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마타의 고양이는 인간에게 너무나 화가 나서 자취를 감춘 걸까? 무작정 바닷가를 달리며 이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갑자기 주택 앞에 회색 고양이가 오도카니 앉아 있는 게 눈가를 스쳤다. 차를 세우고 슬금슬금 다가가도 도망갈 기색이 없다. 발과 배만 하얗고 털이 북실북실하다. 바로앞까지 다가가도 가만 있길래 셔터를 누르는데 어디에선가또 한 마리, 두색털 고양이가 나타났다. 당황해서 렌즈를 들여다보니 주택 안쪽에서 두색털 고양이와 비슷한 흰검 고양이가 잇따라 나타나 어느새 빙 둘러싸였다. 큰 녀석도 있는가 하면, 아직 새끼 고양이 같은 작은 녀석도 있다. 사람을잘 따르는 고양이들이라 쓰다듬어도 싫어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다른 데서 온 인간이 어딘지 신기한 듯 발을 내밀어 장난을 치는 녀석마저 있다.

빛바랜 잡지를 지금도 몇 권 갖고 있다. 몇 차례 이사를했지만 버리지 않은 건, 페이지를 넘기면 젊은 날의 내가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토요일이었는데, 왔던 사람의 얼굴을 전부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손님이 없었다. 창문도 열지 않아서 바람에 문이 열린 일도 없다. 어쩌면 손님이 열었던 것보다 내가열었던 게 훨씬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그런 게 아니라면 이런 날도 좋다. 멀리서 온 손님과 느긋하게 이야기할 수있었고, 창문 너머에는 미국풍나무 잎이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 있다.

구마모토 지진 열흘 전에도 불쑥 나타났다. 서로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에 또 보자며 언제든지 만날 수있는 사람처럼 인사를 나누고 배웅했다. 보통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만, 마음은 이웃처럼 곁에 있다.
지진 후에는 진심으로 걱정해주었다. 아미고 씨가 걱정하는 건 구마모토만이 아니다. 동일본 대지진 뒤에는 몇 번이고 도호쿠에 가서 친구를 사귀고, 한결같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미고 씨는 자선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아미고씨의 행동은, 지원이 아니라 소통이다.

그의 그림은 인쇄매체에서 자주 봤다. 그러나 원화의존재감에는 압도당했다. 좁은 방에 북적거리는 것처럼 인물화를 전시했는데, 방이 아니라 그들이 존재하는 어딘가 다른세상이 되었다. 전시 기간 중 몇 번이나 그곳에 들어갔다.
방 가운데에 앉으면 천장이 낮기 때문에 신발을 벗고들어가야 한다―그들을 응시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응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 명 한 명 어떤 인물일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쏘아보는 듯한 시선에 너는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낯선 거리를 걷고 있는듯한 불안과 자기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는 마음의 동요가 엄습했다.

귓가에 콩콩콩, 인간보다 빠른 심장 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면, 약간 서글퍼진다. 가끔 서점에 데려가는 하얀고양이는 언제나 얼굴 옆에 바싹 달라붙어 잔다. 두 명이 자고 있을 때는, 반드시 한가운데로 들어와 어느 한쪽에 기댄다. 처음에는 갸르릉 갸르릉 하고 목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잠들면 조용해져 귓가에 작은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린다. 콩콩콩. 인간보다 심장 박동 소리가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나보다 빨리 떠나버린다는 것이다.

어느 날, 지인이 낮 동안이라도 좋으니까 고양이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입양할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성묘는아니지만, 생후 6개월 정도로 새끼 고양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크다. 꽤 지친 상태라 건강해지면 입양할 사람을 찾으려했으나 너무 커져서 생각보다 입양할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렇게 귀여운데, 크면 안 되는 걸까? 확실히 작고가냘프게 보이는 쪽이 새 주인을 찾기 쉽다.

