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 경계인이 바라본 반세기
도널드 리치 지음, 박경환.윤영수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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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취향을 즐기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자신이 느끼기에

무엇이 좋은 감각인지 정하기만 하면 된다

도널드 리치



역사와 애니메이션, 만화를 시작으로 직접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며 평소 관심 있게 지켜봤던 일본에 대해 내가 알던 건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게 된다. 까도 까도 새로운 양파 같은 나라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룬 인문학 에세이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도널드 리치는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와 구로사와 아키라를 본격적으로 서방세계에 소개한 영화평론가로 잘 알려진 분이다. 그는 1947년 연합군 사령부의 군무원으로 일본에 살기 시작하면서 경계인 혹은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학위와 취업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던 시간을 제외하고는 60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본에 머무르며 실험영화를 제작하기도 하고 일본 사회와 문화, 영화에 관한 글을 남겼다. 2013년 88세의 나이로 눈 감을 때까지 오직 일본을 사유하며 지낸 그의 글은 통찰력으로 가득했다.



책에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무렵부터 시작해 세기가 바뀌고 그가 생을 마감한 비교적 최근까지 다양한 분야의 일본 문화에 대한 소고를 담은 에세이 20편이 실려 있었다. 나는 마냥 신기하고 좋게만 바라봤던 현상을 반대편에서 이면까지 꿰뚫어보는 그의 시선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워크맨, 망가, 사회

1985



생산하는 회사마다 제품명이 달랐지만 압도적인 인기로 상표 그 자체가 일반명사가 되어버린 소니의 워크맨, 마찬가지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대중 만화 망가. 이 두 가지는 우리나라에도 전파되어 많은 이들을 열광케했다. 



나 역시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그것들이 주는 눈과 귀의 즐거움에만 집착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도널드 리치의 시선은 이것이 둘 다 입력의 차단이라는 부정적인 이유로 각광받는 것이었다고 한다. 즉 사람들이 외부 세계를 차단하고 대안 현실을 찾는다는 것.



이 열풍에는 부(富)를 지상 최대 과제로 삼아 자연을 파괴하고, 일본을 소비 지상주의의 나라로 만든 권력자들에 대한 은밀한 비판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오랜 세월 일본에서 비판의 표현은 침묵을 통해 이루어졌다. 귀에 이어폰을 꼽고 눈을 망가에 몰입시키며 보이지 않는 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 : 반세기의 변화

1994



일본은 변화를 자신들의 문화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최대한 비슷한 모습을 유지해야만 할 것 같은 전통에서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었다. 도널드 리치는 고국에서 6년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후의 일본에서 이전의 패러다임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과거에는 그들이 우러러보던 전형적인 백인 미국인에 대한 태도나 거의 모든 집이 일본식 다다미 바닥에서 서양식 바닥으로 바뀐 점, 콘크리트로 해안선을 메우고, 도쿠가와의 무덤을 밀어내고 호텔을 짓는 등 이런 변화를 보고 처음엔 일본의 의지와 무관하게 서양 문화에 잠식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일본은 원하는 것은 취하고 원치 않는 것은 밖에 두고 있었다. 지극히 실용적인 관점과 태도를 발견한 것이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라기보다는 삶의 유한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불확실한 세상에서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하나의 가치체계로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책에 담겨 있는 모든 것들은 지나간 얘기들 위주였다. 나라의 모든 틀이 겉으로 드러나 있는 나라, 영화에서는 스토리, 플롯, 액션보다는 정취를 중요시하는 태도, 비움을 통해 완성을 추구하는 창조성 등이 지난 시간 바라본 일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저자의 시선에서 일본은 경쟁적인 성향으로 지극히 실용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비움의 세계는 과잉으로 채워지고 여백에서 생기던 창의성도 많이 사라졌으며 방향은 자연스레 소비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평생을 이방인으로 경계인으로 살아온 도널드 리치는 자신이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친근하게 다가왔지만 반면 같은 이유로 평생 그들에게 거리 두기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모든 것에 이면이 있듯 그들에게 온전히 동화되지 못했기에 오히려 그들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소속감보다 자유가 더 중요한 가치이며, 좋은 취향을 즐기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자신이 느끼기에 무엇이 좋은 감각인지 정하기만 하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나간 것의 가치를 되새겨보는 일은 선택의 연속인 삶의 길 위에 서 있는 우리에게 분명 의미 있는 시간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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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담덕 2 - 천손신화
엄광용 지음 / 새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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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고국원왕(할아버지) → 17대 소수림왕(큰아버지) → 18대 고국양왕(아버지) → 19대 광개토태왕(기준)




역사를 좋아하지만 10여권 가까이 기획된 장편 대하소설이라 조금은 부담을 안고 시작했는데 아껴서 읽고 싶을 만큼 너무 재미있다. 1권에서는 다시 백제 근초고왕과 태자 수의 평양성 침공 소식을 듣고 대왕 사유(고국원왕)가 노발대발하며 응징하러 가면서 마무리되었다.



