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이혼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이혼에 따른 전반적인문제, 심리적 후유증, 법적인 문제, 재산분할, 가족의 역할 등등. 할 말을 못다 해서 잠시 멍하고 있다가 안 하길 잘했다고생각을 고쳐먹었다. 복잡하고 구질구질한 건 질색인 시누이였다. 서두만 듣고도 머리를 흔들고 끝까지 들으려고도 안 할 것이다. 남들의 통속적인 속내에 전혀 호기심 없는 태도 자체가도덕적인 해결책보다 훨씬 도움이 될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가. 파출부 다음으로 해야 할 오늘 일에 대한 부담이 한결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쿨하게 쿨하게. 바로 그거야.

시누이는 오히려 그걸 즐기는 것 같았다. 엄마에게 내놓은자식 취급당하니 살 것 같다고 했다. 넉넉한 위자료와 아이들양육권까지 챙긴 그녀는 자식 뒷바라지도 잘해 좋은 외고도보내고 명문 대학도 보냈다. 곧 유학을 보내거나 결혼만 시키면 완전 프리라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지금도 자식이나 남의이목에 신경쓰며 사는 건 아니었다. 동창들 사이에서는 직접적으로나 한두 다리 건너서 알 만한, 꽤 괜찮은 유부남들하고염문도 잘 뿌리고 헤어지기도 잘했다. 아마차버렸을 것이다.
찼든 차였든 임자 있는 남자와의 염문에 지저분한 뒷소문이없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서 그 비결을 물어보면 ‘쿨하게‘ 였다. 만병통치, 그놈의 쿨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걸까. 아무튼 부러운 능력이었다.

그녀답지 않게 가벼운 설교까지 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안 하던 짓이었다. 그거 하나 혼자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느냐는 가벼운 질책은 시누이 노릇이라기보다는 우정에 가깝다.
시누이로서보다는 친구로서 그 여성이 고맙고 의지가 되는사실이다. 그러나 나도 고분고분한 성미는 아닌데 처음부터도 아니고, 시집살이 무섭던 옛날에도 고방 열쇠 물려받을이 나이에 새삼스럽게 시어머니한테 꼼짝 못하고 쥐여 살게된 사정은 내가 생각해도 하도 치사스럽고 한심해서 설명이 불가능하다.

남편은 어머니의 위장 가난 때문이었는지 한때의 시대정신때문이었는지 대학 시절 내내 운동권의 변두리를 돌다가 군대갔다 와서 간신히 취직한 회사에도 오래 붙어 있지 못했다. 그래도 취직하길 참 잘했다 싶은 건 나에게 청혼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아직까지도 가끔 말하는 걸 보면,
이 남자가 나하고 결혼한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건 확실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자유를 사고팔 수 있게 하는 게 돈의 힘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팔순이다 된 노인에게 그렇게 많은 사교모임이 있는 줄은 몰랐다. 정기적인 것만도 한 달에 서너 번은 되는 것 같았고, 친구네 혼사 생일 입학 학위취득 등 축하를 핑계로 모이기도 하지만 언짢은 일도 위로한답시고 꼬박꼬박 챙겼다.

희수 해에는 그 비슷한 모임이 몇 번 더 있었다. 희수니까.
나도 될 수 있는 대로 기쁜 마음으로 허울뿐인 맏며느리 노릇에 충실하려고 했다. 4.4모임 외에는 다들 L호텔보다는 싼데서 했지만 여러 번 치르는 걸 보니 그게 다 내 주머니에서나간다면 수월치 않은 액수일 테니 마냥 좋은 얼굴만 할 수는없을 것 같았다.

내가 다달이 시어머니 아파트로 시누이 말 짝으로 파출부나가게 된 경위가 대강 이러했다. 절대로 자식 신세 안 지고사는 잘난 노인들의 잘난 노인다운 이 착한 일을 내가 미력이나마 - 한 달에 한 번이니까- 거드는 일을 영광스러워는 못할망정 파출부라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줄 안다. 그러나그날이면 아침부터 심사가 꼬이는 걸 어쩔 수가 없다. 신역이고돼서는 절대 아니다.

