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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신해철 - 신해철 유고집
신해철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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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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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하나의 길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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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이야기 - 2015년 제3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숨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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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겨울은 평년보다 춥다고 한다. 기상청에 의하면, 북쪽에서 형성된 차가운 대륙성 고기압이 평년보다 빨리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지난해의 경우 1월경에 내렸을 폭설이 12월 초에 내렸다고 했다.

그로 인해 언론과 여러 전문가들은 겨울철 전력대란을 우려했다.

겨울철 전력대란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겨울은 여름보다 잔인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이날 누군가는 창밖으로 펑펑 내린 눈을 보며 디카로 사진을 찍으며 낭만을 얘기했지만, 난 그 누군가를 보며 참 한심하다까지는 아니고 조금 어이없다는 생각을 했다.

연병장에 가득 찬 눈을 치워보지 않았을 것이고, 2박3일 혹한기 훈련에서 2박3일을 밖에서 자지 않은 채 계속 걸어보지 않았을 것이며, 차가운 군화로 인해 동상에 걸려본 적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겨울철 전력대란. 이번 폭설을 낭만적으로 보는 그녀의 디카를 뒤로 하고 난 눈을 맞으며 우체국으로 가서 대량 우편발송 작업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넋두리를 하는 것이다.

겨울은 잔인하다. 그리고 겨울철 전력대란은 분명히 가난한 이들에게 더 치명적으로 다가갈 것이다.

한국전력은 전기요금을 미납한 세대에 최소한의 전기를 제공하던 조치를 겨울철 동안 철회한다고 했다. 전기요금 미납 뒤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들을 모두 건너뛰고, 전기요금을 미납한 가구에 설치한 장비를 철수한다는 방침이라고 들었다. 전기요금을 미납한 세대에 새로운 장치를 설치하는 것도 이번 겨울철에는 실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배운 도덕과 정의, 이웃사랑 등은 거의 멸종된 듯하다. 그저 빛바랜 사진처럼 흐물흐물해 힘이 없다.

‘생일 축하해’라는 말을 이제는 어색하게 듣는 친구에게서 느끼는 생경함…….

인간유감일 수도 있겠다. 내가 느끼는 이 잔인함은 아주 오래된 유물이기 때문이다. 파라오가 피라미드를 짓고, 중국에서 만리장성을 지은 것은 잔인함의 화석이다. 거대한 공룡 같은 잔인함이 지성과 제도의 성숙으로 희석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겨울철 전력대란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잔인함을 목격한다.

분명히 서울 하늘 아래 어떤 동네에서는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이웃의 외면 속에 얼어 죽는 흔한 일이 발생할 것이다. 홈리스들에게도 겨울이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신도림역으로 향했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문서작업을 하느라 구부정해진 어깨와 허리, 모니터를 바라보느라 침침한 눈에 묘한 감정을 느끼며 신도림역 승강장으로 올라가려 했다.

그때 눈에 한 할머니가 들어왔다. 할머니는 지하철에서 어린 토끼들을 팔고 있었다. 면봉이나 양말, 나물 등을 파는 다른 할머니들보다 어린 토끼들을 파는 할머니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누가 할머니에게서 다른 행복과 즐거움들을 빼앗아간 것일까? 누가 할머니에게서 지하철에서 토끼를 파는 것만큼의 영토와 행위만을 허용한 것일까? 그 도둑은 누구일까? 나도 그 도둑 중 한명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슬펐고, 우울했다.

할머니와 토끼들을 뒤로 하고 수원행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차가운 겨울 공기를 그대로 맞을 수 있는 1호선 야외 승강장에 섰다.

여동생이 사준 검정색 목도리를 조금 잡아당겨 추위로부터 입을 감췄다. 잔인한 겨울로부터 입술을 보호하고 싶었다. 입술이 터지지 않도록, 나의 우울과 슬픔이 타자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녀와 입을 맞출 때 내 입술의 거침이 그녀의 기분을 잡치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잡상인은 역에서 물건을 팔 수 없으니 바로 나가주십시오. 승객 분들도 잡상인에게서 물건을 사지 마십시오.”

새마을운동의 화법이었다.

