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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는 세상 1 ㅣ 노희경 드라마 대본집 1
노희경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09년 10월
평점 :

드라마 대본은 다른 문자 간행물과는 사뭇 다르다. 글로 되어 있되, 글만으로는 그 의미 가치가 별로 없다. 본래 목적이 <글을 ‘일부’ 재료로 한 영상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대본집을 내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주저했다. 글을 재료로 했지만 연출력과 연기력이 뒤섞이지 않으면 제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본집을 내는 것은 그 어느 간행물보다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으며, 말이 갖는 재미때문이었다.
그래서 나 또한 구입을 고민했다. 드라마에 굉장히 빠져 살았었다. 그건 영상과 배우의 표정. 몸짓. 목소리. 나레이션. ost까지 한데 어우러져 표현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좋아한 것이 아닐까. 대본집으로 그 세상을 접할 때 오히려 실망하지 않을까. 그럼 그들이 사는 세상을 궁금해 기웃거리던 내가 흥미를 잃고 그 세상에 발걸음을 끊어버리는게 아닐까 하고. 그 두려움에 몇날 몇일을 미루고 미루다 구입을 했다.
그래 까짓것 상상해보지. 뭐. 드라마의 그 배우 그 공간이 아닌 나만의 머릿속에 새로운 세트를 짓고 새 주인공을 찾아내보자. 하고. 그리고 책의 첫장을 펼쳐들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새 세트를 짓지도 못했고 새 주인공을 찾지도 못했다. 나도 모르게 1년전의 그 공간, 그 주인공을 그대로 생생하게 내 머릿속에 재현하고 있었기때문이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어쩜 이렇게 다 사랑스러울까. 조연 한명 한명까지도. 미운 사람이 하나도 없고 소중하다. 아니 분명히 미운 짓들은 했다. 미운사람이었다. 지오는 아무렇지않게 준영에게 넌 너무 쉽다며 비수를 꽂고 쉬운 여자도 아닌 가벼운 여자도 아닌 준영이는 또 미친 양언니에게 감정을 기대하게 했다. 규호는 잘난 자기 인생에만 신경 쓰느라 남을 돌아볼 시간이 없고 윤영은 한 사람의 인생의 많은 부분을 마냥 기다리게끔 했다. 다들 한 성깔한다. 작가도 배우도 스탭도.
그런데도 미운사람은 왜 없는걸까. 누군가에게 미운짓을 한 그 사람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아서 안아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거슬러올라가볼까? 민희는 양언니를 짝사랑하다 조금의 눈물을 흘리고, 미친 양언니는 준영과 지오의 시간에 끼어들었고, 준영은 엄마에게 상처받고, 엄마는 아빠에게 상처받았다. 이런 식이다. 그래서 모두 미워할 수 없다. 그래서 새 주인공들을 찾지 못했나보다. 난 이미 그들을 안고 있었던거다.
301p(1)
내가 드라마국에 와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드라마트루기. 다른 말로, 연출법의 기본은, 드라마는 갈등이라는 것이다. 갈등 없는 드라마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최대한 갈등을 만들고, 그 갈등을 어설프게 풀지 말고, 점입가경이 되게 상승시킬 것. 그것이 드라마의 기본이다.
드라마국에 와서 내가 또 하나 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얘기는 드라마는 인생이라는 말이다. 현실과 달리 드라마 속에서 갈등을 만나면 감독은 신이 난다. 드라마의 갈등은 늘 준비된 화해의 결말이 있는 법이니까, 갈등만 만들 수 있다면, 싸워도 두려울 게 없다. 그러나 인생에선 준비된 화해의 결말은 커녕, 새로운 갈등만이 난무할 뿐이다.
우린 갈등에 익숙해있다. 초등학생때부터 배웠다. 발단-전개-절정-결말의 그래프를 그려가며 절정에서는 산 하나를 우뚝 세워 그려넣었다. 하지만 언제나 결말은 곧게 곡선을 그리며 내려온다. 해피엔딩. 언제나 해피엔딩을 꿈꾼다. 그래 우리 인생도 그런가? 지금 내 인생은 왜 계속 절정에만 매달려있을까. 결말로 가기가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라고 지쳐 주저앉아있는것은 아닌가? 아님 아직도 심심하게 발단에만? 힘들게 한걸음 한걸음 나섰는데 아직도 출발지점? 좀 허탈해져버린다. 그리고 불안하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많이 나아갔는데 나만 아직도 여기에 라며 혼란해 하고 있는가?
149p(2)
화이트아웃 현상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모든게 하얗게 보이고 원근감이 없어지는 상태.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세상인지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상태.
내가 가는 길이 길인지 낭떠러지인지 모르는 상태. 우리는 가끔 이런 화이트아웃 현상을 곳곳에서 만난다.
절대 예상치 못하는 단 한 순간
자신의 힘으로 피해갈 수 없는 그 순간, 현실인지 꿈인지 절대 알 수 없는,
화이트아웃 현상이, 그에게도 나에게도 어느 한 날 동시에 찾아왔다.
그들의 삶이 갈등과 오해. 피곤함 같은 것이 섞여있다해도 내 눈엔 마냥 아름답고 재밌어보인다. 지금의 내 삶도 누군가 보고 아름답고 재밌어라고 말해줬으면 싶지만 잘 모르겠다. 아닐꺼다. 아직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답답한 상태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그들의 갈등이 부럽다.
난 지금 화이트아웃상태다. 하지만 찾아왔다. 찾아왔다면 또 언젠가는 물러날꺼다. 그렇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