배불리 잡숫고 나서 남은 음식은 싸달라고 했다. 어떤 분은잡채를, 어떤 분은 야채전을, 혹은 북어구이를 싸달라고 하면서 손님 치르고 나면 남은 음식이 제일 곤란하잖아, 이렇게 생색을 냈지만 집에 기다리고 있는 영감님이 있는 사람이 주로싸달라는 것 같았다. 영감님이 계신데도 남은 음식 차례가 안간 이에게는 넌 가다가 김밥이나 족발이라도 사가지고 가렴,
일러주기도 했다.

시어머니가 나에게 이제 가도 좋다는 눈짓을 했다. 그런다고 당장 나오긴 좀 뭣해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제야곗돈들을 모으다 말고 누가 느닷없이 말했다.
야, 그 배고프던 그 시절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드나드는 젊은 여자들은 하나같이 팬티가 보일락 말락 하게짧고 나풀나풀한 치마를 입고 있다. 커피빈 안쪽 벽은 완만한둥근 곡선인데 선을 따라 턱을 만들어놓아 걸터앉을 수도 있게 꾸며놓았다. 동성끼리나 사무적인 관계로 보이는 남녀만테이블에 마주 앉고 사귀는 사이로 보이는 커플은 나란히 앉을 수 있게 해놓은 그쪽에 가 앉아 있다. 남자 무릎 위에 올라앉은 계집애도 있고, 남자 목에다 제 팔을 감고 있는 아이도있다. 그 자리는 남녀의 친밀한 신체 접촉을 위해 꾸민 자리인듯했다. 근데 가만히 보니 상대를 주무르고 있는 건 주로 여자고 남자는 수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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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 답답했으면 일 년에 몇 번 마을에 나타나는 각설이떼를 할아버지는 전에 없이 반기셨다. 전에는 각설이타령 듣기싫다고 얼른 찬밥이건 쌀이건 주어서 보내라고 호령을 치시던할아버지가 실컷 놀고 난 후에 주라고 바가지를 들고 나가는식구들을 만류하고 그들의 신바람을 끝까지 즐기셨다. 중이동냥을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세히 들어보면 다 덕담이니중툭을 자르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라고 이르는 할아버지의 음성은, 그 까탈스러운 쇳소리는 온데간데없고 바람 든 무처럼퍼석했다.

마흔 살이란 늦은 나이답게 수줍게 문단을 두드린 게 처녀작 『나목』이었다. 사적인 경험을 우려낸 작품이니 유니크하지만 등단작으로 끝나는 일회적인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한심사위원의 조심스러운 전망이 기억에 남는다. 그분의 우려가격려가 되어 그후 나는 열심히 글을 썼고 문단과 독자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아 종종 인기작가 소리도 듣게 되었다. 초기에쏟아낸 6·25를 소재로 한 작품들에 대해선 비극적인 가족사를 반복적으로 우려먹는다는 평도 들었지만 나는 반전소설로읽히길 바라고 있다. 유연하게 성공적으로 가정주부에서 작가로 변신할 수 있었고, 그후의 작가생활도 결혼생활처럼 풍파없이 순탄했다.

세 여자를 만나 나의 시골집까지 오는 동안은 간략하게 내이야기를 들려주기에 알맞은 거리이다. 멀리 울산바위가 보이는 우리 마을은 앞벌만 빼고는 삼면이 짙은 숲에 둘러싸여 있다. 녹색도 극에 달하니까 지쳐 보인다. 힘겹게 저장하고 있는과중한 수분을 언제 토해낼지 모르게 둔중한 빛을 하고 있다.
친구의 어머니 유해야 찻건 말건 내일은 나도 떠나리라. 망설이던 마음을 별안간 굳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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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두고두고 채정이 졸업식날을 악몽처럼 기억하는 건 남편의 무신경한 옷차림 때문인데 채정이는 하마터면 아빠를 못찾을 뻔했던 게 더 기억에 남는 모양이었다. 동생 채훈이의 졸업식을 앞두고도 또 아빠 못 만나면 어떡하냐고 그 걱정부터 하더니, 제가 미리 학교 앞을 답사하고 와서 제일 찾기 쉽고 노인네들도 눈치 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며 정해준 곳이 파바로티였다. 딸이 시키는 대로 따르기는 하면서도 후기 졸업식에는 그닥 사람들이 많을 것 같지 않아 괜한 일이다 싶었다.