법과 제도, 세금과 국가가 필요하다는 걸 안다. 그런 기본적인 것을 지키는 보수적인 태도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건 너무 잔인하다. 그렇지 않나? 겨울철 전력대란도, 2박3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았던 혹한기 훈련도, 지하철의 이 방송도, 그것도 토끼를 팔고 있는 할머니가 있는 지하철에서 이런 방송을 한다는 사실이 너무 잔인하게 느, 껴, 졌, 다.

이것은 법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과 감정의 문제다. 감성과 감정은 결코 열등하지 않다. 논리학과 수학, 물리학이 중요한 만큼 예술도 중요하다. 이성과 지성이 중요한 만큼 감성과 감정도 중요하다. 인간은 뼈와 살, 피, 신경물질 등으로 이뤄져 있듯이, 이성과 지성, 감성과 감정으로 이뤄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지나친 인간화, 물질화다.

 

풍선껌 같은 여행이었다.

주말에 다미와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로 잠시 떠나자고 했다. 계속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그건 이십대 중반부터 계속된 일이었다.

왜 이십대 중반부터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 말을 계속, 주저리주저리 하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이제는 하고 싶지 않다. 비밀로, 또는 무한대를 담고 있을 ‘( )’ 속에 묶어서 영원히 봉인해버릴 생각이다.

다미를 만나기 위해 신촌역으로 향했다. 성균관대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1호선 창밖을 바라보며…….

지하철이 신속하기는 하지만, 답답하다는 이유로 어렸을 때부터 난 버스를 더 좋아했다. 하지만 1호선은 두 가지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준다. 가끔 연착이 있기는 하지만, 도로의 교통체증처럼 빈번하고 심각하지는 않다. 또, 1호선은 지상을 달리니 충분히 밖을 바라볼 수도 있다.

겨울의 여린 햇빛이기는 하지만, 눈을 찌푸리게 하는 햇빛이 좋다. 볼 살을 약간 찡그리며 먼 곳을 쳐다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특히 의왕역 근처를 지나갈 때 보이는 의왕저수지에서는 하늘이 물에 비친다. 채색수묵화 느낌의 갈대들은 또 어떤가.

다미는 신촌역 앞에 있는 미플이라는 스터디카페에서 공부하고 있다.

미플은 글로벌 경제위기가 만든 새로운 문화공간이다. 월스트리트의 분노한 사람들, 그리스의 절망한 청춘들, 한국의 이태백들……. 이들은 ‘미플’로 모인다.

‘미플’만 있는 것도 아니다. 직장인에게 프레젠테이션 공간을 제공하는 카페들도 많지만, 미래를 유예한 대학생들, 졸업 후 취직을 못해 방황하는 청춘들이 모이는 다른 스터디카페들은 충분히 많다. 신촌에도, 광화문에도, 종각에도, 수원역에도 ‘미플’과 청춘들은 많다.

‘이들은 왜 이렇게 됐을까’라고 자문할 수밖에 없다.

나의 실존이니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왜 2번이나 세계대전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자문해야만 했던 유럽인들의 고민처럼, 일제 치하에서 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대한제국의 후예들처럼, 살아있다면…….

2012년을 살아가는 20대 후반 또는 30대 초반의 명멸하고 싶지만, 명멸하기에는 너무 어린 영혼들이 찾아가는 곳이 스터디카페 ‘미플’이다. 반딧불이의 묘도 아닌 것이, 인큐베이터도 아닌 곳이, 놀이터도 아니고, 사무실도 아니다.

한국은 고등교육을 받은 인원의 비중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그로 인해 미스매칭 현상이 발생한다. 배운 게 많은 젊은이들은 쉽게 육체노동 일에 만족하지 못한다. 육체노동을 존중해주는 문화도 희박하다. 미스매칭이 빚은 막대한 취업준비생들, 줄임말로 취준생들은 오늘도 ‘미플’로 모여들고 있다.

다미도 거기에 있다.

스터디카페에서는 커피나 음료수 한 잔을 시키면 3시간 동안 스터디룸을 사용할 수 있다. 기본 사용시간이 끝나면 추가요금을 내고 스터디룸을 조금 더 사용하거나, 홀에 있는 자리에서 추가요금 없이 공부나 토론을 이어가면 된다.

솔직히 말이 좋아 토론이지, 그게 제대로 된 토론인지는 모르겠다고 적으면서 젊음의 만화 같은 순정을 한 번 더 새겨본다. 하지만 이제, 난, 그것을 떠나보내고 싶어 한다. 누구에게나 시간을 다시 돌릴 수 있는 능력은 없기 때문에, 나도 이 시간을 그리워할 것이다.

