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세면장 한켠에 세워진 두 개의 우산을 보았다. 물방울무늬의 우산은 민화의 것이었고, 그 옆에 진초록색 남자용 우산이 기대어 있었다. 우산 꼭지들에서 흘러나온 빗물이 서로엉키며 세면장 바닥을 타고 수챗구멍까지 뻗어 나가 있었다.그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단호하게 방문을 열어젖혔다.
겨울에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누군가가 속삭여준 듯 문득 떠오른 말을 속으로 되뇌며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새벽빛은 천천히 가셔갔다. 꽁지가푸른 산까치 한 마리가 마른 울음을 뱉으며 철조망 너머로 날아갔다. 바람이 일 때마다 벌거벗은 나뭇가지들이 몸 스치는소리를 냈다.
과거가 빛의 속도로 나를 다시 붙잡았다. 내가 아무도 아니었던 곳, 어느 영토에도 속하지 못하고 문화가 없고 정체성도 없는 존재였던 곳으로 다시 안내하는 레드 카펫 위로,그동안 내가 지나온 먼 거리가 달려 내려갔다. 나는 그때까지, 그러니까 카-나-다라는 단어가 온전한 의미를 띠는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내가 지나온 길들과 샛길들을 되짚어 보려애썼다. 깃발들이 사방으로 자유롭게 휘날리는 곳에서 전국민을 대표하는 시민으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난민으로 들어와 이민자가 된 사람을 고를 수 있는 나라가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십대 때는 우리 집 지하실에서 수백 개의 지퍼와 어깨심과 주머니를 재봉질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누군가의 놀림을, 누군가의 침묵을, 그들이 서로의 머리카락에 대해 묻는 질문을, 그들의 발걸음의 의미를, 그들의 피부색을,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그들이 쓰는 언어의억양을, 그들이 입은 치마의 치수를, 그들이 선택하는 꿈을,현기증 나는 그들의 뒷이야기를 분석했다.
군중 속에서 나와 똑같은 사람을 발견하던 순간, t를 수많은가능성 속에서 잃어버린 순간, 이미 지나쳐서 잔상만 남은,그러나 여전히 삶에서 휘발되지 않은 순간들을 한 번 더 목도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아몬드 모양 꿈에 저장하기로 한다. 테니스 열매의 씨앗이 있다면 꼭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