"여기가 페스타롯치 다소?"
종업원들은 물론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손님의 대부분은 고등학생 티가 가시지 않은 젊은이들이었다.
원 페스타롯치? 하면서 여기저기서 킬킬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여기라고 외치는 대신 황급히 그에게로 다가가 소매를 끌었다. 마누라를 보자 안심한 듯 그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졌다.
"내가 그래도 옳게 찾아왔구먼. 많이 기다렸는가?"

그녀는 인사성으로 그렇게 말해놓고는 말끝을 흐렸다. 말끝을흐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화도 났다. 안사돈끼리의 이런 미묘한심리전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앉은 남편은 고개를 길게 빼고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졸업식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정색을 하고 따졌다. 결혼식을 마침 바캉스 시즌에 치렀을 뿐 아니라, 유학 갈 날을 한 달 남짓 남겨놓은 시점이라 채훈이는 채훈이대로 수정이는 수정이대로 각각 일이 많았다. 비자도 새로 내야 하고, 짐도배로 미리 부쳐야 하고, 운전면허 갱신해야 하고, 이런저런 해결 안 된 일 때문에 마음들이 한갓지지 않아 신혼여행은 미국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서 며칠 쉬다 가는 걸로 대신하겠다고 저희끼리 합의하고 양쪽 부모는 통고만 받았는데 지금 와서 웬트집인가 싶었다.

아들은 그들하고 단체로 또는 삼삼오오 끼리끼리 사진도 찍고인사치레도 하느라 아직도 정신이 없고, 이쪽의 짝사를 자처하고 나선 채정이까지도 그 사진 찍기 좋아하는 족속한테는 손을들었는지 중심에서 밀려나 관망을 하고 있었다.

둘 사이는 그들보다 어린 우리 또래들 사이에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우리들은 그들 사이를 연애를 건다고 말하면서 야릇하게 마음 설레곤 했다. 사십년대의 보수적인 시골마을에서도 젊은 남녀가 부모 몰래 사랑을 나누는 일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나보다. 누가 누구하고 바람이 났다든가, 눈이 맞았다든가, 심지어는 배가 맞았다는 소문까지 날 적이 있었다. 그건 부모가 얼굴을 못 들고 다닐 만한 스캔들이었고, 그 뒤끝도 거의 다 너절하거나 께적지근한 것이었다.

우리 마을에서 만득이가 제일 먼저 읍내 중학교로 진학하자곱단이는 아버지를 졸라 십 리 밖에 새로 생긴 소학교 분교에 입학했다. 방구리사건이 있고 나서였다. 분교를 간이학교라고 불렀고 입학하는 데는 연령제한 같은 것도 없었다. 남학생 중에는아이 아범도 있을 정도였다. 중학교도 마찬가지였나보다. 만득이도 소학교만 나오고 나서 몇 년 집에서 농사를 거들다가 서울로 시집간 큰누나가 신식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해서 상급학교에가게 됐으니 늦공부인 셈이었다

육이오 동란 후 삼팔선 대신 그어진 휴전선은 행촌리를 휴전선 이북 땅으로 만들어놓았다. 그 동안 서로 만나지는 못했어도귀향길에 만득이가 순애하고 곧잘 산다는 소식 정도는 들을 수있었는데 그나마 못 듣게 되었다. 6·25 때 죽지 않았으면 같은서울 하늘 밑 어디에 살아 있겠거니, 문득문득 생각이 나던 것도잠시 만득이는 내 기억 속에서 아주 사라져버렸다. 서울살이라는 게 촌수 닿는 친척도 결혼 청첩장이나 부고나 받아야 마지못해 챙길 정도로, 이해관계가 닿지 않는 인간관계는 지딱지딱 잊게 돼 있었다.

