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먼저‘와 ‘물질 먼저‘ 간의 분쟁을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우리의 믿음이 걸림돌이라 해도, 현실이 스스로 말하면 결과를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방안이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이 처음으로 제기한 역설 속에서 생겨났다. 이를 일반적인 용어로
‘제논의 화살 역설‘이라고 한다.
제논은 말한다. 화살 하나가 공중을 날아갈 때 우리는 화살을 어느순간에나 관찰할 수 있다. 우리가 관찰할 때, 화살은 특정 위치를 점유한다. 어떤 위치를 유지하는 동안 화살은 움직이지 않은 채로 있다. 그래서 만약 시간이 일련의 순간들이라면, 화살은 항상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어떻게 화살이 움직이고 있으면서 동시에 움직임이 없을 수 있는 걸까? 이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2500년 후 텍사스대학교의 조지 수다르샨George Sudarshan과 바이다나트 미스라Baidyanath Misra가 ‘양자 제 효과quantum Zeno effect‘를제안했다. 이번에는 관찰되는 대상이 화살이 아니라 한정된 시간 안에 정상적으로 붕괴하게 될 전이transition가 진행되고 있는 분자와 같은)양자 상태다.

존재한다는 것은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모든 것이다.
놀랍게도, 우주도 마찬가지다. 의식이 없다면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마치 꿈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 아무도 무언가가 존재했는지 알 수 없다. 우주에게 의식이 있다고 말하는 것조차 충분하지 않다. 앞으로 우리가 설득력 있게 주장하겠지만, 우주는 "의식 그자체"다. 이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현실의 메시지를 온전히 듣지 못한다.

이제 올바른 질문을 할 차례가 되었다. 생명의 시작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생명 없는‘ 화학적 반응에서 ‘생명 있는‘ 것으로의 전이다. 생명이란 창조 내내 보편적인 화학 행위의 부수적 활동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어떠한 답이든 나머지는 자신들의 즐거운 길을 계속 가는데 왜 몇몇 원자와 분자만이 이 부수적인 활동에 참여하는지도 설명해야만 한다.

슬프게도, 옥에 티가 있다. ‘준안정적‘이라는 말은 한발 떨어져서 바라보면 불안정한 영역들이 상쇄된다는 걸 의미한다. 죽어가는 사람의몸속 탄소는 새로 태어나는 아이의 몸속 탄소만큼이나 안정적이다.
한발 물러나서 보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어난 모든 일은 아무런의미가 없다. 이 말은 화학 수업에서는 괜찮겠지만, 실생활에서는 쓸모없다. 진공 상태는 은하가 태어나서 소멸해도, 아니면 인류가 나타나서 멸종해도 안정적이다. 이는 생명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단지 무대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만을 말할뿐이다. 린데는 훌륭한 무대를 준비했지만(아마도 지금까지 준비된 가장훌륭한 무대일 것이다), 무에서 어떻게 생명의 근원으로 이어졌는지는 보여주지 못한다.

우주의 마음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충분히 논리적인 접근이다. 돌고래나 코끼리 모두 매우 높은 수준에서 작동하는 커다란 뇌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의 마음을 통해서 현실을 볼 수는 없다. 돌고래에게는 돌고래의 현실이, 코끼리에게는 코끼리의 현실이 있다. 그들 각자 나름의 신경계에 맞춰 존재하는 게 거의 확실하다. 돌고래는 단어를 배울 수 있다고 알려져 왔는데, 이 때문에 인간은 돌고래에 친밀감을 느낀다. 또한 돌고래는 인간처럼 야만적인 행동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은 인간이아니고, 우리의 현실 너머의 현실에 산다.

