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탐험이란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야를 여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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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의 첫 사명은 무엇이 주어지든 주어진 것을 탈바꿈시키는 일이라고 루이스 칸이 말한 바 있다. 여러분은 자기 글의 건축가이므로 다른사람의 지시에 따라 글을 쓰더라도, 자신의 지혜와 창의성으로 그 지시를 탈바꿈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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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종교와 세속적 권위를 무시하는 잔치를 라파예트가 의도적으로조직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그를 열정적으로기렸다. 적어도 행사장에서는 그 현상이 두드러졌고, 그래서 미라보 백작 같은 사람은 왕의 앞날을 걱정스럽게 내다보았다. 그러나 좀더 자유로운 성향의 ‘민주파‘는 다른 차원에서 걱정을 했다. 그들이 보기에 전국연맹제의 주역은 왕이나 라파예트였지 국민은 아니었다. 행사장에서 울려 퍼지는 "왕만세!", "라파예트 만세!"가 "국민 만세!"를 압도하지 않았던가. 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도 행사장에서 퍼져나가는 소리를 퐁뇌프 다리에서 들을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국민 만세!"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전국연맹제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전국이 자발적으로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으며, 진정한 의미의 국민혁명이었다고. 그것은 혁명의 종착점이 아니었다. 그것은 훗날 프랑스가 입헌군주국을 거쳐 ‘하나이며 나눌 수 없는‘ 공화국으로 가는 출발점이며, 파리의 주도권을 부정하면서 파리가 프랑스의 83분의 1에 해당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지방을 ‘연방주의‘로 공격할 명분이 되었다.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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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 시민헌법‘은 반혁명의 불씨를 키우는 요소였다. 그럼에도 1년 전의 현실에 비해 확실히 민주화한 모습을 보여주는 개혁이었다. 새 프랑스를혈통보다 능력 위주의 사회로 만들어가려는 원칙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혁명 직전부터 개신교도와 유대교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 시작한 프랑스가 정교분리 원칙을 적용하면서 가톨릭교회를 국가 아래 둔 것을 보면, 문화적 구체제의 큰 뿌리가 끊겼음을 알 수 있다. 계몽주의자 가운데 볼테르의 주장만큼 혁명에 확실하게 반영된 것은 없으리라. 볼테르는 틈만 나면 가톨릭교를비판하고 더 나아가 종교적 자유를 주장했는데 이제 그 길이 확실히 열렸던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고, 프랑스는 크게 둘로 나뉘었으며, 왕이 파리에서 국경 쪽으로 도피하는 계획을 세우는 원인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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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에 왕국을 도(데파르트망), 코뮌, 캉통으로 재편성하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때 법원문제가 함께 나타났다. 오후 2시가 되자 의장은 관례상왕국의 재편성 문제를 이튿날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그때 알렉상드르 드라메트가 긴급발언을 신청해 왕국의 모든 고등법원을 쉬게 하고, 이 문제에대해 별도로 명령을 내릴 때까지 휴가정이 대신 일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리자고 제안했다. 그는 사실상 고등법원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리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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