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닝 걸스
로렌 뷰키스 지음, 문은실 옮김 / 단숨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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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소설을 읽는데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까지 읽어 본 소설 중에 아주 읽기가 힘이 드는 소설 축에 들어가지 않나 싶다.

참으로 어려운 책이다​.

학술 서적이거나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전문 분야의 책처럼 어렵다가 아니라 읽는 문득 문득 과연 내가 글을 제대로 읽고 있는가 하는, 문장에서 오는 걸림돌들이 너무나 많았다.

읽다가 다시 앞 문장으로 돌아가기를 여러 번 반복하며 ​읽었다.

몹시도 불친절한 소설이다.

작가도 불친절하고 번역자 역시도 몹시 불친절하다.

소설의 기획된 부분에서는 아주 많은 호기심을 일으킬만한 그런 소설이다.

시간을 옮겨 다니며 살인을 저지르는 ... 그래서 피해자들마다 분명 수 십 년의 시간 차가 나지만 그래도 한 사람이 저지르는 살인이니 연쇄살인이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면 ... 굉장히 독특한 소설이 될 것 같았다.

기대감은 아주 컸다.

하지만 아주 많은 문장들은 너무나 난해하여 이해하기도 힘들뿐더러 '더 하우스'라는 건물에 대한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왜 시간을 옮겨 다니는 것인지, 왜 살인범이 살인을 하는지 ... 그 이유도 드러나지 않지만 그는 정해진 사람만 살인을 한다. 차라리 묻지마식 살인이라면 이해가 더 잘되었을까?

작가는 묘사를 한다. 묘사란 독자로 하여금 그 장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장치가 아닐까?

"문이 번쩍이는 빛으로, 깜깜한 지하 창고에 터진 폭죽처럼 날카로운 빛이 고양이의 내장을 훑고 지나가듯이 홱 열렸다"고 한다.​

도대체 고양이의 내장을 훑고 지나가는 빛은 어떤 모양일까? 개나 소도 아니고 고양이의 내장이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그녀는 '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채찍으로 후려갈기는 것 같은 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피아니스트가 달달하고 아무 느낌 없는 노래를 깔짝깔짝 쳤다."​

번역이 주는 불친절함일까?​ 채찍으로 후려갈기는 것 같은 생이란 묘사와 달달하다는 것은 노래에 대한 느낌이 아닌건가? ... 참 낯설다.

 

번역자는 잘 알고 있는 어휘들이라 그대로 영어를 한글로 표기했는지 모르겠지만 ... 읽는 나는 대충의 뜻으로 그냥 넘어가자! 이러며 글을 읽어내려가야만 했다.

"세바스천처럼 즐기기 좋아도 결혼 상대자는 아닌 남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외과의사나 브로커 같은 돈 잘버는 사람을 남편감으로 원해서 이런 말을 한다. 그래서 지금 사귀는 애인인 세바스천은 그냥 애인으로는 좋아도 결혼할 남자는 아니란 뜻으로 적은 문장이다. 무척 어렵게도 번역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싸워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고 했다."

의미는 어느 정도 알아 먹겠는데 참 친절하지 못한 번역인 것 같다.

목적어 앞에는 ~을, ~를이 들어가는 식의 번역일까?

번역자의 약력을 보면 몇 권의 책을 번역도 하였고 한국 최고의 미국 드라마 평론가라고도 한다.

그래서일까?

해석이 필요한 ... 나에게만 국한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 그런 단어들을 그대로 한글로 적어버린다. 주석도 없이.

외래어와 외국어

혼란스럽다. 나만 모르는 단어인가?

"칼럼이야말로 글다운 글이 나오는 지면이다. 의견을 담은 기사. 스포츠(제길, 영화도 끼워주자)를 세계의 상태에 대한 알레고리로 사용할 수 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난간 옆 빨간색 도리에 앉아서"​ 도리는 무슨 뜻일까?

"백인 팝 문화 종족 " "게이 고딕 씬"  "피켓 펜스" "펜터그램" "파란색 위장 트랙톱을 입은 남자아이"

"오리가미"  - 이 뜻은 찾았다. origami 종이접기라고 한다. 일본어로 오리가미라고 하며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나 보다. 하지만 우릿말에는 종이접기라는 말이 분명있다. 소설에서도 일본식의 문화 표현이 아니라 시간이 마치 종이처럼 접혀져서 다른 두 시간대가 한 공간에 놓여진 걸 의미하는데, 굳이 해석도 없이 오리가미로 둔 이유를 모르겠다.

