라뮤트 양을 위해서, 비록 아직 이름도 모르긴 하지만, 어쨌든……. 사랑하는 누나를 위해서, 음, 그리고 내 절친한 친구인 너를 위해서, 제대로 된 삶을 살겠다고.

내가 처음에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 잊지 않으려고 길거리에서도 노력을 많이 했어. 결혼해서 강아지도 낳고, 주인의 말도 잘 듣고, 흠……. 너무 큰 욕심을 부리면서 살고 싶진 않아.

내가 007이라고 스스로를 부르게 된 건 과거의 기억과 연관이 많아. 007 시리즈의 22탄인 ‘퀀텀 오브 솔라스’에서 제임스 본드로 나오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 그의 고통과 역경,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첫사랑의 비밀을 찾아가는 행로가 난 좋더라. 나도 그렇게 살아봐야겠다, 뭐, 그런 것이지.

날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구해준 것은 누나와 누나의 친구들이지만, 이제는 내가 나를 구하고 싶어. 그리고 거기서 조금 발전한다면 다른 유기견들도 구하고 싶어. 과거보다는 그래도 조금 더 행복하게, 아주 약간만, 그리고 내 아이들이 나보다는 조금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너무 오버하지 않는 선에서만 살아보고 싶어. 지금 우리가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이 언제까지나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사람들도 동물들도 편안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줬으면 해. 5월의 라일락 향기만큼이나 매혹적인 것들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에 이런 내용이 나와. 아까 말했던,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집에서 읽었는데……. ‘만약 외계인이 지구를 찾는다면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개미들과 대화하려고 할 것이다.’라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의하면, 지구에는 인간보다 더 많은 개미들이 살아간대. 지구의 주인이 인간이라는 생각은 인간만의 생각이라는 것이지. 인간의 지나친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꼬집은 말인데……. 지구에는 인간만 사는 게 아니니까.

인간의 고유한 권리를 부정하지 않지만, 이제 인간도 이미 많은 종을 멸종시킨 만큼, 그리고 지구의 환경을 이미 많이 파괴한 만큼, 다른 종과 지구의 환경에 대해서 깊은 책임감을 느낄 때가 됐다고 봐.

그리고 그게 결국은 인간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면서, 대대손손, 지구에서 조화롭게, 조금 더 눈부시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현명한 길이지 않을까.

 

야. 저기 그녀가 온다. 그녀가 여기에 온 후로, 그녀가 걷는 걸 본 건 처음이야. 이제 좀 괜찮아졌나봐.

“안녕? 난 007이라고 해.”

“먹을 거 있니?”

“배고파?”

“언니가 먹을 것을 주기는 했는데, 그래도 아직 배가 고프네.”

“그럼 우유를 조금 먹어봐. 먹을 게 있기는 한데, 아직 이렇게 몸이 회복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퍽퍽한 걸 먹는 건 좋지 않은 거 같아. 이해하겠지? 지금은 일단 안정이 필요해 보인다. 서서히 적응하는 게 더 좋을 거 같아.”

“고마워……. 친절하구나.”

그녀가 우유를 먹어. 휴. 그래. 그녀가 움직이는 걸 보니 좋아. 하하하. 그래. 너도 좋아.

“다 먹었어?”

“응. 한결 낫다.”

“햇볕을 좀 쫴봐. 창가로 와봐. 직사광선은 무리일거야. 창에 비춰져서 들어오는 햇볕을 쬐는 게 나을 거 같아.”

우린 어디로 가게 될까? 새 주인을 만나고 싶어. 내 상처를 감싸주고, 내가 도약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새 주인을 만나고 싶어.

“저기. 졸고 있는데 미안하지만, 이름이 뭐야?”

“내 이름? 수정. 수정이야.”

수정이래. 드디어 이름을 알았다.

“선물을 줄게.”

“선물? 무슨 선물?”

“이야기, 짧은 이야기야.”

“옆에 있는 내 친구랑 같이 들어도 돼?”

“그럼. 같이 들어도 돼. 우린 모두 비슷한 처지이잖아. 그리고 너희는 내게 우유도 줬잖아.”

수정이의 얘기를 들어보자고.

“태풍이 지나갔어. 일주일 동안 비가 내려서 땅위에 먼지와 쓰레기들이 비에 모두 쓸려갔어. 거센 바람에 작은 물건들과 동물들도 날려갔어.

하지만 우린 운이 아주 좋았어. 마음이 착한 사람을 만나서, 그녀의 튼튼한 집에 몸을 숨길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평소에 열심히 일을 해서 먹을거리를 저장해뒀어. 우린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그녀의 집에서 몸을 숨기고, 그녀가 저장해둔 먹을거리들을 야금야금 먹었어.

일주일 동안 집안에만 있었더니, 너무 심심하고 견딜 수가 없었어. 일주일 뒤에 태풍이 지나간 것을 확인하고, 그리고도 하루가 더 지나기를 기다렸어.

그리고 바깥으로 나왔어. 밤이었지만, 달빛과 별빛에 의지해서, 풍경들을 볼 수 있었어. 태풍으로 은행나무가 뿌리 채 뽑혀 뒹굴고 있었어. 개들도 다리가 부러지고, 돌풍에 날린 돌에 긁혀 상처투성이가 됐어. 별들은 상처가 아문 듯 했어.

난 엄마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황금빛 성이 황금빛 모래로 흩어지기 전에…….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바깥으로 나왔어. 햇볕이 식빵 사이에 잼처럼 깔려 있었어.”

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동화야. 친절하게 대해줬잖아. 난 너희들에게 동화를 이야기해주고 싶어.”

잠자코 듣고 좀 있으라고? 알았어.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햇볕이 식빵 사이에 잼처럼 깔려 있었어. 아픈 동식물들이 스스로 상처를 돌보고 있었어. 비가 일주일 동안 내려서 하늘이 무척 맑았어.

저쪽에서 둥근 물체들이 다가왔어. 점점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어.

그것은 복어들이었어. 배가 빵빵하게 부픈 복어들이었어. 복어들은 무얼 먹었는지, 빵빵해진 배에서 다양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어. 파랑, 노랑, 빨강, 하양의 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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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영이는 가족을 속였다. 유서를 남기고서는 여행을 다녀왔다. 준영이의 유서를 발견한 부모님은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부모님의 수심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식이 된 도리로 가까이에서 보기 힘들 정도였다. 난 그 충격으로 환각증상을 겪으면서 독일에도 다녀왔다.

준영이는 모두를 속였다. 준영이가 정말로, 진심으로, 진지하게 자살을 결심한 줄로 알았다.

물론 유서가 발견된 것 말고는 준영이가 정말로 자살을 감행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었기에, 일말의 희망을 놓지는 않았었다.

평소에 큰 사고를 친 적이 없는 녀석이라서 가족들의 충격은 매우 컸었다. 그가 지금까지 친 가장 큰 사고는 대학교 2학년 때에 학고를 받은 게 거의 다였다.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준영이의 과실이 아니므로, 그가 친 사고라고 보긴 힘들다.

이 사건, 그러니까 준영이의 실종사건 또는 준영이의 가짜 유서 사건은 신문에까지 나왔다. ‘나라대 대학생, 유서 남기고 사라져’, ‘나라대 학생, 유서에서 징벌적 등록금제 비판’ 등의 제목으로 몇몇 신문에서 보도도 했다.

경찰에 실종신고만 했는데, 준영이가 나라대의 학생이며, 유서의 내용에 당시 화제였던, 나라대의 징벌적 등록금제도에 대한 언급 내지는 비판이 있었기 때문에, 그 경찰서에 출입하던 기자들이 데스크와의 상의 후에 기사를 쓴 거 같다. 나는 몰랐지만, 기자가 어머니에게 전화도 했었다고 한다.

 

대략 한 달 전이었다. 공항 벤치에 앉아 게이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난 눈이 침침했다. 며칠 동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자는 것도 아니고 자지 않는 것도 아닌 몽롱한 상태가 계속됐다.

일을 제대로 할 수도 없었다. 시뻘건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연거푸 커피만 마셨다. 직장 사람들은 그런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의식이 들었다. ‘얼마나 남동생을 돌보지 못했으면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쓸 때까지 방치했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 모든 불행이 나의 책임이라고도 생각했다. ‘내가 조금 더 훌륭한 사람이었다면 준영이는 자살하지 않았을 거다. 부모님도 비참해지지 않았을 거다.’라고 생각했다.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 삼십분 정도 남았다. 엠피쓰리에 담아온,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돈트 에스크 와이’에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거칠게 뭉그러지는 기타 소리가 귀를 간지럽게 했다.

준영이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노래를 방에 크게 틀어놔서 볼륨을 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는 했다. 준영이는 음악을 스피커로 틀어놓는 걸 좋아하지만, 난 스피커로 음악을 듣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 3번 게이트에서 비트겐슈타인이 걸어왔다. 준영이의 자살로 허우적거리는 나를 다시 일상의 궤도로 올려놓은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다.

그는 회색 정장에 푸른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전자총에라도 맞은 것처럼 분자로 쪼개져 허공으로 사라졌다.

환각현상이다.

눈을 살짝 감거나 잠시 멍한 상태에 빠져 있으면, 비트겐슈타인이 나타났다.

준영이가 자살한지 속고 있을 때, 우연히 어느 남성잡지에서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글을 읽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이 환각으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내가 준영이에게 어떤 존재였는가에 대한 답을 간절히 구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비트겐슈타인은 버트란트 러셀의 제자다. 그는 1889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철강 사업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했던 카를 비트겐슈타인. 하지만 카를의 재력은 가족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와 그의 가족은 매우 불행했다. 첫째, 둘째, 셋째 형이 모두 자살했다. 첫째 형 한스는 미국에서, 둘째 형 루돌프는 독일에서, 셋째 형 쿠르트는 1차 세계대전의 접전지에서 자살했다.

나보다 더 불행했을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위로를 얻었다. 난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을 잃은 줄만 알았고, 그는 세 명의 형을 잃었으니까.

내가 헤쳐가야 할 길의 표지판을 비트겐슈타인이 갖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형들과 준영이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주변사람들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것. 비트겐슈타인의 형들은 세계대전이라는 참극 속에, 준영이는 징벌적 등록금제도라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나와 비트겐슈타인에게도 공통점이 있었다. 친형제를 잃어버렸다는 것, 하지만 절망하기보다는 떠나간 형제의 몫까지 살아서, 남은 자들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겠다고 발버둥을 쳤다는 것.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 ‘철학은 생각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그음과 동시에 생각될 수 없는 것에 한계를 그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고.

그때의 난 영원히 침묵하고 싶었다. 모든 사물과 개념들을 생각할 수 없었고, 어떠한 감정과 생각도 말로 꺼내기 힘들었다.

 

잠에서 깼다. 고개를 들어, 멀뚱멀뚱, 비행기 천장을 바라봤다.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온몸이 쑤셨다. 책이나 영화를 보고 싶진 않았다.

고개를 돌려서, 주변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찰했다. 복도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든 남자,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열심히 영화를 보고 있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커플…….

“승객 여러분. 이제 곧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합니다. 안전벨트를 제대로 매고 있는지 확인해주십시오.”

자세를 고쳐 자리에 똑바로 앉았다. 푸석푸석해진 마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몇 번 문질렀다.

주원이가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친구의 소개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3년 전에 직장을 그만두고 독일로 유학을 와 있다.

“점을 뺐네?”

“어떻게 알았어? 역시 자기구나.”

주원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둘이서 따뜻한 토마토 파스타와 오징어 먹물 빵을 먹었다. 그리곤 캔 맥주로 입가심을 했다.

맥주가 입술에서 마를 즈음 창문을 열었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봤다.

준영이가 떠올랐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지압을 하기 위해서 손가락으로 머리를, 쿡쿡, 눌렀다.

