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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 클럽 ㅣ 반올림 6
김혜진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5년 9월
평점 :
친구에게 전치 3주라는 치명상을 입히고도 멀쩡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윤오. 오히려 그 친구는 바로 자퇴를 하고 모습을 감추어버린다. 죽도록 때린 사람은 나인데, 왜 그 친구가 학교를 떠나야 했는지. 그 애매한 상황 너머에는 자신의 부모와 담임교사의 은밀한 합의가 있었음을 알게 되는 사춘기 소녀 김윤오. 그 이후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윤오를 못마땅하게 여긴 윤오의 부모는 큰아들의 대학교가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간다는 핑계를 대면서 윤오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킨다. 하지만 새로운 학교, 새로운 친구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소극적인 전학생의 이미지를 지키면서, 그것이 결국은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방법이라도 되는 듯, 윤오는 외톨이처럼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 도서관으로 가는 길목에서 일제 시대에 지어졌음 직한 오래된 집 한 채를 발견하게 된다. 마치 비밀의 화원을 보는 듯한 묘한 이끌림에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곳이 카페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카페, 윤오는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나원이라는 여자애를 만나게 된다. 문득 서가에 꽂힌 마르셀 프루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발견하게 되었고, 윤오를 뒤따라온 듯한 나원이는 그 한 권의 책을 계기로 윤오를 오래된 카페에 초대하게 된다. <프루스트 클럽>은 주인공 윤오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단단하게 자신을 지키는 윤오에게 접근하지 못하는 아이들과 달리, 윤오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부반장 효원이, 학교에서 더는 배울 것이 없어서 과감히 자퇴를 하고 자유인이 된 나원이까지… 열 여섯 사춘기 소녀 윤오, 효원, 나원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목을 따라가는 듯,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을 목표로 삼고 독서클럽을 만들게 된다. 겉은 멀쩡해도 속은 곯아서 터지기 직전인 서로의 상처를 발견하고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처받은 영혼의 모임처럼… 카페의 여주인이 마련해준 작은 창고를 아지트 삼아서 학교가 마치면 항상 모여서 '열여섯 청춘이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논하기도 하는데……
「"상처를 받지 않을 수는 없어. 그런 게 일상이니까. 비가 내리고 얼음이 어는 것처럼, 상처는 생기니까. 그리고 또 흉터가 생겨. 그것도 어쩔 수 없어. 시간이 지나면 지워져 가겠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흉터는 드물지. 그럼 그 흉터를 가지고 잘 살면 돼. 거기 적응하면 돼. 상처를 받았다고, 흉터가 있다고, 그걸로 인생이 끝인 건 아니잖아. 어쩌면 그 상처와 흉터 덕분에 삶이 나아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가끔은…… 그래, 가끔은 그냥 아프기도 해. 후회가 되기도 하고, 막 원망스럽기도 해. 어쩌겠어, 내버려 둬야지. 지나갈 때까지. 다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지금이 좀 그런 땐가 봐, 나."」- 본문 중에서
청소년의 이야기로 가득한 소설집을 연이어 읽은 탓일까. 성장소설이라고도 불리는 청소년 문학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어른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내면세계를 다양한 소재를 곁들여 표현한다는 것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든다. <프루스트 클럽>을 비롯한 청소년 문학은 시작과 끝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것을 읽고 또 다른 시발점을 찾아내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겠지만… 상처를 받은 아이들의 가정환경, 부모의 양육태도는 크게 어긋나는 법이 없었으며, 아이들이 말하는 '나쁜 선생님 표'에 해당하는 선생님의 모습도 전형적인 틀에서 비춰지고 있다. 아이들의 고민거리도 우리가 충분히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그것을 해결하려는 아이들의 노력도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대중성을 지닌 내용은 특히,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통상적인 범주 내에서 해석이 가능한 문제상황을 연출하여 등장인물의 내외적인 갈등을 표출시키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와 어른의 의식구조를 바꾸고야 마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에 대부분의 성장소설이 집중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다. 그래서 너무나 극단적이고 우리가 미처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청소년의 삶은, 그래서 더욱 대중에게 보여주기가 조심스럽고, 그것이 사회적 파장이 되고 몇몇 청소년들에게 뜻하지 않은 모범사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인해서 평범하게 소설화되지 못한다는 점이 안타깝기도 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아이들이지만, 결국은 상황정리를 하고 도움을 주는 역할은 어른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작은 통로를 열어주는 역할에 그칠지라도, 아이들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해결하기에는 아직 힘들다는 분위기가 깊숙이 깔려있기 때문에 성장소설은 그야말로 '아이들의 성장'에 관한 것이지, 아이들 자체가 어떻게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느냐에 대한 심도 있는 접근은 아직 힘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에 분노를 표출하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오해를 풀게 되는 진부한 이야기가 언제까지 청소년의 삶을 대변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다양한 작가가 선보인 청소년 작품을 읽어보니, 그들이 생각하고 표현하는 청소년의 전형적인 표본이 존재한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이렇게 혼잣말을 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