재미나다는 생각보다는 뭐지 뭐지 하며 마구 미로 속을 헤매다닌 것만 같은 느낌의 소설이다.

​설명이 부재해서 그런 재미를 알지 못한 것은 아닐까?

끝까지 왜 샤이닝 걸스의 죽음이 필요한지, 별자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더 하우스'는 왜 어떤 사연으로 그런 건물인 것인지 설명을 해주지 않는 불친절한 소설​이다.

혹시 작가는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시카고로 '더 하우스'를 찾아가는게 두려웠던걸까?

설명서가 필요한 그런 소설이다.​

 

번역자님 저같은 경우에는 외람된 말인지 모르겠지만 영어를 잘 몰라서​ ... 뭐 시카고에 떨어뜨려놓아도 굶어죽지는 않을 정도의 영어는 하지만 (농담입니다) ... 영어로 된 책을 읽을 정도의 실력은 절대적으로 되질 않아서 번역 그것도 우릿말로 번역된 외국책을 읽는답니다.

번역은제 2의 창작이란 말이 있지요. 번역을 하는 순간부터는 이 소설은 새로운 소설으로 탈바꿈을 한다고 봅니다.

소설가 '스티븐 킹'선생은 자기 나라 언어로 읽어서 기발한 스토리에 깔끔한 문체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한글로 번역된 이 소설은 참 지독하게 읽기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글을 쓰는 것이 번역자님의 스타일이시라면 뭐 어쩔 수 없지만 말입니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 번역을 해주시면 안될까요?

영어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뜻이 통할 그런 한글로 적혀진 번역 책 말입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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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독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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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무라는 참 좋은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곤란을 겪고 있다는 게 느껴지면​ 그것을 그냥 지나쳐 가지를 못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번거로운 세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도 없이, 때로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거나 함께 사는 사람을 기쁘게 하거나, 적어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제대로 살아가"는 걸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라고 믿는 참 좋은 사람입니다.

'스기무라'가 등장하는 미미 여사의 '행복한 탐정' 시리즈에서 두 번째 책입니다.

어쩌다 보니 세​ 번째 책인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을 먼저 읽고 그 후에 첫 번째 시리즈인 "누군가"를 읽고 난 후입니다.

미미 여사가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앞으로 '행복한 탐정' 시리즈가 계속 이어진다니 하고 무척이나 기대가 되는 한 편 언제 그다음 편이 나올지 목이 빠질지도 모를 것 같기도 합니다. 기다리는 일은 늘 즐겁지만은 않은 일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래도 '행복한 탐정' 시리즈를 읽고 '스기무라'의 매력을 느끼고 난 후라면 ​힘든 기다림 후에 만나게 되는 그 기쁨을 충만히 즐길 수 있을 거란 희망도 가져봅니다.

'스기무라' 만큼 오지랖이 넓어 '이마다 콘체른' 본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속속들이 알게되는 '스이렌'의 지배인도 함께 '기타미' 씨의 뒤를 이어 탐정 이야기로 나오면 재미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스이렌'의 지배인 역시 '스미무라' 만큼이나 정이 많이 가는 인물입니다.

소설은 산책을 나갔다가 편의점에서 사서 마신 우롱차에 든 독극물 때문에 ​'후루야 아키토시'가 사망을 하며 시작을 합니다.

상점에서 사서 마신 우롱차로 사망에 이른 네 번째의 사건입니다.

연쇄 살인인지 ... 모방 범죄인지 ...

사망사건이 발생하면 목격자가 없는 경우에는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가장 먼저 의심을 받는 사람은 가족인가 봅니다.

그래서 아키토시와 관련된 사람들이 의심을 받게 됩니다.

책 제목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미미 여사를 이르며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하는 부분과 함께 어쩌면 늘, 지금까지 미미 여사가 추구해왔던 이야기들은 사회에 흩뿌려져 있는 독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이제서야 들었습니다. 혼자만의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기무라가 등장하는 소설뿐만 아니라 여러 소설에서도 그렇고 '사회파' 라는 그 이름 자체가 사회에 만연한 문제를 드러낸 것일 테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 "이름 없는 독"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독들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습니다.