고양이는 자주 자는 동물이다. 자주 자기 때문에 네코(고양이를 뜻하는 네코貓와 자는 아이란 뜻의 네코는 동음이의어다 옮긴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다. 야행성이라서 낮에는잠만 잔다는 이야기지만, 시라다마는 밤에도 사람과 같이잔다. 지금은 낮이고 정기 휴일이라 집에서 원고를 쓰고 있는데, 시라다마는 자거나 일어나거나 방해하거나 한다. 자고 있어도 거기 있는 것만으로 옆에 있는 사람의 기분을 편안하게 한다. 자고 있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 적어도 나에게, 멋진 일이다. 내가 저기서 뒹군다 한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무를 보는그로부터 며칠 후 출근해 창문을 열었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쓸쓸했다. 미국풍나무의 가지가 가지치기되어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잘라야 하나란 생각이 들 정도로 바싹 잘랐다. 나뭇잎이 간신히 나무라는 걸 알아볼 정도로 아주 조금밖에 달려 있지 않았다. 가위로 머리가 박박 깎인 아저씨 같다. 가지와 가지 사이가 텅 비어서 맞은편 건물의 콘크리트가 빈틈을 채우고 있다. 정원수의 가지치기였다면,
이렇게 조잡하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일하는 동안 계속 그나무가 정면으로 보여서,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안타까운기분이 들었다

고죠가 얼마 동안 오지 않았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지금은 유타와 카운터석에 나란히 앉아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면 이 글은 쓰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서점에 오게 된 것은, 고조의 친구 덕분이다. 어느날, 카운터석에 앉아 있던 손님에게 고죠가 전화를 했다. 다이다이 서점에는 갈 수 없어서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다고하는 것 같아서 바꿔달라고 한 뒤 오라고 했다. 잠시 후, 긴장한 표정의 고죠가 오랜만에 왔다. 그러고 나서는, 유타가있는지 없는지 신경 쓰면서도, 다시 서점에 오게 되었다.

지진이 나면, 말도 못할 만큼 우울해져 안에 틀어박히는 사람과 움직이지 않으면 진정이 되지 않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사이에 텐션이 높아지는 사람이 있다. 나는 틀림없는 후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불안했다. 어느 쪽이든 평상심이 아닌 것에는 변함없다.
그래서 미치코 씨의 이 재치 있는 말에 크나큰 도움을받았다. 굳어 있던 몸이 스르르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나서 한동안 우리들의 암호는 ‘지진 재해 노브라 야호‘였다.
나한테는 브래지어가 필수라 야호는 할 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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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교리 전체를 꿰는 실이요, 정수라 할 수 있는 사상은 연기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기의 대승불교적전개가공과 유식사상이 아니라 자기 몸속에서 펄펄 살아 숨 쉬게 하여, 연기 공식그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선禪이다. 연기·공·유식·선은 세계사상사의견지에서도 실로 귀중한 사상과 실천이며, 앞으로도 인류에 크게 공헌할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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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자에는 여러 사람이 앉았다. 작가와 시인과 사진가와 노래하는 사람에 그림 그리는 사람.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에 작은 아이. 사람뿐 아니라 고양이도 앉는다. 모두, 책장을 떠올릴 때 그 의자 역시 함께 떠올릴 게 틀림없다.

‘첫 입맞춤‘은 손톱만큼도 잘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알고 있었기에, 목소리가 큰 사람에게 노래가 시작되면 요란하게 떠들어달라고 했다. 그는 카메라맨이라 그 순간의 사진도 찍어달라고부탁했다. 그런데 사진을 찍지 못했으니 한번 더 등을 외쳤다. 그렇게 부끄러워하는데 다시 할 리가 없다. 카메라맨은모두에게 호되게 야단맞았다. 불시에 그런 걸 시켜서 미안했지만, 수줍어하는 두 사람은 풋풋하고 무척 사랑스러웠다.

공원에서 엄마들의 화제는 아이를 군대에보낼까 말까다. 이스라엘에서는 폭력을 보고 못 본 척할 수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홍보 전화를 잘 거절하지 못하는이야기와 사모님들과 뒤섞여 필라테스를 하는 이야기가 익살스럽게 나온다. 폭력이 넘쳐흐르는 세계를 유머와 다정함을 섞으며, 때로는 사회를 풍자하면서 경쾌한 필치로 묘사해 나간다. 머나먼 이국의 전쟁 속 이야기인데, 친척오빠의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친근감을 느꼈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술을 마시며 듣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게 된다. 전쟁을 하는 것도, 테러 행위에이르는 것도, 우리와 그리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다.

