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환상일지도 몰라. 너무 괴로워서 그런 상상을 하곤 했어. 이 모든 것이 조작된 세계이고, 난 게임을 하고 있거나 생체 연결 시스템에 강제로 접속돼서 원치 않는 일상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를 비웃듯이 그건 한낱 기우에 불과했어. 의식이 돌아오면 내가 처한 현실이 괴로워서 난 어찌할 줄 몰랐어. 그래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어. 최대한 오랫동안 잠을 자려고 했지.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더라. 한 이틀 정도 안 일어나고 자봤니? 그거 고문이야.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어. 잠에 빠져있는 순간에는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으니 편할지는 몰라도, 환경이 개선되면 절대로,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져. 내가 아니라도 누구나 그럴걸.

난 유기견이야. 실망했다면 미안해. 김이 빠지지? 하지만 어쩌겠어. 난 버려진 개인걸. 그래도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시베리안 허스키야. 이제 2살이다. 수컷이고. 음. 클 만큼 컸지. 자립할 나이이긴 해. 하지만 주인이 있고, 그 그늘 밑에서 어미로부터 자립하는 것과 주인도 없이 그냥 세상에 내팽개쳐지는 것은 조금, 아니 많이 다르지. 난 후자인 경우인데. 흑. 그래서 젊은 나이인데도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 시베리아에서 썰매를 끌던 선조들이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우리 종이 가정생활에 길들여진지도 꽤 오래됐기 때문에 그건 적절한 논의는 아니라고 봐.

음. 태어나서 반년은 행복했어. 엄마 품에 안겨 젖도 먹고, 아빠랑 산책도 하고. 주인도 나를 무척 좋아해줬어. 하지만 7개월쯤엔가 버려졌지. 몇 가지 이유가 있어. 먼저 주인집이 시 외곽에서 도심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됐어. 나랑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아기가 있었는데 내가 그 아기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셨던 거 같아. 엄마랑 아빠는 일찌감치 개장수에게 팔리고. 그래도 주인인 아줌마랑 아저씨가 나는 기르려고 시도했던 것 같긴 해.

아줌마랑 아저씨가 휴가를 가게 됐어. 그들이 휴가를 말이지, 이민도 아니고 휴가를. 굳이 개장수를 찾아서 팔기도 귀찮고, 기르자니 부담스러운데 휴가도 가야겠고. 그래서 그냥 길거리에 날 내려놓고 가버렸어. 그게 끝이야. 어쩌면 시작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겠구나.

유기견이라고 무시하지는 말아줘. 나도 나름대로 길거리에서 공부도 많이 했어. 운 좋게 나보다 똑똑하고 나이 많은 유기견 선배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어. 그 옆을 지키며 그분의 임종도 지켜봤지. 후후.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지?

이것저것 많이 배웠지. 아픈 만큼 여문다고. 생각도 많이 할 수 있었어. 너무 외롭고 괴로워서,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늘어트리며 지새운 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또 어떤 얘기를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네가 나를 버리지 않고, 내 곁에 조금이라도 오래 머물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야.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적도 얼마나 많은지 몰라. 하지만 그렇게 세상을 등지고서만은 못 살 거 같더라.

이젠 2살이나 먹어서, 덩치도 제법 크고 힘도 세지만, 어렸을 적에 받은 충격과 고통이 커서, 사실 성격은 애와 같아. 생각이 깊다고 방금 그랬는데, 전혀 반대의 면도 있어. 그러니 말짱 도루묵이지.

잠깐만. 누나가 오신다. 맛있는 것을 주려나. 아니면 주사를 놔주려나.

참, 난 007이라고 해. 애칭이 아니라 자칭인데. 나랑 노는 동안은 나를 007이라고 불러줬으면 해.

잠깐만. 누나의 관심을 좀 받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난 버려졌어. 버려진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모르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내가 특별한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더 이상 나를 보기 싫다고 했다는 것이 한 마리의 개에게 얼마나 큰 상처로 남는지 사람들은 모를 거야.

