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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만든 마을 - 에밀리 디킨슨이 사는 비밀의 집
도미니크 포르티에 지음, 임명주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평점 :
1800여 편의 시를 썼으나 평생 10편도 채 발표하지 못했던 시인, 발표한 시들조차 익명으로 했기에 생을 마감하고서야 유고 시집으로 비로소 빛을 보게 된 시인, 바로 에밀리 디킨슨이다. 자연과 사랑, 죽음과 영원을 주제로 한 그녀의 시들은 대체로 추상적이지만 섬세한 필체로 많은 이들에게 위안을 전한다.
생애 대부분을 집 안에서 머무르며 매일같이 시를 쓰던 에밀리 디킨슨의 삶은 베일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일까 시를 통해 남다른 통찰력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에밀리 디킨슨의 생애는 후대의 수많은 이들의 상상을 자극한다.
캐나다 퀘백의 소설가이자 에밀리 디킨슨 연구가인 저자 도미니크 포르티에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남겨진 시와 편지, 기록을 바탕으로 에밀리 디킨슨이 살았던 종이로 이루어진 세상을 다시 재건했다. 자신의 이야기와 상상 속 에밀리의 삶을 조화롭게 녹여낸 전기 에세이 《종이로 만든 마을》
도미니크는 남편의 회사 일로 퀘백에서 보스턴으로 이주한다. 이후 여러 집을 거치지만 자신만의 집이라고 불릴만한 곳은 없었다. 보스턴에서의 첫 집은 홀리요크라는 지역에 있었다. 온전히 내 집으로 정을 붙일만한 곳을 찾아 옮겨 다니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홀리요크는 에밀리가 다니던 학교의 이름이었음을 알게 된다.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에밀리 디킨슨은 19세기 당시 여인들이 꿈꾸던 일상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과감히 평범한 다른 여인들의 일상을 거부하고 독신의 길을 걷는다. 누구보다 시를 사랑하고 자연에 귀를 기울이며 그저 지나칠만한 것들도 온전히 인식하며 사유한다.
”원주, 경계에 머무르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1862년 에밀리가 히긴슨에게 보낸 편지 中
이 세계와 저 세계, 시와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에서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는 에밀리 디킨슨의 삶은 결국 경계에 머무르는 은둔자처럼 보이지만 우리 모두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경계의 주변에서 왔다 갔다 하며 균형의 추를 맞추려 애쓰며 일생을 보내지만 완벽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도미니크의 상상 속 세계를 함께 유영하며 나 또한 자기만의 집을 그려보았다. 진정한 자기만의 집은 외부가 아닌 내면에 있다는 걸 자신의 집 조그마한 방 안에서 우주를 창조했던 에밀리 디킨슨의 삶이 보여주고 있었다.
”린든은 종이 마을이야.
지도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마을이지.
자기들이 제작한 지도를
다른 사람들이 훔치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적어놓은 거야.“
p48 오스틴이 에밀리에게 하는 말
돈독한 사이였던 에밀리와 오빠 오스틴은 어릴 적 함께 지도책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사는 애머스트에서 보스턴으로 가려면 스프링필드, 레스터, 우스터, 린든, 월섬을 지나야 하는데 그중 린든이라는 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스틴은 말해주었다.
에밀리가 되뇌었던 "종이 마을......". 가상의 린든 마을은 지도 제작자들이 표절의 증거로 만들었을 뿐이지만 오빠에게 전해 들은 후 에밀리에게는 삶의 증거가 된다. 소중히 간직했던 종이 위의 시들은 그녀의 사후에 신화라 일컬어질 만큼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에밀리 디킨슨의 사망 증명서 '직업'란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필체로 '집'이란 단어가 적혀있다고 한다. 낯선 도시 보스턴에서 자기만의 집을 찾아 헤매던 저자 도미니크는 결국 자신이 머무르던 공간에서 우주를 창조해낸 에밀리 디킨슨의 일상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던 바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전기 에세이 《종이로 만든 마을》은 폐쇄적인 은둔자로서의 이미지보다는 애정 있는 상대에게 보이는 에밀리의 인간적인 모습이 좀 더 부각되어 친근하게 다가왔다. 상상이라는 감미료를 더해 과거의 위인을 만나는 방식은 그리운 이와의 꿈속에서의 조우처럼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도미니크 포르티에는 이 에세이로 2020년 르노도상 에세이 부문을 수상하고 같은 해 페미나상 에세이 부문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