“한 달만 쉬다가 갈게. 괜찮겠지? 자긴 원래 일정대로 움직여. 난 독일의 애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 취재 좀 해보려고. 회사에서 시킨 건 아니고. 내가 해보고 싶어서…….”

“직업은 못 속인다니까.”

그녀도 나의 환각증상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난 요즘 논문 때문에 정신이 없어.”

“독일인 남자친구가 생긴 건 아니지?”

“남자친구들은 많아. 자기는 아주 특별한 사람인 거고. 자기는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인 거고.”

짐을 풀고, 주원이와 밖으로 나왔다.

골목에는 오래된 건물들이 즐비했다. 거대한 박물관이나 신전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주원이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마트 앞에서 서성였다.

눈길이 머무는 곳에 금발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광합성을 하고 있는, 신비스러운, 오후의 나팔꽃처럼 보였다.

그녀는 저녁의 햇볕이 따가운지 작은 손바닥을 펼쳐서 햇빛을 가리려고 했다.

“내일 아침으로 스테이크를 해줘도 괜찮겠지? 난 이제 거의 적응해서 괜찮긴 한데…….”

“응? 괜찮아. 그런데 오늘 주말이니?”

“아니. 평일이야. 왜?”

“애들이 이른 시간인데 집에 있어서…….”

“쟤넨 원래 그래. 독일 애들은 수업이 일찍 끝나. 고등학생쯤 되는 애들도 오후 2시면 수업이 거의 다 끝나. 수업이 끝나면 취미활동을 하고, 그렇지, 뭐……. 친구나 가족들이랑 놀고……. 음……. 처음에 한국인들이 독일에 오면 그런 거에 적응을 못해. 나도 그랬어.”

“특이한 나라네.”

“아프면 학교도 가면 안 돼. 아픈데 학교에 가면, 병원균을 친구에게 옮길 수 있다고, 싫어한다기보다는 금지해. 그건 비상식적이며, 매우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것이지. 병이 다 나았다는 진단서를 제출해야,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어.”

“그거 괜찮은 거 같은데…….”

“아이스크림이나 먹을래?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을 먹는 게 최고야. 준호 씨, 이것들 좀 들고 있어봐.”

주원이는 아이스크림가게로 들어가더니, 초콜릿과 땅콩가루가 듬뿍 얹어진, 꽤 큰 아이스크림 두 개를 들고 나왔다.

“걸으니까 좀 낫지?”

“너랑 장 보는 것도 좋고, 얘기하는 것도 좋고. 기분이 한결 좋아졌어. 독일의 애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어.”

“내가 유학을 와서, 자기랑 도련님에게 신경을 많이 못써서 미안해. 다 잘 될 거야. 준영 씨가 진짜로 자살을 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잖아. 희망을 버리지 말자고. 일단 자기부터 지친 마음을 좀 풀어.”

 

차창을 열었다. 차안으로 한 무더기의 상쾌한 바람과 한 다발의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왔다.

뒤쪽 시트에 놓은 바구니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꺼냈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플라타너스들을 보면서 샌드위치를 오물조물 씹었다.

“준영이는 자살한 게 아닐지도 몰라. 비밀조직의 음모에 빠져서 억지로 유서를 남긴 걸 거야. 아니다. 준영이에게 적용하기에는 너무 끔찍하다. 우리를 속이고 하와이나 괌 같은 곳에서 숨어서 지내고 있을지도 몰라. 신분을 위조하고 성형수술을 하고, 국가를 위한 비밀작전을 수행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국정원 같은 데 취직을 한 건지도 몰라.”

주원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움켜잡고서는 묵묵히 앞만 봤다. 그녀는 운전에 몰두하고 있었다.

준영이에 대한 음모설이 007 시리즈 같은 공상이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런 상상을 지우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말이라도 누군가에게 하지 않으면, 숨이 막혀서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준호 씨. 아우토반이야.”

“아우토반? 속도 무제한인 도로?”

“아우토반이라고 모두 속도가 무제한인 건 아니야. 무제한 구간이 있고, 제한 구간도 있어. 무제한 구간에서도 권장 속도가 있고. 그러니까 일반도로랑 별로 다를 건 없어.”

“양파랑 비슷하다. 독일은 까면 깔수록 뭔가 계속 나와.”

“그건 뭐든지 다 그렇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원래 다 어느 정도는 다층적이지 않아? 그런데 준호 씨. 이제야 좀 준호 씨 같다.”

아우토반에 있다고 하니까, 잊고 지냈던 일이 떠올랐다.

나와 준영이의 어렸을 적 꿈은 카레이서였다. 둘 다 독일의 전설적인 드라이버인 미하엘 슈마허를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좋아한다.

어렸을 때, 우리가 슈마허에게 보인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다. 슈마허의 포스터를 방에 붙여놓고, 슈마허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카레이싱 게임도 즐겨했다.

둘 다 슈마허를 좋아한다기보다는 준영이가 날 따라한 것에 더 가깝기는 하지만…….

“다 왔어, 준호 씨. 투비아 공원이야.”

홀로코스트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살렸다는, 투비아를 기리는 조각상들이 잔디밭에,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식탁에서 빼온 테이블보를 보리수나무의 그늘 아래에 돗자리삼아 깔았다. 피크닉 가방에서 샌드위치, 피자, 과자, 사과와 물통을 차례대로 꺼내서 테이블보 위에 늘어놓았다.

주원이가 파슬리가 얹어진 피자 한 조각을 떼어서, 내게 줬다.

우리를 둘러싸고, 바람이, 아주, 살랑살랑, 불었다.

피자를 손에 들고서, 물통을 찾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보 위로 개미 한마리가 올라와 있었다. 작고 검은 일개미가 빵부스러기로 다가갔다. 개미가 빵부스러기를 몇 번 건드리더니, 빵부스러기를 끌고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평화로웠다.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들이 고마웠다. 그리고 주원이가 피자를 오물거리면서 내 뺨에 입을 맞춰줬다.

 

“형은 왜 살아?”

“답답하다. 창문을 좀 열게.

담배를 한 대 필래? 주원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집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지만,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니까 이해해줄거야.

형도 아주 평범한 대학생활을 했지만, 너처럼 1학년 때부터 토익을 공부하고 그러진 않았어. 우리 위에 선배들은 대학만 졸업해도 취직이 잘 되는 분위기였어. 호황기였거든.

난 IMF가 와서 조금 힘들었어. 이직을 하려고 하는데, 수습기자를 뽑는 방송사가 한군데도 없는 거야. 경력으로 움직이기엔 경력이 너무 짧았고……. 난감했지. 한 달에 30만원을 받으면서 하루에 12시간씩 일한 적도 있어. 거의 1년 정도를 그렇게 산 거 같아.

음……. 젊은이들에게 제대로 된 희망을 제시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

나도 너에게 인생의 밑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얘기해준 적이 없잖아.

밑그림이 참 중요하지만, 내게 밑그림 따위는 사치였어. 상상할 수 없다기보다는 없으니까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더 가까웠어. 그럴 여유가 없었어. 우린 모두 너무 바빴어.”

“형의 말이 맞아…….”

“한줄기의 빛도 없는 골방에 갇힌 상태로 지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더라. 입학하자마자 토익 공부를 하면서 취업하기 위한 각종 활동들에 파묻혀 살았잖아. 어학연수, 봉사활동, 인턴, 그런 것들을 하면서 말이야.

끝없는 경쟁 속에서 무언가를 갈망할 권리조차 박탈당했을 수도 있어. 꿈을 잃어버린 거지.

우리는 그게 아니라고, 우리에 비하면 넌 얼마나 행복하냐고, 남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모르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꾸리는 필수적인 요소 같은 거, 연애, 우정, 자신만의 목표 찾기, 그런 것들을 가르쳐주는 것은 잊어버리고…….”

담뱃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하엘 슈마허도 항상 챔피언은 아니었잖아. 부상으로 복귀를 미룬 적도 있잖아. 실격을 당한 적도 있고. 1위였다가 하위권으로 밀린 적도 있지.”

 

준영이가 실종됐을 때, 우리의 교육제도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다. 거기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어디로든 발을 내딛고 싶었다.

준영이가 징벌적 등록금제도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걸 안다. 준영이처럼 평화로운 시대만을 살아온 청년에게는 그것이 큰 벽으로 다가왔을 수 있다.

녀석이 유서를 남기고 사라지고서, 녀석의 방에서 우연히 녀석의 일기장을 봤다. '등록금 때문에 같이 공부하는 친구와 친해지기 힘들다.' '오늘도 상원이와 크게 다퉜다.', 이런 문장들을 읽었다.

OECD 회원국 중에서 우리나라의 교육수준은 1위이다. 핀란드는 2위이다. 어느 날 어떤 자리에서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한 교육자가 핀란드의 한 교육자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어떻게 따라오실 건가요?’ 핀란드의 교육자가 이렇게 답변했다. ‘핀란드 학생들과 한국 학생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뭔지 아세요? 핀란드 학생들은 행복하고, 한국 학생들은 불행하다는 것이에요.’

핀란드의 교육은 우리와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고학력의 학생들보다 저학력의 학생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떨어트리는 교육이 아니라 끌어올리는 교육을 하는 것이다. 우월반의 수업은 없지만, 우리가 열등반으로 부르는 수업은 있다. 그들은 그것을 당연한 상식이자, 윤리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어울리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반대다. 저학력의 학생들은 일치감치 평균 이하라며 밑으로 떨어트린다. 우월반과 열등반으로 나눠서, 열등반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빼앗는다. 좋은 환경과 각종 특혜는 우월반의 아이들의 몫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상식이라고 말한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주원이의 핸드백에서 차키를 꺼냈다.

한국 면허가 독일에서도 통용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차를 끌고 좀 달려야했다. 안 그러면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부르릉, 낮게 으르렁거리는 녀석의 엔진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살 거 같았다.

끄윽, 트림이 났다. 딱 맥주 캔 한 개를 먹었지만, 경미한 수준이라고 해도 음주운전은 안 될 거 같았다.

얼마 안 가서, 도로변 공터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엔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초코쿠키 위에 뿌려진 땅콩 조각처럼 보였다.

쌀쌀했다.

술도 깨고, 추위도 이기고 싶어서, 뛰었다.

어둠 속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내 안에 고인 무언가가 출렁였다. 세밀한 영상으로까지는 떠오르지 않지만, 준영이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등산복 차림의 비트겐슈타인이 나타났다.

그는 파란색 등산화, 테가 둥그렇게 늘어지는 파란색 등산용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 물통을 담았는지 아니면 책을 넣었는지, 작은 등산용 가방도 메고 있었다.

“당신은 참 대단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었잖아. 하지만 당신도 형들의 자살로부터 자유롭진 않았어.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았을 때, 당신은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어. ‘암에 걸렸다는 게 놀랍지 않아. 난 더 살고 싶지 않아.’ 이건 모든 걸 포기한 인간이 할법한 말이야. 당신이 형들의 자살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명백한 증거이지.”

형들의 자살은 여러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모되어, 그를 괴롭혔을 거다.

‘괜찮은 거니?’, ‘너도 자살하는 건 아니지?’ 무심코 타인들이 뱉은 이런 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을 것이다. 누구도 풀 수 없는 미분문제가 되어 그의 마음에 적혀 있었을 것이다.

 

물안개가 올라왔다.

‘근처에 저수지나 호수가 있나봐.’

조금 걸었다.

호수인지 저수지인지, 거대한 물웅덩이가 보였다.

숨이 막힐 때까지 그 주변을 뛰었다.

숨이 차서, 팔을 무릎에 대고 벤치에 앉아 헉헉거렸다.

하늘 한쪽에 떠 있는 달을 힐끔 봤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국의 꽃 위에서 천천히 기어가는 작은 달팽이를 봤다.

인공의 빛이 장승처럼 곳곳에 서 있었다.

