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한국 시 필사 - 마음에 스며드는 명시 100
한용운 외 지음 / 시대인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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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한국 시 필사」는 한국 현대시인 김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돌담에 조용히 말을 걸 듯 내려앉는 햇살의 모습은 그 표현만으로도 따뜻함과 평온함, 섬세한 감성과 순수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표지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열한 명의 시인이 조용히 곁에 앉아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이 책은 한국 근현대 대표 시인 11명의 작품 100편을 모은 필사집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나룻배와 행인>,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엄마야 누나야>, 정지용의 <향수>,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윤동주의 <서시>와 <별 헤는 밤>, 이상의 <오감도>, 이육사의 <청포도> 등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이 한 권 가득 담겨 있다. 학창 시절에는 시험공부를 위해 외우고 해석하던 시들이었는데,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니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이 책은 단순한 필사집이 아니다. 시와 명화를 함께 감상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시를 읽고, 그림을 바라보고, 한 글자씩 천천히 따라 쓰게 만든다. 그래서 읽고 지나가는 책이 아니라 오래 머물게 하는 책이다. 특히 김영랑의 시에서 제목을 가져온 것도 절묘하다. 맑고 아름다운 언어로 유명한 시인의 분위기가 책 전체에 은은하게 스며 있다.


 책장을 넘기며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호스피스 병동에 계신 시어머니였다. 꽃을 무척 좋아하시는 분이다. 지금은 곡기를 끊으신 지 한 달이 넘어가고 말씀은 거의 하지 못하신다. 깨어 계신 시간보다 주무시는 시간이 더 길어졌지만, 마지막까지 남는 감각이 청각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병실에서 시를 읽어드리기 시작했다.


 가을이 막 시작되던 날이었다. 손주가 먼저 김영랑의 <오-매 단풍 들것네>를 읽어드렸다. 전라도 해남이 고향인 어머니께는 그 사투리가 얼마나 정겨웠을까. “오-매, 단풍 들것네.” 아이는 일부러 맛을 살려 읽었다. 마치 시골집 장독대 곁으로 붉어진 감잎 하나가 날아와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이어 정지용의 <홍시>를 읽어드리고, 윤동주의 <서시>와 <별 헤는 밤>도 읽어드렸다.


 나는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읽어드렸다. 시 옆에 실린 모란 그림을 보여드리며 말했다. “어머니, 꽃 참 예쁘죠?”  한용운의 <해당화>를 읽을 때는 해당화 그림을,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읽을 때는 진달래 그림을 함께 보여드렸다. “어머니, 이게 해당화예요.” “모란이 이렇게 생겼네요.” “진달래 참 곱죠?” 어머니는 말씀을 못 하셨지만 조용히 눈을 뜨고 듣고 계셨다. 그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한용운의 「사랑하는 까닭」을 읽으며 오래도록 목이 메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만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한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만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한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만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한다.


 시를 읽다가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잘난 자식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족한 모습도, 실수하는 모습도, 힘들어하는 모습도 있는 그대로 품어주셨다. 기쁠 때만 곁에 있는 사랑이 아니라 슬플 때도 함께 있어 주는 사랑. 좋은 모습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픔까지 끌어안는 사랑.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시를 읽는 내내 마치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가끔은 창밖 이야기도 해드렸다. “어머니, 오늘은 바람이 제법 차네요.” “이제 완연한 가을이에요.” 그리고 다시 김영랑의 <오-매 단풍 들것네>를 읽었다. 작은 감잎 하나에서 계절의 변화를 발견하는 시인의 눈이 좋았다. 삶에는 걱정할 일이 많지만 시인은 먼저 가을의 아름다움을 본다. 붉게 물든 감잎 하나를 보며 “벌써 가을이 왔구나” 하고 설레어한다. 그 짧은 한마디에 시골집 풍경도 있고, 계절의 냄새도 있고, 사람 사는 정겨움도 담겨 있다. “오-매, 단풍 들것네.” 짧은 문장이지만 오래 입안에 맴돈다.


 한국 시라고 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위해 외웠던 작품들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시집이 아니다. 하루에 한 편씩 펼쳐 읽고, 그림을 함께 바라보고, 천천히 한 글자씩 따라 쓰며 마음을 가라앉히게 하는 책이다. 기다림, 상실, 그리움, 사랑, 아름다움처럼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감정들이 담긴 시들이 조용히 마음을 두드린다.


 나 역시 필사를 하며 시인의 문장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국 근현대의 아름다운 시와 그림을 함께 음미하며 마음을 천천히 정돈하게 만드는 책. 어쩌면 이 책은 시를 필사하는 책이라기보다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책인지도 모르겠다.


 시를 읽어드린다고 해서 어머니의 병세가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를 읽는 동안만큼은 병실이 병실 같지 않았다. 장독대에 감잎이 떨어지고, 모란꽃이 피고, 별이 뜨고,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시는 누워 계신 어머니와 우리를 잠시 다른 세계로 데려다 놓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단순한 필사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를 따라 쓰며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읽으며 추억을 쌓게 하는 책이다. 어쩌면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은 필사한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을 읽어드리던 순간들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병실에서 시를 읽어드리던 이 가을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어머니 곁에서 가장 많이 읽고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문장처럼.


“오-매, 단풍 들것네.”





* 네이버 미자모 카페 서평단 이벤트 참여하며 도서를 증정 받아 리뷰하였습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증정 받아 솔직한 리뷰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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