아니, 이미 약간 그리워하다가 중소기업 무역회사의 사원이라는 현실에 적응해가고 있다.

신도림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신촌역 2번 출구에서 다미를 기다렸다.

175cm인 나보다 머리 한 개 정도는 더 작다, 다미는……. 내가 다미를 좋아하는 이유는 당돌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덤빌 때는 덤빌 줄 알기 때문이다.

이날 다미는 하늘색 잠바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눈에는 다미와 하늘색이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하늘색 잠바를 입은 다미가 안쓰러워 꼭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미는 함부로 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에 그랬다가 정강이를 차인 적이 있다.

다미는 완벽한 이태백은 아니다. 이십대 후반인 그녀는 직장인의 무늬를 가진 이태백이다. 인턴으로 일을 하다가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이것도 나만의 생각일 수 있다. 이런 얘기를 또 잘못하면 다미에게 정강이를 차일 것이다.

기존 사람들과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고, 그 회사에서 하는 일에 만족하지 못해서 자기 발로 걸어 나왔다고 들었다.

하지만 다미는 그 일로 오랫동안 힘들어 했다. 마치 거대한 흰긴수염고래가 겨울잠이라도 자겠다고 심해로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만 같았다. 혹시라도 다미라는 흰긴수염고래가 심해에서 수압에 눌려 질식사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다미가 인턴으로 일하다가 인간관계에 실패한 것인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

다미를 만나, “어디 갈까?”라는 상투적인 말…….

우리는 지하철을 탔다.

다미는 고정적인 소득이 없지만, 집에 손을 벌리기에는 너무 커버렸다. 나는 적은 고정적인 수입이 있지만, 그동안 쌓인 대학 등록금 대출금도 아직 다 상환하지 못했다. 솔직히 한참 남았다. 그렇기 때문에 스키장에 가거나, 괜찮은 식당에서 요리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조금 사치스러운 행위로 다가온다.

조화롭지 않는 것은 아름답거나 평화롭지 않기 때문에, 다미와 난 그냥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로 조금 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가 지하철을 타고 소소한 여행을 가기로 한 것에는 나의 상태로 인한 부분도 있다.

친구들은 내게 이런 말들을 했다.

“그 정도의 상처도, 이야기도 없는 사람은 없어.”, “우리 벌써 삼십대야.”, “고등학교 졸업한지는 10년도 넘었어. 10년이면 강산도 변해.”, “네가 군대에 다녀오는 동안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어.”, “네가 모르는 일들이 많아.”……

떠날 수 없던 이유? 너무나 착하게도 소박한 꿈을 키워가는 가족이 있으며,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해외로 떠날 만큼의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하철은 네트워크 같아. 네트워크 이론 알아? 쉬운 이론이기는 한데, 우리는 모두가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고, 네트워크가 만나는 지점이 링크라는 거야. 많은 링크를 갖고 있는 사람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지. 아, 링크 이론이라고 해야 하나?”

“헐. 고생했어.”

“왜 ‘헐’이래. 직장생활은 괜찮아?”

“운 좋게 다니고 있다고 말하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 거 같다.”

다미와 난 정원이 있다는 지하철역인 고담역(高癚驛)으로 가기로 했다. 고담역(高癚驛)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신촌역에서 2호선 지하철을 탔다.

서울 북쪽 끝에 있는 고담역(高癚驛)은 신촌역에서 지하철을 3번 정도 갈아타고 40~50분 정도 가야 한다. 지하철역에 정원이 있다는 것, 지하철 정원을 만나기 위해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는 게 우리가 고담역(高癚驛)을 주말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다.

“나 면접 봤어.”

“무슨 면접? 일 년도 아직 안 됐잖아. 물론 내가 지금 오빠 걱정할 때는 아니지만…….”

“지금 회사는 중소기업이잖아. 월급이 너무 적어. 이 회사에만 있어서는 생활하기 힘들 거야. 나도 만족이 잘 안 되고, 더 발전하고 싶고……. 면접 본 회사는 대기업 자회사야.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해서…….”

다미는 고개를 떨궜다. 5개의 지하철역을 지나갈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미와 고담역(高癚驛)으로 지하철 여행을 다녀온 날 저녁, 1차 면접을 본 회사에서 기획안을 제출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일요일에는 집에 틀어박혀서, 기획안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이메일로 보냈다.

