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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아랑전
조선희 지음, 아이완 그림 / 노블마인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큰이모네 집은 어둑하고 낡았지만 제법 큰 저택이었다. 담장너머로 바다가 보이고 수국이 핀, 협소한 듯 꽤 길고 깊은 정원이 있었다. 마당도 따로 있고 복층 구조의 내부까지 있는 그냥 문을 열고 들어서기만 해도 이야기가 쏟아 질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그 집은 여전히 그대로이겠지만 이모네는 더 이상 그 곳에 살지 않는다. 그저 이제는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시간과 공간이다.
외삼촌과 이모들과 외사촌들이 옹기종기 모이면 오빠 방에 불을 끄고 둘러앉아 막내 외삼촌을 조른다. 귀신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지금처럼 티비에서 영화에서 세련된 공포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그런 매체가 드물었었다.
외삼촌이 들려준 이야기들은 지금 생각하면 다 헛웃음이 나오는 과장도 많았지만 손에 땀을 쥐고 마음을 졸이면서 어둠속에서 마른침을 삼키며 들었었다.
나는 조선희 작가가 신작을 발표하면 당장 사는 열혈 독자 중 하나일 것이다.
피곤한 퇴근길의 지하철에서도 한 권을 집중해서 읽어버릴만큼 그의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그 때 그렇게 두근거리며 듣던 이야기들이 다시 생각난다.
나는 이제 이런 이야기들이 무섭지 않다. 밤중에 혼자 앉아 읽어도 괜찮을 만큼 튼튼한 담력을 가지게 됐다.
어린시절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그의 책을 읽으며 떠올리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것이 그다지 순수한 그리움만은 아니다.
침을 꼴딱 꼴딱 삼키며 책장을 넘기는 흥미진진함은 이번 모던 아랑전에 속해 있는 <금도끼, 은도끼>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게 됐다.
이게 뭘까... 무섭지도 않고 복잡하기만 한 이야기. 그런데 곰곰히 생각하던 어느 순간 밀려드는 씁쓸함. 그럴 수도 있겠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편백나무 숲 할머니처럼.
"나는 네 이야기가 하나도 안 무서워. 그런데 그렇게 우는 네가 더 무서워서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나는 이제 이런 '무서운 이야기'가 무섭지 않다. 무서운 건 이 이야기들의 서늘한 슬픔이지 않을까 싶다.
이 이야기들은 어린 시절의'여름밤'이었다. 지금은 더 이상 그날 밤 처럼 순진무구하던 어린 시절의 나도 다정한 친척들의 순한 마음도 깜깜한 밤을 밝혀주던 별빛도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가끔 기분좋게 간질이던 산들바람도 그저 아쉽고 그리울 뿐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 책'을 읽는 나는 이미 조금은 튼튼해진 담력을 가진 어른이고 그때는 몰랐던 이면의 이야기들마저 읽어냄과 동시에 나 자신을 읽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래도 이야기책이 주는 어느 여름밤의 심상이 나는 항상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