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만이 대법원 판사와 예술 활동이라는 이중생활을 했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여러모로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낭만파에 속했던 만큼 자유분방하게 판타지 세계를 다루었던 한편으로, 작품에서 외적 현실을 묘사할 때는 치밀한 정확성을 보여주는 등 동료들과는 다른 재능을 보였다. 작가를 하면서 동시에 악장을했을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있었고, 여기에 판사까지 겸했다고 하니 정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게다가 고양이를 좋아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내가 이 책에서 호프만을 가장 먼저 언급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으리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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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소설이 힘을 잃었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여기서도 말한 것처럼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설 이외의 미디어가 소설을 뛰어넘고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들 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의 총량이 소설을 압도적으로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전달 속도도 소설에 비해 엄청나게 빠릅니다. 더군다나 그런 대부분의 미디어는 소설이라는 기능까지도 자기 기능의 일부로탐욕스럽게 집어삼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래적인 인식이 불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저는 소설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는 오히려 그 느린 대응성과 적은정보량, 수공업적인 고생(혹은 어리석은 개인적 영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유지하는 한 소설은 힘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이 경과해서 그런 대량의 직접적인 정보가 썰물이 빠지듯 빠져나갔을 때 비로소 무엇이 남아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거대한 망상을 품고 있을 뿐인 한 가난한 청년이(혹은 소녀가) 맨주먹으로 세계를 향해 성실하게 외치려 할 때 그것을 그대로물론 그 혹은 그녀에게 행운이 있을 경우이지만받아들여줄 만한 매체는 소설밖에 없을 겁니다.
상대적으로 힘을 잃고 있는 것은 문학이라는 기성의 미디어 인식에 의해 성립된 산업의 형태와 그것에 의존해 살아온 사람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픽션은 결코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 뭔가를 외치려 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길이 넓어진 것이 아닐까요? (무라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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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영어로 쓰인 문장을 일본어로 옮기면서 자신이 변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는데, 점점 그런 느낌이 없어졌어요. 요즘에는 번역을 해도 저 자신이 작가로서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는 다이너미즘dynamism, 자연계의 근원은 힘이며, 힘이 모든 것의 원리라고 주장하는 설이 자꾸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생리도 리듬도 감각도 전혀 다른 영어 문장을 일본어로 바꾸는 일을 통해 제 내부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왔다고생각했습니다. 이제 그런 느낌이 점점 사라지는 거예요. 그것이 결과적으로 어떤 결론을 얻게 될지는 저 자신도 아직잘 알 수가 없어서 계속 생각해 보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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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콧노래를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마침 봄도 되었고 비가내리기 시작했다. 아파트 화단에 쌓여 있던 눈이 이제야 녹는 곳도 있다. 나는 그 색깔들을 눈여겨 볼 것이다. 그리고 그 색깔들과 모양들을 내 재봉틀 아래에서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밤이되면 지금처럼, 원고를 펼치고 소설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나의밤은 콧노래 없이도 온전히 내 것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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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없는 삶, 그것만큼 또 암담한 일이 있을까. 누군들 희망의 끈을 붙잡고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고 싶지 않은 이가 있을까마는 어디 삶이 그러고 싶다고 해서 계획대로 따라주는 것이던가. 알게 모르게 다들 지난한 삶의 문제들을 안고서 전전긍긍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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