군대에서 행정병 일을 하며 배운 보고서 작성법을 동원했다. 표지에 네모 칸을 만들고 색도 넣었다. 회사에서 배운 작성일, 작성자 넣는 방법도 사용했고, 졸업논문을 쓰며 목차를 넣었던 기억도 떠올렸다. 최대한 예쁘게 만들었다.

이메일로 기획안을 보낸 후 이틀 뒤에 최종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이틀의 시간 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기획안을 만들어서 보내라는 연락에 대해, 내가 맘에 들지 않아서 기획안이나 만들어서 보내고, 그걸 통해서 배우라는 의미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1차 면접에서 만난 부장님을 너무 소극적으로 대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가야 했던 것은 아닐까, 바닥에 무릎이라도 꿇는 용기를 보여줬어야 했던 건 아닐까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최종면접을 보러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 이틀의 시간 동안 내가 했던 별의별 생각들은 그저 잡생각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난 이 일로부터, 1차 면접에서 했던 ‘적당한 거리두기’ 같은 행동들이 정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하나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그만큼의 시간, 그만큼의 택시비 등을 투입해 하나의 지혜를 얻은 것이다. 그게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서 살짝 기분이 좋았다.

이십대일 때도 그랬다. 경험에 대한 욕구가 컸다. 일그러진 양은냄비 같은 날들이었지만, 일그러진 양은냄비도 나름의 미적 가치를 지니듯이, 그 시절도 나름의 내적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난 지식보다는 지혜에 대한 갈망이 컸다. 그런데 지식보다 지혜에 대한 갈망이 큰 것은 ‘토탈 이클립스’ 같은 영화에는 어울리지만, 취업하는 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혜를 증명하는 것은 지식을 증명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본부장님을 본다는 최종면접을 보러가는 날,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대리님에게 치통이 심해서 치과에 다녀오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택시를 타고, 지금 회사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그 회사로 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1차 면접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 전날 밤에도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일찍 잤다.

또, 하나의 변화? 변수?

1차 면접을 보러 갈 때 만났던 택시 기사 아저씨는 다정하게 말을 걸었고, 한 번에 회사 앞까지 잘 찾아가주셨다. 하지만 최종면접을 보러 가는 길에 만난 택시 기사 아저씨는 퉁퉁 거리며 자기의 지난 과거에 대한 듣기 거북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자기 친구 중에 검사가 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은행 지점장이 된 친구가 있다, 큰 사업을 할 때는 지갑에 몇 억 원씩 넣고 다녔다, 등…….

하지만 아저씨는 1차 면접을 보러 가는 길에 만난 택시 아저씨처럼 한 번에 길을 찾아가지 못했다. 같은 길을 두 번이나 맴돌았고, 그 결과 면접 시간에 5분 늦게 도착했다. 택시요금은 1차 면접 때보다 1,600원 더 나왔다.

1차 면접 때 봤던 부장님에게 이끌려 본부장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본부장님의 방에는 동양란 화분, 컴퓨터, 책꽂이 등이 있었다. 창밖으로는 평범한 외관의 빌딩이 보였다.

“기획안은 그럴듯한데……. 주로 사무실에서만 일을 했다고 해서……. 이 회사에서는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해요.”

지금 회사에서는 막내이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보다는 사무실 안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다고 했다. 더불어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말도 했다.

“집이 수원이네.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려요?”

2시간 정도 걸리는 데 1시간 반 걸린다고 대답했다. 대학을 서울로 다녀서 그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것에 익숙하다고도 했다.

“그래요? 대학을 서울로 다녔구나. 연락할게요. 부장이랑 얘기를 해봐야 하니까.”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말하며, 90도로 인사를 했다.

 

다미는 고담역(高癚驛)으로 지하철 여행을 다녀온 후, 일주일 정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최종면접을 본 회사에서도 연락이 없었다.

물론 그 과정을 통해 배운 것이 있고,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 헛헛한 마음을 달래야 했지만,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이상한 것은 기획안을 보내고 연락을 기다릴 때보다 최종면접을 보고 연락을 기다릴 때가 덜 떨렸다는 점이다.

본부장님에게 회사에 대한 좀 더 냉정한 이야기를 듣고, 연봉을 깎고 싶어 하는 마음 등을 읽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대기업 본사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업무에 대해서 차근차근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적을 거 같았다.