셔츠를 끌어올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가슴과 배에 맺힌 땀을 손으로 털어냈다.

다시, 현기증이 날 정도로 뛰었다.

바람으로 만든 듯 투명하며, 파란 잎들이 약간 섞인 버스가 왔다.

내가 어리둥절해서 타지 않고 머뭇거리자, 준영이가 내렸다. 뒤이어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리버 피닉스도 내렸다. 비트겐슈타인과 축구공을 든 히스 레저도 내렸다.

‘형. 나랑 에이미, 피닉스가 한 편이고, 형이랑 비트겐슈타인, 레저가 한 편이야. 이해했지?’

히스 레저가 내게 공을 패스했다. 난 준영이에게 패스.

비트겐슈타인이 내 팔을 툭 쳤다. ‘정신을 차리라는 신호인가보다’했다.

준영이는 피닉스에게로 패스, 피닉스는 우리 골문 앞에 와 있던 준영이에게 패스. 준영이는 기회라는 듯이 발을 높이 들어 골대를 향해 힘껏 슛.

골이었다. 난 환하게 웃었지만, 비트겐슈타인과 히스 레저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곧 웃었다.

이건 게임이니까. 게임에 불과하니까.

고개를 흔들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채 헉헉거리며, 나 홀로 공터에 쓰러져 있었다.

헤어짐에는 항상 흔들림이 동반되게 마련이다. 나를 위한 변명이다. 남은 생을 꾸역꾸역, 그게 말라비틀어질 정도로 구차한 것이라고 해도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내 안의 부패한 것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혈액형이 바뀔 정도로까지 나를 개조해서라도 살아남고 싶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이라도 좋아. 내 삶을 즐길 거야. 삶은 문제집이 아니야. 항상 컴퓨터용 사인펜을 품에 넣고 다니며, OMR카드의 작은 동그라미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려고 조마조마하게 살 필요는 없어.

물론 가끔 그래야 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곧 인생이 되는 순간엔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버려.’

 

“새벽에 나가서 뭐 한 거야?”

“에이미 와인하우스랑 축구했어.”

“이따가 신경정신과에 같이 가자, 자기야. 거부감을 갖진 말고. 독일인들은 신경정신과에게 편하게 다녀. 친한 친구한테는 스스럼없이 얘기도 하고, 그렇지, 뭐…….”

주원이가 당근과 브로콜리가 들어있는 수프를 줬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기침이 났다. 거의 쓰러질 때까지 뛰었다. 선선한 아침 공기에 그대로 땀을 식혔더니 감기몸살이 왔었다.

물을 한 모금 입에 물고, 주원이가 준 감기약을 탁탁 털어 넣었다. 나도 이제 마냥 강철체력은 아니다.

“수업을 듣고 올게. 영화도 보고 그래.”

다리가 약간 저렸고, 머리도 아팠다.

유자차가 먹고 싶었다.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주전자에 물을 넣고,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았다. 주원이가 유자차는 찬장에 있다고 그랬다.

병들이 서로 부딪혀 달그락거렸다.

주전자의 물이 끓으면서 수증기와 함께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머그컵에 유자차를 한 숟가락 듬뿍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유자차의 새콤달콤한 냄새와 뜨거운 김이 얼굴로 쏟아졌다.

그리고 엠피쓰리를 컴퓨터의 스피커에 연결했다. 스피커로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음악을 잔잔하게 틀었다.

유자차를 몇 모금 마시자, 목이 편안해지면서 두통도 가라앉는 거 같았다.

따뜻한 물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화장실 거울에 나를 비춰봤다. 주름살이 늘었지만, 아직 탱탱했다. 20대 후반이라고 해도 믿을 거 같았다.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려 덮었다.

눈을 감았다.

검푸른 바다가 보였다. 난 잠수부가 되어 해저로 들어갔다.

흰긴수염고래를 만났다. 손을 뻗어서, 지방이 듬뿍 저장된 흰긴수염고래의 배를 만졌다.

흰김수염고래가 준영이의 목소리로 말을 했다.

“형, 나 그때 많이 아팠어. 몸보단 마음이 아팠어. 형이 나한테 왜 그럴까, 얼마나 힘들면 나한테 그럴까.

형 때문에 자살한 건 아니야.

우리도 그렇게 넉넉한 형편은 아니잖아. IMF 때, 부모님이 하시던 화장품 가게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서 빚이 생겼잖아. 그 빚을 아직도 다 못 갚았다는 걸 나도 알아. 부모님도, 형도 힘들게 일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는 걸 뻔히 아는데, 내 등록금 부담까지 주긴 정말 싫었어.

그런데 성적이 낮으면, 성적이 높은 애들보다 등록금을 더 많이 내라잖아. 4.3점 만점에, 학점이 3.0 미만이면 최저 6만원에서 최고 600만원까지 등록금을 내야해. 0.01학점이 부족할 때마다 6만원씩 추가돼.

가족들에게 이런 등록금 부담을 주기 싫은 게 어디 나뿐이었겠어? 다들 그러니까, 나중엔 친구고 후배고 선배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지더라고. 관계라는 것 자체가 희미해지더라고.”

“그렇다고 유서를 쓰니? 겁쟁이야? 바보야? 우리가 너한테 그 정도밖에 안 됐어. 그렇게 쉽게 버려도 되는 사람이야.”

 

얼마나 잤을까.

오른쪽 어깨에 뻑뻑한 통증이 왔다. 그래서 잠에서 깼다.

팔 굽혀 펴기를 했다. 20번쯤 하니까, 어깨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집밖으로 나왔다.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했다. 독일의 애들은 학교도 일찍 끝난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베이지색 니트를 입은 비트겐슈타인이 윙크를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바람으로 만든 듯 투명하며, 파란 잎들이 약간 섞인 버스 옆에 서 있었다.

어디로든지 떠나고 싶어서 그와 함께 버스에 탔다.

버스의 내부도 투명했다. 발 아래로 바퀴와 바닥도 보였다. 엔진 같은 부품들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버스의 손잡이마저도 투명했다.

손잡이에서 물방울이 밑으로 똑똑 떨어졌다. 하지만 물이 바닥에 고이지 않았다. 버스가 스펀지처럼 물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내 손을 봤다. 실핏줄이 보였다. 배를 봤다. 심장과 폐가 보였다. 나도 투명해져 있었다.

버스는 마치 에너지나 빛으로 이뤄진 것처럼 물질들을 통과했다. 거리의 사람들, 승용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모르는 거 같았다. 투명한 버스와 난 그들에게서 지워져 있었다.

숲에 도착했다. 주황빛으로 변해가는 햇빛을 받으며, 숲속으로 돌진했다.

“투명한 버스의 운전사가 누구인지 알아? 당신이야. 투명한 버스가 왜 숲으로 왔는지 알아? 당신이 숲으로 가길 바랐기 때문이야. 당신의 무의식적인 바람을 투명한 버스가 읽었기 때문이야.

투명한 버스에 타면 아무도 당신을 볼 수 없어. 그리고 어디로든 갈 수도 있어. 당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갈 수 있어. 동물의 몸속으로도, 우주로도, 책속으로도 갈 수 있어.”

무한대의 기호가 얌전히 누워있는 괄호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대학생활에 회의를 느껴서 주변의 관계를 모두 정리한 채 군대에 갔었다. 나보다 네댓 살이나 어린 선임들의 폭력에 시달렸다. 폭언은 기본이고, 철모로 머리를 얻어맞는 일도 종종 있었다. 계급이 낮은 자를 복종시키기 위한 각종 얼차려들은 과연 인간이 선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나는 물들지 않으려고, 후임들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했다.

이상하다는 걸 느낀 건, 제대 후였다. 입대하기 전의 나로 돌아가지질 않았다. 누군가 밥에 독을 탔을 거라는 망상에 빠져서 밥을 먹을 수 없던 적도 있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심하게 대하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검은 빨래와 흰 빨래는 구분해서 빨아야한다는 준영이의 일상적인 말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것조차도 명령으로 들렸다.

준영이가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어서 다퉜다. 그때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했다. 준영이를 발로 걷어찼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서는 사과를 했지만, 나도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준영이도 사과를 받아줬었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시골로 내려가서 반년 정도 혼자 공부하면서 살았다. 죄책감과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그 행동을 했던 것이 준영이를 더 외롭게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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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후대들을 위한, 일종의 기록이다. 소설의 형식을 빌렸다.

 

처음으로 몸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스물일곱 살의 어느 날이었다. 우주태양열에너지연구소에 있는 360°트랙에서 조깅을 하는데, 동기들보다 내가 월등히 빨리 달렸다. 똑같이 출발해도 항상 두세 바퀴 정도 앞섰다. 사용료 내기 게임을 해도 내가 항상 이겼다.

평소보다 신진대사도 빨라졌었다. 평형에서는 프로운동선수들보다 뛰어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어떤 친구는 ‘이 기회에 수영선수로 진로를 전환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 정도의 기록을 세울 만큼 열심히 운동을 한 적이 없었다. 전문적인 코치로부터 특별한 트레이닝을 받은 적도 없었다. 운동은 그때나 지금이나 취미이다.

거기에다가 두뇌회전까지 빨라졌다. 한 번, 쓱, 본 자료가 잊히지 않았다. 업무에 필요한 자료를 생체컴퓨터에 저장하거나, 여유시간을 쪼개서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몸 안의 세포들, 장기들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무엇인가가 나를 조종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끔찍한 사고가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육체를 착육하기 직전까지도 가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었다. 슬쩍 문을 열다가 문을 부순 적도 있었다. 방대한 양의 숫자와 문자들이 머릿속을 점령해서 기절하는 일도 있었다. 잠을 자다가 거의 실신 직전의 상태에 빠져버린 적도 있었다. 침대가 부서져서 방이 엉망이 되고는 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는 했다. 그럴 때는 발작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누리로 인한 육체변형이네요. 직업이 우주태양열에너지 연구원이라고 했죠? 의사들이 모르는 우주로부터 온 파장이나 물질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어요.”

의사가 책상서랍을 열었다. 우주태양열에너지로 만든 빛이 블라인드 사이로 내려왔다. 그가 초록색 팔찌를 내밀었다.

“라이프 타이머라고 해요. 육체와 민감하게 반응해서, 삶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초록빛으로 알려줘요.

반 년 정도 남았을 거예요. 어쩌면 더 짧을 수도 있어요. 반년보다 길 수 있긴 해요. 누리로 인한 육체변형에 대해서 아직 많은 연구가 이뤄지진 못했어요. 그래서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긴 힘들어요.

인공육체가 있으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고요.”

육체가 죽는다고 해도, 인공육체로 새로운 삶을 계속 살 수 있다. 나라는 존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인공육체를 착육하면, 50년에서, 길게는 70년까지도 더 살 수 있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라이프 타이머를 들고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의사는 실은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 부드러운 살갗 밑의 진실은 고목일지도 모른다. 알 수 없다.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특별하지 않은 죽음 앞에서, 남은 시간을 뭘 하며 보낼지 생각했다. ‘직장에 병가를 낸다, 라이프 타이머를 만지작거리며 집에서 쉰다,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난다…….’

지선이가 보고 싶었다. 외롭고 쓸쓸했다. 지선이를 못 본지도 꽤 오래됐다. 일에 치여서, 지선이를 만난 적이 없었다.

지선이와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수줍게, 그리고 매우 어설프게 그녀에게 고백을 하고, 연애를 했던 일들이…….

손목의 생체컴퓨터로 지선이에게 호출신호를 보냈다.

벽면의 스크린에 지선이가 나타났다.

 

나와 지선이 앞에, 물이 담긴 투명한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대기 중의 원자들을 여러 개로 쪼갰다가, 다시 이리저리 합성해서 만든 인공의 물…….

