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우의 소설처럼 김채원 역시 ‘나‘(대체로 여성)를 서사적 존재로 설명하고 정립하는 데 있어 엄마와의 연속과 분리가 문제가 됨을 보여준다. 그러나 상실의 사건 이후, 엄마와 엉켜 있는 ‘나‘의 상태를 바라보고 언어화하는 그의 방식은 박선우와 매우 다르다. 후자가 서사를 인식 가능성의 조건으로 탐색하는 산문의 방식이라면 전자는 서사를 부수적인 것으로 무력화하는 시적 혹은 유희적인 공간을 구축하며 우리에게 그곳에 ‘없지만 있는 것처럼‘ 남아 있는 엄마이야기의 가능성을 전한다. 이토록 다른 ‘나‘들을 ‘이해 불가한 삶에서 ‘있어 마땅한 삶으로 옮기는 한 가지 언어로서, 일종의 규칙(혹은반칙)으로서 어머니가 있는 거라면, 어머니라는 타자는 더 이야기되어도 괜찮은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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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을 노려보고 있다고 표현한 사람도 있고 강물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한 사람도 있지만, 그의 시선이 강물보다 먼 곳을 향하고 있다고 느낀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그사람을 풍경의 한 부분으로 보았으므로, 즉 몸에 밴 타성과 무신경으로 인해 그 흐릿한 사람을 하나의 인격으로 인식하는 데 주저했으므로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혼란에 대해서는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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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조건으로 고착된. 어쩌면 이미 조건 지어진.
이미 조건 지어진 자리를 받아들이는 불러들이는. 어느 결에굳건해진 너의 두 손에 대해. 지붕 없는 들판을 자신의 집으로 삼는.
스스로를 마주 보는 자리를 오래오래 들여다보는. 자기 자신을 껴안을 수밖에 없는 두 개의 손을 가진 하나의 마음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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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이 노래에 얼마나 질색했는지 모른다. 나는 북부 억양을 쓰지 않았다. 아버지는 런던 출신이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프티 부르주아인 어머니에게는 내가 조디 사투리를 쓰지 않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다. 친구들은 약간 위협적인 어조로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넌 왜 더럼 머스마처럼 말하지 않나. 어디 출신이고?" 때로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또는 얻어맞지 않기 위해서 사투리를 흉내 내야 할 필요도 있었다. 그렇다고는해도 ‘내 고향 뉴캐슬 Coming Home Newcastle‘이란 노래 속 남자처럼 어리석게 "나는 조디라 자랑스러워/조디 땅에 살아서 행복해"라고는 결코 말할 수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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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문학 비평에 비유하는 것은 불완전할 수도 있다. 문학 비평가에게는 음악가가 연주하는 것처럼 자신이 선택한 인용구를 변형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렌델의 장황한 중얼거림을 텍스트의 외면에만 머무르는 문학 비평의 한 형태, 즉 텍스트를 통과하는-글쓰기가 아니라 텍스트에-대한-글쓰기, 창조의 핵심에서 추방된 평면적인 논평을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해보자.
그리고 브렌델의 피아노 연주, 즉 창조 없이는 인용하지 못하는 그의 무능력을 텍스트를 통과하는 글쓰기, 비평인 동시에 재서술인 비평을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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