우리가 ‘참여우주participatory universe‘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참여가 전부라고 말하는 건 그저 작은 발걸음에 불과하다. 우리의 마음은 우주의 마음과 융합되어 있다. 이 결론에 도달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린 유일한 이유는 오래된 두려운 것(완고한 물질주의) 때문이다. 물질주의자에게 뇌가 없다는 것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뇌를 사고 기계로 보는 한, 우주의 마음은 있을수 없다. 이 장애물보다 더 다루기 힘든 건 없을 것이다.
이 장애물을 제거하고 인간의 마음이 우주의 마음과 융합되게 하려면, 우리는 뇌가 어떻게 마음과 연관되는지의 미스터리를 다루어야만 한다. 달리 방법이 없다. 인간 두뇌를 1.6킬로그램 우주"라고 부른 첫 번째 사람은 잊히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뇌가 슈퍼컴퓨터처럼 작동하는 독특한 물체라면, 물질주의자들이 이겼다. 하지만 우리 뇌 안의 원자와 분자를 특별한 지위로 승격시켜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우주에 있는 모든 입자가 마음의 지배를 받아 만들어지고 조정된다면, 뇌 또한 마음이 하라는 대로 작동한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다.

마음은 생각한다. 컴퓨터는 숫자를 주무른다.
마음은 개념을 이해한다. 컴퓨터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마음은 걱정하고 의심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통찰력의 순간을 기다린다. 마음에는 감정이 있다. 컴퓨터는 입력된 숫자에 기반해서 대답을 뱉어낸다.
마음은 이유를 묻는다. 컴퓨터는 마음을 가진 누군가가 명령하지않으면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마음은 경험을 함으로써 세상을 헤쳐나간다. 컴퓨터는 어떤 경험도하지 않는다. 소프트웨어를 돌린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마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많을 것을 설명할 수 없는데, 특히 양자입자들이 마음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관찰자 효과를 설명할 수 없다. 의식이 양자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다른 어떤 과학적 사실만큼이나 똑같이 실용적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논쟁에서배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또한 마음과 물질은 뇌 속에서 계속상호작용하고 있다. 이를 피할 방법도 없다. 생각은 화학물질을 일으키고, 거꾸로 화학물질은 생각을 일으킨다. 누구도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구도 복잡성이 어떻게 생명의 속성을 설명하는지 보여주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카드 한 벌에 카드를 추가하는 것이 포커게임 방법을 갑자기 배우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원시적 박테리아에게 더 많은 분자를 던져준다고 최초의 세포가 어떻게 존재하게되었는지, 그리고 더군다나 이들 세포가 어떻게 복잡한 행위를 배웠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두 가지 치명적인 오류가 떠오른다(인간 존재는 의식적이지 않다는 비상식적인 주장은 제쳐놓는데, 이는 진지한 사고라기보다는 장난처럼 보인다). 첫 번째 결함은 창조력이다. 인간은 거의 무한한 발명, 예술, 통찰, 철학, 발견 행위를 할 수 있는데, 이는 세포의 고정된 기능으로축소될 수 없다. 두 번째로, 좀비 이론은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스스로 좀비가 되는 식이기에 자신들의 개념이 신뢰할 만하다는 걸보여줄 방법이 없다. 따라서 자기 모순이다. 이는 마치 낯선 사람이당신에게 와서는 "저는 당신에게 실체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줄 겁니다. 하지만 먼저 제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걸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뇌라는 물체가 마음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는 가정을 떨쳐내는 것보다 심장을 관통하는 말뚝으로 흡혈귀를 죽이기가 더 쉽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뇌와 마음에 관한 현재 이론들 속에 담긴 치명적인 오류들을 보아왔다. 그러나, 좋지 않은 생각을 해체하는 것과 더나은 것을 발견하는 것은 같지 않다. 우리는 비틀즈의 명곡 〈렛잇비Let It Be〉를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들으면더 나은 생각을 펼칠 수 있다. 당신의 뇌가 이 노래를 음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당신의 마음이 음미하는 것인가? 뇌가 음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경과학자들은 <렛잇비>가 소리 진동으로 귓구멍으로들어갈 때 어떤 특정 뇌 프로세스를 일으키는지 정확히 짚어낼 수있다.