600년 전이었다면 나도 땅으로 돌아가 분해됐을 거다. 미생물들의 일상을 위한 일용할 양식이 됐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인간 외에는 생명이 살지 않는다. 지독한 이상기후로 인해 먹을거리의 생산과 유통시스템이 완전히 망가졌다.

“모든 동물은 태어났다 죽는 거야. 그게 생명체의 숙명이라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물이나 되고 싶었다.

“아파?”

“괜찮아. 진통제를 먹었어.”

“네 육체변형은 진화잖아. 퇴화한 사람들을 몇 명 만나봤는데,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 같더라. 인공육체를 착육하면 되잖아.”

난 일종의 동료의식이나 동질감 때문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진화자나 퇴화자나 오십보백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퇴화자보다는 진화자에게 호감을 갖기는 한다. 진화자는 일반인보다 육체의 기능이 우월해서, 이런저런 일에 도움이 많이 되기 때문이다. ‘도달하기 힘듦’이라는 설정, 욕망의 최종적인 목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진화도 진화 나름이다. 나의 경우처럼, 지나친 진화도 진화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퇴화보다 못한, 가장 비루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린 신의 도박판에 던져진 거야.”

“난 그 도박판에서 빠지고 싶은데…….”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네가 보고 싶었어.”

“왜? 몇 년 동안 연락도 안 했잖아. 물론 네가 성공했고, 무척 중요한 일을 한다는 걸 알아. 바쁘다는 것도 알아.”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지 몰랐어.”

“하지만 노들을 벗어나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 오래 사신 분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예전엔 여행도 다니고 했다는데, 우린 못 그러잖아. 하지만 난 노들이 고향이니까, 노들이 좋아.”

노들은 거대한 플라스틱 돔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 노들은 2813년의 도시를 지칭하는 단어다. 지구상에는 100여개 정도의 노들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노들의 정확한 명칭은 ‘노들 그리고 서울’이다. 주요도시들의 이름은 이런 형식이다. ‘노들 그리고 베이징’, ‘노들 그리고 뉴욕’, ‘노들 그리고 파리’…….

“나도 떠돌이들, 여행가들을 좋아하는데…….”

“신상에 변화가 생기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법이지. 그 맘은 나도 이해해.”

종업원이 우리의 열 손가락 끝에, 하나씩, 작은 센서를 연결했다. 그리고 우리는 갈비찜과 해물떡볶이를 주문했다. 갈비찜과 해물떡볶이의 맛과 향이 뇌에 그려졌다.

우리가 앉은 식탁의 가운데 부분이 열리면서, 밑에서 위로 작은 장치가 올라왔다. 연이어 갈비찜과 해물떡볶이의 3D 시뮬레이션이 나타났다. 갈비찜과 해물떡볶이의 3D 시뮬레이션에 입을 댔다가 땠다.

종업원이 누리 두 알을 들고 다가왔다.

누리 한 알이면 한 끼의 식사가 해결된다. 한 끼의 식사로 누리 외의 것을 섭취할 필요는 없다.

 

이명한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영혼의 안식’에도 갔다. 이명한 선생님은 당대 최고의 우주태양열에너지 권위자이자, 대학에서 내게 처음으로 우주태양열에너지에 대해 가르쳐주신 분이다.

선생님이 임종에 임박했던 14년 전에는, 지금처럼 인공육체가 세련되게 발달하지 못했다.

지금의 인공육체는 인간복제에 가깝다. 복제된 육체에 뇌를 이식한다.

인공육체를 착육하면 생식은 할 수 없다. 하지만 관련 전문가들은 3년 안에 생식기능도 할 수 있는 인공육체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력이 있는 사람이 ‘영혼의 안식’을 선택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나도 그때 선생님의 선택이 의아했었다. ‘워낙 개성이 강한 분이시라서’라고만 이해했을 뿐이다.

입구에서 신분증을 제출하고, 면회를 신청했다.

‘영혼의 안식’의 외양은 웅장했지만, 내부는 한산했다.

안내인이 날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텅 빈 방엔 스피커와 마이크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오랜만이네.”

쾌활하고 힘찬 기계음, 이명한 선생님이다.

“지내실만한가요?”

“못 지낼 건 또 뭔가. 영혼일 뿐인데……. 정확히 말하면 특수물질에 담겨진 뇌이지.”

“센서나 코드들도 연결되어 있으시잖아요.”

“썰렁하군. 농담 실력이 별로 안 느는 거 같아. 참으로 서글픈 일이야.”

그때 진정제를 먹지 않은 게 기억났다. 주머니에서 진정제 한 알을 꺼내 급하게 삼켰다.

“누리인가?”

“아니요. 진정제예요. 저도 곧 죽어요. 누리로 인한 육체변형이에요. 진화이기는 한데요. 너무 많이 진화했다는군요.”

“그래서 날 찾아왔구먼.”

“죄송합니다. 다급해져서야 선생님을 찾아와서요.”

“이곳도 상당히 괜찮아. 영혼이라고 해도 요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알 수 있어. 웹에 접속해서 필요한 정보를 보는 것도 가능해. 심심하지 않아. 다른 영혼들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도 있어.”

“저도 선생님의 곁으로 갈지 몰라요.”

“자네가 왜 이곳으로 오나. 자네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 인공육체를 선택했으면 좋겠구먼. 요샌 인공육체도 많이 발달했지? 그리고 난 특별한 이유로 이곳을 선택한 거야. 자네는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네.”

“선생님이 좋아서 ‘영혼의 안식’을 선택하신 게 아니에요?”

“누리에 대한 연구 때문에 누리사, 그리고 정부와 마찰이 있었어. 누리에 대한 연구의 결과물을 공개하려고 했거든. 그랬더니 상황이 매우 안 좋아지더군.

그 상황이 어땠는지, 누가 나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겠네.

조약했던 인공육체를 착육하기도 싫었고.”

“선생님이 지식인으로서 사회의 귀감이 되기 위해서 ‘영혼의 안식’을 선택했다던, 그 많은 보도들은 다 뭔가요?”

“추측이 아니라면, 정부나 누리사의 보도용 자료를 보고 만든 것이지.

난 나를 ‘영혼의 안식’에 집어넣음으로써 경종이 되고 싶었어. 귀감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야.”

“경종이요?”

“어. 경종. 미친 속도로 앞으로 달려오기만 한 인간이 만든 끔찍한 이상기후에 대한 경종. 결국 그로 인해 인간과 몇몇 박테리아를 제외하고는 모든 생명체들이 멸종한 것에 대한 경종.

누리로 인해 증가한 사회의 불확실성이 얼마나 큰지 아나.

인공육체를 한 사람이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생물일까. 자네는 지금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인가, 기계와 대화를 하고 있는 건가.

노들에 갇힌 사람들의 정신적 분열도 가속화되고 있어.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를 구분하는 사회의 인지적 기능도 백 년 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네.

난 순수한 사람이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네. 누리로 인한 육체변형은 이제 시작에 불과해. 100년 이내에 이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인간은 사라지게 될 거야.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이 지구에서 살게 될 거야.

노들의 정부는 이 문제가 수면으로 부각되는 것을 억압하고 있어.

인공육체가 인간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안 힘드세요? 그렇게 많은 걱정을 떠안고 사시면요?”

“이건 반은 본능이네. 내 아이디어와 비밀번호를 가르쳐줄게.”

“비밀번호가 만 단위만 아니라면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비밀번호인가요?”

 

이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선생님의 개인용 웹페이지에 입력했다.

작은 종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면서 이 선생님의 웹페이지가 열렸다.

일기를 비롯해서, 각종 동영상, 글들이 빼곡하게 들어있었다. 누리에 대한 연구결과들을 담은 폴더도 있었다.

이 선생님의 웹페이지를 훑어보고, 누리에 대한 글을 한편 쓰기로 결심했다. 선생님이 말년에 하시던 누리에 대한 연구와 누리에 대한 그의 견해를 소개하자고. 그가 영혼의 안식을 선택한 것은 시대의 경종이 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점도 포함해서. 물론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나의 생각도 조금 첨가했다.

글을 완성하는 데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제목은 ‘최고라고 불리던, 이명한 우주태양열에너지 박사의 진실’이라고 정했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혼의 안식’으로 이 선생님을 뵈러가기 전에 이 선생님에게 힘든 척 하고 싶지 않았다. 과도한 진화로 육체의 죽음을 앞두고, 인공육체를 착육해야 하는 혼란 속에서도 최대한 무덤덤한 척 했다.

‘반은 본능’이라는 선생님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그 글을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기자에게 이메일로 전송했다.

“보도해도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형을 믿어요.”

그리고 그 글을 내 웹페이지에도 게재했다.

2시간쯤 뒤에 내 글에 대한 첫 기사가 나왔다. 그리고 거의 모든 매체에서 내 글을 분석하는 보도를 쏟아냈다.

꽤 관심을 끌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렇게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올지는 몰랐다.

이 선생님이나 나 말고도 누리와 누리로 인한 육체변형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내심 불만을 품고 있었나보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어딘가에서 뇌관이 터지기만을 기다리고들 있었던 거 같다.

5시간쯤 뒤에는 이 선생님의 인생과 이 선생님이 ‘영혼의 안식’을 선택한 진짜 이유에 대한 특집기사까지 나왔다.

그날 밤에 노들 정부의 보안요원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오후 11시쯤이었다.

“저희와 함께하시죠.”

안대가 채워진 채 어딘가로 끌려갔다. 감옥은 아니었다. 아주 한적하고 청결한 가정집의 거실과 같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외부와의 연락은 허용되지 않았다. 웹 접속도 허용되지 않았다.

노들위원회의 관계자, 누리사의 변호사, 법무부의 관계자와 몇 번의 심문 또는 질의응답을 했다.

거의 아침이 다 됐을 때, 날 담당하겠다고 나섰다는 변호사와 짧은 면담을 할 수 있었다.

“겨우 하루 정도밖에 안 된 짧은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그동안 누리를 다르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꽤 많이 늘어났어요.

여론은 한 박사님에게 유리해요. 한 박사님과 박사님의 글, 이 박사님에 대한 우호적인 층이 두터워서, 누리사나 정부가 한 박사님을 고소하는 일도 없을 거 같아 보여요.”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나요? 그리고 최근에 옛 애인을 만났었어요. 지선이라고요. 다들 잘 지내고 있죠?”

“한 박사님의 가족들은 일상생활에 별다른 변화 없이 모두들 잘 지내고 있어요. 지선 씨라고요? 지선 씨라는 분에 대해서는 한번 알아볼게요. 특별한 일은 없을 거예요.”

변호사가 돌아가자, 보안요원들이 들어왔다.

 

지선이가 살포시 날아왔다. 지선이가 날개인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언제부터니?”

“나도 너랑 비슷한 시기부터?”

“부작용은 없니?”

“없어. 내 날개는 보다시피 날개인 중에서도 조금 작은 편이야. 높게 날지도 못해. 평소엔 숨기고 다녀. 널 만나려고 특별히 저 앞에서부터 조금 날아왔어.”

지선이가 작은 날개를 힘껏 펼쳤다. 깃털은 없지만, 분명히 어깻죽지로부터 나온 작은 날개였다.

날개인은 광고 모델, 행사 진행 등으로 하루에 몇 억 원을 버는, 현대의 전설이다. 날개인은 누리사나 우리 회사처럼 규모가 큰, 다국적 대기업의 광고에 자주 등장한다.

일반인들에게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도 않는다. 몸값을 높이기 위해서인지, 그들만의 규칙이라도 있는 것인지……. 길거리를 다니면서 날개인을 보는 것은 성탄절에 파란 눈이 내리는 것과 비슷한 확률의 일이다.

허공광고판이 우리 위에 떠 있었다. 성인의 팔 크기만 한 날개를 가진 날개인이 누리를 먹고 있는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인공육체는 어느 브랜드로 할 건지 결정했니?”

