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는 자연주의를 거부하면서 우울한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이 스타일은 극도로 개인적이고, 고통받는 ‘나‘의 확장이며, 그 중심에는 예술가와 사회의 대립이 있다. 토마스 만은 자아의 딜레마라는 이런 낭만주의적 개념을 심오하게 표현한 마지막인물이다. 지버베르크 같은 낭만주의 이후 예술가는 비개인적인멜랑콜리 스타일로 작업한다. 이제는 기억과 과거의 관계가 중심에 놓인다. 기억의 가능성, 지속의 가능성과 망각의 유혹이 충돌한다. 베케트는 이 대립 관계를 탈역사적인 형태로 제시했다. 또 다•른 형태인 역사에 천착하는 버전은 지버베르크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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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영화는 각각 독립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이들을3부작으로 간주한다면, (첫 번째 영화인) <루트비히>가 (두 번째 영화인) <카를 마이>보다 (세 번째 영화인) <히틀러, 독일영화>에 더 많은이미지를 공급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 세트와 배우를 사용해 찍은 <카를 마이>의 일부 장면은 <루트비히> 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야심 차고 심오한 히틀러 영화의 어떤 장면보다선형적이고 재현적인 극 형식에 가깝다. 그러나 파스티셰를 좋아하는 예술가가 으레 그러듯이 지버베르크는 리얼리즘이라고 하는것에 별 느낌이 없다. 파스티셰 작가의 스타일은 기본적으로 환상의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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푀이야드 영화의 조직 원리가 연속적 반복성과 강박적 상세성이라면, 고다르 영화의 조직 원리는 길이나 명시성을 예상할수 없는 상반된 요소의 병치다. 이야드의 작품이 암묵적으로 예술을 환상의 충족과 연장으로 바라본다면 고다르의 작품은 예술의 전혀 다른 기능을 암시한다. 감각과 개념의 혼란이 그것이다.
고다르의 영화는 하나하나 다 스스로 와해하는 총체성,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탈총체화하는 총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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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난해함에 관한 논란이 있어야만 난해한 영화가 되는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난해하지 않다면 평론가들 사이에서 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불일치와 빤한 오독이 일어나겠는가?
<마리앙바드>와 마찬가지로 <페르소나>는 도전적으로 모호하다.
전체적 외양은 레네의 영화와 크게 다르다. <마리앙바드>의 배경은성이라는 추상적인 매혹이 내재하는 공간이지만, <페르소나>의공간과 실내는 반낭만적이고 차갑고 평범하고 임상적이고(실제로 병원이기도 하다) 부르주아-모던의 느낌이다. 그러나 이런 배경에도 미스터리가 깃들어 있다. 행동과 대사가 주어지지만 관객은이 장면이 과거·현재·미래 중 언제 일어나는 일인지, 이미지나 에피소드가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할 수 없어 혼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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콕토 영화에서 주인공(장 마레Jean Marais가 주로 연기한다)의 정신적 스타일은 자기애로 기우는 경우가 많지만 브레송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정신적 스타일이 자의식 없음을 여러 형태로 보여준다(그래서 브레송의 영화에서는 과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제가자아에 소모될 에너지를 흡수하고 개별 인간의 독특한 면, 우리를 가두는 한계가 되는 개성을 지운다). 자아에 대한 인식은 정신을 짓누르는
‘중력‘이다. 자의식을 넘어서는 것이 ‘은총‘ 또는 정신적 가벼움이다. 콕토 영화의 절정은 주로 관능적인 움직임으로 이루어진다.
사랑(<오르페우스>), 죽음(<쌍두 독수리>, <비련>>, 비상(<미녀와 야수>등. <불로뉴 숲의 여인들>(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녜스가 바닥에 하얀 새처럼 누워 있고 장이 그 위로 몸을 숙이고 있는 화려한 부감 숏이다)을 제외하면 브레송 영화의 결말은 전혀 관능적이지 않고 억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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