촬영 당일은 아침부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따로쉴 수 있는 날이 없어서 예정대로 나갔지만, 차에서 내리는것조차 주저할 정도로 비가 앞 유리를 때렸다. 와이퍼가 부지런히 빗물을 닦아내는 걸 보면서, 사진 실력도 부족한데이 빗속에서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 불안해졌다.
그러나 미나마타역 근처에 도착했을 무렵, 마실 거라도 살까 하고 차를 세웠더니 딱 비가 멈췄다.
비 개인 산은, 산등성이가 선명하고 고요하다. 흐린 하늘에서 뻗어 내리는 빛은 바다의 표정을 풍부하게 한다. 인기척은 거의 없지만, 살아 있는 것의 기운이 그득하다. 오랜만에 홀로 어슬렁어슬렁 사진을 찍는 게 즐거워졌다. 서점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디에도 나가지 않던 시절이었다. 예기치 않게 사치스러운 하루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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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하나가 아니라 여덟이다. 안식에서 아뢰야식까지의 여덟 개의마음이 각각 별도로 있으며, 따라서 여덟 마음이 동시에 작용할 수도있다. 모든 마음, 즉 8식은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생겨나서 작용했다가조건이 다하면 소멸하는 연기적 존재요, 찰나적 존재다. 반짝 빛났다가소멸하는 빛과 같다.
빛이 소멸하면 밝게 비추는 작용도 동시에 소멸한다. 빛은 소멸했는데 밝게 비추는 작용만 남아있는 경우는 없다. 마찬가지로 밝게 비추는 작용은 소멸했는데 빛만 남아있는 경우도 없다. 소멸한 빛은 조건이 갖추어지면 다시 생겨나 밝게 비춘다. 마음은 이러한 빛과 같다. 그
‘러므로 어떤 마음의 작용이, 예를 들어 의식의 작용이 멈추었다는 것은의식 자체가 소멸했다는 것을 뜻한다. 작용만 멈추었을 뿐 의식 자체는그대로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의식 자체는 언제나 그대로 있다고한다면 의식은 불교가 부정하는 아뜨만이나 자성이 되어버린다.

부처가 되었을 때 8시 각각은 지혜로 바뀐다고 했다. 이를테면 의식은 묘관찰지라는 지혜로 바뀐다. 이것은 번뇌에 물든 의식의 흐름이 차원이 완전히 바뀌어 번뇌가 전혀 없는 ‘지혜의 의식(=묘관찰지)‘의 흐름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나머지 식도 이에 준하여 이해하면된다.

깊은 잠에 들거나 식물인간일 때는 안식부터 의식까지 전육식은 소멸한다. 우리는 몸에 들어온 병원균을 알아채기는 하나, 그것은 자각적감지가 아니다. 자각적 감지는 육식에 의해 일어난다. 그렇다면 병원균에 대한 알아챔은 육식에 의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깊은 잠, 식물인간, 병원균의 침입 등 어느 경우든 생명을 유지시키는 작용은 지속된다. 이것은 생명이 전육식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아뜨만과 같은 ‘영원불변의 나‘를 부정한다.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를 표방한 말이 ‘무아無我‘, 곧 ‘영원불변의나는 없다‘이다.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한다는 말인가? 불교에서는 이문제를 해결하여 무아와 윤회를 조화롭게 연결시키려는 여러 사상이나왔다. 유식에서는 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로 본다. 자신이 행한 행위가 남긴 종자를 하나도 유실하지 않고 보존하고 있는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라고 본 것이다. 아뢰야식이 아뜨만과 같은 영혼이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다룬 심상속의 내용을 통해 충분히 납득했을 것이다.

나의 외부에 고정된 소리 자체가 있다는 것도 하나의 믿음에 불과하다. 혹자는 소리의 세기를 측정하는 기계에 찍힌 수치가 그 소리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동일 소리라도대기 중이나 수중이냐, 산속이냐 도심이냐 등 주위 환경에 따라 그 수치는 다르다. 또한 측정 기계가 발달할수록 그 수치도 미세하게 다르게측정될 것이다.
질량과 무게는 다르다고 한다. 지구에서 몸무게가 60kg 중인 사람이 달에 가서 몸무게를 재면 10kg 중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 사람의 질량은 지구에서나 달에서는 언제나 60kg이다. 이와 같이 장소나 상태에따라 달라지지 않는 물질의 고유한 양을 질량이라 한다. 같은 장소에서무게는 이 질량에 비례한다.