“아니. 아직…….”

“여성으로 살아보는 건 어떨까?”

긴 한숨의 끝에, 눈물이 났다. 전자책에서 봤던, 해파리부터 향유고래까지, 인간과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인연을 맺어온 모든 생명체들이, 기억에서조차도 한꺼번에 몽땅 떨어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빅뱅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우주와 태양계 그리고 인류의 모든 순간들, 그 연장선상에 있는 내가 불쌍했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한쪽 팔로 지선이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빨리 어느 브랜드의 인공육체를 구입할 건지 결정해. 같이 가줄까? 우리 엄마도 하셨어. 처음엔 많이 우울해하셨는데, 지금은 괜찮으셔.”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진정제를 먹을 시간이네.”

“알았어. 나도 바쁘다고……. 참, 나도 봤어. 그 글을 말이야. 좋았어. 내가 아는 상원이가 맞더라.”

지선이가 날개를 가리는 겉옷을 입고, ‘쉬어, 내 사랑’이라고, 내 귓가에다가 속삭였다.

그리곤 손을 흔들면서, 공중열차정거장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갔다.

지선이가 떠나자,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마치 빛의 끄트머리에서 홀로 미약하게 존재를 드러내는 탁자처럼 변했다.

멸종한지 500년은 된, 최고 기록으로는 120년까지도 살았다던 바다거북이의 하품 같은 피로가 몰려왔다.

노들의 어딘가에서 바다거북이가 수조의 물을 헤엄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우리 집의 문 앞에서였다.

나보다 더 건장한 사내가 손수건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현관문 뒤에 숨어 있었다.

손수건에 마취제를 묻혔는지, 사지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사내가 희미하게 보였다. 내 윗옷을 벗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저항할만한 힘이 없었다.

그가 내 팔을 붙잡고, 날 질질 끌어서, 벽 쪽으로 날 옮겼다. 그리고 벽의 고리에 내 양팔을 고정시켰다.

난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서히 의식이 돌아오면서, 주변의 것들이 점점 또렷해졌다.

수초색의 방이었다.

방에는 6개의 생체센서가 달린 장치가 있었다. 외식할 때 사용하는 센서와 비슷한 유형인데,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최신의 것이었다. 생체컴퓨터와 외식용 센서의 구조를 융합한 것 같았다. 그 장치가 생체컴퓨터, 외식용 센서와 다른 건, 센서의 끝에 작은 바늘이 달려있다는 것이었다.

벗어나려고 이리저리 팔을 움직였다. 하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사내가 내게 다가왔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방에는 사내와 나, 단 둘 뿐이었다.

그가 내 입을 강제로 벌렸다. 그리고 누리 세 알을 내 혀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그걸 다 삼킬 때까지 커다란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자료는 없나?”

기계음으로 변형된 목소리.

“무슨 자료? 누리에 대한 자료?”

사내가 내 오른쪽과 왼쪽 가슴의 힘줄에 생체센서를 3개씩 꽂았다.

그가 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길고 가느다랗지만, 매우 강렬한 자극이 육체변형으로 두꺼워진 근육을 뚫고, 내장에까지 쏟아졌다.

자극은 가상과 실재를 버무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온몸이 생체컴퓨터에 접속한 것만 같았다. 다른 차원이나 공간으로 순간이동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이대로 존재가 영원히 지워질 것만 같았다.

“이 박사에게서 다른 자료를 받았나?”

사내가 내 양팔과 양다리의 힘줄로 생체센서를 옮겨 꽂았다.

그가 다시 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자극이 팔과 다리의 근육을 경련시켰다. 극심한 고통이 힘줄과 근섬유의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를 괴롭혔던 자극도 우리 회사에서 만든 우주태양열에너지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고통이 기억될 뿐이야. 너무 걱정하진 말라고. 널 헤칠 생각이 없어.”

“우리? 넌 누구야? 나한테 무슨 자격으로 이러는 거야. 이런 건 불법이라고.”

“너는 선을 넘었어. 그분도 이 일에 동의하셨어.”

“그분은 누구야? 노들의 위원회와 누리사와도 이미 만났어.”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자네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거야. 하지만 자네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그들은 절대로 아는 척 하지 않을 거야.

그들에 대해서 알려줄까? 그들은 ‘카랑’이야. ‘카랑’은 철저한 비밀조직이지. 추천으로만 가입할 수 있어.

자네도 10년 뒤엔 ‘카랑’의 회원이 될 거였어. 내가 당신한테 잘 보여야 했을 거라고. 난 더러운 뒤치다꺼리나 하는 사람이거든.”

“카랑? 당신이 말한 그분이라는 사람이 그럼, 노들의 위원장을 말하는 거야?”

“노들의 위원장은 ‘카랑’의 회원이 아니야.

더는 나도 몰라. 마지막으로 이건 가르쳐주지. 누리에 대해서 더 알려고 하지 마. 더 알리려고도 하지 마.”

 

난 노들의 외곽지역에 있는 하수구에 버려졌다. 외곽지역에 있는 하수구에는 찌꺼기와 쓰레기들이 버려진다.

난 손이 뒤로 묶여 있었다.

줄을 느슨하게 묶어서, 이리저리 몇 번 비트니 풀어버릴 수 있었다. 몸에 온갖 오물이 묻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주변사람들이 내게서 심한 악취를 맡을 거 같았다.

하수구의 둑에 걸터앉았다.

온몸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노들을 덮고 있는, 플라스틱의 돔 너머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윤슬이 보였다.

아주 오랜만에 윤슬을 봤다. 윤슬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있었다.

윤슬엔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만 가득했다. 윤슬엔 제대로 햇빛도 비치지지 않았다. 노들의 빛이 닿는 곳까지만 보였다. 나머지 부분의 윤슬은 거대한 어둠에 짓눌려 있었다.

손으로 몸의 이물질을 대충 닦아냈다.

사내의 말대로, 상처는 없었다. 고통만 남아있었다. 고통이 기억과 통증의 잔영으로 몸과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꿈을 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통증이 그걸 증명해줬다.

“내가 아니면 노들의 사람들이 살기 힘들 거라는 약간의 과대망상이 포함된 욕심이 문제일지도 몰라. 내가, 또, 그분이라는 분이 그렇게까지 나서지 않아도 세상은 알아서 잘 굴러가.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게 모두를 위해서 더 나을지도 몰라.

내가 한 일도 지나친 일이었는지 모르지. 내 행위가 노들의 안정성을 훼손하는 일이므로 응징을 받아야 한다면, 나도 할 말은 없어. 누리사의 주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나로 인해 피해를 입었을지도 몰라.”

하수구의 둑에 걸터앉은 채 혼잣말을 했다. 나도 그들을 닮아버린 것만 같았다.

하수구를 따라서 걸었다. 간혹 하수구에서 올라온 퇴화자들과 마주쳤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무심히 지나쳤다.

50분 정도를 걸었지만, 일반인이나 진화자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우리 집이 있는 8구역까지 왔다. 주로 일반인들, 진화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심호흡을 했다.

사람들은 나를 노골적으로 피했다. 손가락질을 하기도 하고, 비웃음을 흘리면서 지나가기도 했다.

고개를 숙이고, 집을 향해서 걷기만 했다.

집으로 들어가도 될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다.

공중광고판이 허공에 떠 있었다. 누리를 선전하던 날개인이 다울이라는 신약을 먹으며 웃고 있었다.

 

다울이 어떤 약인지 알고 싶어서, 웹페이지에 ‘다울’이라는 단어를 넣고 검색을 했다.

“다울은 누리로 인한 육체변형을 억제하는 약이에요. 다울을 먹으면 당신은 육체변형으로부터 안전해요.”

허공광고판에서 봤던 광고의 영상이 나왔다.

다울의 제작사도 누리사이다. 다울은 누리의 동생뻘쯤 되는 약이다. 누리를 먹으면 다울도 먹어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제 누리를 먹고, 다울도 먹어야만 한다.

누리사의 주가는 더 치솟았다. 다울이 판매된 이후로, 노들의 위원회에 대한 지지율도 높아졌다.

이 선생님과 내가 다울의 등장에 어느 정도 기여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다울이 과연 바람직한 대안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새로운 누리인지도 모른다. 다울은 누리로 인해 육체변형에 걸린 사람들을 위한 진통제에 불과하다.

언젠가 우리는 다울로 인한 또 다른 육체변형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울로 인한 육체변형을 억제하기 위해서, 또 다른 신약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 개인용 웹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두 달 뒤에 인공육체를 착육하고, 달의 노들로 떠날 계획이다. 한동안은 달의 노들에서도 누리와 다울을 먹으며 살겠지만, 박테리아를 기초로 해서, 상추나 돼지 같은 동식물을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것이다.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 달의 노들에서 당신과 당신의 아이들을 위해서, 당신이 원하는 미래를 함께 꿈꾸고 싶은 사람은 연락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서른 명의 사람들이 웹으로 연락을 해왔다. 어린 고아부터 퇴화자들, 다섯 명의 정상인인 가족, 몇 명의 진화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 함께 달의 노들로 떠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무엇보다 반갑고,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중에 바이오테크놀로지 전문가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분은 실존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을 거 같아.’

우주캡슐에 앉아서 멀어져가는 지구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카랑’이라는 비밀조직이 실제로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분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분은 누리일 뿐일지도 모른다.

웹을 통해 모은 서른 명의 사람들과 함께 ‘달로 이주’라는 정부의 계획에 참여했다.

우리는 총 6대의 우주캡슐에 5명씩 나눠 탔다.

달의 노들로의 이주는 아직 초기단계다.

하지만 지구는 인구가 임계수치에 도달했기에 때문에, 노들 정부가 달로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달의 노들에는 위원회도, 행정체계도 없다. 그저 살만하고 한적한 동네 수준이다.

우리가 달의 노들로 떠나기 전부터, ‘노들 그리고 서울’의 정부도 우리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이명한 박사님에 대한 나의 글로 내가 꽤 유명해진데다가, 누리사가 누리의 부작용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막는 신약인 다울도 내놓은지라, 노들의 정부는 우리에게 지원도 약속했다. 그 약속은 지금도 잘 지켜지고 있다.

방해공작이 또 있을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또 다른 위협은 없었다.

노들의 정부는 우리의 프로젝트에 대해서 은근히 기대마저도 하고 있다. 영향력이 너무나 커져버린 누리사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인 이유도 있는 거 같다.

하지만 그건 나완 상관없는 일이다.

우주캡슐의 둥그런 좌석에 푹 파묻혔다. 여유로움 속으로 별빛이 흩어졌다.

눈을 감았다.

무한함수 그래프가 나타났다. 무한함수 그래프의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서, 긴 미끄럼을 탔다.

영원히 지하로 내려앉을 것만 같은 어둠속으로 빠져들었다.

가장 밑바닥에 도달했을 때, 난 우주에서 가장 말랑말랑하고 탄력적인 물질로 변했다.

영원히 튀어 오를 것처럼, 통통, 위로 튀어 올랐다.

 

달의 노들로 이주한 후, 처음으로 지구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영상을 만들었다.

“이건 배추와 무에요. 이제 곧 고추도 복원할 수 있어요. 그러면 김치를 만들 생각이에요. 김치를 만들기 위해서 아주 오래된 자료들도 살펴보고 있어요.”

나래방송사와는 프로그램도 제작하기로 했다. 우리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성과와 우리의 일상이, 주기적으로 방송을 타고 지구로 전달될 것이다.

나의 목표는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구의 노들을 포기하고, 우리만 ‘달의 노들’에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는 건 아닌 거 같다. 닭과 돼지, 소의 복원과 사육까지 성공하면, 이 기술을 가지고 지구로 돌아가는 게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이다.

“다음 주에 고추의 복원을 완수할 수 있을 같아요.”

