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언어에 한계란 없으며, 이러한 성질이 언어의 강력한 힘이 된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가진 결핍을 숨기고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의 능력에도 한계란 없다. 언어는 일반적으로 다른 예술처럼 시적이거나 은유적일수 있고, 또는 과학이나 일상적인 실용주의 분야처럼 고도로 기능적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언어는 우리와 우리의결핍 사이에 일종의 장막을 쳐 주어 우리가 지나친 공허함을겪지 않게 해 준다. 또한 우리가 불안을 직접적으로 느끼지않게 하고, 불안의 정도를 낮추어 불안이 우리를 잡아먹는것을 막는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의 도구라 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애초에 내면의 결핍이란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결핍이 존재하는 한 언어는 결핍을완화하는 가장 좋은 해독제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이곳에 무엇을 배우러 왔을까? 사랑이었을까? 우리의문제는 단 한 가지일 것이다. ‘나‘의 범위를 ‘나‘
한정 짓는에게로것. 그래서 ‘나‘ 이외에는 모두 타인이며 타자라고 믿는 것. 반면에 공감과 연민은 우리를 더 큰 ‘나‘로 만든다.
어느 명상 센터에서는 이렇게 기도한다.
‘내가 가능한 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갖기를. 만약 내가 이순간에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친절하기를. 만약내가 친절할 수 없다면 판단하지 않기를. 만약 내가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면 해를 끼치지 않기를. 그리고 만약 내가 해를 끼치지않을 수 없다면 가능한 한 최소한의 해를 끼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본래의 나는 맑고 고요한 존재이다. 우리는 어떤 감정보다 더큰 존재이기 때문이다. 새가 날개의 크기에 상관없이 멀리 창공을 나는 것처럼 다정하게 맞이하지 않으면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은 어둠 속에 갇혀 괴물이 된다. 여인숙의 깨비와 망자와 토리가불을 끄면 공포의 괴물로 변하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에게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면 허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역동성에 눈뜨게 된다. 그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열심히 놀이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다른 놀이로 옮겨 간다.
‘나‘의 품사는 흐르는 강처럼 순간순간 변화하는 동사이다. 나는 ‘나의 지난 이야기 My Story‘가 아니라 이 순간의 ‘있음‘Am‘이다.
만약 내가 ‘시인‘이라는 호칭을 존재의 고정된 틀로 지니고 다닌다면 그것은 죽은 명사가 된다. 죽음만이 유일하게 동사가 될 수없는 고정 명사이다. 내가 시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만날 때 오히려 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오직 모름과 모름일 때존재와 존재로 마주하는 일이 가능하다. 순수한 있음과 순수한 있음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상처에는 목적이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우리를 치료하는지도 모른다. 상처는우리가 자신의 어떤 부분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정확히 알려준다.
돌아보면 내가 상처라고 여긴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과 다르지 않았다. 삶의 그물망 안에서 그 고통의 구간은 축복의 구간과 이어져 있었다. ‘축복blessing‘은 프랑스어 ‘상처 입다blesser‘와어원이 같다. 축복을때상처를 빼고 세지말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