어떤 뇌 기능도 엉망이 되지 않았다.
음악을 만드는 뇌 기능은 복잡하고 불가사의하게 연결되어 있다.
잡음 신호를 의미 있는 음악으로 변환하는 과정은 물리적으로 관찰될 수 없다.
뇌가 음악을 만들고 감상하도록 진화했는지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다. 따라서 음악에 전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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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커니 서서 분자 하나를 계속해서 지켜보면 실제 사건이 일어나는 모습을 관측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리고 그게 역설이다. 관찰자가 계속해서 또는 아주 짧은 간격으로 지켜보게 되면 관찰되는 상태는 절대 붕괴하지 않는다. 날아가는 화살을 작은 시간 단위로 잘라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안정한 양자 시스템을 관찰하는 것은 잘게 쪼개진 활동을 더 쪼개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비유를 위해 당신이 웨딩 사진사라고 상상해보자. 당신이 "웃어요"라말하면, 신부는 "카메라가 나를 향해 있으면 웃을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이제 당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카메라를 그녀에게 향하는 한 미소는 없다. 카메라를 치우면 미소 띤 신부의사진을 찍을 수 없다. 이것이 양자 제논 효과의 본질이다.

‘물질 먼저‘ 진영은 지속적인 관찰이라는 이 피할 수 없는 사실을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이들은 신부에게 "카메라가 당신을 향할 때 당신이 웃을 수 없다고 해도 전 상관 안 합니다. 제가 미소를 잡아낼 ㅁ까지 당신에게 카메라를 계속 들이댈 겁니다." 그는 영원히 기다릴 수있다. 양자 제논 효과에도 불구하고 ‘물질 먼저‘ 진영은 기다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양자 제 효과는 우리가 관찰을 고집하는 한 전이가 진행되는 특정 분자를 결코 볼 수 없을 것임을 말한다. 사실 더 많이 관찰할수록, 불안정한 시스템은 더 얼어붙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물질 먼저‘와 ‘마음 먼저‘는 둘 다 ‘현실 먼저‘에 항복해야만 한다. 관찰자는 현실 이외에는 서 있을 곳이 없다. 관찰자는바다를 탈출하려는 물고기와 같다. 물 밖으로 나가면 죽음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인간의 존재 방식은 우주에 참여하는 것이다.

방정식과 이론, 과학 데이터와 결과는 우리와 동떨어진 것이라 말할수도 있지만, 생명은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한다. 살아 있는 것의 가장특이한 점 하나는 이게 어떻게, 그리고 언제 생겨났는지를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다. 어떠한 생명체(감기 바이러스, 티라노사우루스, 나무고사리,
또는 갓난아기)는 다른 생명체에서 태어났다. 생명은 생명에서 나온다.
이것은 생명이 처음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려주지 않지만, 죽은 물질에서 살아 있는 물질로의 전이가 어떤 식으로 일어났음은 분명하다.
생화학에서는 이 중요한 전이 순간을 한쪽에서는 무기화학으로, 다른쪽에서는 유기화학으로 설명한다. 유기화학은 생물(유기체)에서만 나타나는 화학으로 정의한다. 소금은 무기물이다. 이는 탄소(생화학 반응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면에 DNA에 의해 다량으로 만들어지는 단백질과 효소는 유기물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생명은 물리학에서 가장 불편한 주제다. 생물학은 추상적인 방정식에 맞지 않는다. 생명을 경험한다는 것이 어떤느낌인지를 염두에 둔다면, 생물학조차 이를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명에는 목적, 의미, 방향, 그리고 목표가 있지만, 유기화학물질은 그렇지 않다. 단백질 사슬이 주변을 둘러보다 생명체와연관된 것들이 나왔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신빙성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건 마치 뉴잉글랜드 들판에 있는 돌들이 주위를 둘러보다 농부의 울타리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소금은 ‘죽었다‘ 하더라도, 생명은 소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몸 안의 모든 세포에는 필수 화학 성분인 소금이 들어 있다.)

현 상황에서 이런 추측은 과학계에서 상당한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표준적인 견해는 우주가 어떤 목적이나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생명의 시작에 관한 새로운 모델을 제공하기 전에, 먼저 기존의 사고를 해체해야만 한다. 의식하는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이미 살아 있다. 생명이 생명에서 나온다는 관찰은 우주적 진실임이 밝혀졌다.