“몇 세대가 지나는 동안, 음식물을 전혀 먹지 않았기 때문에 위장이 많이 약해져 있을 거예요. 위장을 보호하는 특수한 점액물질도 만들어야 해요. 그 물질도 완성이 되면, 그땐 김치를 만들어서 먹자고요. 조촐한 시식회도 열고요.”

나래방송사와 함께 제작하는 프로그램에 우리가 지구로 돌아가기까지의 과정을 담을 것이다. 우리가 결코 우리만 잘 먹고 잘 사는 목표를 가진 게 아니라, 복원한 먹을거리와 식사문화를 갖고 지구로 돌아갈 것임을 지구의 사람들에게도 알린다면, 보다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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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세게 밀치는 거 아니야?”

병은 씨는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실수라는 것을. 그 청년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이라는 것을. 키가 큰 청년은 바퀴벌레 보듯이 그녀를 내려다본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라는 위압감마저 묻어난다. 소도 때려잡을 것 같은 그의 묵직한 팔이 병은 씨의 머리위로 살짝 올라간다. 병은 씨는 반자동적으로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린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요량으로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모두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멍하니 앞을 바라보거나, 아침 출근길 특유의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다. 병은 씨를 거들어주는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병은 씨는 다리에 힘이 쫙 빠진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현기증마저 일어 세상이 빙빙 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힘껏 손잡이를 붙든다.

“더러워.”

젊은 여자가 청년의 품으로 파고들며 병은 씨를 노려본다. 그 눈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서 병은 씨는 눈을 감아버린다.

그때 병은 씨의 머리를 누군가 툭툭 친다. 세게 내려친 것은 아니지만, 생쥐를 갖고 노는 고양이처럼 기분 나쁘게 살짝살짝 그녀의 머리를 누군가 계속 건드린다. 병은 씨는 눈을 더 질끈 감는다.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않았으면서 다음 정거장에서 내린다.

그녀는 젊은 사람들 앞에서는 애써 머리를 조아리며 얼굴을 잘 들지 않는 편이다. 나이 많은 게 자랑도 아니고, 괜히 보잘 것 없는 것이 젊은이들의 앞길을 망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많아봤자 이십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청년이 그녀를 거칠게 밀칠 때, 그의 애인이 그녀에게 더럽다는 말을 뱉을 때, 그것과 비슷한 상황에서는 병은 씨의 감정적 마지노선이 무너져버린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다음 역에서 문이 열리자 병은 씨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내린다. 숨이 막힌다. 의자에 앉아서 숨을 고른다. 물을 먹고 싶다. 차가운 냉수를 한 컵 들이키면 좀 나아질 거 같다.

‘지하철에서 부딪힐 수도 있지.’

병은 씨는 반성한다. 사람도 많은데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군 것 같다고.

'그 아이들이 화를 낼만도 했어.'

하지만 그녀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던 커다란 손길은 견디기 힘들다. 그녀는 그것만은 결코 견딜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머리를 조아리며, 밥벌이를 하고 있지만, 병은 씨도 어엿한 시민이다. 지금까지 세금을 밀린 적도 별로 없다. 그녀에게도 폭력과 조롱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지하철이 한 대 무심히 지나간다. 그냥 떠나보낸다. 다음번 지하철이 왔을 때, 그녀는 고귀한 생계를 위해서, 어미로서의 책임감으로 지하철을 다시 탄다.

 

하늘국제공항의 높은 천장은 마치 신전 같다. 때로는 엄숙한 느낌마저 준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병은 씨는 서둘러 짙은 하늘색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우선 병은 씨의 담당구역 쓰레기통을 비운다. 쓰레기통에 넣어놓은 커다란 비닐봉지를 통째로 꺼내고 새 걸로 교체하는 작업이다. 한 시간 정도 분주하게 이 쓰레기통에서 저 쓰레기통으로 옮겨 다녀야 일을 다 끝마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에스컬레이터 바를 걸레질해야 한다. 그녀는 총 2대의 에스컬레이터를 맡고 있다. 화장실도 아니라, 꼭 지하 주차장 구석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걸레를 빨아서 해야 한다. 하늘국제공항을 이용하는 내외국인 승객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환경미화원들을 교육하는 관리가 말했다. 힘을 빡 주고 에스컬레이터 바를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면 팔이 무척 아프다. 그렇다고 파스 값이 아까워서 파스도 잘 붙이지 않는다. 그냥 참고 한다.

한참 청소를 하다가, 아까 지하철에서 마주친 젊은 커플 생각이 나자 병은 씨는 부아가 치민다. 그러면서도 순리대로 젊은이들에게 양보하고 자리를 내주는 것이 맞건만, 환경미화원 주제에 왜 짜증을 냈던 것일까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생각해보고 저렇게 생각해봐도 그건 도덕도, 질서도, 규칙도 아닌 거 같다. 거의 아들, 딸에 가까운 아이들이다. 환경미화원이라고 해서 그렇게까지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쓰라린 마음을 끌어안고 병은 씨는 점심을 먹으러 간다. 하늘공항의 다른 직원들은 직원식당을 사용하지만 환경미화원들은 거의 직원식당을 사용하지 않는다. 한 끼에 오천 원 정도 하는 식대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병은 씨를 비롯한 대부분의 환경미화원들이 그렇다. 그녀들은 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 보일러실로 향한다.

삼삼오오 동료들이 모인다. 김치나 단무지 같은 반찬 한가지씩에 밥을 꺼내놓고는 한다. 종이상자를 잘라서 그 위에 꺼내놓고 함께 먹는다. 가장 마음 편안한 시간이다.

하지만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병은 씨는 오늘은 계속 목이 막힌다. 보통 때보다 두 배 정도의 많은 물을 마신다. 밥도 물에 말아 거의 마시다시피 한다.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아들 준다고 붕어빵 천원어치를 산다. 불이 켜진 허름한 빌라의 문을 연다. 남편도, 아들도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불도 켜지 않고 바닥에 몸을 뉜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붕어빵을 한입 베어 문다. 따뜻한 팥이 물컹하게 씹힌다. 달콤한 팥을 음미하며 병은 씨는 찔끔 눈물을 흘린다.

25년차 주부의 근성을 발휘해서, 일어나 불을 켠다. 청소를 한다. 조그만 주방과 두 개뿐인 조그만 방에 흩어져 있는 옷이며 잡동사니들을 정돈한다. 설거지도 한다. 설거지를 하며 그녀는 자신이 음식물찌꺼기 같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몇 년 동안 남의 뒤치다꺼리만 했다.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그녀의 인생은 타인의 배설물을 치우고 정돈하는 것이다. 검은 비닐봉지 속에 담겨져 썩은 국물이 줄줄 흐르는 음식물쓰레기가 자신과 가장 닮은 거 같다.

‘보잘것없는 년. 혼자서는 의미도, 가치도 가질 수 없는 년. 널리고 널린 차돌멩이 같은 년.’

끼이익. 골동품 같은 철제문이 운다. 아들이다. 복학하기 전에 사회생활 연습도 하고, 한 푼이라도 더 보탠다고 카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착실한 아들이다.

“창준이, 밥 먹었니? 엄마랑 밥 먹을까? 뭐 해줄까? 떡볶이 먹을래?”

“오다가 먹었어. 엄마나 챙겨 드세요.”

“우리 아들, 무슨 일 있어?”

병은 씨는 아들이 조금 이상하고 느낀다. 창준이는 한 마디 던지고는 방으로 쏙 숨어버린다. 병은 씨는 창준이의 방으로 들어간다. 벽을 향해 돌아누운 건장한 창준이는 뭔가 분이 덜 풀렸는지 어깨까지 들썩이며 씩씩거린다.

“아들……. 엄마 좀 봐줘.”

병은 씨는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아들은 귀찮은지 몸을 흔들어 그녀의 손길을 뿌리친다. 아들의 어깨에서 모래가루가 만져진다. 그리고 약간 비릿한 피 냄새가 아들의 방에 통통 번진다. 엄마가 피 냄새를 알아챘음을 알았는지 아들은 그제야 몸을 일으킨다.

“나 좀 씻고 올게. 떡볶이 해줘. 조금만 해서 국물에 같이 밥 말아먹자.”

병은 씨는 떡볶이 떡을 물에 헹구고 오뎅을 썬다. 창준이가 떡볶이를 워낙 좋아하는지라 항상 떡볶이 떡과 오뎅은 끊이지 않게 사다놓는다.

창준이는 부모의 형편을 아는지, 군대에서 세상의 무서움을 알았는지 제대하고선 비싼 거 사달라는 말은 일절하지 않는다. 착실히 아르바이트해서 번 몇 푼 안 되는 돈도 거의 다 병은 씨에게 준다.

입술이 터진 창준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화장실에서 나온다. 창준이는 머리를 푹 숙이고 앉아 떡볶이를 먹는다.

“싸웠니?”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 술 먹고 몇 번 해롱대며 집에 들어온 적은 있지만, 지금까지 부모의 기대를 무너트릴 만큼 큰 사고를 친 적은 없다. 누군가 아들을 건드린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게밖에 물어볼 수가 없다.

“누구랑 그랬어?”

“됐어. 떡볶이나 먹어.”

“엄마가 누구랑 그랬냐고 물었잖아.”

“누가 그랬는지 엄마가 알면 어쩔 건데. 가서 따질 거야? 고급승용차 타는 사람들을 우리가 당해낼 수 있어? 엄마, 우리 이사 한두 번 다닌 거 아니잖아. 고작 조그만 방 세 놓는 주인집 사람한테도 벌벌 떨면서 살잖아. 엄마가 뭔데. 엄마, 환경미화원이잖아. 엄마가 어떻게 할 건데. 아빠는 또 어떻고. 아빠는 경비원이잖아. 나는 정비공 연습생이고.”

아들의 말이 틀리진 않다. 다 맞는 말이다.

아침부터 참아왔던 병은 씨의 감정이 펄펄 끓더니 결국 흘러넘친다. 찔끔 눈물이 아니라, 밥상 앞에 아들을 놓고 왈칵 눈물을 쏟고 만다.

“그래. 알아. 엄마가 미안해. 미안해, 아들. 엄마는 아들을 너무 사랑해. 우리 가족은 사랑하니까 행복한 거야.”

그녀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는다. 무능력하고 가난함으로 피고인 자신을, 변호해줄 친구 하나 갖기 힘든 자신을 스스로도 변호하지 않는다.

 

지하철은 변함없이 움직인다. 지하철이 생긴 이래로 항상 그렇다.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지고, 사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파업하다가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자살을 해도 별로 변하는 건 없다. 병은 씨는 그렇게 죽어간 이웃사촌을 떠올린다. 그가 참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병은 씨네 세 가족은 경비, 청소, 정비 아르바이트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입에 풀칠 할 정도로는 살고 있다. 살아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살아있다는 것. 세상이 허락한 것은 인생이 아니라 생존이지만, 자살을 택했던 이웃사촌에 비하면 낫다. 병은 씨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오늘은 전용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들고 나오지 않았다. 전용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포기하기로 했다. 눈칫밥을 먹어가면서도 꿋꿋이 지켜온 직업정신이자 마지막 자존심이지만, 그걸 지킬 용기가 이제 없다.

대신 촌스럽지만 화려하게 화장을 했다. 공항에서 일하다 보면 가끔 충분히 쓰고도 남을 물건을 주을 때가 있다. 그녀는 주로 그런 물건을 사용한다. 오늘 바른 립스틱도 공항 쓰레기통에서 주은 것이다. 유행이 좀 지난 흐린 브라운 계열의 색이기는 하지만 꽤 유명한 브랜드다.

병은 씨가 처음부터 환경미화원 일을 했던 건 아니다.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난 병은 씨는 공부를 꽤 잘했던 수제였다. 집안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는 그녀를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간호학교를 나와 간호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음반 제작 공장에서 일하던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을 돕지는 못할망정 피해주지는 말자는 신념으로 지금까지 살았다.