지난 백제와의 전투에서 당한 치욕을 대갚음하기 위해 고구려 군은 철갑기병을 앞세워 빠르게 적군을 섬멸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백제군의 함정에 빠져 대왕 사유는 결국 전투 중 사망하게 된다. 사실 대왕 사유가 직접 전투에 나서는 걸 모두가 말렸지만 그는 분노에 사로잡혀 자멸한 셈이었다.



타고난 성정이 어질지 못했지만 한편으론 그의 재위 당시 주변국 사정이 고구려에 불리하기도 했다. 연나라의 침입으로 대왕 사유의 태후와 왕후가 적국에 볼모로 잡혀가기도 하고, 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침입한 백제에 거듭 설욕을 당한 사유는 결국 복수를 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고구려 대왕 사유는 평양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국원에 묻혔다. 그가 바로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이었다. (p49) 원통하게 죽어서 고국원왕이라고 외웠는데 그가 묻힌 곳의 지명이 고국원이었다.



16대 고국원왕(할아버지) → 17대 소수림왕(큰아버지) → 18대 고국양왕(아버지) → 19대 광개토태왕(기준)



이후 왕위에 오른 태자 구부는 복수보다는 내실을 다시기 위해 피폐해진 나라를 우선 다시 바로잡고자 했다. 백성들의 생활을 보살피는 한편 국가 제도를 정비하며 태학을 설립하고 율령을 반포하기도 하며 나라의 국교로 불교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가 바로 고구려를 대국의 반열에 올리기 위한 기틀을 마련한 17대 소수림왕이었다. 소수림왕의 이런 개혁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고구려를 다시 살리기 위한 타개책이었지만 그 시절에도 나라를 위하기보다는 자신의 가문의 안위만을 생각해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주몽에 의해 고구려가 설립된 이래로 5부족 연합체로 시작한 고구려는 귀족들의 세력이 막강했다. 전통적으로 왕을 배출한 계루부와 왕비를 배출한 연나부 세력이 특히나 강했는데 소수림왕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들과 무관한 을두미를 국상으로 임명해 왕권 다지기를 시도한다.



왕권이 강해지려면 나라 안팎으로 기틀을 다져야 함은 물론이지만 왕의 후손도 중요했다. 하지만 소수림왕과 왕비는 오래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소수림왕의 동생인 태제 이련과 그 부인 동궁빈 하씨(연화)에게 다들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왕비는 이를 질투해 동궁빈에게 비소를 담은 한약을 보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왕비의 출신 가문인 연나부 전체는 일대의 위기를 맞고 왕비의 자결로 마무리되는듯싶었다. 이런 왕비의 죽음에 마음 여린 연화는 죄책감을 느끼며 백팔배를 드리면서 그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고구려에 불교를 국교로 지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석정 스님은 그런 연화에게 고대 조선부터 시작된 천손신화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날 이후 태제비가 되어 여러모로 마음고생을 하던 연화는 드디어 아이를 갖게 되고 석정 스님께 전해 들었던 천손 담덕을 드디어 출산하게 된다.



양측의 지략으로 긴장감 넘치던 평양성 전투부터 고국원왕의 안타까운 죽음 그리고 태자 구부가 왕위에 올라 주변 세력의 방해를 무릅쓰고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을 설립하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담덕이 드디어 태어나면서 2권은 마무리되었다.



1권 서문에서 작가님은 유목민의 후예인 우리가 다시 노마드 정신을 살려 새로운 미래의 길을 열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참을성이 부족해 일을 그르친 고국원왕과 그에 대비되는 성품을 보여준 소수림왕을 보며 나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태어나자마자 시해될 뻔했지만 무사히 위기를 넘긴 아기 담덕. 앞으로 그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그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위기를 기회로 바꿔 고구려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길 담덕의 모습이 무척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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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 개정판 ㅣ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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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된지는 몇 년 되었지만 난 올해 상반기 이 소설을 처음 만났었다. 구상부터 탈고까지 무려 30여 년이 걸린 작가의 혼이 담긴 작품이라는 파친코를 읽고 아직 2022년이 한참 남았지만 이건 올해 최고의 소설이 될 거라는 예감과 함께 소설과 작가에 대한 애정이 날로 커져만 갔다.