미생물이든, 나비든, 코끼리든, 아니면 야자나무, 살아 있는 것이하는 일은 그 구성성분이 하는 일과 같지 않다. 화학물들을 아무리 섞어도 피아노가 음악 작품을 쓸 수는 없다. 인간 몸과 마찬가지로, 피아노의 재료인 나무는 주로 섬유소로 된 유기화학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섬유소에 대한 어떤 것도 비틀즈를 비롯한 다른 가수의 음악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처럼 인간 몸의 화학물질을 이리저리 뒤적거려서는사람이 행하는 어떠한 행동도 설명하지 못한다. 유전학은 불안정한토대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자는 거의 순간적으로 상호 작용한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몸에 존재하면서 파괴적인 과정과 건설적인 과정 모두에 작용하는 ‘자유라디칼free radical‘로 알려진 화학물질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자유라디칼은 양날의 칼이다. 노화와 염증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동시에 상처를 치료하는 데 필요하다. 하지만 자유 라디칼이 기본적으로하는 일은 상당히 단순하다. 다른 원자나 분자에서 전자를 훔치는 것이다. 방사선, 흡연, 그리고 다른 환경적 요소나 인체 자체의 자연적인 과정에 노출되기 때문에, 자유 라디칼 자신의 전자 개수는 불안정하다. 면역 시스템은 자유 라디칼을 만들어 침입한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중화하는 방법으로 이들에게서 전자들을 훔친다. 전자 훔치기와 연관된 가장 흔한 원자는 산소다. 산소의 전자 개수가 불안정할때, 산소는 훔칠 수 있는 가장 가까이 있는 전자에 달라붙는다. 따라서, 자유라디칼은 반응 속도가 빠르고 보통 수명이 짧다.

생명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 정반대의 어울림은 가설이 아니다. 세포 내부에서 몇몇 원자와 분자는 다른 원자와 분자와 결합하여 다양한 일을 하기 위해 자유로워야만 한다. 반면에 이런 일을 완료하려면안정된 물질이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원자가 어느쪽을 담당하는가? 정해진 주소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 건, 가장 중요한 유기화학물질 중 어떤 것, 주로 식물에 있는 엽록소와 붉은 피 동물의 헤모글로빈은 안정 대 불안정의 까다로운 균형을 놀라운 극단까지 유지한다는 것이다.

생명은 생명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납득시키는 것은 간단한 일이아니다. 최초 시작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작게 더 작게 가하는 충동에서 과학자들은 벗어날 수 없다. 가장 오래된 생물은 현미경으로 보아야 할 정도로 작은데, 세포보다 훨씬 작으며, 몇 억 년이지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최근에 이루어진 발견은 지구가 형성되고 고작 10억 년이 지난 35억 년 전부터 이미 복잡한 미생물이 강성했음을 보여준다. 몇몇 미생물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매우 오래된 암석에는 검출 가능한 박테리아 화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게 발견되고 연대를 추정할 때마다, 누군가 이의를 제기한다. 화석(즉생명의 흔적을 보고 있는지 결정체(즉 무생물)의 흔적을 보고 있는지를 구별하기란 극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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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를 옮겨 일상생활에서 양자 효과를 감지하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양자가 매우 작아서 그럴까? 바이러스도 작지만, 질병을 일으켜 항상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감기 또는 독감 바이러스는 우리 몸에왔다가 가지만, 양자는 매 순간 영향을 미친다. 손을 들고 바라보라.
본다는 행위는 눈의 망막을 때리는 양자인 광자와 함께 시작하기 때문에, 이 간단한 몸짓에서도 우리는 양자 활동을 했다. 정원과 나무들을 보라. 햇빛의 광자가 이들을 성장시킨다. 미시적인 것이 자에게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광자의 행동을 감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내재된 메커니즘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이다.

소박한 실재론의 큰 문제점은 인간의 뇌가 현실의 모습을 전달한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단지 하나의 지각perception일 뿐인 3차원 이미지만을 전달한다. 우리가 방금 다룬 이중 슬릿 실험을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어려움은, 광자가 날아갈 때는 볼 수 없고이들이 사라질 때만 검출된다는 사실에서 생긴다. 애초에 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신경 시스템을 지날 때를 제외하고는 보이게 만들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일단 신경 시스템을 지나게 되면, 빛은 더 이상 자신의 자연스러운 자기가 아니라 신경이 창조한 것이 된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보면서 정반대로 반응한다면, 이들이 자신의 반응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이 이들을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양자상태 속으로 들어간다고 모든 단단한 물체가 환영이 되고, 모든 친구가 가상의 인물이 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당신이 다른 관점으로 발을 들여놓았다는 걸 의미하며, 자신의 삶을다차원적인 일련의 양자 사건들로 인식하게 됐음을 뜻한다.