‘내가 죄라도 저질렀다면 사죄하거나 잘못을 시정하려는 노력이라도 하겠지만, 이건 그것도 아니야.’라는 생각도 해봤지. 그러다가는 결국 내가 잘못했었던 일들이 떠오르더라. 방을 어지럽힌 일, 주인인 아줌마의 손가락을 깨물었던 일, 바뀐 사료가 맛이 없다고 투정을 부렸던 일…….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

내 과거와 사정이 그렇다는 걸 조금만 이해해줘.

그래서 길거리 생활을 시작했어. 나의 수난기지. 그 수난기로 인해서 약간 예민한 게 있어. 자기다짐도 잦고. 생각해보면 내가 원래 꽤 예민하고 수줍음도 많은 개인 거 같아. 조금 더 마음도 넓고, 서글서글한 개였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이렇게 길거리에 버려지는 일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음.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이해해주라. 네가 내 얘기를 다 들어주고, 내 옆에 있어주면 난 조금이라도 빨리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늪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늠름한 시베리안 허스키, 007로 거듭날 수 있을 거야. 이런 고백도 쉽게 할 수 있게 된 건 아니야. 결단코.

처음엔 살던 집으로 찾아갈까도 생각해봤어. 하지만 금방 포기했어. 너무 어릴 때 버려져서, 후각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었거든. 찾을 수 없더라.

버려진 장소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헤매다보니 배가 고팠어. 뭔가를 먹어야 했지. 먹을거리의 냄새가 나는지 코를 킁킁거렸어.

멀리에서 고기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는 거야. 냄새를 따라 걸었어. 그날의 고기 냄새는 바다에서 표류하는 개가 찾은 북두칠성의 별빛과도 같았어.

냄새의 근원지는 정육점이었어. 생고기도 팔고, 구워서 먹을 수도 있게 하는 데 있잖아. 식육점이라고 하나?

고기 조각 몇 점이 길바닥에 떨어져 있더라. 배송차량이 떠난 직후였는데, 고기를 식육점으로 옮기다가 흘린 거 같았어. 일단 주변을 두리번거렸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얼른 고기 조각을 주워서 먹었어. 주인인 가족들과 집에서 살 때는, 시베리안 허스키의 자존심이 있는지라, 밥그릇에 주지 않으면 먹지도 않았는데, 어쩔 수 없었어. 살고 봐야 하잖아.

그런데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빗자루를 들고 나와서 나를 때렸어. 더러운 떠돌이 개가 장사를 망친다는 거야. 그때 처음 알았어. 아, 버려진다는 건 이런 거구나. 버려진다는 것은 배고픔과 아픔의 시작이야.

그래서 도망갔어. 그러기를 몇 번 반복했어. 먹을거리의 냄새가 나면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가고, 먹을 게 있으면 주워서 먹고, 먹다가 맞고를 반복했어. 수컷인 시베리안 허스키라지만, 1살밖에 안 된 내게 왜 그렇게들 모질게 대해야만 했던 것인지 모르겠어.

결정타이자, 고난의 정점은 수유동의 시장 근처에서였어. 여느 날처럼 식당 잔반통에서 주린 배를 채우고 있었어. 동네 청소년들이 날 붙잡았어. 남자아이들이었는데, 아주 질 나쁜 자식들이야. 너도 혹시 그런 애들을 만나면 조심해. 알았지? 일단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해. 알았지?

한참 쓰레기통에 남아있는 음식들을 먹고 있는데, 날 붙잡더라고. 날 공터로 데리고 갔어. 내게 친절을 베풀어주려는지 알았어. 드디어 방랑의 세월이 끝나는가보다 했어.

중학생들인 거 같았어. 쇠꼬챙이의 끝을 라이터로 달구더니, 그걸 내 배에 대더라고. 깨갱거리며 힘껏 비명을 질렀어. 깽깽깽, 이렇게. 그 녀석들은 그런 나를 보면서 좋다고 웃어댔지. 자기들끼리 웃음의 축배라도 드는 줄 알았다니까.