하여튼 그 회사의 최종면접을 보고서는 마음이 편했고, 조금 더 성숙해진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몇 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연락을 기다리기는 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다미를 잊고 있었다. 먼저 전화를 한 건 다미였다.

“나 토끼 분장 알바 해. 토끼로 분장하고 제과점에서 케이크 홍보하는 일이야.”

“왜 하필이면 토끼냐? 달나라 갈 거야? 네가 옥토끼야?”

내 말투가 다미를 갈구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갓 제대했을 때, 후임과 일반인이 구분이 안 돼서 애를 먹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잠자코 얘기를 들어줘도 모자랄 판에, 갈구고 있다니…….

“케이크가 토끼 모양이야. 이직한다는 건 어떻게 됐어? 잘 됐어?”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락 없구나? 괜찮아. 더 좋은 회사 갈 거야. 그러니까 우리 힘내자고. 추운 겨울에 토끼 분장 아르바이트하면서 케이크 홍보하고 있는 나도 있잖아.”

살짝 눈 끝이 붉어지려고 했다.

“언제 나 아르바이트하는 데 놀러와. 난 뉴디케이드 토끼야. 뱃속에 잘 익은 은행을 한가득 넣고 있지.”

“뉴디케이드 토끼? 그게 뭐야? 호객도 하니?”

“그냥 내가 만든 말이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특별한 의미가 있어야만 하나? 그냥 별다른 의미 없는 말을 하고, 그냥 머릿속에, 맘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사용하면 안 되나? 그러면 안 되는 이유도 없잖아.”

“그건 네 말이 맞아. 너와 난 계약서상 갑과 을의 관계도 아니고, 누가 상대방을 고용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린 그냥 좋아서 만나는 거니까. 그런데 다미야. 뉴디케이트 토끼는 무슨 말인지 알겠어. 새로운 시대의 토끼라는 거잖아. 그런데 뱃속에 잘 익은 은행을 한가득 넣고 있다는 말은 뭐야?”

“그것도 별다른 말은 아니야. 네가 예전에 신도림역에서 토끼 파는 할머니 보고 우울하다고 문자 보냈잖아. 그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해보고 싶기도 하고 해서……. 물론 토끼들 마음도……. 돈도 벌고…….”

“내가 질문한 건, 네가 왜 토끼 분장 아르바이트를 하냐가 아니고, 뱃속에 잘 익은 은행을 한가득 넣고 있다는 말이 어떤 의미냐는 거잖아. 너 그렇게 대답하면 면접에서 좋은 점수 못 받아. 물론 나나 잘해야겠지만……. 미안하다. 얘기가 또 이런 얘기로 흘러와버려서…….”

“뉴디케이드 토끼는 새로운 시대를 고민하는 토끼야. 지하철에서 토끼를 파는 할머니가 지하철에서 쫓겨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따뜻한 새로운 시대를 원한다는 마음의 표현? 그리고 잘 익은 은행을 뱃속에 넣고 있다는 건, 음……. 은행은 은행나무 열매이기도 하지만, 돈을 맡기는 은행이기도 하잖아. 동음이의어지. 자본주의가 성숙하길 바란다, 경제민주화가 이뤄지길 바라지만, 잘해서 재정위기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해답은 내 안에 있다, 뭐, 그런 말이지. 아직 별 거 아닌 존재이지만, 난 나를 믿어.”

 

기상청에서는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 거라고 했다. 며칠 전 폭설을 보며 낭만적이라고 디카로 사진을 찍던 누군가를 한심하게 봤던 나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기뻤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 것이라는 소식에 다미와 어떤 데이트를 할지, 다미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 고민했다.

사람은 이렇게 간사하고, 자기중심적이라고 적지만, 이것은 내가 아직 훌륭한 인품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모든 생각들, 말들이 합리적일 것이라는 것은 오산이다.

물론 100%의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100%라는 것, 희망이라는 것, 꿈이라는 것, 무릉도원이라는 것을 상정하지 않고서 살 수도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폭설 앞에 낭만적인 행동을 했던 것이 그 사람이 나보다 고생을 덜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을 잃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는 거 같다. 아직 내가 경험이 적고, 고생을 덜했기 때문이라는 설명 말이다.