당신은 우리가 현실에 대한 가정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하는 유일한 동시대 물리학자입니다. 사람들이 정직하면 좋을 텐데…. 대부분은 자신들이 현실을 가지고 만지작거리는 게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 고양이의 있음과 없음이 관찰위와 무관하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진짜로 아무도 없습니다.

단순히 관찰하는 것만으로가 아니라 나타나는 현실 속에 참여하여,
우리 자신을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곳에 투영한다. 우리는 허영심 때문에 우리 인간의 특성들을 우주에 주입하면서 자기중심적이 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주에 원래 마음이 내포되어 있어 그런 게 아닐까? 이것이 다음 장에서 풀어야 할 미스터리의 핵심에 놓여 있는 뜨거운 쟁점이다.

자연스럽게, 모든 과학자는 ‘나‘가 있고 개인의 삶이 있다. 하지만물리학과 현대 과학에 의해 발전된 현실에 대한 모델에서는 일반적으로 우주는 제3자 경험이다. 존 아치볼드 휠러가 한 유명한 말처럼, 유리를 깨뜨려야 할 때 두꺼운 유리를 통해 우주를 바라보고만 있는 것과 같다.

인간 DNA의 이중나선이 수십억 개의 염기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처럼 당혹스러울 정도의 복잡성 뒤에 숨어 무지를 감추는 것도충분히 가능하다. 어떤 물체가 의식이 있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말하는 것은 아주 까다롭다. 전체 우주가 의식이 있다는 말은 의식이 없다는 말만큼 그럴듯하다. 이 논쟁은 물질적 토대에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없다.

"어려운 문제"는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가 공식적으로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마음 - 몸 문제mind-body problem’의 형태로 수 세기 동안 존재했다. 테그마크는 과학의 영원한 동반자인 수학에 의존하여 해결책을 찾았다. 그는 물리학자들에게 인간 존재는자신의 원자와 분자가 복잡한 방식으로 재배열된 음식 같은 존재라고말했다. "당신이 먹은 것이 당신이다"라는 말은 그대로 진실이다.

정보는 "입자들이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해답이 아니라 문제다. 정보를 더하면 더할수록 온전한 인간의 마음이만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카드 묶음에 카드 묶음을 더하기만 해도갑자기 포커 게임이 진행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잭, 퀸, 에이스 모두정보를 전달하지만, 그건 정보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아는 것과는 다르다. 여기에는 마음이 필요하다.

나는 셔터가 열려 있는, 상당히 수동적이며, 기록은 하지만 생각은하지 않는 카메라다. 창문 반대편에서 면도하는 남자와 머리를 다듬는 기모노 입은 여자를 기록한다.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은 현상되고, 조심스럽게 인화되고, 색상이 입혀질 것이다.

"뇌=마음"은 투 스트라이크를 먹어서 막다른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얄궂게도 마음에는 뇌가 필요하다. 우리가 아는 한 뇌 없이는 마음도 존재할 수 없다. 앞에서 다룬, 라디오를 통해서만 음악에 접근할수 있는 상상의 세계와 같이, 우리의 세상도 뇌를 통하는 방식을 제외하고는 마음에 접근할 수 없다. 정신과 의사 데이비드 비스콧DavidViscott은 회고록에서 수련의 시절 한 병원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환자가 막 숨을 거두는 병실에 들어갔는데, 그 순간 환자의 몸을 떠나는 한 줄기 빛을 본 것이다. 흡사 영혼이나 정신이 떠나는 것 같았다.
그는 이 일로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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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질서를 찾아내고 어디에서 이 패턴들이 왔는지 파악하는 것으로 우주에 참여한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깊은 진리를 건드렸다. "저는 신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세부 사항일 뿐이에요." ‘신의 마음‘을 ‘우주의 목적‘으로 바꾸면 평생추구해볼 가치가 있는 목표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런시간은 두 얼굴, 즉 하나는 직접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하나는 과학 방정식에 의해 기술되는 객관적인 세계와 관련이 있다. 이문제는 얽혀 있다. 치과 의자에 앉아 있거나 막힌 도로 위에 있어서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은영향을 받지 않는다. 당신은 이 문제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이 실제이고, 개인적인 시간은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아니면 시간의 개인적인 측면을 배제하는 건 이론으로만 가능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경험의 세계에서는 모든 시간이 개인적이다. 이 시점에서 급진적으로 그리고 기이하게조차 들리지만,
우리는 두 번째 입장을 취한다.