'새집증후군"이라 흔히 부르는 ​독과 택지 토양 오염으로 인한 독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습니다.

이러한 독들은 이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발견을 해낼 수 있으며 제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있으면 해결 방안도 빠르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 내는 독은 그 정체를 알 수가 없기에 어떻게 그 독이 우리에게로 퍼져오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독을 주변에 퍼트리는지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는 정당한 일을 할 뿐이라고 여긴 말과 행동이 다른 이에게는 독이 되어 그 사람을 병들게 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

나 역시 상처를 입었을 때는 똑똑하게 알고 기억하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를 입은 것은 알 수가 없겠단 생각이 듭니다.

나는 좋은 마음이었거나 별생각 없이 한 말인데 그것이 상대에게는 화살이 되어 상처를 입히고 고통스럽게 만들어 아프게 한 적 많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런 사소한 것들에서부터 인간의 독은 상해를 입히거나 목숨을 앗기도 하고 크나큰 고통에 빠지게 만들곤 합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것이 가장 큰 권력이 아닌가 하고 소설에서는 이야기합니다. 금기의 권력이라고 ...

우리 사회에서 갑질 논란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떠돌았습니다.

지금도 결코 사라진 이야기는 아닐 테지요.

흔히 말하는 진상 손님에 대해 판매자들은 대항할 방법이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판매자 입장에서 느끼는 진상 손님의 갑질은​ 그 손님 입장에서는 판매자의 부당함에 강력한 혹은 일상적인 대처 방법일지도 모르겠네요.

양쪽 다 자신의 처지에서 그 상황을 봐서 그렇겠지요?

상대방을 늘 배려하고 이해할 수는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당했다는 의식이 들어서 일까요?

내가 왜 손해를 봐야 하느냐?는 생각에서 그런 걸까요?

어쩌면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전부터 우리 마음에는 손해를 보면 바보다! 손해 볼 필요는 없다! 라는 마음을 새겨놓고 사람을 대할 때마다 그런 마음에서 나오는 전투적인 자세로 그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내 마음대로 혹은 내 뜻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으면 바로 지금 내가 당하고 있나? 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닐까요.

나 역시 그런 사람이겠지만, 세상에는 진상 손님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신이 진상 짓을 했다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판매자의 태도가 나빠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품어내는 독은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만들어 내는 것이겠지요. ​

​그 독은 분명히 이름을 지을 수 없는 독입니다.

그 독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해독할 수도 있을 때 즈음이겠지요. ​

 

 "옛날, 정글의 어둠 속을 누비고 다니던 짐승의 송곳니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인간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짐승이 잡혀, 사자란 이름이 붙여지면서부터 인간은 그 짐승을 퇴치하는 방법을 짜냈다. 이름이 붙여지자 모습도 없던 공포에는 형체가 생겼다. 형체가 있는 것이라면 잡을 수도 있다. 없앨 수도 있다.

나는 우리 안에 있는 독의 이름을 알고 싶다. 누가 내게 가르쳐다오. 우리가 품고 있는 독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하시타테'의 이야기에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슬펐습니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하시타테는 천식으로 몸이 허약하여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하며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편의점 알바 같은 일이 주 수입원입니다.

할머니는 고령의 나이로 집 안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계십니다.

할머니 명의의 집을 팔기라도 하면 두 사람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 수가 있을 텐데, 집의 토양 오염으로 제값으로 집을 팔 수가 없게 되니, 할머니는 집을 파는 것을 거부하십니다.

집을 판매하려는 자들의 농간이라 생각하시는 것이지요. ​

그래서 하시타테는 할머니의 죽음을 생각해냅니다.

가족의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 그 부분에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눈물까지 흘렀습니다.

왜 그런 나쁜 마음이 드는 것인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단 생각을 하니 도대체 내가 지닌 독은 얼마나 나쁜 큰 독일까 하고 ... 아팠습니다 ... 슬펐습니다.

하시타테는 또 다른 독을 품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난 살인자입니다.

행복이 맥없이 무너져 버린다는 걸 난 압니다. 무너진 적이 있으니까요.

그런 짓을 저질렀을 때 나는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었죠.

나는 너무 화가 났었으니까요.

