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 - 신화에 가려진 여자
제시 버튼 지음, 올리비아 로메네크 길 그림, 이진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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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방패를 들고 천천히 내가 있는 것으로 걸어오는 그를 보는 순간,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았다. 거의 평생토록 나에게서 도망치며 살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이 옳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결단의 시간이 왔다. 나를 제대로 알 시간이었다. <메두사 p190>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 메두사는 머리에 형형색색의 뱀을 달고서 눈빛만으로 사람을 돌로 만들어 죽이기로 악명 높았다. 언니들과 달리 불사의 몸이 아니었던 메두사는 결국 영웅 페르세우스에 의해 머리가 잘려 나간다. 우리에게 악당 이미지로 각인된 메두사가 실은 악당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시대를 초월해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듯 우리는 선악 구별이 뚜렷한 스토리에 익숙하다.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할 필요가 없도록 선한 영웅의 대척점에 강력한 악당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다르다. 누가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지 단편적인 시선으로는 구분하기가 어렵다.


제시 버튼의 <메두사 신화에 가려진 여자>는 아테나 신의 저주로 흉측한 모습으로 변한 뒤 외딴섬에 숨어사는 괴물 메두사의 이야기를 메두사 본인의 시점으로 재해석한 책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의 모습과 달리 페르세우스와 메두사의 첫 만남은 여느 로맨스 소설처럼 설렘으로 다가온다.


외딴섬에서의 유배 생활에 신물이 난 메두사는 어느 날 섬으로 찾아온 아름다운 청년 페르세우스를 발견한다. 차마 보여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바위 뒤에 숨긴 채 그에게 말을 건다. 페르세우스 역시 자신의 모든 걸 드러내지는 않은 채 매일 바위를 사이에 두고 메두사와 이야기를 나눈다.


메두사는 자신의 이름을 '메리나'라고 소개하고 페르세우스는 자신이 섬을 찾은 이유를 숨긴 채 메리나와의 대화에 빠져든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둘은 서로에게 끌리고 메두사는 얼굴을 보여주길 애원하는 페르세우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지를 두고 고민에 빠진다.


아름답다는 이유로 포세이돈에게 농락당하고 아테나에게 저주받은 메두사는 어찌 보면 신들의 싸움에서 희생양이 된 존재였다.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은 모두 돌로 변하는 게 메두사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머리카락 대신 흉측하게 달린 뱀들의 존재 역시 메두사에겐 슬픈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메두사에 대한 왜곡된 평가는 역사적으로도 권력을 가진 여성 혹은 권력을 위해 싸우는 여성들이 메두사에 비유되며 지금껏 이어져왔다. 이 책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전형적인 악당도 다르게 볼 수 있는 해석의 여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오비디우스<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메두사 이야기를 최근에 읽었는데 둘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타인에 의해 추앙 혹은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한 여성이 스스로 내면의 힘을 회복하는 과정이 세밀하게 묘사된 이 책은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애쓰는 모든 메두사들에게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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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런 제닝스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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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부커 상에 노미네이트 된 남아공의 작가 캐런 제닝스의 세 번째 장편소설 <섬>. 아프리카 해안가의 작은 섬에 카메라가 비치고 앵글은 홀로 있는 등대지기 새뮤얼에게로 향한다. 해변에는 지난 세월 바다를 떠도는 물건들이 간간이 파도에 밀려왔는데 그중엔 시신도 있었다.


식민지 시대 아프리카에서 자란 그는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결국 나라는 잔인한 독재자의 통치 하에 놓인다. 체포되어 25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등대지기로 삶을 마감하려는 노년의 새뮤얼에게 벌어진 4일간의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펼쳐진다.


새뮤얼은 현재를 살고 있는 동시에 여전히 과거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성장한 그는 식민주의자들에게서 독재자에게로 나라의 통제권이 넘어가는 걸 목격하고 오랜 세월 감옥에서 보낸 후 등대지기가 된 지금까지 상실을 견뎌내며 고립된 삶에 익숙했다.


어느 날 해안가로 떠내려온 난민과의 동거는 고되지만 나름 만족스러웠던 새뮤얼의 일상을 위협한다. 격변으로 인해 일상은 번번이 혼란에 빠진 그에게 변화는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오갈 곳 없는 낯선 이를 받아들이려 노력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끊임없이 분노에 휩싸인 새뮤얼은 점점 그에 대한 원망도 커져갔다.


소설 <섬> 속 새뮤얼의 인생이 그리는 작은 무늬들은 비참하고 불안한 상황에 놓인 식민지와 독재 치하의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잘 보여준다. 또한 낯선 방문객의 존재는 우리가 타고난 외부인에 대한 의심과 침략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두려움에 대한 우화로 그려진다.


과거로 인한 편집증에 사로잡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그의 행동에 상반된 감정이 든다. 트라우마가 삶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내 안의 두려움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게 아닐지. 다 읽고 나니 지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립된 한 남자의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제목이 더욱 깊이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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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피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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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가 1989년과 1990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여섯 편을 모아 엮은 소설집 <TV 피플>. 낯선 제목의 표제작 <TV 피플>부터 <비행기>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 <가노 크레타> <좀비> <잠>까지 수록된 소설들을 읽다 보면 단편의 스토리임에도 강력한 킥이 있는데 이런 점이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매력이구나 실감한다.


각 단편은 각기 다른 듯 비슷한 분위기를 공유하고 있는데 마무리 역시 독특하다. 하루키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묘한 이야기들은 이게 과연 현실에서 가능한 일인가 싶다가도 내가 미처 모르는 사이 어느 곳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하루키는 그가 발표한 여러 단편소설들 중 <TV 피플>과 <잠>에 애정을 표했는데 개인적으로 여섯 작품 중 인상 깊었던 단편은 <잠>이었다. 불면증에 걸린 한 주부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주인공은 독특하게도 잠을 자지 않아도 전혀 일상에 전혀 문제가 없는 기이한 불면증에 걸린다.


