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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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네 존재를 사랑했다, 나의 처녀, 너는 나만의 영원한 처녀로서 기억될 것이다.

소신껏 휘두르는 제 필력에 심신이 점차 황무지가 되어버린 시인 이적요, 그는 잔가지 무성한 고목처럼 노년의 애끓는 욕망과 사랑 그리고 삶의 군더더기를 보여준다. 그의 필명이자 이 책에서 자신을 대변하는 적요寂寥, 그 이름처럼 노시인의 모습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늙어가는 인간의 마지막을 애잔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혈기왕성한 삼십 대 중년남성을 대변하는 서지우, 대학에서 노인을 만나 문학의 길을 자처하여 들어왔다. 그의 잠재된 거친 욕망은 쉽사리 표출되지 못하고 스승 이적요 시인의 그늘 아래서 고목의 수액만 재량껏 빨아먹으면서 기생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등장한다. 시인의 대필원고가 공모전에서 큰 상을 거머쥐게 되었고, 서지우는 시인의 힘에 의지해 꽤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자신의 작가적 기질이 자립하지 못함에 늘상 자책하는 서지우, 그런 제자의 모습을 고요하게 관망하는 시인의 눈빛이 유난히 짙어진다. 그러던 차에 이 두 사람의 애끓는 욕망에 불씨를 던지는 소녀가 등장한다. 이름은 한은교,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운 청춘, 고등학생 한은교를 사이에 두고 스승과 제자가 드러내고 혹 감추어야만 했던 욕망이 《은교》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아 마시면 되고 걷고 싶으면 운동화를 찾아 신으면 그뿐인 것이, 자연이다. 자연의 사이클을 따르면 된다고 여겨온 섹스의 욕망이 나를 긴장시킨 것은, 그러므로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은교를 향한 욕망은 확실히 강도와 빛깔에서 전에 경험한 것과 판이했다. 평생 처음 겪는 강도, 빛깔이었다. 포악스럽고 장렬했다."(p.125)

 

지켜주려는 것을 나만의 소유물로 만드는 것, 그것은 억압하고 복종하려는 것을 감추기 위한 욕망의 위선일 뿐이다.

노인의 집에서 청소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한은교, 그 집을 드나들며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수발을 들던 서지우는 언제부터인가 은교를 향한 노인의 눈빛이 변질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착각인지도 모를 상황에서 오로지 스승의 고결함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치우쳐 서지우, 자신이 일종의 훼방꾼이자 중재자로 나선다. 은교의 젊음을 탐닉하면서 밀애를 즐기는 서지우, 그러나 시인은 점차 그 요망한 훼방꾼의 이중적인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제 스스로 노망에 가까운 수치심에 몸과 마음을 외부로부터 차단시킨 노시인, 그를 할아부지라 부르면서 병아리처럼 따라다니던 은교, 모든 일이 계획대로 풀리고 있음에 진정을 되찾은 서지우까지…… 《은교》는 시인 이적요와 제자 서지우가 죽기 직전까지 적었던 자필 일기장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면서 노년과 중년의 갈림길에서 가시처럼 돋아난 소녀 한은교를 에워싼 욕망과 사랑을 재정립하고 있다.

 

"선생님을 위해서도 그렇다. 적요라는 필명이 그렇듯이 세속적 욕망을 다 접은 것처럼 회자되는 고결한 시인 이적요 선생님이다. 여고생과,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인가.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오금을 박아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서 나는 화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살차게 오금을 박았다. "얘, 고작해야 고등학생이에요!" 선생님이 내 말에 화난 표정으로 휘익, 돌아보았다. 나는, 찔끔했다. 그 순간의 선생님 표정, 잊을 수 없다. 살기가 번뜩이는 표정이었다. 그 농도가 이제까지의 그것과는 달랐다. 내 심장에 칼침이라도 놓을 것 같았다."(p.317) 서지우의 일기 중에서

 

 

《은교》는 독자의 취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작품이다. 작가는 시인과 제자의 사랑이라는 것에 무게를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노시인이 자신의 일기장을 맡길 만큼 신임을 얻고 있던 Q변호사의 추측에 신빙성을 더하여 우리로 하여금 노년의 시인과 중년의 제자가 서로 제 빛깔을 보호하기 위해서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음은, 결국 서로를 위한 사랑의 또 다른 묵상, 인내 그리고 관망과 같은 것이었노라며, 그것을 소녀 한은교에 대한 욕망으로서 감추려고 했던 것이었음을 말이다. 대학생이 된 은교는 두 사람 사이에서 항상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자신이었다면서 끝내 울음을 터트린다. 《은교》는 노시인의 오감으로부터 새롭게 탄생하는 은교의 존재와 정체성이 섬세하고도 격렬하게 묘사되어 있다. 은교의 눈, 코, 입술, 목, 허리, 가슴, 손목, 종아리, 발목에 이르기까지… 노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 애는 손녀 같았고, 어린 여자 친구 같았으며, 아주 가끔은 누나나 엄마 같았다."고 말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욕망의 불씨는 쉽사리 꺼지지 않는다. 죽음은 사랑을, 사랑은 또 다른 죽음을 부르고…

결국 시인은 제자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껍데기가 숙성되어 점차 발효되는 현상에 대하여, 반감을 품고 그것을 발정 난 노년의 몸부림이라 비웃었을 제자 서지우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지우의 일기를 읽으면서 다시 통곡하게 된다. 스승을 위하는 것이었으나, 그 욕망의 존재 자체마저 인정할 수 없었던 서지우의 혼란스러움이 이 모든 것을 자처했음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스승의 마음을 알아챈 서지우의 눈물은 재차 마를 수 없이 흘러내린다. 두 사람 사이에서 공허하게 남겨진 은교의 모습만이, 독자에게 다양한 추측과 해석을 자극한다. 《은교》는 곧 영화화되어 상영을 앞두고 있다. 시인 이적요는 배우 박해일이 실제 70대 노인으로 분장하여 대변하게 되었다는데, 개인적으로 많이 기다려지는 영화다. 과연 원작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제대로 살려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그런 것일까. 싹이 자라고 잎이 무성해진들, 곧 뼈만 남겨질 가시 같은 것… 노년의 사랑이 처절한 고독 속에서 어떻게 몸부림치고 체념하여 승화하는가에 대한 숙제를 남겨준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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