사실, 아인슈타인식 민주주의는 참여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안겨주는 더 보편적인 민주주의다. 상수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빛의 속도는 하나의 물체가 얼마나 빨리 시공간을 통해 움직일 수 있는가에 동일한 한계를 부여할 것이다. 하지만 상수들은 우리를 막고 있는 감옥의 벽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과 같다. 규칙을 따라야만 체스 미식축구든 마작이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과학은 지나치게 그 규칙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전자기파는 진공 속에서 빛의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주 속 어디에서도 속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빛의속도를 어떤 절댓값으로 고정하면 주관적 시간이라는 신뢰할 수 없는 요소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계산을 해낸다는 쪽에서는 바람직한 성취였다.

시간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미스터리에 대한 최선의 답은 인간적인 답human answer임이 밝혀졌다. 빅뱅이 심리적 요소를 갖기 위해서 빅뱅의 순간에 우리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마음과 뇌를 사용하여 인간이 말한 빅뱅 이야기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은 기제가 바로 이 순간에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의 미스터리는 우리의 눈앞에 존재한다. 인간적인 해답 없이는 이것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현실(실재)은 명백히 물리학 이상의 것이다. 양자적인 ‘것들‘을 하나의 물리적 상자 안에다 욱여넣는 짓은 현실과 거리가 먼 짓이다. 그래도 물질적 현실감에 대한 믿음은 대부분 과학자의 DNA에 일부 남아있다. 표준모델의 성공을 들먹이는 과학자들은 남아 있는 간극이 곧채워질 것이라고 약속한다. "우리는 거의 다 왔어요"라는 낙관론을부채질한다. 그러나, ‘물질‘이 진부한 개념임을 받아들인다고 전제하면, 우주에 대한 비물질적 설명은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거의 다 왔다‘와 ‘우리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사이에서 선택이 주어진다면, 대부분의 과학자는 의심 없이 전자를 고른다.

자연스럽게 물질주의자 진영은 이 주장에 상당히 강하게 저항한다.
한 세기 동안 이 거대한 다툼은 관찰자 문제라고 알려져 왔다. 무언가를 측정하기 전에, 과학은 먼저 관찰을 해야만 한다. 고전 세계에서는우리 앞에 놓인 것이 올챙이, 토성의 고리, 또는 프리즘을 지나 굴절하는 빛, 혹은 그 무엇이든 그것을 관찰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실험자는 방을 떠날 수 있었고,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해도 문제가 되지않았다. 관찰은 똑같았다.

전적으로 무작위성에 의존하여 우주를 설명하는 과학은 아직 한참부족하다. 지능과 설계는 우주를 매우 신비스럽게 만드는 같은 실뭉치에 얽혀 있기 때문에, 과학의 이성적 활동 내부에는 여전히 논쟁할 것이 많다. 우리는 특정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꼬인 매듭을 풀려고 노력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몇 가지 감춰진 주제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결코 풀리지 않았지만,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인간 육체에 실마리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윌첵은 이런 종류의 사고에 무척 공감한다. "그의 그림은 기하학과 ‘이상적인‘ 인간의 비율 간에 근본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제시한다." 이 아이디어는 우주가 인간의 몸안에 반영되어 있고, 역으로 인간의 몸이 우주에 반영되어 있다는 훨씬 더 오래된 고대의 신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슬프게도 우리 인간이나 우리 육체는 과학적 연구로부터 그려진 세상의 그림 속에서는돋보이지 않는 것 같다."