하지만 더 좋은 것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유성우가 내린다는 점이다. 보송보송한 아기털이 듬성듬성 남아있는 어린 새 같은 연인에게 유성우가 내리는 밤만큼 아름다운 선물도 없다.

이직을 하기 위해 면접을 봤던 대기업 자회사에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었다. 다미도 토끼 분장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소식 외에 다른 좋은 소식을 전하지 않았지만, 행복했다.

 

“이 토끼, 신도림역 할머니한테서 산거야. 예쁘지? 잘 키워야 해. 아기 낳으면 나한테 분양해주고.”

“잘했어. 그렇지 않아도 애완동물 키우고 싶었는데……. 자취하니까 외롭더라고. 에구구. 토끼들한테 이름 지어줘야겠다.”

“그렇게 좋아? 다행이다.”

“할머니가 신도림역에서 계속 토끼를 팔고 계셔서 다행이야. 지하철역에서 허가받지 않은 상행위를 하는 게 불법이라고 해도, 이 추운 겨울에 토끼를 파는 할머니를 몰아내는 건 좀 아닌 거 같아.”

“현실이라고 하지만, 슬픈 일이지. 세상은 거대한 냉장고 같다는 생각도 들어. 불볕더위의 여름이라고 해서 우리의 마음이 냉장고의 온도보다 높을까?”

“그렇게 냉장고의 온도로 살면, 생산성이 유지되겠지. 경제학적으로 보면……. 하지만 나도 그렇게 맘에 들지는 않아. 그리고 네 표현대로 냉장고의 온도로 살고 싶지도 않고……. 테레사 수녀님도 계시고, 아웅산 수지 여사님도 계시잖아.”

다미는 아현동 고시촌에 있는 5평짜리 방에서 테레사 수녀님과 아웅산 수지 여사님에 대해서 말했다.

그리고 다미는 가스레인지 앞으로 갔다. 내가 좋아하는 ‘다미표 떡라면’을 끓여주겠다고 했다. 난 그렇게도 ‘다미표 떡라면’이 맛있었다. 면발과 떡이 약간 흐물흐물해지게 충분히 끓이고, 물을 졸여서 약간 짜고 맵게 만드는 ‘다미표 떡라면’은 아무리 먹고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다미가 라면을 끓이는 동안 아기 토끼 한 쌍이 든 우리를 다미의 책상 위에 올려뒀다. 아기 토끼들에게 물을 조금 갖다 주고,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잠깐 열었다가 닫았다.

다미가 ‘다미표 떡라면’을 끓여왔고, 창문을 잠시 열어둬서 훨씬 상쾌해진 공기 속에서 우리는 작은 상에 이마를 맞대고, 호호, 불면서 라면을 먹었다.

라면을 다 먹고, 다미와 남산타워에 가기로 했다. 남산타워로 가는 밤의 버스에서 생각한 일인데, 남산타워와 서울의 야경이 너무 밝아서 유성우를 제대로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론은, ‘그래, 끝까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고, 모든 실수를 용서받고 싶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다미와 함께 밤의 버스를 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잖아. 그리고 난 원래 완벽하지 않잖아.’였다.

“우리에게 인류의 희망이 있지 않을까?”

계속 창밖을 바라보던 다미가 불쑥 말했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했던 연구는 동북아시아 경제모델에 대한 것이었어. 국가 주도 성장 같은 거 있잖아. 러시아의 사회주의 모델은 이미 오래전에 실패했고, 미국과 유럽의 경제모델도 금융위기와 재정위기로 한계를 드러내고 있잖아. 현재 서구에서는 패러다임, 즉 체제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고 하잖아. 그러고 보니까, 패러다임이라는 말에는 편견을 안 갖게 되는데, 체제라는 말에는 편견을 갖게 되는 거 같아. 우리가 아직 분단 중이라서 그런가?”

밤의 버스에서 내 옆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다미의 코를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

“그러니까 내 말은, 사회주의 모델도, 자본주의 모델도 실패했거나 실패하고 있다면, 사회주의 모델이라고 볼 수도 없고, 자본주의 모델이라고 볼 수도 없는 한국형 경제모델에 인류의 희망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 하버마스는 유럽의 통합에서 인류의 희망을 찾았다고 하는데, 나라고 한국의 통합적인 미래에서 인류의 희망을 찾으면 안 되는 거야? 청년 실업자는 그런 꿈꾸면 안 되는 거야? 토끼 분장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십대 후반의 여자아이는 그런 꿈꾸면 안 되는 거야? 아니잖아.”