그들은 동료애와 의협심을 확인했다는 듯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어. 나를 들어 올리고서는, 내 배의 상처를 보면서, 성공했다고 자축하는 표정을 지어보였어. 환한 얼굴로 고통스러워하는 날 바라봤어.

증오가 불타올랐어. 뭐, 저런 것들이 있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 3번쯤 그러더니, 날 공터의 구석으로 던져버리더라.

그날의 부끄러운 상처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보여줄까? 아직 아무도 보여준 적은 없지만 너에겐 보여줄 수 있어. 괜찮다고? 그래. 그런 걸 봐서 뭐하니. 보여준다고 한 나도 좀 그렇다.

그 상처를 봤을 때의 네 기분은 생각도 못하고……. 미안해.

 

괜찮아. 낮잠을 잤더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어. 아까 그런 우중충한 얘기했더니 머릿속이 복잡해지더라.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아? 그런 상태에 빠지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개마저도 미울 때가 있다는 거야. 내가 사랑하는 친구가 나를 나쁜 놈으로 기억하길 바라지 않아. 그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으니까.

인생이 뭐니? 모두 태어났다 죽는 거잖아. 주어진 시간은 모두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영원히 살 수는 없잖아. 모든 생물의 생명은 유한하잖아.

억척스럽게 욕망을 부릴 필요가 있을까싶어. 좋아하는 벗들과 행복한 게 최고이지.

야. 근데 정말 봄이 좋다. 유기견 생활을 할 때는, 겨울이 정말 싫었어. 굉장히 고통스러웠거든. 한겨울에 밖에서 안 자본 개는 모르는 일이야. 너도 안다고? 후후.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우린 정말 편안하고 행복한 거야. 그치?

너도 그렇겠지만, 그래서 ‘수리’의 누나를 좋아하잖아. ‘수리’가 뭐냐고? 아직 그것도 몰랐어. 우리가 지금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 동물보호협회의 별칭이 ‘수리’이잖아. ‘수리수리 마수리’에서 차용했다고 누나가 그랬어. 모든 유기견들이 마술처럼 편안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길바닥에서 형편없이 망가진 채 방황하고 있는 날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나야. 누나가 형들과 함께 그물로 날 잡았지. 또 상처를 받을까봐 사람들을 피해 다녔거든. 그리고 그들이 날 여기로 데려왔어.

이발을 하고, 목욕을 하고, 주사를 맞았어. 모두 누나가 해줬어. 그리고 누나가 미지근한 우유도 줬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몰라. 먹다가 울 뻔 했어. 이틀 뒤에는 미지근한 우유에 으깬 참치를 말아서 줬어.

그렇게 한 달을 지내니까 거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더라. 정상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망가졌었어.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게 뭔지 알아? 실은 며칠 전인데……. 얼마 안 됐지? 하하. 누나가 나를 재워줬다는 거야. 아기를 재우듯이, 내 머리를 누나의 다리에 올리고서는, 토닥이면서 자장가도 불러주더라고.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하면서.

창문으로 정오의 봄빛이 고양이의 걸음처럼 살금살금 들어오고 있었어. 실내는 아주 조용했어. 모두들 낮잠을 잤거든. 먼지조차도 몇 개인지 셀 수 있을 정도로 나른한 시간이었어.

곧 누나의 무릎을 베고, 누나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에 빠져들었어. 그때만큼은 악몽을 꾸지 않았어.

 

볼일을 보고 온 거야?

엉겨 붙은 혈흔 같은 기억들은 이렇게 자꾸 말로라도 뱉어내야 해. 고백함으로 구원받는다고도 할 수 있고. 감기에 걸리면 가래를 뱉는 것처럼 말이지. 가래에 감기 바이러스가 들어있어서, 가래를 뱉어나면 상태가 나아진다고 하잖아.