아들을 낳고는 동네에 아주 작은 화장품 가게를 차렸다. 남편은 카센터에서 일했다. 순탄한듯했다. 그러다가 IMF라는 복병을 만났다. 그녀의 화장품 가게는 남의 것이 됐다. 남편이 잘 다니던 카센터는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전세로 살던 아파트도 빼야했다.

둘은 적게 벌어도 밑천이 안 드는 일을 택해 연명하기로 맘을 먹었다. 병은 씨는 젊었을 적 경험을 살려 간병인으로 일하고, 남편은 아파트 경비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병은 씨는 젊은 조선족 출신 간병인들에게 밀리면서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하늘공항 환경미화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들 하나 공부시키며 세 식구가 사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병은 씨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공통점이 신분의 하락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걸 알 정도로는 배웠다. 병은 씨는 가끔 서글프다. 그녀도 꿈 많은 소녀였던 적이 있다. 터질 것 같은 꿈을 안고 홀로 서울로 상경했던 기억이 있다.

젊고 아주 예쁜 여자아이가 지하철에 탔다. 검정색 초미니 스커트에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일견 회사원 같기도 하지만, 회사원치고는 그녀의 화장이 너무 짙다.

“네. 피디님이 열시까지 오라고……. 음. 네. 대사 연습은 충분히 했어요.”

통화 내용을 들으니 배우인 모양이다. 드라마인지, 영화인지, 대중성이 강한 작품인지, 예술성이 짙은 작품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제 막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듯 풋풋한 기운이 솔솔 풍기는 아이다.

병은 씨는 처음 서울에 올라올 때, 여배우가 되고 싶다는 어렴풋한 꿈을 잠시 품었던 것이 기억났다.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던 시간이었다.

어제 지하철에서 젊은 커플에게 모욕을 당했을 때만 해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아들이 아르바이트하다가 맞고 들어온 것을 보자 갑자기 땅이 꺼지듯이 모든 것이 가라앉아버렸다.

병은 씨는 이제라도 그녀의 인생을 되찾고 싶다. 이런저런 이유로 버림받고, 양보할 것을 강요당해온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맞춰놓고 싶다. 그녀가 품었던 푸른 꿈들을 이제라도 조금씩 일궈나가고 싶다. 원래 나의 것이어야 했던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병은 씨는 맘을 단단히 먹었다.

‘남편 잘 보살피고 아들도 잘 키웠잖아. 이 정도면 국가에 공까지는 아니어도 도움을 준거야.’

 

텔레비전에서 봤다. 숙주의 의식을 장악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외계 생명체가 있었다. 그녀에게도 그 외계 생명체가 들어온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도 없이 병은 씨는 점심시간에 하늘공항 화물구역으로 갔다.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풋내기 배우인 여자아이를 본 후 막연히 그래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니 그녀도 신기하다.

체크무늬가 있는 부드러운 천 재질의 커다란 여행가방 앞에서 멈춘다. 주변을 두리번거려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준비해온 쓰레기봉투에 여행가방 안에 있던 물건을 모두 꺼내 담는다. 가방에 있던 물건이 담긴 쓰레기봉투는 화물구역 쓰레기통 옆에 놓는다. 지나가던 공항 직원이 쓰레기봉투를 옮기는 그녀를 본다. 하지만 일상적인 청소 업무를 하는 것이려니 하며 언제나처럼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녀를 지나친다.

여행가방 앞으로 돌아온 그녀는 우유 한 개와 빵 두 개가 담긴 검정색 비닐봉지를 들고 환경미화원 복장 그대로 여행가방 안으로 들어간다. 작은 머리핀을 이용해 지퍼를 움직인다. 안에서 가방을 잠근다. 워낙 큰 여행가방인지라 공간은 넉넉하다. 천 재질이라 숨을 쉬는 데도 불편함이 없다.

그녀는 만족한다. 엄마의 자궁 속에 다시 들어간 것처럼 편안하다. 그리고 그녀는 곧 곤한 잠에 빠져든다.

 

병은 씨는 다리가 아파서 눈을 뜬다. 쪼그린 다리에 통증이 느껴진다. 손으로 종아리를 주물럭거린다. 좁은 공간이지만 다리를 앞으로 살짝살짝 뻗어본다. 바깥쪽을 향하게 손바닥을 깍지 끼고 위쪽으로 당겨 올리기도 한다.

검정색 비닐봉지에서 주섬주섬 빵 한 개를 꺼내 먹는다. 우유를 먹을까도 생각했지만 화장실에 갈 수 없는지라 목마름은 참기로 한다.

푹 자고 배도 든든해지자 병은 씨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제야 되새김질할 수 있었다. 후회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평생 양지바른 길로만 다녔어. 가끔은, 아니 난생 처음으로 비탈길로 들어섰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건 없어.’

어제의 잊고 싶은 사고에서 벗어나 그녀에게 남은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서라도 이런 모험이 필요하다고 자신을 다독인다. 당당한 엄마이자 아내로 그들과 함께하고 싶기도 하다. 여자이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공부를 잘해도 대학도 못 간 처지이지만, 이제는 세상이 변하지 않았는가.

‘나도 할 수 있어.’

커다랗고, 텅 빈 터널에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가 빠져나갈 때처럼, 웅웅웅, 소리가 들린다. 비록 여행가방 안에 있지만, 정말 하늘을 날고 있나보다 싶다.

병은 씨에겐 비행기를 타는 게 처음 있는 일이다. 신난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병은 씨가 확인한 게 확실하다면 이 비행기는 프랑스 파리로 간다. 프랑스 파리라는 생각만으로도 병은 씨는 몸서리쳐지게 좋다. 비록 아직도 자신의 행동이 조금은 감당이 안 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병은 씨는 자신이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고 느낀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의 흐름 속에 올라타고 인생을 온전히 자신의 욕망대로만 조종하고 있다.

 

정오 즈음, 창준이는 점심 먹고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주섬주섬 일어난다. 엄마의 쪽지를 발견한다. 싱크대 앞, 상에 된장찌개와 계란말이와 함께 나란히 놓여 있다. 하얀 백지 위에 검정색 볼펜으로만 눌러쓴 편지다.

‘사랑하는 아들. 엄마의 아들이어서 고마워. 엄마가 아들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엄마, 아빠가 못나서 아들 더 좋은 것도 못해주고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서 미안해. 하지만 엄마, 아빠도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 아빠도 미워하지 마. 아빠가 돈 못 벌고 싶어서 못 버는 거 아니잖아. 아빠는 항상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나쁜 짓 하지 않았고. 착실한 가장이잖아. 엄마는 아빠도 진심으로 사랑해.

엄마는 잠시 엄마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알아볼 참이야. 당당한 엄마로 아들 앞에 서고 싶구나. 그래야 앞으로 우리 가족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살아가지. 아들은 지금처럼만 해줘. 엄마는 어떻게든 엄마 나름대로 활로를 찾아볼게. 솔직히 엄마가 뭘 어떻게 한다고 크게 변하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잖니.

아들이 제대해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해서 엄마는 얼마나 대견한지 몰라. 고마워. 우리 가족 힘내자.’

 

병은 씨는 자신이 들어있는 가방이 움직인다는 걸 느낀다.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가기 전에 끌로델공항 화물구역에서 나와야 한다.

병은 씨는 머리핀을 이용해 밖을 볼 수 있도록 지퍼를 약간 위로 올린다. 병은 씨가 들어있는 가방 위로 다른 가방이 몇 개 올라간다. 옷가지들만 들어있는 가방들인지 다행히 견딜만한 무게다. 사람들의 다리가 보이고, 비행기의 다리도 보인다. 병은 씨는 여행가방과 함께 공항용 컨테이너로 빠르고 신속하게 옮겨져 분류된다.

여행가방의 지퍼를 내리고 병은 씨는 우유를 마신다. 곧 화장실에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젠 목마름을 참지 않아도 된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도 다듬는다. 주머니에 넣어둔 십 만원도 확인한다. 하지만 파리에서 십 만원 갖고 어떻게 여배우가 될 수 있는 것인지 도통 알 길이 없다. 그저 예술의 나라를 향해 프랑스행 비행기를 타고 파리에 도착하면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맹추.’

병은 씨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는다. 여행가방의 주인은 입을 수도, 섭취할 수도 없는 환경미화원 아줌마를 발견하고 경악할 것이다. 병은 씨는 생각을 가다듬는다.

‘일단 끌로델공항 환경미화원인 척 하자.’

하지만 한국도 아니고, 하늘공항보다 더 클 것으로 예상되는 끌로델공항에서 어떻게 드라마 피디나 영화감독을 찾을 수 있을지 막막하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니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녀는 맘 착한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머리핀으로 지퍼를 다시 올린다. 내다보니 사람들이 다른 화물을 나르기 위해 한쪽에 몰려있다. 그 틈을 타 얼른 가방에서 나와 화물 더미 뒤로 몸을 숨긴다.

오랫동안 가방 속에 있어서 그런지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들다. 눈치를 보다가 씩씩하게 몇 발자국 앞으로 걷는다. 푸른 눈에 금발을 가진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화물구역에서 나와 쓰레기통을 찾는다. 쓰레기통 옆에 서니 마음이 놓인다.

유리천장으로 햇빛이 들어온다. 하늘공항에 비하면 한결 여유로운 풍경이다. 사람들의 표정도 훨씬 느긋하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달려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사람들 속으로 몇 발자국 걸어 들어간다. 푸른색 환경미화원 작업복을 입고 있는 그녀를 사람들은 조금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긴 하지만 크게 불편해하진 않는 눈치다. 병은 씨는 프랑스인들 사이에 섞이자 마음이 놓인다.

‘일단 뭘 먹어야겠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식당가로 내려간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간판이 즐비하다. 병은 씨는 파스타와 커피 사진이 걸려있는 식당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파스타와 커피를 먹고 싶다. 병은 씨의 형편에 미친 짓이라는 걸 알지만 어렵게 여기까지 와서 파스타도 먹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검은 머리를 가진 젊은이들이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어제 지하철에서의 일을 떠올리자 겁부터 났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다가간다.

“학생들, 한국인이야? 내가 한국 돈밖에 없는데 저 파스타가 너무 먹고 싶네. 프랑스 돈 있으면 좀 시켜줄 수 있어?”

젊은 학생들은 환하게 웃으며 아줌마를 바라본다.

“물론이죠. 저희도 파스타 시켜 먹을 생각이었는데 같이 드실래요?”

“그래도 돼? 보다시피 내가 학생들 밥을 사줄 수는 없고, 대신 내가 내 거는 낼게. 한국 돈 줄게. 파스타랑 커피 한 잔만 시켜주라.”

“네.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저희 프랑스 처음이에요. 오자마자 한국 분을 만나서 저희도 좋네요.”

학생들은 연신 싱글벙글 웃는다. 착한 아이들인 것 같아 병은 씨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2만원을 주자, 학생들이 조갯살과 야채가 곁들여진 크림파스타와 원두커피 한 잔을 갖고 온다. 포크로 크림파스타를 말아 한 입 먹자 여행가방 안에서 보낸 피로가 확 풀린다. 옅은 향이 매력적인 따뜻한 원두커피도 한 모금 삼킨다. 세 명의 학생들은 웃으며 파스타와 샌드위치, 생과일주스 등을 먹으며 떠든다.

“아줌마는 여기서 일하세요?”

한 남학생이 병은 씨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일? 응. 아주 중요한 일이지.”

병은 씨는 묘한 웃음을 흘린다. 남학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 먼 곳을 쳐다본다.

 

제복을 입은 외국인 사내와 검은 머리의 여인이 그들에게 다가온다.

“실례합니다. 한국인이시죠?”