이 세상 모든 것에 화가 나서 내겐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죠. 전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되건 상관없었죠. 누가 죽건 신경도 쓰지 않았어요. 나는 이렇게 괴로우니까. 남들도 나처럼 괴로워진다고 해도 상관없지 않느냐. 그게 무슨 문제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고 해 봐야 아무것도 달라지는게 없습니다. 난 전혀 기분이 풀리지 않았어요.

당신이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지, 스기무라 씨에게 어떤 원한이 있는지 난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짓을 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건 잘 압니다. 그만 하는 게 좋아요.

스기무라 씨의 딸을 해쳐도, 스기무라 씨를 괴롭혀도 당신에겐 달라질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다만 당신도 나 같은 심정이 될 뿐입니다. 분명히 그렇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도저히 돌이킬 수가 없게 됩니다.

나는 살인자입니다.

살인자라서 살인이 얼마나 덧없는 짓인지 압니다. 당신은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그만 하세요. 부탁드립니다" 

 

 

어렵지만 그래도 살아야겠지요.

세상의 많은 것들이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내 편이 아닌 것 같다 하더라도, 그래도 독기로 세상을 대하지 않고 살아야겠지요.

​내가 독기를 드러낸 만큼 상대도 독기를 품게 될 수 밖에 없을테니까요.

오늘은 어제보다 하루만큼 더 다정해지는 그런 날이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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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의 첫날
비르지니 그리말디 지음, 이안 옮김 / 열림원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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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계 일주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어보지 않았을까?

어렸을 적, 해외여행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던 시절​에도, 책이나 영화의 영향이겠지만 그런 시절에도 세계 일주를 꿈꾸곤 했었다.

왜 우리는 여행을 꿈꾸는 것일까? 왜 현재의 거주 지역에서 온갖 만족을 다 느끼지 못하고 거주지를 벗어나고 싶어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안겨주는 일이거나 달콤한 휴식을 제공하여 또다시 돌아왔을 때 숨 가쁘게 살아갈 원동력을 주는 것쯤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일까? ​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정 혹은 집에 어떤 문제들이 있어서 떠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정이나 집에서 보다 차나 배나 비행기를 타고 떠난 곳에서만 만끽되는, 아니 집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여행의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은 아닐까 싶다.

알지 못하는 미지의 장소 혹은 환경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호기심이나 익숙하지 않기에 혹은 쉽게 볼 수 없기에 주어지는 높은 가치에 대한 숭배로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소설 "남은 생의 첫날"은 ​책표지에 어른들의 성장소설이라고 적혀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순수한 드라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20대 40대 60대의 세 여성, 카밀, 마리, 안느​가 그 이야기의 중심에 있으며 80대 여성인 이블린까지 치자면 그 각 세대의 여성들이 사랑을 찾으며 행복한 엔딩을 맛보는 그런 드라마이다.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게 되고 결혼을 하여 20여 년을 남편과 딸아이들을 위해서 자신을 가족에 묻은 채 살아온 마리는 자신과의 결혼 생활을 지루해하는 남편의 마흔 번 째 생일날 집을 떠나 여행의 취지가  '고독 속의 세계 일주'인 100일간의 크루즈 여행길에 오른다.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40년간 동거를 해온 남자 친구?가 집을 떠나 더 이상 자신의 전화도 받지 않고 자신에게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상처 입은 60대의 안느도 '고독 속의 세계 일주'를 떠나게 된다.

​20대의 카밀은 누구나 외면했던 뚱뚱한 외모로 살아오다 성형 수술로 누구나 뒤돌아보게 되는 미녀가 되어 회사도 옮기고 자신감 없는 외모로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그런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보고자, 100일 동안 닿는 항구마다 그곳에서 남자 한 명을 유혹하는 그런 목표를 지니고 역시 크루즈 여행을 선택한다.

어떤 이유로든 각자의 이유에서 여행길에 오르지만 결국 다들 상처 입은 사람들이 모여진 곳 같다. 이곳은 ...

