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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라무슈
프로메테우스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그는 조롱할 줄 아는 재능과 세상이 미쳤다는 생각을 갖고 태어났다.”
첫째, 조롱할 줄 아는 재능을 즐기거나 사랑한다.
둘째, 세상은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 전제에 동의하는 사람에게 <스카라무슈>는 고감도 쾌감을 보장하는 오락소설이다. 모든 것이 미쳐돌아가던(지금도 세상은 그렇지만)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냉소적인 젊은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4년간을 그린 소설은, 프랑스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미미하게’ 시작된다.
귀족의 사생아이자 시골뜨기 변호사인 앙드레는 정의를 사랑하는 친구 빌모렝이 다쥐르 후작의 사유지에서 평민이 총에 맞아죽은 사건을 비난하다가 결투 끝에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비뚤어진 지배계급과 맞서싸워 보기로 한다.
그러나, 지배계급인 귀족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겠다는 순진하고 혈기방장한 바람은 당연히 실패한다. 분개한 앙드레는 타고난 말재주를 십분 활용하여 때마침 혁명의 기운이 싹트는 도시 낭트에서 민중을 선동하는 연설을 하여 결국 쫓기는 신세가 된다. 도망치던 중에 우연히 만난 유랑극단에 합류한 앙드레는 ‘조롱할 줄 아는 재능’으로 이번에는 무대 위에서 ‘스카라무슈(허풍쟁이 광대)’로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약혼자가 다쥐르 후작의 애인이 되어 변심하자 연극을 빌어 다시 민중을 선동하고는 몸을 숨긴다.
이번에는 펜싱 학원에 취직하여 칼솜씨를 연마한 앙드레는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제3신분의 정치적 중심에 서 있던 옛 친구를 만나 마침내 정치판에 뛰어든다. 그리고 귀족들을 부추겨 결투를 유도한다. 마침내 자신과 묘하게 뒤틀린 악연을 가진 다쥐르 후작과 결투를 벌이게 되고, 앙드레는 억울하게 죽어간 친구 빌모렝의 복수를 다짐하지만….
<스카라무슈>는 18세기 후반 프랑스, 당시 유럽대륙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이자 혁명과 낭만이 현란하게 공존하던 공간을 무대로 시니컬하지만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 한 젊은이가 벌이는 인생활극을 연극적으로 그려낸다. 출생의 비밀, 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유랑극단, 목숨을 건 결투와 장밋빛 로맨스… <스카라무슈>는 낭만적인 소재들이 총출동한 사랑과 복수의 대서사시이다. 소설은 ‘시골 변호사’, ‘연극배우’, ‘검객’이라는 3개의 장으로 나뉜다. 각각의 장은 주인공 앙드레가 변신하는 신분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가 그런 신분으로서 겪는 감정의 파고와 사건을 함축한다.
현대적 시선으로 보면 극히 ‘쿨한’ 주인공 앙드레의 캐릭터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책을 읽노라면 그의 지식인다운 신랄함과 젊은이다운 순수함에, 그리고 세 치 혀가 내뱉는 인간과 사회체제와 계급에 대한 독설과 조롱에 통쾌함과 대리만족을 느끼고, ‘세상은 미쳤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500쪽이 넘는 페이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아아, 그리하여 두 사람은 그리하였던 것이었다…” 하며 변사가 구성진 입담으로 풀어가는 장터 유랑극단의 연극을 구경하는 듯한 착각까지 드는 고풍스러운 문체를 읽어내려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라파엘 사바티니가 <스카라무슈>를 쓴 것은 20세기 초인 1921년이지만,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스카라무슈>는 여전히 흥미로운 코드를 제공한다. 그것은, 파우더 바른 가발이나 페티코트의 시대는 갔지만 부패한 지배계급과 억압받는 민중이라는 구도는 여전하고, 계급간의 칼날 같은 대립 또한 어떤 정치체제가 대체하더라도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리라. 혁명과 반동이 영원한 한, <스카라무슈>의 낭만과 냉소도 시대를 초월해 매력적이다.