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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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초 처음 만나 인생 소설로 손꼽을 만큼 깊은 여운을 남긴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저자 파스칼 메르시어의 신작이 나왔다. 파스칼 메르시어는 본래 철학자로 페터 비에리라는 본명으로 남긴 《삶의 격》 《자기 결정》으로도 유명한데 그의 소설 역시 철학적 사색이 짙게 묻어난다.

때로 느낌으로만 어렴풋이 인지하던 그 감정에 매료되어 한참을 휩쓸려 다니다가 결국 매듭짓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미묘한 감정을 언어로 표현해 내는 사람이 바로 파스칼 메르시어였다. 소설의 내용면에서나 분량면에서나 쉽지만은 않지만 그의 유려한 문체는 묘한 끌림이 있다.

어릴 적 동양학자인 삼촌의 영향으로 낯선 언어에 매료된 주인공 영국인 레이랜드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서 번역가로 살아가고 있었다. 소통의 매개로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로 누구나 쓸 수 있는 언어라지만 그에게는 좀 더 특별했다. 그렇게 언어에 묻혀 살아가던 레이랜드는 어느 날 시한부 판정을 선고받는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조급해 하며 보내는 대신 차분히 주변을 정리하는 레이랜드. 먼저 떠난 아내를 대신해 경영해오던 유서 깊은 출판사를 매각하고 아이들과 좀 더 친밀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소울메이트와 같았던 아내에게 쓴 편지를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시한부 판정은 이내 오진임이 밝혀졌고, 비슷한 시기 작고한 삼촌에게 물려받은 영국의 저택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삼촌이 남긴 집에서 삼촌이 써준 편지를 읽으며 어린 시절부터 60대가 된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본다.

어릴 적 삼촌의 집에서 보았던 지중해 지도를 보며 주변국 모두의 언어를 배울 거라 선언하던 모습, 대학에서 뛰쳐나와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며 독학으로 번역을 배우며 지새던 수많은 밤, 아내를 처음 만난 기차, 아이들이 생기고 급작스레 아내가 출판사를 물려받게 되면서 트리에스테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만난 인연들까지.

레이랜드는 '모든 것은 이름이 불리고 이야기된 후에야 실제로 존재했다'고 하며 언어로 이해해야 모든 걸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에겐 그만큼 언어는 중요했고 생사의 기로에 서 있을 때조차 자신의 언어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 강박적으로 정신을 놓치지 않으려 점검했다.

그만큼 언어에 기대어 살아왔던 레이랜드는 삼촌의 편지를 계기로 자신과 주변인들과의 삶을 반추하면서 미쳐 인식하지 못했던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의 형태로 쓰는 것이었다. 단순히 읽고 쓰는 언어를 넘어 자신의 삶을 문학으로 승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파스칼 메르시어는 주체적인 삶을 살고 내 삶의 존엄성을 잃지 않기 위한 가장 중요한 노력 중 하나는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한 자신의 가치관을 《언어의 무게》속 레이랜드의 삶에 녹여낸 걸 보면 어쩌면 파스칼 메르시어 그리고 페터 비에리의 자전적 소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모든 게 급변하는 세상에서 마음의 여유를 잊은 채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는 문학의 효용을 우아한 방식으로 설파한다. 글로 쓴 생각은 문학의 형식으로 누군가에게 전해져 자신의 생각과 정신을 점검하는 도구이자 불안한 마음을 일시적인 쾌락이나 욕망에 내맡기는 대신 온전한 정신으로 세상을 대할 수 있는 무기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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