카밀은 '고독'해지지 않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지만 시간이 맞는 여행 상품이 이 상품 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여행길이지만 ...​ 이 여행을 선택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들 자신만의 슬픔 혹은 아픔을 지닌 사람들로 '고독 속의 세계 일주'라는 컨셉이 자신에게 꼭 알맞은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렇게 떠난 그들은 분명 떠나야 할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를 왜들 그리 물어보는 것인지를 모르겠다. ​

다른 사람이 묻기 전에 말하기도 하지만 ...​

크루즈라는 여행이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보다는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더 선호하는 여행이라 그런 건지 ... 주인공 세 여성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랑하는 배우자를 잃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랑이 생겨나고 ... 떠나간 사랑이 다시 찾아오고 ... 뜨개질을 즐겨 하며 가정주부로 살았는데 그 뜨개질이 사업으로 연결이 되어 독립하여 살아갈 경제력을 제공하게 되고 ... 그런 그냥 소설 같은 영화 같은 드라마 같은 내용일 뿐이다.

절망으로 자신의 터전을 떠났다기 보다 ​떠나고 보니 모든 게 다 잘 되어지는 그런 드라마.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눈에 띈 것들은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한 ... 그러니까 몇 년 전에 내가 들은 말은 프랑스인들은 자기 나라에 대한 문화 의식에 자존감이 높아서 ​프랑스에 여행을 가서 영어를 사용해도 거의 통하지 않고 그네들은 자기들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만 사용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마리는 즐겨 보는 드라마와 영화의 제목들이 모두 나도 알고 있거나 들어 본 미국 드라마나 헐리우드 영화들뿐이었다.

프랑스의 드라마나 영화는 한 편도 입에 오르질 않는다.

프랑스에 대한 것은 유일하게 이 소설의 제목이 쓰인 듯한 장 자크 골드만의 샹송뿐이다.

마리가 집을 떠나 변신을 꾀하기 위해​ 크루즈에서 머리를 적갈색으로 염색을 하고 머리 스타일을 바꾸었을 때도 미국 여배우 줄리아 로버츠를 닮았다고 말을 한다.

프랑스의 배우가 아니라 말이다.

​프랑스라고 하면 민주주의의 태동을 이끌기도 하였고 여권 신장이 이루어진 나라라고 생각했던 반면 아내들의 삶은 한국의 여성들 못지않게 여자로 강요당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미인이어야만 가질 수 있는 어떤 특권이 있는 ... 그리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의식의 나라여서 참 신기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 프랑스 소설을 읽는 것인지 한국의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인지 솔직히 분간이 되질 않을 정도였다.

20대의 카밀은 성형으로 미녀로 탈바꿈한 외모로 항구마다 멋진 남성을 유혹하여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관계 측면에서 말만큼 그리 적극적인 아가씨는 아니다.

그리고 다른 여성들 역시 성에 대해, 나라는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만큼의 자유로움도 없이 굉장히 보수?적인 느낌이다.

배우자를 병으로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결혼 후에는 다른 이성을 전혀 만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더더욱이 순수한 드라마같단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다섯 여성이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그들은 배를 탄 이후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어떤 경로로든 ...

오늘이 내 남은 생의 첫날이란 포부를 당차게 만들어주는 부분이 결국 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느낌의 소설같아서 ... 여성의 성장 소설이라기 보다 그냥 어찌보면 신데렐라같은 흔한 드라마같은 그런 소설이다.

​여성에게는 사랑이 무척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게하는 ... 여성이 성장하는 원동력이 사랑일까? 아니면 사랑이 그 목표지점인걸까?

​여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로맨틱할 수도 있을 법하다.

자신의 근거지를 떠나야 할만큼 큰 파장이 삶에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떠나는 것만으로도, 그것도 ​호화 크루즈를 타고 100일간의 세계 여행을 하면서 사랑을 얻고 일도 얻게되고 ... 현실의 지루함을 소설로나마 꿈꾸게 할 그런 로맨스.

여성들에게는 현실의 고달픔을 잠시나마 위로해줄 그런 로맨스가 아닐까 싶다.

소설 속에서 마리는 이와 같은 일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지 실제로 일어날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는 식의 표현이 나온다.

이런 소설에서는 그런 표현을 사용하면 안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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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드롬 E 샤르코 & 엔벨 시리즈
프랑크 틸리에 지음, 박민정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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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품을 고를 때는 분명 나름대로의 기준에 의해서 고르게 될 것이다.

프랑크 틸리에의 "신드롬 E'를 고를 때 나는 어떤 기준으로 혹은 기분으로 고르게 된 것일까?