검은 머리의 여인이 밥을 먹고 있는 병은 씨와 학생들에게로 다가와 묻는다.

“서울에서 온 여객기 손님의 여행가방의 내용물이 모두 사라지는 사고가 발생했어요. 신고가 접수돼서 끌로델공항 보안과에서 탐문 중이예요. 전 통역사이고요.”

제복은 입은 프랑스인 사내가 통역사에게 뭐라고 말한다.

“사모님은 이 학생들 보호자이신가요?”

“그건 아닌데요.”

병은 씨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다. 학생들도 어리둥절해한다.

“끌로델공항 보안요원이 간단한 조사를 하기 위해 잠깐 동행해 시간을 내주실 수 있냐고 물어보네요.”

병은 씨는 어쩔 수 없이 알았다고 말한다. 이어 먹던 음식을 마저 먹고 같이 가겠으니 식당 앞에서 기다려달라고 한다.

“아줌마, 괜찮으신 거예요?”

“죄 없는 사람한테 무슨 일이야 있겠어. 괜찮아. 학생들, 먹던 거 먹어.”

병은 씨는 학생들을 진정시키고 남은 크림파스타와 커피를 모두 먹는다.

 

“아줌마. 비자 없으시죠? 불법 밀입국이시네요. 어떻게 오신 거예요?”

프랑스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나온 한국인 직원은 짜증스러운지 오만상을 찌푸리고 병은 씨를 바라본다.

“특별히 끌로델공항에 우리에게 신원을 인도해달라고 요청했어요. 프랑스 정부에서도 크게 불만은 없는 거 같습니다. 전과도 없으시고, 마약이나 그런 것도 없으시고. 혹시 위장 같은데 비닐로 포장한 마약 넣어서 오신 거 아니죠? 엑스레이 결과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지만요.”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사장님.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저 같은 게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한국으로 송환되시면 경찰 조사를 받으셔야 해요. 아마 징계도 따를 겁니다. 아줌마의 행위는 분명히 위법이니까요.”

병은 씨는 고개를 숙인다.

“그나저나 어떻게 오셨어요? 복장을 보아하니 환경미화원이신 거 같은데, 기내 청소하시다가 내릴 때 못 내리셔서 같이 오신 건가요? 아줌마가 끌로델공항에 도착할 즈음에 한국인 승객의 가방에서 물건이 다 사라졌는데 거기에 대해서 아시는 건요? 전 대사관 직원일 뿐이지만 기본적인 조사는 저희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별 탈 없이 아줌마의 신원을 인도받아서 본국으로 송환시킬 수 있어요. 협조해주셔야만 해요.”

“그게……. 여행가방 내용물은 제가 건드린 게 맞아요. 그 가방 속에 들어가 있었어요. 화물대신 제가 온 거죠. 전 전라도 구례 출신인데요. 젊을 때 서울로 오면서 여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프랑스에서 여배우가 되고 싶어요.”

“가방에 아줌마가 들어가셨다고요? 여배우가 되고 싶어서요? 특이하네요.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

“행동의 동기가 악의적이시진 않네요. 다만 입출국법을 어기신 것과 가방 안 물건에 대한 절도죄는 피하실 수 없을 거예요. 프랑스에 가면 젊었을 적 꿈인 여배우가 될 수 있을 거 같으셨다…….”

그는 낄낄거리며 웃는다.

“재미있네요. 그 꿈 꼭 이루셨으면 좋겠는걸요. 아까 직업은 하늘공항 환경미화원이라고 하셨고……. 음. 이제 좀 전체적인 상황이 이해가 되는군요. 한국 경찰이 향후 조사할 때 악의적인 의도가 없다는 것이 참고사항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조치하겠습니다. 대사관 상부에도 그렇게 보고할게요.”

“어이쿠. 고맙습니다. 제가 생각이 너무 짧았어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닌데요. 나이 들어서 살짝, 아주 잠깐 치매가 왔는지.”

“하지만 또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셨죠? 프랑스에 오시고 싶거나, 여배우가 되고 싶다면 다른 경로로 하셔야 해요. 이런 경로로는 두 번 다시는 안 됩니다. 이건 아줌마를 위해서 드리는 말이에요.”

프랑스 주재 한국대사관 직원은 끌로델공항 보안과와 프랑스 경찰청 관계자를 만나고 오겠다며 방을 나간다.

병은 씨는 자신의 모험이 이렇게 빨리 끝날 줄 몰랐다. 너무 시시하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너무 대책 없음에 반성한다.

대사관 직원이 돌아온다.

“행정 절차가 끝나는 이삼일 동안 대사관에서 지낸 다음에, 서울로 가는 비행기로 추방되는 형식을 취할 거 같아요.”

 

창준이는 경찰청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창준이는 기겁한다. 단 한 번도 사고 친 적이 없는 엄마다.

‘엄마가 얼마나 서럽고 힘들었으면 그런 행동을 했을까.’

창준이는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슬펐다. 마음이 아팠다.

엄마와 아빠에게 보다 편안한 집과 여행 등, 해주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줄 수 없는 자신이 너무 나약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창준이는 눈물이 나는 것을 주먹으로 쓱 닦고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카센터에서 창준이는 또 한 번 놀란다. 텔레비전 뉴스에 엄마가 나오고 있다.

“하늘공항 소속 환경미화원이 여배우가 되고 싶어서 여행가방 속에 들어가 프랑스행 비행기에 탔다가 귀환 조치됐습니다. 이 환경미화원은 악의적인 의도가 없고 초범이라는 점 등으로 기소유예 조치될 것으로 보입니다.”

창준이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앞으로 또 하나의 고난이 닥쳐올 것 같아 답답하다.

‘이 시련은 어떻게 해쳐나가야 하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며 창준이는 아빠와 통화했다. 잘 해결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해 말하는 아빠의 말에 겨우 힘을 얻는다.

혼자 집에 들어온 창준이는 낡은 컴퓨터를 켠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엄마의 기사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클릭했다. 하늘공항으로 막 들어온 엄마를 직접 인터뷰한 기사이다. 엄마의 그간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나와 있다.

기사에 의하면 엄마는 그런 행동을 했던 그간의 심정을 토로한 뒤, 불콰해진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통은 가장 약한 존재에게 가장 먼저 찾아갑니다.”

그런데 창준이는 기사 밑에 달린 리플들에 더 놀란다. 악플이 아니라 거의 다 선플이다. ‘아줌마, 힘내세요.’, ‘정말 왕 멋진 아줌마이시네요.’, ‘우리 환경미화원 아줌마들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합시다. 저도 반성하게 되네요.’ 등의 리플들이 많은 추천을 받고 상위에 링크돼있다. 창준이는 엄마 기사에 달린 리플을 보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하늘공항에 도착한 병은 씨는 경찰청으로 이송돼 간단한 조사를 받고 인근 구치소에 수감됐다.

심사결과를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차분한 마음으로 자신의 지난 며칠을 되돌아본다. 참 무모했다. 남편과 아들 생각도 났다. 미안했다.

저녁쯤에 사회봉사활동 50시간에 기소유예라는 심사결과를 통보받았다. 구치소 직원이 내일 아침에 나가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어둠이 찾아들고, 구치소는 적막에 휩싸인다. 싸늘한 바닥에 모포를 깔고 눕지만 병은 씨는 쉽게 잠을 잘 수 없다. 난생 처음 온 구치소에 적응이 안 되기도 했지만 사회봉사활동 50시간을 할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하다. 하늘공항 일자리도 잃을 것만 같다. 그러면 또 어딜 가서 무얼 해야 할까. 아들을 생각하며 용기를 갖기로 한다.

병은 씨는 구치소의 콘크리트 벽을 뚫고 들려오는 풀벌레의 낮은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잠이 든다.

 

구치소의 아침식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역국에 부서질 것 같은 밥을 말아 병은 씨는 덜 깬 정신으로 꾸역꾸역 아침을 먹는다. 끌로델공항의 크림파스타와 원두커피가 그립다. 끌로델공항의 음식 같은 건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는 맛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울적하다.

겨우 배를 채우고 구치소를 나온 병은 씨의 눈에 쓰레기통이 눈에 띈다. 병은 씨는 습관적으로 쓰레기통에 다가간다. 편안하다. 누군가 병은 씨를 부른다.

“저……. 오병은 씨 맞으신가요?”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맞대. 전 나라일보 김형진 기자라고 하는데요. 몇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수첩을 든 몇 명의 기자들과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방송국 카메라도 다가온다. 병은 씨는 어안이 벙벙하다. 기자들의 질문에 정신없이 답변을 하고 있는데, 색종이 플래카드를 든 여학생들이 두부를 들고 병은 씨에게 다가온다. 여학생들이 든 플래카드에는 ‘아줌마의 고운 꿈, 우리가 지켜드릴게요’라고 적혀있다.

 

“네. 아줌마. 네. 거기요.”

감독은 병은 씨가 기차역 표지판 앞에 서자 만족스러워한다.

병은 씨는 스타가 됐다. 온라인에 작은 규모의 펜클럽도 생겼다. 사회봉사활동을 마치자, 단편영화계에서 꽤 알아준다는 한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병은 씨에게 자신의 단편영화에 출연해달라고 제의했다. 병은 씨는 잠시 생각한 후에 흔쾌히 승낙했다.

“오랜만이네. 잘 있었니? 난 결국 널 떠날 수가 없구나.”

여주인공인 병은 씨가 기차역 표지판 앞에서 혼잣말을 하는 장면이다.

“고통은 가장 약한 존재에게 가장 먼저 찾아오는 건가봐.”

감독은 하늘공항을 통해 막 귀환한 병은 씨가 했던 그 말에 반했다. 그 말만큼 인간의 본질적인 아이러니와 슬픔을 드러내주는 말도 없다고 병은 씨에게 말했다. 감독은 병은 씨에게 그 말을 자신의 시나리오에 넣어도 되냐고 물었고, 그녀는 흔쾌히 그러라고 그랬다.

“자기 곁에만 머물러달라던 그도 떠나버렸어. 이제 혼자 다시 시작해야 해.”

파란색 환경미화원 복장이 아니라 흐린 분홍빛의 나풀거리는 블라우스를 입은 병은 씨는 나직하게 대사를 읊는다. 그건 연기라기보다는 그녀의 일상에 가깝다. 그녀는 감독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며 대본에 있는 대사를 대충 외워 말하기만 할뿐이다.

“타고 나셨어요.”

감독은 자신의 페르소나가 되어달라며 좋아라한다. 병은 씨는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감독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들 같은 젊은 감독이 좋아하자 덩달아 기분이 좋다.

“아줌마. 아니. 배우님. 점심 먹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할까요?”

 

<환승역>의 첫날 촬영을 마친 병은 씨는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아들에게 준다고 붕어빵 천원어치를 산다.

붕어빵 하나를 베어 문다. 끌로델공항에서 먹었던 크림파스타 생각이 난다. 조갯살이 들어있던 부드러운 크림파스타……. 하지만 병은 씨는 지금 먹고 있는 붕어빵이 그 크림파스타보다 맛있다고 생각한다. 발걸음이 경쾌해지며 약간 빨라진다. 누가 보면 주책이라고 할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집에 도착한 병은 씨는 아들을 위해 떡볶이를 만든다. 떡볶이 떡을 물로 헹구고 오뎅을 썬다. 떡볶이 떡과 가지런히 썬 오뎅을 냄비에 넣고는 노곤해서 싱크대 옆에 눕는다. 여행가방 안에서 잤던 몇 시간의 잠이 떠오른다. 병은 씨는 이내 잠이 든다. 꿈속에서 꽃잎이 흩어지는 봄날의 공원을 걷는다. 손을 뻗어 꽃잎을 잡는다. 떨어지는 꽃잎들을 제치며, 공중에 뜬 커다란 붕어빵이 꼬리를 실룩샐룩 흔들며 그녀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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