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여행지에서 걸을 때와 서울에서 걸을 때 나의 태도는 퍽 다르다. 여행지에서 나는 지도를 잘 보지 않는다. 워낙 심한 방향치라 길을 잃을 것이 필연적인데 크게 걱정하지도 않는다. 길을 잃고 헤매다 만나게 되는 뜻밖의 풍경들 앞에서 나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해지기 때문이다. 보물찾기를 하는 아이처럼, 겁 없는 탐험가처럼 나는 호기심에 이끌려 기꺼이 성큼성큼 지도 밖으로 걷는다. 운동화 밑창이 닳고 다리가 아파올 때까지.
헤어질 시간을 미루느라 집이 코앞인데도 일부러 골목을 배회하는 애틋한 연인들처럼 나는 목적지에서 멀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웃거리며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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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되었든 생명을 가진 존재는 한없는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존재는 사랑을 줄 줄 안다. 봉봉은 차갑고 이기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한 내 안에도 사랑이 이렇게나 많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려준 존재다. 봉봉이 먹고 싶어 어쩔 줄 몰라하는데 목숨을 잃을까봐 먹지 못하게 막거나 고통스러워하는데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야만 할 때, 자유의지를 주었다면서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만들고 누구보다 사랑한다면서 때때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시련을주는 신의 뜻을 나는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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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녹색의 물결을 몇시간이고 질리지 않은 채 바라볼 수 있지만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지면 운동화를 꿰어 신고 나가야 한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부딪히며 만드는 소리를 듣기 위해. 나는 나의 늙은 개와 나무들 아래에 오래도록 서서 무성한 연둣빛과 진초록의 잎이 매달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서로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 소리는 파도가 밀려온 소리와 꼭 닮아서, 듣고 있노라면 아주 먼 곳으로 떠밀려가는 듯한 황홀한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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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사전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사실, 냉정하고 기계적인 판단, 수술대 위의 수술 도구처럼 건조하게 살균된 정의를 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전에 들어갈 말을 고르고 정의하는 것은 사람이니 그 사람과 당대 사회의 편견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읽는 사전은 대부분 남성중심적, 이성애중심적, 인간중심적 사회의 편견을 담은 중산층 지식인의글이다. 무언가를 배제하고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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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가리키는 단어들 가운데 중립적인 단어들은 부정적인 의미를 획득하며 욕이 되고 욕은 ‘플러스욕‘ 또는 ‘더블플러스욕‘으로 진화하는 까닭은말할 것도 없이 문화적, 사회적 요인 때문이다. 수천년 전부터 계속된 남성중심적 사회에서는 여성을 성적인 대상 혹은 성적으로 통제해야 하는 대상으로 본다. 여성을 성녀 아니면 창녀라는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바라보는 여성혐오적 시각에서는 ‘보통 여성=
‘창녀‘가 된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을 가리키는 중립적 단어들이 점점 부정적이거나 성적인 의미를 추가로 획득하는 ‘의미적 타락‘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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