마침 애플 TV에서 드라마로도 출시되면서 원작 소설을 읽고 이어서 드라마까지 감상하며 파친코의 모든 장면이 박제되어 뇌에 각인된 기분이었다. 한창 인기몰이 중 원작 소설의 국내 판권이 종료되어 서점에서 <파친코>가 잠시 자취를 감추었을 땐 마치 내 일인 양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이미 책을 갖고 있었음에도 ㅎㅎ)




이후 다행히 다른 출판사와 판권 계약이 새로 체결되고 새로운 역자의 손에서 다시 번역되어 새 옷을 입고 등장한 <파친코>. 표지는 이전 판본과 분위기는 유사하지만 좀 더 밝고 세련된 무드가 느껴진다. 또한 소제목의 구성과 역자가 바뀜에 따라 글의 문체도 바뀌었고, 그에 따라 분량도 달라졌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부산 영도의 하숙집 주인 훈이, 양진 이들 부부의 딸 선자, 선자가 일본으로 건너가 낳은 아들 노아와 모자수 그리고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핏줄의 역사로 파란만장했던 우리의 근현대사와 맞물려 그들의 치열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역사소설의 장르 특성상 전개가 역동적인데 거기에 더해 작가는 곳곳에 독자가 빠져들 수밖에 없는 흥미로운 사건들을 추가해놓아 분량이 적지 않음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끝까지 몰입해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이번엔 드라마를 보고 나서인지 등장인물들이 좀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가난한 집의 막내딸 양진은 입을 덜기 위해 미혼은 언니들을 앞서 언청이에 절름발이인 훈이와 결혼하게 된다. "여자의 인생은 고생길"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이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양진은 훈이와 함께 하숙집을 운영하며 고된 삶을 살지만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위로 여러 아이를 유산하거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잃고 낳게 된 선자. 선자는 이들 부부의 살아남은 유일한 자식이자 장애 없이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였다. 부모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고 자란 선자는 오사카에서 온 엄마 또래의 생선 중매상 한수에게 빠져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한수를 사랑했지만 뒤늦게 그가 기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선자는 절망에 빠졌다. 한수는 결혼은 할 수 없지만 아이와 선자를 책임지겠다고 하지만 선자는 그런 상황을 용납할 수 없어 거부한다. 마침 하숙집에 손님으로 와있던 목사 이삭이 사정을 알고도 선자에게 청혼하면서 이 둘은 결혼 후 오사카로 함께 이주하게 된다.



비극으로 점철된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일반 국민들이었지만 아무도 이들의 고난에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살 길을 모색하여 떠난 일본이었지만 그곳의 교포들은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모두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오사카에서 선자와 그녀의 아이들 노아, 모자수 그리고 이삭의 형 요셉과 그 아내 경희 그리고 늘 주변을 맴도는 한수까지 저마다 이국땅에서 정착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 중에 1권은 마무리되었다. 이때는 한국전쟁이 끝난 시기와도 맞물려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모두가 힘든 시기였다.



다시 읽은 파친코는 처음 읽었을 때 처럼 그 먹먹한 기분이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다만 이번엔 등장인물들의 삶의 태도에 좀 더 주목하며 읽게 된 것 같다. 이어지는 내용을 알더라도 혹여 그렇지 않더라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음속의 묵직한 그 무언가가 눈물샘을 자극한다.



이 달 후반에 2권이 출간될 예정인데 너무 기다려진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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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버린 배 - 지구 끝의 남극 탐험 ㅣ 걸작 논픽션 24
줄리언 생크턴 지음, 최지수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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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진보를 위해 사람들의 영감을 자극해 줄 흥미진진하면서도 오싹했던 남극 탐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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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버린 배 - 지구 끝의 남극 탐험 ㅣ 걸작 논픽션 24
줄리언 생크턴 지음, 최지수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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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과학 탐사에 관한 논픽션 _ 실화 기반의 극지 스릴러



세계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사람은 잘 알려진 대로 노르웨이 출신 탐험가 로알 아문센. 아무도 가본 적이 없기에 지도조차 없었고 육지인지 바다인지도 몰랐던 그곳에 최초로 도달한 아문센의 발자취는 분명 인류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무수히 많은 이들의 시도가 있었고 그것들이 모여 이런 결과를 이뤄낸 것 같다. 그중의 한 케이스인 1897년 벨기에의 군인 아드리앵 드 제를라슈는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미지의 영역에 대한 탐험을 시도하게 된다.



