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인가 그녀가 나를 불러낸 적이 있다. 그녀는 2단짜리 캐리어를 끌고 비행기에서 내린 모습 그대로 내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퇴근하는 길인 모양이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캐리어의 손잡이를잡고, 그녀는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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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엽서를 찢어 편의점 쓰레기통에 버리고 천천히 전철역 쪽으로 걸었다. 자신은 비밀과 관련된 모든 것을 유일하게 다 알고 있지만 어쩐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아는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어째서 그런 아이에게 충동을 느꼈는지,
아이는 어쩌자고 그를 끝내 기억하지 못하는지, 아이가 가진 유일한증거가 하필이면 실증할 수 없는 감각인지, 아이는 왜 직감을 끝까지 몰아붙이지 않는지, 침착하고 단호한 거짓말의 내면이 무엇인지,
거짓말의 결과로 그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비밀을 유지하면서 끝내 지키고 싶었던 게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래서 그것들을 제대로지켜냈는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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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k는 심호흡을 하고 서둘러 자리를 뜬다. 바로 옆 공터의 향나무 울타리 틈새로 몸을 밀어넣는다. 공터를 이리저리 오가며 자리를가늠한다. 경찰관의 집 현관문이 잘 보이는 자리와, 경찰관의 집에서 내려다보이지 않는 자리를 찾아낸다. 현관문이 잘 보이는 자리에서서 시각을 확인한 뒤 넓적한 돌을 줍기 위해 돌아다닌다. 적당한돌을 찾아 경찰관의 집에서 잘 내려다보이지 않는 자리에다 내려놓고, 그 위에 쪼그리고 앉는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든다. 갑자기 쳇,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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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숨을 거두기 전 모습이 떠오른다. 감정을 가진 로봇처럼 기계음을 내며 계속 몸을 떨던 얼굴이. 그가 계속해서 ‘우어어, 흐어어‘
라고 웅얼댈 때 그것은 빙하가 무너지는 풍경과 비슷했다. 수백만년 이상 한자리에 태연하고 엄연하게 존재하다 우르르- 한순간에무너져내리는 얼음의 표정과 흡사했다. 그것은 무척 고요하고 장엄하며 안타까웠지만 심지어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까지 했다. 뭐랄까.
세상에 아무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는 멸망, 어색한 침몰을 목격하는기분이었다. 그는 끝내 온전한 문장 하나를 완성시키지 못하고 숨을거뒀다. 그가 눈을 감자 세상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고요에 휩싸였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동시에 내 속에 이상한 그리움,
뜻밖의 욕구가 일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태어난 장소에 가보고 싶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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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논리에 사로잡히기는 「폴이라 불리는 명준」에서 아들진욱이 죽은 원인이 앤디 워홀에게 있다고 믿는 명준의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명학수는 실체적인 진실 없이 상상적으로 구조화된 세계에서는 정체성 역시 체계의 산물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데 더 공을 들이는 듯하다. 소설은 오리지널리티를 흔드는작품들을 내어놓은 앤디 워홀을 등장시킴으로써 지금의 우리에게고정된 정체성은 없으며 단지 어느 체계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그것이달라질 뿐임을 강조한다. 미국 이민 2세대인 이명준이 ‘Paul Lee‘
가 되어 더 이상 명준으로 불리지 않고, 이후 앤디 워홀을 연기하는배우로서 (연극이 끝난 후에도) 앤디 워홀의 가명인 ‘밥 로버트‘나
‘앤디‘라고 불릴 때, 무엇이 진짜 그의 이름이며 그의 본질이라 할 수있을까. 이러한 문제를 소설에서 다룸으로써 명학수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가 그저 어떤 체계로 구성된 산물에 불과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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