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
필립 그랭베르 지음, 홍은주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우정은 무색으로 바래지는 오래된 책 속의 사진과 같다.

 

 

이 책은 인간의 우정을 과거와 현재를 뒤엉켜 놓아 심리적인 혼란을 주는

듯하면서도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감정에 이르도록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책에 등장하는 만도와 루는 서로 하나의 몸과 정신으로 생각하는 친구로 나온다.

책의 화자인 '루'는 자신의 회상록과 현재의 메시지를 독자에게 골고루 이야기한다.

두 사람이 함께 놀았던 공원에서의 추억을 회상하며 여느 사내아이들처럼

롤러스케이터를 타고 시소타기를 겨루고, 손가락 총싸움을 하며 둘의 우정을  

높은 탑처럼 쌓기 시작한다.

 

「우리는 뭐든지 같이 했고 늘 붙어 다녔다.」 p.17

 

만도의 삶이 루의 삶이 되었고, 루의 삶은 만도의 삶이 되는 듯 보였다.

책을 읽으며 악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만도와 루의 우정은 나날이 깊어가고 눈에 띄는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만도, 내 둘도 없는 친구.

공원 모래밭에서 처음 만나 단짝이 된 이래

나는 뭐든지 그 애와 함께 했다.」 p.42

 

 

<악연>은 두 소년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까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왜 악연으로 관계를 정리하게 되었는지 서서히 보여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만도는 법률과 정치학에 가게 되고,

루는 정신분석에 흥미를 느껴 인문과학 쪽으로 가게 된다.

거기서부터 두 사람의 인연이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보인다.

서로의 길이 갈라진 것에 만도와 루는 불안해하며, 계속 함께하려고 애를 쓴다.

여전히 흔들림없이 조화롭다고 생각하던 루의 생각은 깨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루는 정신분석 쪽으로 진로를 정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개인적인 생각에서 이 책의 작가 '필립 그랭베르'는 정신분석가이자 작가라고 했다.

그래서 루의 성격과 가치관이 은연중에 작가의 성격을 조금 닮아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책을 읽은 나의 관점에서 본 생각에 지나치지 않는다.

(책의 내용과는 무관하다.)

서로의 길이 엇갈리면서 두 사람의 우정은 흔들렸고, 자신과 함께 하지 않고

자꾸 멀어지려는 루를 보면서 배신감에 충격을 받고 정신적 착란 증세를

보이게 되는데…

 

이것이 우정이었나.

아니, 집착이었고 소유할 수 없음에 강한 애착을 느낀 것이었나.

 

 

<악연>은 한 친구의 배신으로 깨져버린 우정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처음부터 배신이라 할 수 없었던 지극히 정상적이었던 우정을

한 사람의 히스테리적 애착에 잠시 흔들렸음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만도가 루의 악연이었는지,

루가 만도의 악연이었는지는 아무도 단정 지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구의 악연이 되었든 한번 맺어진 연을 쉽사리 끊을 수 없기에

우리는 지금도 누군가의 악연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그 애의 악연이었나, 그 애가 나의 악연이었나?」 p.205

 

'미쳤다고 시인하는 사람은 미친 게 아니다!' 라는 메시지가

마지막을 장식하는 루의 귓가에 울리기 시작하면서 <악연>의 이야기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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