제목은 어딘가 약간 촌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제법 뒤처진 듯한 느낌이었을까? ​

하지만 표지의 필름과 눈동자 같기도 하고 카메라 렌즈 같기도 한 O의 느낌들이 사뭇 공포스러움을 느끼게 한 부분이 컸던 것 같기는 하다.

​작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전 소설들에서 각각의 주인공이었던 '프랑크 샤르코' 형사와 '뤼시 엔벨' 형사가 이번 소설에서 함께 나와서 범인을 추적한다.

이른바 "샤르코 & 엔벨" 시리즈 그 첫 번째 책이라고 한다. 

엔벨이 인터넷 만남 사이트를 통해 몇 번의 데이트를 가졌던 ​뤼도비크는 굉장한 영화광이어서 벨기에에 위치한 곳에서 '옛날 영화 소장품 판매'라는 광고를 보고는 200km를 달려 아침 일찍 찾아간다.

​뤼도비크는 거기서 라벨이 붙어있지 않은 영화와 함께 열 편을 400유로에 사서 돌아온다.

그리고 라벨이 붙어있지 않은 영화를 보게 된다. ​

대개 그런 영화들이 숨겨진 보물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고 ... 하지만 뤼도비크는 영화를 보다가 눈 앞이 안 보이는 실명 상태가 되고 ​엔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하게 되며 엔벨은 '그 영화'와 접하게 된다.

​공사현장에서 시신 다섯 구가 발견이 된다. 두개골이 절단되어 있고 뇌와 눈이 사라진 시신들.

시신을 조사하던 샤르코에게 엔벨이 연락을 취하게 되고 그들이 각각 알고 있는 두 사건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두 사람은 만나게 된다.

샤르코는 자동차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고 망상성 정신분열을 앓고 있는 형사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위제니'라는 이름의 소녀가 나타나서 자주 샤르코를 괴롭힌다.

엔벨은 쌍둥이 두 딸을​ 기르는 이혼녀이며, 사건 때문에 자주 어머니에게 두 딸을 맡긴 채 일을 해야 하며, 두 딸이 성장해나가는 시간 동안 자주 함께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도 하는 엄마이다.

샤르코와 엔벨은 각자의 삶은 고단함에 시달리는 인물들이다.

그들 내부에 짙은 그늘이 있는 ...

두 사람만 두고 보자면 샤르코가 훨씬 더 병적인 인물이다.

자기만의 세계가 분명하게 지켜져야만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래서 엔벨과의 첫 만남에서도 엔벨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외모를 제외하면, 성격적으로 참 못되게 군다.

현실에서의 일이라면 참 정나미 떨어지는 인간이겠지만, 소설이기에 두 사람이 주인공인 걸 알기에, 읽으면서 어떻게 두 사람이 관계를 형성해갈지 자못 궁금하게 만들어 그래서 눈여겨보게 만들어준 부분이 아닐까 싶다.

소설은 굉장히 전문적이란 느낌이 강하게 들게 만든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는 영사기의 종류라든지 필름의 종류, 영화의 기법이나 서브리미널 효과에 대해서도 말하고 영상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 뇌에 미치는 영향과 함께 뇌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들이 아주 많이 등장한다.

영화와 정신의학 분야에 대해 작가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 이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 글을 읽는 나로서는 구분도 못하지만 ... 아무튼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이 들게 만들어준다. ​

특히 '정신 전염'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최초의 감염자가 분노를 폭발하게 되면 그 주변의 사람들도 그 분노에 전염되어 집단적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이야기에서는 상당히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우리 인간의 뇌가 무한한 힘을 지닌 만큼 반대급부적으로 또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쉽게 조종당하기 쉬운 존재인지를 ... 인간의 뇌를 조종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인간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

우리는 어쩌면 무수히 많은 영상과 소리들에 의해 갖가지 조종을 당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광고를 통해 판단의 기준을 삼게되고 소리의 느낌에 따라 감정의 기복이 달라지며 그렇게. 조종을 당하는 줄도 모르고 조종을 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끔찍한 것일까?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한 상영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온 많은 사람들이 코카콜라를​ 찾았다고 한다.

그 영화의 필름 속에는 1/3000초 마다 코카콜라 영상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1/3000초라면 너무나 짧은 찰나의 순간이라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의 눈으로는 그 코카콜라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눈을 통해 들어온 그 콜라의 영상은 뇌에 새겨지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콜라에 노출되어 영화가 끝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콜라의 시원함을 맛보고 싶은 갈증을 느꼈다고 한다.