내가 너무 똑똑하다고? 나도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아. 떠돌이 생활을 하다보니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경험도 했어. 때로는 살기 위해서 더 오랫동안 유기견 생활을 한 분들에게 도움도 청했고,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도 많아. 그게 남은 거라면 남은 것이지만, 생활이 너무 불안하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모두 도루묵. 크크크.

유기견은 그런 게 있어. 주인이 날 버린 것인지, 나의 어떤 행동이 주인으로 하여금 날 버리게 만든 것인지가 헷갈려. ‘내가 규칙을 어긴 것일까, 나약한 존재는 내쳐지는 게 맞는 것일까, 가장 강한 동물인 인간이 먼저 생존해야 나 같은 개도 그나마 안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들이 자꾸 드는 거야. 그렇다면 원래 내게 주어진 행복이란 고작 이런 것인가. 맘이 복잡해지지.

이렇게 자꾸 말하다보면, 나도 언젠간 웬만한 일에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지도 몰라. 지금은 이게 나를 살게 해주는 힘이야.

유기견으로 1년 정도를 살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구제역 현장이었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도 거의 기직맥진 했을 때였던 거 같아. 물을 먹고 싶어서 웅덩이를 찾고 있었어. 그런데 꿀꿀, 꽥꽥거리는 돼지의 멱을 따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거야. 호기심에 힘든 것도 잊고서는 그쪽으로 다가갔지. 소리의 근원지로 갈수록 점점 더 많은 꿀꿀, 꽥꽥 소리가 중첩되어 들리는 거야.

‘이건 무얼까, 돼지들이 집단으로 버려져서 길을 헤매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했어. 간혹 다른 유기견이나 들짐승이 고통스러워서 우는 소리를 들을 적은 있어. 쥐덫에 잡힌 까치를 보기도 했고. 그들도 항상 울지. 상처가 생겼고, 그래서 아프니까.

하지만 이처럼 많은 동물들의 울음은 처음이었어. 점점 난 두려워지기 시작했어. ‘뭔가 크게, 엄청나게 잘못되고 있구나.’ 그런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어.

오랫동안 유기견의 생활을 한 늙은 선배의 임종을 지킨 적이 있다고 했지? 그 선배가 그런 말을 했어. ‘너에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니?’ 난 그런 거 생각해본 적 없다고 그랬어. 그랬더니 그 선배가 그랬어. 너에겐 영혼이 있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영혼은 정신인 것인데, 육체와 정신이 전혀 별개인 게 수의학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는 거야.

그 선배의 말에 따르면,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말로 유명한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육체와 영혼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대. 그러면서도 그것이 불안했던지 송과선이라는 것을 더불어 주장했대. 영혼과 육체를 연결해주는 기관인데, 후에 인간의 육체엔 송과선이 없는 것으로 판명됐지.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이분법은 틀린 것이지. 정신은, 어느 정도는, 육체를 바탕으로 한 호르몬과 신경물질의 전달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 거기엔 슬픔, 기쁨, 아픔, 짜릿함과 같은 감정도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사람처럼 뇌 용량이 크지는 않다고 해도, 우리도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잖아. 우리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이 선배가 거의 평생을 떠돌면서 내린 결론이래. 붕어도, 오징어도 의식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작은 영혼이 그들에게도 깃들어 있는 거야.

난 눈물이 다 나더라. 그러면서 이런 말도 했지. 인간도, 우리도 다른 동물이나 식물을 먹으니 무조건 인간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면 우리도 영혼을 지닌 존재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 살기 위해 다른 동물이나 식물을 먹더라도 그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 한다……. 이런 말들이 그 선배가 마지막에 남긴 말들이었어. 난 몸을 부르르 떨었어.

얘기가 좀 다른 데로 샜지? 미안해.

