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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속의 남자
신이현 지음 / 이가서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나는 신이현을 꽤 좋아한다. 신이현의 소설은 특이하고 또 지리멸렬할 뿐 아니라 대체로 충격적이거나 가끔 변태적이기도 하다. <숨어있기 좋은 방>이 첫만남이었고 장정일과 결혼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그런 기분이다. 고속터미널의 더러운 여자 화장실 구석탱이에서 노골적인 광고를 봤던 기분, 거기다가 일반행 고속버스를 대여섯 시간 타고 지루한 여행 끝에 먼 타지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겨울이 될듯 말듯한 저녁에서 밤사이의 어중간한 그 시간에... 다름 아닌 장기매매 알선, 유흥업소 종업원 모집(일과 숙식제공), 무모증으로 고민하십니까?, 파출부 대모집, 주부 부업 등등등등...
더럽고 불쾌하고 꾀죄죄한 기분. 몇시간 참고 참은 오줌보를 쥐고 뛰어나가 주렁주렁 짐을 나름 과학적으로(?) 더러운 문짝에 붙은 고리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고서 급하게 바지춤을 내리고 앉아서 시원하게 싸고 나와도 시원하지 않은 그런 기분... 그냥 교양있게 말하지 않아도 똥구덩이에 빠져서 암모니아 냄새로 정신이 헤롱거리는 그런 기분이 든다는 거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에 이어서 나온 비슷한 그러나 역전된 상황의 <잠자는 숲속의 남자>.
신이현의 책은 지금 구하지 그렇게 쉽지 않다. 대부분 절판이 많기 때문이다. 발품을 수고스럽게 팔아줘야 읽을 수 있는데 사실 그만한 가치가 있다.
<잠자는 숲속의 남자>를 나는 단숨에 읽었고 그만큼이나 단숨에 나는 너무 슬퍼졌다. 눈물이 쭈륵 흐를 정도로. 삶의 얼굴은 사실 너무 비참하다. 이 개같은 자본주의 사회는 웃어라, 긍정적이어야 한다, 동료들과 친하게 지내라, 사랑하라, 용서하라, 기타등등의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한편으로는 자기수양으로 개개인의 자존감 형성에 영향을 주는 캠페인을 펼치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을 교묘히 이용해서 노동력을 좀 더 착취해가려고 지랄을 떤다. 하지만 삶의 본연은 결국 비루하고 서울역이나 더러운 공중화장실이나 구역질이 날 것같은 쌩비린내 풀풀 나는 그런 더러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외. 롭. 다.
강변하고 싶지 않다. 그저 있는 단어 그대로를 담백하고도 덤덤하게 발음할 뿐이다. 의연하게도 아니다.
외로워서 결혼을 한다. 연애를 한다 변명을 하지만 외롭다. 그것은 원죄다.
어느 비 오는 날 술집 처마 밑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기생오라비처럼 쭉 빼입고 서서 초조하게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꽁초는 비에 젖어 더 이상 연기도 나지 않았다 몇 시간 전에는 장롱 안에 든 가장 멋진 옷을 꺼내 입고 향수를 듬뿍 뿌린 꽤나 멋있었을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찌그러진 성냥갑처럼 볼썽사나웠다. 젖은 담배를 던지다 그 앞에 선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비틀거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줄곧 기다려온, 버림받기 직전의 연인을 만난 것 같은 미소였다.
나는 남자를 데리고 와 뜨겁게 데운 술을 한잔 주었다. 누구라도 나를 애인으로 생각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그는 뜨거운 술을 마신 뒤 양복저고리를 벗었다. 앙상한 어깨뼈가 드러나는 낡은 와이셔츠가 나왔고 바지를 벗자 궁둥이 부분이 너덜너덜한 사각팬티가 나타났다. 그러나 구두만은 어디서 훔쳐 신은 것처럼 번쩍거렸다. 그는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은 채로 나에게 다가와 가장 두근거리는 연애의 한순간을 재현해 주었다. 그런 뒤 그는 벗어놓은 후광들, 양복과 셔츠를 입고 사라졌다.
그리고 끝이었다. 두 번 다시 그를 볼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더이상 외롭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남자는 누구라도 자신을 애인으로 생각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리의 아담, 거리의 천사다.
어느 날 당신 눈에 전봇대 뒤에 구부정하게 서서 수상하게 담배를 피우는 남자 혹은 사람 많은 역 광장에 꿈쩍도 않고 혼자 서 있는 남자, 혼자 캄캄한 도로에 서서 주머니 속에 든 술병을 꺼내 한모금씩 마시며 추위를 달래는 남자, 그런 남자가 보인다면 그것은 당신이 몹시 외롭다는 신호다. 그럴 때는 주저 말고 그 남자에게 미소를 지어보라.
그 남자가 당신에게 무슨 위험한 선물을 줄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는 아주 귀엽고 상냥한 남자다. 그는 먼저 당신의 마른 입 안에 흰 각설탕을 넣어줄 것이다. 그런 뒤 그 설탕을 녹일 커피를 마시게 할 것이다. 뜨거운 커피가 입 안에 들어가는 순간 설탕은 작은 모래 언덕처럼 허물어지면서 당신 혓바닥 위로 흘러내릴 것이다. 그 순간 당신을 설탕을 가장 맛있게 먹는 한 가지 방법을 안 것에 대해 조금은 위로를 받고 기분 전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이고 끝이다.
이 이야기는 안주머니에 술 한 병과 면도기, 빗을 꼽고 오늘도 어느 벽에 기대서 있는 그 남자에 대한 것이다. 행복한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눈에도 행복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입 안이 너무 바싹 말랐거나 오랫동안 모래만 씹고 살았던 이라면 문득 그가 보일 것이다. 그러면 부탁하건데 망설이지 말고 그를 따라가보라. 짤막한 여행을 끝낸 뒤 먼 하늘을 보며 아, 이제 좀 살아봐야겠군, 하고 생각한다면 그걸로 끝이다. <2003년 11월 신이현>
성매매에 관한 불쾌한 비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아니다. 책의 전반에 흐르는 절묘한 믹스앤매치는 더러움과 순결함, 슬픔과 행복, 사랑과 증오 육체와 정신 등의 것들이다. 어울리지 않으나 어울리기도 하는 것들.
육체와 정신, 정신과 육체. 그것은 다르고 같은 이름이고 인간의 정신은 메마르고 육체 역시 메마르고 그래서 더더욱 슬프고 그래서 외롭다는 것이다.
그 메마름에는 비싸게 카드로 팍팍 긁어 산 수분 앰플이니 수분 엣센스니 수분 마스크니 수분 크림이니 그런 따위의 종합셋트를 사다 모아 피부에 때려 바를 수 있는 응급조치도 없다.
원죄를 떠안고 사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