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톨런
루시 크리스토퍼 지음, 강성희 옮김 / 새누출판사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그렇게 난 또다시 당신의 덫에 걸렸어. 당신이 날 없애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지. 난 스르륵 바위를 타고 내려가 모래 위에 주저앉았어. 그리고 아직 따뜻함이 가시지 않은 땅바닥을 손으로 파기 시작했어. 온기를 찾아서 필사적으로. 당신은 내가 움직이는 걸 봤어. 울타리로 다가와 손바닥을 짚고 날 주의 깊게 쳐다보다가, 차에서 절단기를 갖고 돌아왔어.」- 본문 중에서

 

가족과 함께 베트남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던 열여섯 살 젬마. 그녀는 수많은 인파가 북적거리는 공항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오래전부터 알아온 남자에게 불쾌한 감정을 느끼고 거리감을 두려고 한다. 그러나 남자는 젬마에게 환각제를 탄 커피를 먹인 뒤, 가발을 씌우고 짙은 화장과 옷을 갈아입힌 다음에 납치를 하고야 만다. <스톨런>은 젬마가 납치범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을 이루는 내용은 모두 열여섯 살 젬마의 관점에서 씌여졌으며, 이따금 황량한 황무지에서 납치범과의 생활과 자신의 심리적 변화에 대하여 언급하기도 한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는 <스톨런>은 등장인물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을 둘러싼 배경요소마저 일인칭 화자에 의존하여 상상할 수밖에 없다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납치범 타이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건장한 청년이었다. 그는 젬마를 납치해서 데리고 온 날부터 매일같이 이런 말을 반복적으로 했다. 지켜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속물이 되어버린 부모로부터 젬마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그 여린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가 젬마를 데리고 온 곳은 물 한 모금, 바람 한 점 불지 않을 허허벌판과 같은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한 초라한 판잣집이었다. 그는 젬마에게 순수하고 거친 야생에서의 삶을 몸소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한다. 자연을 사랑하는 것, 꾸미지 않은 것으로부터 동화되어가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별이 어떤 형태로 나열되어 있는지 알아요?" "별자리 말이야?" 당신은 어깨를 으쓱였어. "내가 만든 별자리는 알아." "무슨 뜻이에요?" 당신은 재빨리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았어. "그림이 보인다는 말이야. 난 별들 속에서 사람의 얼굴도, 땅의 거짓말도 볼 수 있어. 정말로 뭐든지 말이야. 한참 동안 찾고 있으면 알고 싶은 걸 별이 다 알려 줘. 방향, 날씨, 시간, 이야기… 뭐든 말이야."」- 본문 중에서

 

 





 

이 책은 납치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소녀의 삶에 큰 반전을 일으켰다는 점이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납치범 타이는 젬마를 데려오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많은 준비를 해왔다. 자칫 병적인 집착으로 볼 수 있는 그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면 무언가 애잔함이 묻어나오게 유도하는 듯하다. 사실 그는 어릴 적에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고아였던 것이다. <스톨런>은 반사회적 장애를 지닌 남자가 한창 성장 중인 열여섯 살 소녀를 제멋대로 감금해서 데리고 사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에 반해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한 남자의 내면이 지닌 소망을 발견할 수도 있다고 보인다. 젬마는 그를 죽이고 벗어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했으나, 서서히 그가 지닌 내면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는 자칫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졌다고 볼 수도 있으나, 젬마는 타이를 통해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즉 부모와 형제간의 관계, 그 외의 학교를 비롯한 집단생활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미래가 불투명하게 그려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사막 한가운데에 버려진 소녀의 혼란스러운 심리변화에 매료되어버렸다. 소녀의 곁을 지켜주면서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려고 노력하는 납치범의 모습이 한없이 안쓰럽게 느껴진다는 것이 놀라웠다. 결국, 소녀의 건강을 위해서 보금자리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자수하게 되었으나, 소녀는 그의 보살핌을 영원히 잊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기존의 소설이 지닌 형식을 과감히 탈피한 <스톨런>이다. 타이와 젬마가 보여준 아름다운 자연의 세계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때로 우리의 삶에서 진정 소중한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자. 이 책이 다루는 주제가 정답이 될 수는 없으나, 이것도 하나의 삶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줄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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