조카가 먼저 격앙된 목소리로 어머니를 만류했고, 질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 방을 뛰쳐나갔다. 딴 식구들도 우르르 질부를 따라 나가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그 일이 왜 조카며느리가 울고불고 위로받아야 할 일로 둔갑을했는지 미처 깨달을 새도 없이 언니가 꺼내놓은 것들을 가방에도로 쑤셔넣기에 바빴다. 졸지에 분란을 일으킨 것들을 우선 안보이게 하는 게 수라고 생각했다.

조카딸 얘기를 듣고 보니 언니의 수의에 그닥 큰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질부가 그렇게까지 심하게 넘겨짚은건수의가 주는 이미지의, 경사와는 너무도 안 어울리는 그 생급스러움, 사위스러움의 충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밍크코트하고 수의하고 비교가 가능한 조카딸한테 사위스럽다는 우리마음속의 해묵은 그늘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나는 암만해도 느이 엄마 여기 오래 계실 것 같지 않다는 소리만 하고 조카딸하고의 통화를 끝냈다.

큰조카가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지 싶어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힐 무렵 먼저 조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질부를 거치지 않고조카가 직접 전화하기는 드문 일이었다. 회산데, 장례 치르고 와서 첫 출근이라 자연히 이모님 생각이 난다면서 차 보낼 테니 나오시면 점심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점심이 급한 게 아니라 할얘기가 급한 것 같은 눈치에 사양하지 않았다. 여자 형제끼리는늙을수록 닮아가는 법이고, 그게 그 자식들한테는 곧잘 상실감을 달랠 수 있는 구실이 된다는 걸 나도 경험해봐서 알고 있기때문이었다.

겁이 많은 나는 그 직장을 그만두었다. 함부로 굽실대며 미안해할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착실하게 배운 성싶었다. 또하나, 같이 일하던 멕시칸들로부터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믿을 만한 직업소개소가 어디 있다는 걸 알아놓은 것도 냉동회사에서 얻은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일본말엔자신이 있었고, 통하는 말로 통사정을 할 수 있으면 반드시 살길이 열릴 것 같았다.

버스 종점에서 아란은 집을 지나쳐 조각공원 쪽으로 갔다. 옥죄는 가슴을 펴고 마음을 진정시키기에는 집은 너무 좁아터졌다. 마을 사람들이 조각공원이라 부르는 곳은 그냥 넓은 초원이었다. 왕년의 어떤 조각가가 인근의 농가를 개조해 찻집을 차리고 주변의 공터에다 조각물을 설치하고 공원처럼 꾸몄다고 한다. 찻집 자리가 어디쯤인지 지금은 그 흔적도 없지만, 공터에조각물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조각가는 죽었다고도 하고 이민을 갔다고도 하는데 남아 있는 조각들은 거의가 온전치 못하거나 흉물스러워 아란은 거기 갈 때마다 조각가가 공원을 임대를 했었을까 무단점거를 했었을까 궁금해하곤 했다.

공원엔 벤치 같은 것도 없었다. 여기저기 남아 있는 조형물의잔해가 벤치 구실을 했다. 간혹 작가의 이름과 작(作意)같은게 새겨진 팻말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작품과 팻말이 제대로 짝이 맞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 작품은 없이 팻말만 남아 있는 것은 빈 무덤가에 서 있는 비석처럼 처량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팻말의 설명문치고 겸손한 건 하나도 없었다.

정확하게 일 주일째 되는 날 아침에 이변호사한테 연락이 왔다. 전번의 아파트가 아니라 정기 회사 사장실로 나오라는 전갈이 왔고 이변호사도 동석한 자리에서 천만원짜리 수표 서른다섯장을 건네받은 것이다. 새삼스럽게 정기가 칠순잔칫날의 부친을연상시켰다. 거의 그만큼 늙어 보이기도 했지만 첫 대면 때와는다른 낯익음 때문인 듯도 했다. 아란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친근감이 수치스러워서 삼억오천만원어치 수표에 대해서는 짐짓 덤덤하게 굴었다. 그런 아란이 가소로웠던지 정기씨는 한쪽 입가로만 웃는 이상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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