소리의 근원지에서 생지옥을 봤어. 수십 마리의 돼지들이 산채로 커다란 구덩이에 던져지고 있었어. 그리고 사람들이 그 위에 흙을 쏟고 있었어. 돼지들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동료를 짓밟고 올라가다가 사람의 삽에 맞아 다시 구덩이로 떨어지곤 했어. 다른 돼지의 발에 밟혀 죽은 돼지도 있었어. 아기 돼지를 지킨다면서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눈물만 흘리고 있는 어미 돼지도 있었어. 아비규환이었어.

단테가 그리려고 했던 연옥이 바로 이런 건가라는 생각이 들더라. 아니면 로댕이 만든 지옥의 문이…….

수풀 너머에서 잠시 보고 있다가, 위액을 토하고 말았어. 그 광경이 너무 끔찍해서 달아나고 말았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너무 무책임하고 비겁하지? 그래도 시베리안 허스키인데…….

걷다가 그 선배가 생각났어.

‘정도는 다르다고 해도 개나 돼지에게도 의식이 있고, 그것을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최소한 저런 취급은 하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닌가.’라고 생각했어. 인간에게 인권이 있다면, 동물에게는 동물권이라는 게 있는 건 아닌가하고 말이야. 내가 본 구제역 현장은 킬링필드와 별반 다를 게 없었어.

치사율이 최대 55%에 이른다는 구제역에 걸린 동물을 처분해야 한다면 생매장 말고 약물 투여 같은 방법으로 고통 없이 저 세상으로 보내주면 안 될까? 주사약의 비용이 사치스러운 걸까? 돼지들이 인간들을 위해 수백 년 동안 제 살을 제공해줬는데도?

 

나 실은 누나 말고 사랑하는 개가 생겼어. 너도 알걸. 음. 누나가 목에 분홍색 리본을 묶어준 말라뮤트 말이야. 그녀도 유기견이지. 나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고생을 엄청 많이 했는데, 그녀는 암컷의 몸으로 얼마나 힘들었겠니. 그런 생각으로 그녀를 바라보니까 왠지 털을 핥아주고 싶고, 지켜주고 싶고, 짐을 나눠 들어주고 싶고, 그렇더라.

물론 그녀는 날 잘 바라보지도 않지만……. 힘들어서 그럴 거야. 구조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렇지? 네가 봐도 그녀가 날 외면하는 건 힘들어서 그런 거 같지? 아니라고? 내 말이 맞아. 볼 때마다 자고 있더라고. 아니면 바닥에 엎드려서 눈만 말똥말똥 뜨고 미동도 안 한 채 앞만 쳐다보고 있던지. 많이 지친 거 같았어.

사랑에 빠져서 다행이야. 누나 덕분에 예전의 매력도 어느 정도는 되찾았으니까. 아직 나도 좀 움직이기 힘든 면이 있지만……. 오른쪽 뒷다리가 잘 움직이질 않아.

왜 예수님이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는지 알 거 같아. 사랑은 과거의 모든 아픈 기억까지,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잊게 해주는 거 같아. 마법의 약과 같아. 누군가 큐피드의 화살 같은 걸 물약으로 만들어서 팔면 대박일 거야, 그치?

미안하다. 실없는 소리를 해서. 알았어. 미안하다는 말도 그만할게. 이것도 떠돌이 생활의 잔재이기는 해. 그저 누구에게나 다 미안하더라. 외로우니까 그런 것도 있고. 항상 미안하다고 말할 만큼 섬세하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 누구도 거대한 먼지 덩어리와 같은 날 사랑해주지 않더라. 내 곁에 같이 있어주지도 않았어.

그런데 내 사랑에 방해꾼이 하나가 있어. 실은 그것 때문에 아까부터 널 붙잡고 얘기를 하고 있는 건데……. 물론 친구로 내가 널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지만 분명히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장황하게까지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녀가 내 말문을 틔워줬다고 해야 할까. 그게 아니라면 굳이 같은 수컷끼리 이렇게 많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나? 아닌가? 내가 잘못됐을 수도 있고. 아, 참, 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구나.