위험하면서도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지만 성공한다면 국가적으로도 영광인 일이라 수년간 계획하여 배를 준비하고 함께 할 이들을 선발했다. 벨지카호에 대한 이야기가 이런 논픽션으로 출간된 이유 중 하나는 이곳에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의 남극 탐험 주인공들이 많이 탑승했기 때문인 것 같다.



훗날 인류 최초로 남극점을 밟는 로알 아문센이 일등 항해사로 참여했고, 역시 훗날 북극점을 최초로 정복했다고 하는 피어리와 북극점 정복 논쟁이 주인공이 되는 미국인 의사 프레더릭 쿡, 동유럽 남극 탐험의 대부라 불리는 라코비차와 아르츠토프스키까지 모두 한 배에 탑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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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과 사기꾼, 미치광이를 만들어낸 1897년 남극 탐험



이들을 이끄는 드 제를라슈는 과학적 임무를 탐험의 주요 목표로 삼았지만 세계지도의 여백을 자신들의 발견으로 채우겠다는 꿈도 함께 품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합심해도 혹독한 환경의 남극에서 살아 돌아오기 힘든 상황인데 처음부터 자격 미달의 일부 동료들 때문에 벨지카 호는 삐걱거렸다.



우여곡절 끝에 남극해로 진입하지만 초반부터 선원 한 명이 파도에 목숨을 잃게 되면서 분위기가 나빠진다. 돌아갈 수 있는 여지도 있었지만 불명예스러운 일을 목숨보다 싫어했던 드 제를라슈의 결정으로 그대로 나아가다 결국 얼음에 갇히고 그 상태에서 해도 뜨지 않는 남극의 겨울을 맞게 된다.



1년 넘게 얼음 사이에 끼어 지내는 동안 많은 이들이 괴혈병에 시달리며 몸져 눕고 일부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나마 정신력이 강했던 아문센과 쿡의 기지로 죽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얼음을 깨며 조금씩 이동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모두 합심하여 얼음왕국을 탈출하게 된다.



처음엔 의지에 충만해있던 모든 이들이 2년여 동안 배에 갇혀 지내는 동안 모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10년 이상 노화가 찾아온 듯했고 정신적·신체적 문제로 오래도록 고통받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쿡은 감옥에 갇히고, 다른 한 명인 아문센은 영웅이 되었다.



남극 탐사 이후의 삶



저자 줄리언 생크턴은 탐사 이후 벨지카 호 멤버들의 삶을 끝까지 추적했다.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산 이는 물론 로알 아문센. 그는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원정대를 꾸려 남극이 아닌 북극으로 향했고 이런 경험들을 모아 결국 1911년 최초로 남극점에 발자취를 남겼다.



그리고 다재다능하고 아이디어 뱅크였던 의사 프레더릭 쿡도 새로운 여정을 이어 북극점에 도달했다. 이후 안타깝게도 끊임없이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다가 결국 감옥에 갇혀 한 쪽 눈이 거의 실명된 상태로 64세의 나이에 가석방된다. 그의 북극점 도달은 증거불충분으로 오늘날 인정되진 않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탐험의 계기를 만들어 준 사령관 드 제를라슈는 이후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 가스통은 1957년 남극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후 남극 대륙에서 어떤 군사적 활동도 금지하는 남극 조약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91년에는 후속 조약으로 남극의 동물과 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마드리드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지구 끝에서의 이러한 선례는 우주로까지 확장되어 경쟁 국가의 우주 비행사끼리 협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비록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미쳐버렸으며 원래의 목표인 남자극점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벨지카호의 업적은 후세 사람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었다. 그들이 목숨 걸고 남긴 수집품들과 각종 기상 및 해양 자료는 미지의 세계였던 남극 대륙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을 한층 높여주었던 것이다.



두렵고 끔찍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들 덕분에 인류는 의식을 넓혀가며 조금 더 진보하게 되었고, 이러한 스릴 넘치는 이야기는 또 다른 진보를 위해 사람들의 영감을 자극해 줄 기록이 되어줄 것 같다. 흥미진진하면서도 오싹했던 남극 탐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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