무작위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차갑고 텅 빈 진공 속에서 인간 존제가 부차적인 먼지 입자들처럼 하찮게 취급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견해를 주장하는 물리학자들의 수가 얼마이든지 간에, 인간은 창조의 바로 그 직물 속에 엮여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빅뱅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우주‘의 공동 창조자인지 아닌지는 인간이 엮인 이 직물이 어디까지 가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 사실에 부합되는 다른 대안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에 부합하는 게 과학의 전부다.

우주의 모든 이론이 하이젠베르크 컷을 따르지는 않지만(예를 들어,
다중우주는 그렇지 않다), 의심의 여지 없이 양자는 우리 감각의 경계 너머에 있다. 우리는 양자를 시각화할 수 없는데,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를 마주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에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경계 너머에는 모든 것everything과 아무 것도아닌 것nothing이 함께 놓여 있다. 가상 양자 영역은 지금까지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건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것이다. 또한 물질, 에너지, 시간, 공간,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어떻게 창조가 이뤄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의이원성을 조화시키는 건 상당히 신비로워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중슬릿 실험은 더욱 복잡해지고 흥미로워졌다.
양자물리학은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생명선이 측정과 관찰이다. 그어떤 과거의 과학보다도, 폰 노이만이 양자 실체 자체가 심리적 요소를 지녀야만 한다고 믿을 정도니, 관찰자가 측정에 미치는 영향이 방정식 안에 포함된다. 관찰자가 이중슬릿 실험의 결과를 바꾸고 있는건가? 상보성의 두 측면인 파동과 입자는 동시에 관찰될 수 없다.

물휠러의 결론이 맞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물리학자들이 애당초입자들이 파동과 입자 이중성을 갖는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말했다. "사실 양자현상은 입자도 파동도 아니다. 관측을 하기 전까지는 물질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2세기 전 영국의 철학자 버클리 주교가 ‘존재하는 건 (인간에게 인식된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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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질서를 찾아내고 어디에서 이 패턴들이 왔는지 파악하는 것으로 우주에 참여한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깊은 진리를 건드렸다. "저는 신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세부 사항일 뿐이에요." ‘신의 마음‘을 ‘우주의 목적‘으로 바꾸면 평생추구해볼 가치가 있는 목표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런시간은 두 얼굴, 즉 하나는 직접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하나는 과학 방정식에 의해 기술되는 객관적인 세계와 관련이 있다. 이문제는 얽혀 있다. 치과 의자에 앉아 있거나 막힌 도로 위에 있어서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은영향을 받지 않는다. 당신은 이 문제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이 실제이고, 개인적인 시간은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아니면 시간의 개인적인 측면을 배제하는 건 이론으로만 가능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경험의 세계에서는 모든 시간이 개인적이다. 이 시점에서 급진적으로 그리고 기이하게조차 들리지만,
우리는 두 번째 입장을 취한다.

사실, 아인슈타인식 민주주의는 참여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안겨주는 더 보편적인 민주주의다. 상수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빛의 속도는 하나의 물체가 얼마나 빨리 시공간을 통해 움직일 수 있는가에 동일한 한계를 부여할 것이다. 하지만 상수들은 우리를 막고 있는 감옥의 벽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과 같다. 규칙을 따라야만 체스 미식축구든 마작이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과학은 지나치게 그 규칙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전자기파는 진공 속에서 빛의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주 속 어디에서도 속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빛의속도를 어떤 절댓값으로 고정하면 주관적 시간이라는 신뢰할 수 없는 요소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계산을 해낸다는 쪽에서는 바람직한 성취였다.

