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그의 영상을 지켜보다가 깨달았다. 내가 기다리는 건 그의완주가 아니었다. 그가 완주를 포기하고 멈추는 순간. 그 장면을 마주하기 위해 나는 매일 그의 영상을 지켜봤다. 오늘은 어디까지 나아갈까. 어디쯤에서 멈출까. 그는 마치 피아노와 싸우는 사람처럼보였다. 피아노는 더 나아가려 했고 그는 다음 건반을 누르지 않기위해 완강하게 버티는 것 같았다. 그가 연주를 멈출 때면 기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지지 않았다는, 밀리지 않았다는, 다음을 확보했다는 느낌. 그럴 때면 그랜드피아노는 거대한 고래처럼, 그는 외로운뱃사람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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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의 붕괴로 잠시 드러난 과거의 기록은 그 보존 기간이 짧았다.
탐사 전문 AI는 빙하 인근 지역을 상시 관찰했고 화석, 벽화, 암각화, 지층을 발견하는 즉시 보존과 해석 작업을 시작했다. 사람의 몸으로는 닿기 어려웠던 극지방과 기암절벽, 깊은 계곡과 크레바스에●서 시간의 흔적이 발견될수록 지구의 과거는 촘촘해졌고 인류의 역사는 수정되고 풍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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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미술 교사는 은주에게 미술반의 누드 데생을 위한 모델이 되어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이전까지 우리는 아직 한 번도누드 데생을 해본 일이 없었다. 은주는 비록 학교 친구들이라고는해도 다수 앞에서 공개적으로 알몸이 되는 일은 겁난다고 대답했다.
자신은 그런 건 상상해본 적도 없다고, 그러자 미술 교사는 우선 수업이 아니라 미술 교사 자신만을 위한 모델이 되어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일종의 연습 삼아서. 소문은 거기서 끝났고 우리는 은주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거절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은주가 직접 말한 게 아니라 은주와 친한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소문이었기 때문이다. 은주와 수학 교사가 사라진 후 미술실 문은닫혔고, 우리는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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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 짙은 안개와 미세먼지로 종일 시야가 답답했던 것과달리 오늘은 공기는 차갑지만 하늘이 깨끗했다. 그 하늘 아래, 교직원회관에서 도서관 건물 앞 광장으로 가는 길에는 무궁화나무들 사이 유일하게 한 그루의 목련나무가 있었다. 지난 학기에 출강하면서 그는 매주 목련나무 사진을 찍었다. 까맣게 달린 닭의볏 같은 열매에서 가을이면 씨가 맺히는 게 신기했고, 일주일에한 번 오는 학교에서 시간의 변화를 나무만큼 잘 보여주는 게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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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는 숨을 골랐다. 종소는 어디서 혼자 자신의 일부를 다시만들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기차 시간이 가까운데도, 옆에 어머니가 없는데도 더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잘 듣고 싶었다.
종소는 무학로교회에 갔다가 문화로를 따라 걷다 현선배가 재직한 대학까지 가게 됐는데 교정에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만큼 빽빽한 소나무 숲과 비어 있는 벤치 두 개를 보았다고 했다. 거기에 앉아 있었다고. 가끔 솔방울이 툭 떨어지는 소리, 까치 까마귀 참새소리를 듣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어머니에게도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거고,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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