 

버스에서 내렸다.

서울타워로 올라가는 골목길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우리의 토끼를 생각하며 당근 음료수 2개를 샀다.

특히 서울에서 편의점이 아닌 슈퍼마켓을 본 게 오랜만이라서 좋았다. 희귀하니까. 슈퍼마켓 아줌마의 빨주노초파남보, 원색적인 옷 색깔도 좋았다.

당근 음료수를 홀짝홀짝 마시며 어두운 골목길을 걸었다. 조금 더 걸어가면 가로등이 보일 거라는 희망을 가질 만큼 원시적인 골목길이었다.

참고로 ‘골목길’이라는 말이 지녀야 할 것만 같은 모습들, 어두움, 흙냄새, 낮은 담 등을 모두 갖췄다는 말이니, ‘골목길’은 화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음료수 한 모금이 목구멍을 넘어 시원한 느낌으로 식도를 흘러갈 때쯤 밤하늘을 봤다. 빛나는 물질이 슬라이딩을 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한 개의 빛이 떨어지고, 두세 개의 빛이 더 땅으로 떨어졌다.

자개 서랍장의 빛처럼, 어두운 골목길에서 본 유성우는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유성우야. 봤어?”

“응. 그런데 다른 유성은 다 노란빛인데, 푸른색 유성 하나가 내려오는데…….”

“잠시만……. 네. 저 지금 밖인데요.”

사장님이었다. 급하게 완성해서 보내야 하는 문서가 있으니, 새벽에 잠깐 해서 이메일로 보내라고 했다. 참,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런 전화를 하다니…….

하지만 그 적은 급여에도 나는 “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순순히 “네”라고 말한 것은 다혈질인 사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등바등하는 날 거칠게 잘 챙겨준 한 형에 대한 의리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 자신과 가족들, 다미를 위해서…….

내 수준이 아직 이렇다. 이런 말을 적어야만 일을 하는 나를 합리화하고 마음에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세상은 어렵다.

그때, 다미가 내 손을 꼭 잡았다.

“푸른색 유성이야.”

순간 골목길이 푸른색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토토로만한 몸집의 갈색 털을 가진 토끼 한 마리가 나타났다.

갈색 털을 가진 토끼가 말했다.

“넌 한국이 호랑이를 닮았다고 생각하니? 아니야. 토끼를 더 닮았어. 한국 사람들이 호전적이었니? 고구려는 좀 그랬지만, 고려나 조선은 아니었잖아. 그러니 나 토끼를 더 닮은 거야. 요새는 여성성이 대세라서, 호랑이의 진취성보다는 토끼의 지혜로움이 사회 생활하는 데 더 좋아.”

“다미야. 토끼가 말을 해.”

“다미한테 잘해줘.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토끼전 알지? 병에 걸린 내 간을 용왕이 원했잖아. 그래서 거북이가 날 구워삶아서 용궁으로 데려갔는데, 내가 재치를 발휘해서 겨우 빠져나온 거 아니야. 그건 옛날이야기고……. 이젠 동양과 서양을 거기에 대입하는 게 어떨까? 지금의 자본주의란 서양의 제국주의 침탈이 낳은 결과물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다미가 버스에서 너한테 했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이지. 서구식 자본주의의 빈틈을 동양식 자본주의가 채울 수 있을지도 몰라. 사회주의적 요소를 가미한 수정자본주의로도 한계가 있거든. 복지비용이 지나치게 많으면 사회 전체적으로 수익이 쉽게 발생하지 않고, 사람들이 게을러지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 비용은 후대에서 지불해야 하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어딘가에서 읽은 거 같다.”

“똑똑한 토끼야. 너처럼 거대한 토끼는 달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금방 달로 돌아갈 거니까. 푸른색 유성을 타고 잠시 내려왔을 뿐이야. 물론 동양적인 게 모두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동양의 정, 이웃사랑, 어른에 대한 예의, 애국주의 등은 좋은 면이 있는 거 같아. 구제 금융을 받아도 유럽 사람들은 금반지 모으기 같은 거 안 하잖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유럽에도 똘레랑스라는 게 있지만, 한국에는 정이라는 게 있잖아. 또, 일제에 저항하며 생긴 애국주의, 산업화시기에 생긴 새마을운동 같은 것도 나쁘기만 한 게 아니야. 그걸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서 달빛 미래로 가기 위한 디딤돌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좀 어렵긴 하지만 동의해. 토끼야.”