낮에는 남편과 아이를 돌보면서도 꼬박꼬박 운동을 하고 밤이 되면 달콤한 간식과 책에 푹 빠지기도 하며 몰래 외출해 드라이브를 하기도 한다. 모두가 잠든 세상에서 혼자만의 세계를 즐기는 주인공을 통해 온전히 세상을 누리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본래의 바람직한 내 모습, 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잠을 버림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확대했다. 중요한 건 집중력이다. 집중력 없는 인생이라니, 눈만 뜨고 있었지 아무것도 못 보는 것과 똑같다'

무라카미 하루키 <잠> p194


몰입의 중요성을 체감하며 지내는 요즘 하루키의 문장은 더 깊이 있게 다가온다. 하지만 다른 단편들과 마찬가지로 결말이 석연치 않다. 홀린 듯 빠져 읽고서 잠이 들었는데 소설에 너무 몰입한 탓인지 악몽을 꾸기도 했다.


기묘한 여섯 단편들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들지만 흡입력만큼은 최고였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집 <TV 피플>. 읽는 사람의 평소 취향이 어떠하든 하루키는 독자들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재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불필요한 수식어 없이 간결한 문장으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그의 깊은 통찰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노골적이지 않되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문장들은 뇌리에 남아 잊고 지내다가도 어느 날 문득 떠오르곤 한다. 하루키의 단편소설을 읽고 나니 이번엔 그의 장편소설이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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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밤
안드레 애치먼 지음, 백지민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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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서툴지만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을 아름답게 담아낸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영화를 보고서 원작 소설을 찾아 읽기도 했는데 섬세한 감정 묘사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한 사람의 감정으로 이토록 멋진 소설 한 편이 완성되다니 안드레 애치먼이라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에 한동안 설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여덟 밤>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원작 소설가인 안드레 애치먼의 신작으로 크리스마스 무렵 뉴욕의 겨울을 배경으로 로맨스가 펼쳐진다. 제목에서처럼 8일간의 일화를 통해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짧은 시간이지만 느린 호흡으로 깊이 있는 감정 묘사에 빠져들다 보면 여덟 밤이 아닌 훨씬 더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누군가에게 빠져 상대에게 몰입할 때 느끼는 그 감정 그대로.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예고 없이 찾아와 어느새 마음 전부를 내어주게 되는 그 신기한 일들을 한 올 한 올 섬세하게 풀어낸 <여덟 밤>. 설렘과 행복을 느끼다가도 때로 상대의 예측할 수 없는 언행에 느끼는 불안함까지. 섬세한 프란츠의 시선으로 사랑이란 이런 거라며 우아하고 다정하게 일러주는 것만 같아 읽는 내내 기분 좋은 두근거림과 함께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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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까지 3킬로미터
이요하라 신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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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꽃이나 새나 사람만
아름다움을 뽐내는 게 아니야.
눈 결정, 구름, 하늘이 잠깐씩 보여주는
무기질의 아름다움도 있어.
누군가 봐주기조차 바라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있는 아름다움.
떳떳하고 덧없는 아름다움.
나도 알고 있었잖아.‘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138억 년이란 시간 동안 우주는 이어져 왔다. 광대한 우주 속에서 티끌에도 못 미치는 인간이 이 세상에 머무는 시간은 찰나의 순간일 뿐.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소용돌이와 같은 희로애락의 늪에서 인생의 기쁨과 슬픔, 좌절과 희망을 고루 맛보며 예고편 없는 단 한 번의 인생을 살다 간다.


이요하라 신의 단편소설집 <달까지 3킬로미터>는 과학도의 눈 비친 다양한 삶의 면면들을 무심한 듯하면서도 따사로운 시선으로 풀어낸다. 크고 작은 시련과 좌절 속에서 허우적대는 주인공들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위로를 받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리라는 기대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일곱 가지 단편소설 속 인물들은 평범하면서도 다채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마주치는 시련에 좌절하고 때론 인생의 막다른 곳에 다다른 각각의 인물들을 위로하는 것은 다름 아닌 달과 눈의 결정, 화석과 바닷속 퇴적층과 같은 자연이었다.


<달까지 3킬로미터>
<하늘에서 보낸 편지>
<암모나이트를 찾는 법>
<덴노지 하이에이터스>
<외계인의 식당>
<산을 잘게 쪼개다>
<새내기 후지산>


잔잔한 울림을 주는 작품들 가운데 <달까지 3킬로미터>와 <하늘에서 보낸 편지> 두 단편이 특히 좋았다.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이 택시에서 만난 자칭 '달 전문가'인 박식하고도 수다스러운 운전사에게 배우는 삶에 대한 태도, 눈 결정 연구를 하는 '기상 덕후'에게 마음을 빼앗긴 한 여인을 통해 미(美) 그리고 욕망에 대한 인간의 관점을 기존과는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실제로 지구과학을 전공한 과학자이자 소설가인 이요하라 신은 연구의 진척이 없어 방황하던 시기 우연히 떠오른 트릭을 소재로 집필한 소설이 에도가와 란포상 최종 후보작에 오른 걸 계기로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다.


감성이 아닌 팩트로 전하는 위로. 인간의 희로애락과는 무관하게 고요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자연 속에서 따스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늘 함께 하지만 미처 몰랐던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는 동시에 자연과 교감하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하는 기분 좋은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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