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숨을 거두기 전 모습이 떠오른다. 감정을 가진 로봇처럼 기계음을 내며 계속 몸을 떨던 얼굴이. 그가 계속해서 ‘우어어, 흐어어‘
라고 웅얼댈 때 그것은 빙하가 무너지는 풍경과 비슷했다. 수백만년 이상 한자리에 태연하고 엄연하게 존재하다 우르르- 한순간에무너져내리는 얼음의 표정과 흡사했다. 그것은 무척 고요하고 장엄하며 안타까웠지만 심지어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까지 했다. 뭐랄까.
세상에 아무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는 멸망, 어색한 침몰을 목격하는기분이었다. 그는 끝내 온전한 문장 하나를 완성시키지 못하고 숨을거뒀다. 그가 눈을 감자 세상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고요에 휩싸였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동시에 내 속에 이상한 그리움,
뜻밖의 욕구가 일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태어난 장소에 가보고 싶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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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논리에 사로잡히기는 「폴이라 불리는 명준」에서 아들진욱이 죽은 원인이 앤디 워홀에게 있다고 믿는 명준의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명학수는 실체적인 진실 없이 상상적으로 구조화된 세계에서는 정체성 역시 체계의 산물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데 더 공을 들이는 듯하다. 소설은 오리지널리티를 흔드는작품들을 내어놓은 앤디 워홀을 등장시킴으로써 지금의 우리에게고정된 정체성은 없으며 단지 어느 체계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그것이달라질 뿐임을 강조한다. 미국 이민 2세대인 이명준이 ‘Paul Lee‘
가 되어 더 이상 명준으로 불리지 않고, 이후 앤디 워홀을 연기하는배우로서 (연극이 끝난 후에도) 앤디 워홀의 가명인 ‘밥 로버트‘나
‘앤디‘라고 불릴 때, 무엇이 진짜 그의 이름이며 그의 본질이라 할 수있을까. 이러한 문제를 소설에서 다룸으로써 명학수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가 그저 어떤 체계로 구성된 산물에 불과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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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진의 순진한 삶에 실린 시들은 공통적으로 ‘순진한 삶‘을 질문한다. 순진함은 무엇이며 더군다나 삶에 있어서 순진함이라는 태도나 지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순진하다는 것은 자주 아무것도모르는 상태를 가리키지만 그때의 무지와 언어를 갖기 이전의 어린아이가 지닌 무구를 동의어로 취급할 수는 없다. 「순진한 삶 속에인간의 언어 밖에 놓인 존재들, 가령 인간 이외의 생명체로서 식물과 동물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 역시 순진하다는 속성과 판단을 가•르는 무지함과 무구함이라는 서로 다른 상태를 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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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를 받아 든 후부터 이남주의 뜻대로 풀렸다. 이남주는 정미조에게 선뜻 수수료를 내놓았고 기꺼이 낡은 차에 동승했다. 함께고속도로를 타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이남주는 얼마간 차에 홀로남고자 휴게소에 들르자고 했다. 그래야 내비게이션의 최근 검색 기•록을 찾아보고 운이 좋다면 동선이 남아 있는 블랙박스 SD 카드를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이남주는 말을 아끼는 방식으로 그 모든것을 얻어냈다. 하지만 이남주는 전리품을 쥐었다는 생각에 취한 나머지 자신이 얻어낸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조금도 헤아리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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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하루에 한 번, 애초에 산길이었을 아파트 사이의 그 가파른 길을 뛰듯이 걸어 올라갔다. 편의점에서 산 김밥 한 줄과 5백밀리리터짜리 생수, 그리고 사료와 육포를 넣은 천 가방을 어깨에멘채, 텅 빈 레일을 혼자 뛰는 고독한 달리기 선수를 상상하며. 간간이 걸음을 늦추고는 더운 숨을 내뱉기도 했지만 오래 지체하지는않았다. 미륵이의 식사까지 챙기려면 점심시간 40분은 늘 빠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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