내 고민은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야. 그것 때문에 그녀에게 다가가기가 힘들어. 그게 뭐냐고? 넌 뭐하고 살았냐. 아직까지 그것도 모르고……. 이해한다. 이해해. 그럴 수도 있지.

야, 잠깐만. 누나가 부르신다. 마당에 같이 나가볼래?

 

마당에 나오니까 좋다, 그치? 파랗게 새로 돋아난 잔디를 좀 봐. 너무 귀여워.

질이 나쁜 중학생들에게 당하고, 돼지들이 집단으로 생매장되는 구제역의 현장까지 보고 나니까 너무 견디기 힘들었어. 내 영혼도, 마음도 모두 10억 광년쯤 떨어진 행성으로 떠나고, 껍데기만 남은 기분이었어.

좀비처럼 생각과 의식이 흐려지면서, 불안증이 심해졌어. 매일 악몽을 꾸고, 괜히 숫자도 세고, 길을 지나가다가 간판을 보면서 몇 글자인지 세기도 하고, 거의 십 분마다 시계를 보기도 하고…….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게 다른 게 아니라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라는 것을 알았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가 뭐냐고? 그건 일종의 정신질환이야.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였던 거, 그걸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라고 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 갇혔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사람들도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의 증상을 보였다고 해. 괜히 건물이 무너질 것만 같고, 똑같은 일이 반복될까봐 너무나 두렵고. 그러면 일상생활도 제대로 유지하기가 힘들어. 천안함에서 생존한 장병들과 구제역의 현장에서 돼지들을 생매장하는 일을 한 인부들도 이런 고통을 호소했다고 해.

떠돌이 생활을 할 때, 너무 고통스럽고, 하루하루가 괴로워서 먹을 것을 구할 때 빼고는 거의 혼자서 지냈어. 불가항력적으로 잠에 빠져든 것도 이 즈음이었어. 너무 자서 나중엔 허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어.

참 불쌍하지, 나? 한참 뛰어놀면서 성장하고, 세상을 만끽해도 모자랄 나이에…….

육체의 건강만이 전부가 아니라니까. 정신의 건강도 중요해.

끔찍한 늪에서 스스로 날 끌어올리기 위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어.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집에 가면 몇 권의 책을 구할 수 있었어. 그분들도 외로우셨는지 나를 쫓아내지 않으셨어.

살고 싶다는 장돌뱅이의 이야기,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행복하다는 고백을 하는 사지가 없는 청년의 이야기 같은 걸 읽었어. 물론 어려운 책들도 조금 읽었고. 크크크.

그리고 달리기도 시작했어. 참 건장하고 잘생겼던 골든 리트리버였는데, 그 역시 유기견이였어. 그가 나를 보더니 자기가 더 견디기 힘들었는지, 같이 달리자고 하더라. 처음엔 억지로 끌려갔어. 아무것도 하기 싫었거든. 조금씩 변하는 나를 보면서, 나중엔 내가 재미있더라. 내가 좋으니까, 나중엔 안 시켜도 하게 되는 거야.

이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에서는 많이 벗어났어. 너랑 이렇게 길게 이야기도 하고 있잖아.

그걸 회한이라고 부를 생각이야. 그래도 될 때가 온 것 같아.

하지만 아직 모자란 부분도 있어. 잔상들이 남아서 떠돌고 있다고나 할까.

이게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기 힘든 이유야.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온 게 얼마 안 되니까,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기가 힘든 거야.

춥다. 들어가자. 꽃샘추위가 맹렬하네.

 

얼마나 많은 개들이 버려지는지 알아? 서울에서 작년 1월부터 8월 사이에 버려진 개가 1만2000여 마리야. 몰티즈 1208마리와 진돗개 284마리가 버려졌어. 엄청나지? 전국적으론 한해에 8만2658마리가 버려졌어. 2002년 이후에 지속적으로 그 숫자가 늘고 있어.