이것이 서브리미널 효과라는 것인데 광고에서도 자주 사용되기도 한다고 한다.

나라는 혹은 우리라는 인간의 존재가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통제가 된다고 생각하면 이보다 더 큰 두려움, 공포가 있을까 싶다.

누군가의 조종에 의해 폭력성을 드러내고 집단적으로 살인에 동참하고 ... 그러면서도 개인적인 행동이 아니었기에 죄책감을 다르게 느낀다면 ...

이런 일들은 실제로 우리 주변에 흔하게 일어났고 일어나는 중이며 앞으로도 충분히 일어날 일일 것이다.

가장 흔한 예가 전쟁이고,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학살이며, 일제가 행한 만행에서부터 6·25 때의 양민 학살과 광주에서의 군인들에 의한 만행 ...

옳고 그름의 판단을 우리의 뇌가 제대로 하지 못할 때 ... 휴대폰 어디 뒀지? 하는 잠깐의 건망증이 아니라 인간의 목숨이 달려있는 그런 문제에서도 ​어떤 이의 조종을 받거나 옆 사람의 행동을 따라 하게 되는 그런 연약한 존재가 학살을 하고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공포스럽게 느껴진 부분은 이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 인간의 뇌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부분.

인간의 뇌에 대한 이야기. 학대받는 아이들. 뇌에 문제를 앓고 있는 샤르코. ​자신의 딸들이 살아갈 세상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생기는 엔벨.

작가 프랑크 틸리에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는 아주 재미있는 반면 ​신중하게 읽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다.

그냥 설렁 설렁 읽다가 쫓고 쫓기고 잡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아주 크게는 사회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제를 말하는 ... 가장 오랜 역사 동안 인간이 인간일 때부터 시작되었을 악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

유럽의 추리 소설을 많이 접해보지 못해 감히 이렇게 말하긴 그렇지만 프랑스에서 이집트의 카이로로 수사를 하러 가고 캐나다의 몬트리올로 가고, 예전 미국의 CIA가 캐나다에서 저지른 만행이라든지 어딘지 스케일이 큰 것이 헐리우드 영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엔벨 형사 역시도 멋진 사람이겠지만 샤르코와 엔벨을 처음으로 접한 나로서는 '샤르코'에게서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된 것 같다.

상처입은 수컷이 지키고자 하는 정의.

사고로 아내를 잃은지도 수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결혼반지를 빼지 않은 남자.​

집을 떠날 때면 늘 장난감 모형 기차를 챙겨가는 남자.

엔벨이 모성애로 따뜻하게 안아줘야 할 그런 남자.​

​이미 세 번째 시리즈까지 나왔다고 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도 곧 번역이 된다고 하니 무척 기대가 되는 소설이다.

반드시 읽고 싶은 시리즈이고 ​개인적으로 "신드롬 E"는 다음 기회에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더 읽어야 할 책인 것 같다.

그리고 다음 책을 꼭 읽게 만드는 식의,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끝날 때 다음 이야기를 언급하는 듯이 끝날 때 기대가 되어서 좋기도 한데 프랑크 틸리에씨 이런 식으로 "신드롬 E"를 끝내는 건 좀 싫습니다 ...

이걸 싫다고 해야 할지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어서 좋다고 해야 할지 ... 참 난감하게 끝을 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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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세 명의 여성 화자의 이야기가 시간대 별로 진행이 되는 소설입니다.

레이첼, 메건, 애나

각자의 시선으로 그날 있었던 일들을 오전 오후 저녁으로 나누어 서술을 합니다.

그래서 그녀들의 현재 심리 상태나 주변 상황들을 아주 주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스릴러라고는 하지만 그다지 긴박감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세 명의 화자들이 여성이라 그런지 여성들이 읽었을 때 더 혹할 그런 소설인 듯합니다.

레이첼은 기차를 타고 다니고, 메건과 애나는 기찻길 주변의 주택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아마도 제목에 기차가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소설은 그럭저럭 재미는 있는 편입니다.

그럭저럭 ...

어떤 상품을 고를 때 현대사회에서는 광고를 피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홍수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광고의 홍수 속에서 그 광고가 어떤 정보를 제공해줄 것이란 믿음으로 찬찬히 상품을 고른다는 것은 아주 쉽지가 않습니다.