시간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미스터리에 대한 최선의 답은 인간적인 답human answer임이 밝혀졌다. 빅뱅이 심리적 요소를 갖기 위해서 빅뱅의 순간에 우리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마음과 뇌를 사용하여 인간이 말한 빅뱅 이야기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은 기제가 바로 이 순간에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의 미스터리는 우리의 눈앞에 존재한다. 인간적인 해답 없이는 이것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현실(실재)은 명백히 물리학 이상의 것이다. 양자적인 ‘것들‘을 하나의 물리적 상자 안에다 욱여넣는 짓은 현실과 거리가 먼 짓이다. 그래도 물질적 현실감에 대한 믿음은 대부분 과학자의 DNA에 일부 남아있다. 표준모델의 성공을 들먹이는 과학자들은 남아 있는 간극이 곧채워질 것이라고 약속한다. "우리는 거의 다 왔어요"라는 낙관론을부채질한다. 그러나, ‘물질‘이 진부한 개념임을 받아들인다고 전제하면, 우주에 대한 비물질적 설명은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거의 다 왔다‘와 ‘우리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사이에서 선택이 주어진다면, 대부분의 과학자는 의심 없이 전자를 고른다.

자연스럽게 물질주의자 진영은 이 주장에 상당히 강하게 저항한다.
한 세기 동안 이 거대한 다툼은 관찰자 문제라고 알려져 왔다. 무언가를 측정하기 전에, 과학은 먼저 관찰을 해야만 한다. 고전 세계에서는우리 앞에 놓인 것이 올챙이, 토성의 고리, 또는 프리즘을 지나 굴절하는 빛, 혹은 그 무엇이든 그것을 관찰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실험자는 방을 떠날 수 있었고,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해도 문제가 되지않았다. 관찰은 똑같았다.

전적으로 무작위성에 의존하여 우주를 설명하는 과학은 아직 한참부족하다. 지능과 설계는 우주를 매우 신비스럽게 만드는 같은 실뭉치에 얽혀 있기 때문에, 과학의 이성적 활동 내부에는 여전히 논쟁할 것이 많다. 우리는 특정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꼬인 매듭을 풀려고 노력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몇 가지 감춰진 주제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결코 풀리지 않았지만,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인간 육체에 실마리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윌첵은 이런 종류의 사고에 무척 공감한다. "그의 그림은 기하학과 ‘이상적인‘ 인간의 비율 간에 근본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제시한다." 이 아이디어는 우주가 인간의 몸안에 반영되어 있고, 역으로 인간의 몸이 우주에 반영되어 있다는 훨씬 더 오래된 고대의 신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슬프게도 우리 인간이나 우리 육체는 과학적 연구로부터 그려진 세상의 그림 속에서는돋보이지 않는 것 같다."

무작위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차갑고 텅 빈 진공 속에서 인간 존제가 부차적인 먼지 입자들처럼 하찮게 취급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견해를 주장하는 물리학자들의 수가 얼마이든지 간에, 인간은 창조의 바로 그 직물 속에 엮여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빅뱅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우주‘의 공동 창조자인지 아닌지는 인간이 엮인 이 직물이 어디까지 가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 사실에 부합되는 다른 대안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에 부합하는 게 과학의 전부다.

우주의 모든 이론이 하이젠베르크 컷을 따르지는 않지만(예를 들어,
다중우주는 그렇지 않다), 의심의 여지 없이 양자는 우리 감각의 경계 너머에 있다. 우리는 양자를 시각화할 수 없는데,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를 마주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에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경계 너머에는 모든 것everything과 아무 것도아닌 것nothing이 함께 놓여 있다. 가상 양자 영역은 지금까지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건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것이다. 또한 물질, 에너지, 시간, 공간,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어떻게 창조가 이뤄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의이원성을 조화시키는 건 상당히 신비로워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중슬릿 실험은 더욱 복잡해지고 흥미로워졌다.
양자물리학은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생명선이 측정과 관찰이다. 그어떤 과거의 과학보다도, 폰 노이만이 양자 실체 자체가 심리적 요소를 지녀야만 한다고 믿을 정도니, 관찰자가 측정에 미치는 영향이 방정식 안에 포함된다. 관찰자가 이중슬릿 실험의 결과를 바꾸고 있는건가? 상보성의 두 측면인 파동과 입자는 동시에 관찰될 수 없다.

물휠러의 결론이 맞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물리학자들이 애당초입자들이 파동과 입자 이중성을 갖는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말했다. "사실 양자현상은 입자도 파동도 아니다. 관측을 하기 전까지는 물질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2세기 전 영국의 철학자 버클리 주교가 ‘존재하는 건 (인간에게 인식된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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