이 개들이 어떻게 되느냐고? 60% 정도는 안락사당하거나 병에 걸려 죽는대. 나머지는 우리처럼 유기견이 되는 거지. 그중에서 아주 운이 좋은 친구들만 우리처럼 동물보호협회에 의해서 구조가 되는 것이고.

버려진 개보다 수위는 낮겠지만, 버린 사람도 어느 정도로는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을까?

동물을 학대하는 현장을 보고 자란 어린이는 어른이 됐을 때 폭력 성향을 보일 가능성이 크대. 선진국에선 자폐증 어린이나 재활 치료를 하는 환자에게 동물을 키우게 하기도 한대. 응? 누가 그랬냐고? 누나의 남자친구들한테 들었어. 약물치료 같은 것보다 유기견을 키우는 게 자폐증 어린이나 재활 치료를 하는 환자에게 정신적으로 훨씬 더 많은 도움이 된대.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는 것은, 어린이의 정서적 성장에도 도움이 되고.

그리고 참, 우린 애완동물이 아니야. 반려와 애완은 다르대. 애완은 아끼는 장난감이란 뜻이래. 이건 나도 아까 한 말이지만, 동물은 엄연한 생명체이잖아. 장난감처럼 싫으면 버리고, 던지고, 부숴버릴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란 말이지.

동물에게도 복지가 있대. 인간의 편의에 의해 동물을 이용할 순 있지만,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편안하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형들이 그랬어. 자신들은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고도.

야. 물을 좀 먹자. 말을 너무 많이 했다. 그런데 넌 원래 말수가 적니? 응? 뭐라고? 내가 너무 말을 많이 했다고? 흐흐흐. 미안해. 아. 미안하다는 말을 이제 안 하기로 했는데…….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좀 편한 거 같아.

 

구조되고서 결심했지. 내 사랑 말라뮤트 양을 위해서, 비록 아직 이름도 모르긴 하지만, 어쨌든……. 사랑하는 누나를 위해서, 음, 그리고 내 절친한 친구인 너를 위해서, 제대로 된 삶을 살겠다고.

내가 처음에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 잊지 않으려고 길거리에서도 노력을 많이 했어. 결혼해서 강아지도 낳고, 주인의 말도 잘 듣고, 흠……. 너무 큰 욕심을 부리면서 살고 싶진 않아.

내가 007이라고 스스로를 부르게 된 건 과거의 기억과 연관이 많아. 007 시리즈의 22탄인 ‘퀀텀 오브 솔라스’에서 제임스 본드로 나오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 그의 고통과 역경,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첫사랑의 비밀을 찾아가는 행로가 난 좋더라. 나도 그렇게 살아봐야겠다, 뭐, 그런 것이지.

날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구해준 것은 누나와 누나의 친구들이지만, 이제는 내가 나를 구하고 싶어. 그리고 거기서 조금 발전한다면 다른 유기견들도 구하고 싶어. 과거보다는 그래도 조금 더 행복하게, 아주 약간만, 그리고 내 아이들이 나보다는 조금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너무 오버하지 않는 선에서만 살아보고 싶어. 지금 우리가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이 언제까지나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사람들도 동물들도 편안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줬으면 해. 5월의 라일락 향기만큼이나 매혹적인 것들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에 이런 내용이 나와. 아까 말했던,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집에서 읽었는데……. ‘만약 외계인이 지구를 찾는다면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개미들과 대화하려고 할 것이다.’라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의하면, 지구에는 인간보다 더 많은 개미들이 살아간대. 지구의 주인이 인간이라는 생각은 인간만의 생각이라는 것이지. 인간의 지나친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꼬집은 말인데……. 지구에는 인간만 사는 게 아니니까.

인간의 고유한 권리를 부정하지 않지만, 이제 인간도 이미 많은 종을 멸종시킨 만큼, 그리고 지구의 환경을 이미 많이 파괴한 만큼, 다른 종과 지구의 환경에 대해서 깊은 책임감을 느낄 때가 됐다고 봐.

그리고 그게 결국은 인간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면서, 대대손손, 지구에서 조화롭게, 조금 더 눈부시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현명한 길이지 않을까.