좋은 상품이면서 내게 잘 맞는? 혹은 잘 어울리는 그런 상품을​ 광고만으로 알아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차피 광고란 구매자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판매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일거니까요.​

그래서 다들 자기 나름대로 어떤 기준이란 걸 갖게 되겠지요.

선택의 기준 말입니다.

책을 고를 때는 자신이 선호하는 작가라든지, 출판사라든지, 누구(지인이나 내가 제법 신뢰할만한 사람 ... 무명인일 수도 있고 유명인일 수도 있고)의 추천이거나​, 제법 신뢰할만 곳에서 주는 상이라든지 ... 각자 나름의 기준이 있을겁니다.

이 책을 고른 기준은 광고였습니다.

'6초마다 팔린'

그렇게까지 광고를 하고 그런대까지 광고를 믿게 되고 해야 하는질 모르겠습니다.

소설은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광고의 과함은 분명 느껴지는 그런 소설입니다.

​분명 6초마다 팔렸겠지요. (언제부터 언제까지 6초마다 한 권이 팔린 꼴이라는 식의 기간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여배우들이 밤을 꼴딱 새우고 저녁밥도 못먹었답니다.

책의 표지를 보면 표지 안쪽으로 온통 유명 신문사의 글을 인용한 광고성 글들이고​ 뒷면 역시 그렇습니다.

빼곡하게 들어찬 찬사들 ...

정말 그 정도의 소설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재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재미가 있다고 말할 부분은 중반 정도까지입니다.

후반으로 가면 누구나 범인이 누구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초반에 범인이겠거니 하는 사람은 읽는 제 눈에도 억지스럽게 느껴져서 범인 같지는 않았거든요.

마지막에는 그냥 얼려집니다. 범인이.

그동안의 정황들을 잘 끼워 맞추었을 때 드러나는 어떤 추리에 의한 게 아니라, 범죄가 일어난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전혀 없던 주인공이 뒷부분에 가서 아주 영광스럽게?도 그냥 기억이 납니다.

​또 어떤 이는 그냥 어쩌다가 전화기를 발견하게 되고 누구와 누가 관련됨을 알게 됩니다.

​범인 역시 어떤 계획이나 연쇄살인범이라 어떤 기준으로 살인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보니 죽이게 된겁니다.

이런 살인의 과정과 살인을 추적하는 부분이 주는 재미를 떠나서 그리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등장인물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매력적인 인물이 없습니다.

여성들은 한 때나 지금이나 금발이고 미모라고들 하지만 그런 외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

주요한 등장인물들은 다들 어떤 정신적 문제가 있는 ... 강하게 표현하자면 정신이 제대로 박히지 못한 그런 인물들입니다.

​사이코패스인가? 싶은 ... 하지만 두려움을 크게 던져주지는 못합니다.

다들 어떤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가 사랑을 하는 부분에 혹은 연애를 하는 부분에 아니면 어떤 남자만 보면 마음이 다들 열리는 ... 세 여성 모두 남자에 대한 의존성이 너무 높고, 어떤 여성들은 그냥 남성이 자신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쩔쩔매는 모습을 즐기기만 하며 어떤 죄책감도 지니지를 못하고, 나중에 가서는 그 남성에게 의지하려고만 드는 ... 과거의 고통과 슬픔이 현재의 심리 상태를 만들어 놓는 식의 이야기 구조는 너무나 잘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상황을 부둥켜 안아주거나 보듬어 품어주고 싶은 마음은 생기질 않더군요.

영화화가 된다고 합니다.

장담컨대 절대 소설과 같은 인물들로 영화화가 되지 않을거라고 봅니다.

작중 인물들이 읽는 이들로 하여금​ 그 인물을 이해하고 공감을 하며 그래서 가슴으로 그 인물을 안아줄 그런 매력은 전혀 없는 그냥 잘 읽히고 그리 재미없지도 않은 정도의 소설입니다.

세 명의 화자가 따로따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로 책은 아주 쉽게 쉽게 읽혀집니다.

히치콕 감독의 이름을 들먹이거나 ​거의 밤을 새웠다는 스티븐 킹의 이름까지 나올 정도의 스릴러 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광고만큼의 그런 책은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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