“지난 이천년으로부터 지금과 내일을 보는 안목이 필요한 시점이야. 그래야 이직도 할 수 있어. 그래야 이렇게 교육열이 높은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용서해. 너와 네 주변사람들을 용서해. 그리고 최대한 많은 것들을 포용해. 그리고 한국적 대안 자본주의가 가능할지 고민해봐. 거기에 사회주의의 실패, 금융위기와 재정위기로 타격을 입은 서구식 자본주의의 병을 해결할 약이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토끼, 나를 닮은 한국에 그 약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푸른색 빛이 사라지면서 토끼도 사라졌다.

눈을 떴다. 어두운 골목길의 낮은 담장에 왼쪽 손바닥을 댄 채 서 있었다. 난 고개를 숙여 약간 밑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미는 붉은 뺨을 한 채 내 앞에 서 있었다. 부끄러운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리고 입술이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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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일곱 살이다.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인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영화 《조지아》에서 망신창이 조지아가 부르던 다. 그 노래가 맘에 든다. 성공한 누나의 무게에 짓눌린 주인공의 비극이 내 마음을 할퀴었다.

“소연아. 이번에 내려야 돼. 일어나.”

꾸벅꾸벅 봄잠을 자고 있던 여동생을 깨운다. 내 마음은 지렁이처럼 땅 속을 헤집고 돌아다닌다. 이 나이에 여동생을 깨워서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한다니. 한가하게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정독도서관에 여자 친구랑 중간고사 공부하러 가고 싶단 말이야.

봄날은 나뭇가지로부터 치렁치렁하게 허공 곳곳에 달려 있다. 햇살은 투명하게 세상을 감싸 쥐고 그 안으로 부드러운 입김을 불어넣는다. 소연이는 언제 졸았냐는 듯이 산뜻한 얼굴로 사방을 감상하며 노래까지 흥얼거린다. 너무 씩씩해졌어. 난 그게 화가 난다. 났으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야. 왜 이혼은 해가지고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냔 말이야.

“응. 엄마. 다 왔어. 오빠랑 왔지. 걱정 마요. 잘 놀다가 밥 잘 먹고 갈게. 응. 걱정 마. 응. 그래, 나도 엄마 사랑해.”

어머니 마음도 이해는 간다. 항상 혼자였으니까. 아버지는 너무 바빴다. 게다가 여자도 잠깐 있었고……. 지금 아버지는 다시 혼자인데 어머니가 너무 하시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잠깐 들고는 한다. 아버지는 이제 일에 빠져 우리에게 돈만 다달이 보내주신다. 난 아버지라는 존재가 희미하다. 어머니는 그것도 싫으신 거겠지. 근데 또 화가 나는 건 왜 내가 그걸 이해하고 있냐 말이야.

“아빠!”

난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반듯한 양복 안에 있으시다. 자신의 딸을 보며 웃는다. 아버지의 차를 타고 식당으로 간다. 차창 밖으로는 봄날들이 날아간다. 퍼런 멍 같은 목련과 벚꽃들의 잔해 위로 드라이브를 한다. 아버지는 일상적인 대화 외에 별 말이 없다. 마치 어젯밤에 서로의 방에서 잠들었다가 오늘 점심 약속에서 만난 사이인 것처럼…….

“중국식 냉면 먹어봤니? 맛있어.”

아버지는 여전히 웃고 계신다. 뭐가 그리 즐거울까? 저 사람은, 내 아버지가 맞기는 맞는 걸까? 이런 상황이 현실적으로 연출될 수도 있구나.

“아버지.”

“응.”

“아니에요.”

어머니는 왜 끝내 아버지와 이혼을 하셨을까.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름대로 성실한 가장이었다.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도 사과를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싫으셨던 걸까?

내가 《조지아》에서 조지아가 부른 를 좋아하는 이유가 변했다. 이제는 그런 노래처럼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동경이어야 한다. 동경은 현실이 아니고. 하지만 나의 동경이 현실이 되어가는 느낌에 열일곱, 나의 삶은 곱다 못해 미칠 것만 같다. 져서 바람에 날리는 벚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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