이 이식과 의식의 종자들이 아뢰야식에서 이어져 오다가 유사한 상황을 만나 그 이식과 의식으로 생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목탁 소리라고 인지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지한 순간 그 이식과 의식은 동일한 성질의 종자를 아뢰야식에 새로이 또 심는다. 결과적으로 목탁소리라고 식별할 수 있는 이식과 의식의 종자는 증가한다. 따라서 같은 행위가 반복될수록 ‘이것은 목탁소리다‘라는 인식은 강해지며 이에 대한집착도 강해진다.

더 심각한 것은 다음과 같은 중생의 현실이다. 중생에게 미움의 종자에서 미운 생각이 일어날 때 상대는 영락없이 미운 놈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려는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보인다. 밉게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밉게 보인다. 목탁소리로 들으려고 해서 그렇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목탁 소리로 들리고 그 결과 그것은 틀림없는 목탁소리라고믿게 되어 버린다. 그런 만큼 그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렵고 힘들수밖에 없다.

이 한계에서 어떻게 자유롭게 될 것인가? 수행하다 죽어도 좋다는각오로 화두를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조 선사가 제자인 백장 선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오리 한 마리가 날아갔다. 마조가 백장에게 물었다. "저게 뭔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답하겠는가? 머리 굴리거나 읽고 들은 것으로 흉내 내서 답한다면 영원한 중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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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문학대로서 여러 일을 해왔지만, 역시 이시무레 문학을잇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란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수년 전부터 작가와 연구자로부터 이시무레 씨의 작품에 대해 듣는 ‘이시무레 대학‘이란 행사를 열고 있다. 다시 말해,
여러분 이시무레 씨의 책을 읽어보지 않겠습니까, 라는 모임이다. 요즘이야말로 이시무레 씨의 말이 필요하지 않을까란 생각에 문학대 사람들과 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지는 꽃부리를 손바닥에 주워 모아 꽃향기에 파묻혀 있었다. 몇 번이고 지나가니까 할 수 있었던일. 눈 깜짝할 사이에 지는 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릴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꽃이 시나브로 진다. 오렌지색이 사라지고 짙은 녹색만 남았을 때 꽃이 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금목서가 지는 걸 지켜볼수 없다니, 어른은 시시하다.

나무에게 좋은 일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금목서가 두번 꽃을 피운다니 조금 득을 본 기분이다. 서점에서 시내로가는 길에 있는 교차점 옆에 금목서가 있어서 장을 볼 때나우체국에 다녀올 때 꽃을 만끽한다. 이때만큼은 신호를 기다리는 게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아직 바뀔 때가 아니라고생각해버리니 인간은 제멋대로인 존재다.
정원에 금목서가 있으면 꽃이 지는 때를 알 수 있을까?
그녀는 오렌지색 작은 꽃부리를 골라내 말끄러미 바라보거나 주워 모아서 향기를 맡을까? 다음에 꽃이 피면 물어보겠노라 생각한다.

낌이실은 그 의자에 나 때문에 생긴 그을린 자국이 있다. 처음 문을 열었던 해의 연말, 서점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저녁거리를 사온 사람이 있었다. 같이 먹자고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급기야 와인도 따서 마신 게 잘못이었다. 저녁을 다먹은 후, 그대로 일을 하다가 오토만에 기대 잠들고 말았다.
오토만이 히터에 가까웠는지 일어나 보니 천의 색깔이 살짝갈색으로 변했다. 몹시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염치가 없어서 의자를 선물한 손님에게 바로 말하지 못했다. 한참 지나 자백하니 알고 있었다고 했다. 알고 있었는데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그 의자에는 여러 사람이 앉았다. 작가와 시인과 사진가와 노래하는 사람에 그림 그리는 사람.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에 작은 아이. 사람뿐 아니라 고양이도 앉는다. 모두, 책장을 떠올릴 때 그 의자 역시 함께 떠올릴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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