 

야. 저기 그녀가 온다. 그녀가 여기에 온 후로, 그녀가 걷는 걸 본 건 처음이야. 이제 좀 괜찮아졌나봐.

“안녕? 난 007이라고 해.”

“먹을 거 있니?”

“배고파?”

“언니가 먹을 것을 주기는 했는데, 그래도 아직 배가 고프네.”

“그럼 우유를 조금 먹어봐. 먹을 게 있기는 한데, 아직 이렇게 몸이 회복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퍽퍽한 걸 먹는 건 좋지 않은 거 같아. 이해하겠지? 지금은 일단 안정이 필요해 보인다. 서서히 적응하는 게 더 좋을 거 같아.”

“고마워……. 친절하구나.”

그녀가 우유를 먹어. 휴. 그래. 그녀가 움직이는 걸 보니 좋아. 하하하. 그래. 너도 좋아.

“다 먹었어?”

“응. 한결 낫다.”

“햇볕을 좀 쫴봐. 창가로 와봐. 직사광선은 무리일거야. 창에 비춰져서 들어오는 햇볕을 쬐는 게 나을 거 같아.”

우린 어디로 가게 될까? 새 주인을 만나고 싶어. 내 상처를 감싸주고, 내가 도약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새 주인을 만나고 싶어.

“저기. 졸고 있는데 미안하지만, 이름이 뭐야?”

“내 이름? 수정. 수정이야.”

수정이래. 드디어 이름을 알았다.

“선물을 줄게.”

“선물? 무슨 선물?”

“이야기, 짧은 이야기야.”

“옆에 있는 내 친구랑 같이 들어도 돼?”

“그럼. 같이 들어도 돼. 우린 모두 비슷한 처지이잖아. 그리고 너희는 내게 우유도 줬잖아.”

수정이의 얘기를 들어보자고.

“태풍이 지나갔어. 일주일 동안 비가 내려서 땅위에 먼지와 쓰레기들이 비에 모두 쓸려갔어. 거센 바람에 작은 물건들과 동물들도 날려갔어.

하지만 우린 운이 아주 좋았어. 마음이 착한 사람을 만나서, 그녀의 튼튼한 집에 몸을 숨길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평소에 열심히 일을 해서 먹을거리를 저장해뒀어. 우린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그녀의 집에서 몸을 숨기고, 그녀가 저장해둔 먹을거리들을 야금야금 먹었어.

일주일 동안 집안에만 있었더니, 너무 심심하고 견딜 수가 없었어. 일주일 뒤에 태풍이 지나간 것을 확인하고, 그리고도 하루가 더 지나기를 기다렸어.

그리고 바깥으로 나왔어. 밤이었지만, 달빛과 별빛에 의지해서, 풍경들을 볼 수 있었어. 태풍으로 은행나무가 뿌리 채 뽑혀 뒹굴고 있었어. 개들도 다리가 부러지고, 돌풍에 날린 돌에 긁혀 상처투성이가 됐어. 별들은 상처가 아문 듯 했어.

난 엄마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황금빛 성이 황금빛 모래로 흩어지기 전에…….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바깥으로 나왔어. 햇볕이 식빵 사이에 잼처럼 깔려 있었어.”

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동화야. 친절하게 대해줬잖아. 난 너희들에게 동화를 이야기해주고 싶어.”

잠자코 듣고 좀 있으라고? 알았어.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햇볕이 식빵 사이에 잼처럼 깔려 있었어. 아픈 동식물들이 스스로 상처를 돌보고 있었어. 비가 일주일 동안 내려서 하늘이 무척 맑았어.

저쪽에서 둥근 물체들이 다가왔어. 점점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어.

그것은 복어들이었어. 배가 빵빵하게 부픈 복어들이었어. 복어들은 무얼 먹었는지, 빵빵해진 배에서 다양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어. 파랑, 노랑, 빨강, 하양의 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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